영어와 영어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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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와 영어원서
  • 유재호 자유기고가
  • 승인 2009.03.06 18: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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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어원서를 읽지 못한다.

의아할 것이다. ‘어떻게 미국에 10년 가까이 산 영어회화선생님이 그깟 영어원서하나 읽지 못하나?’ 하고 말이다. 물론 노력한다면 읽을 수는 있다. 하지만 나에게 원서 읽는 순간은 하나의 고문과도 같다. 시간도 아주 오래 걸린다.

나는 ‘해리포터’ 광팬이다. ‘해리포터’ 시리즈가 나올 때마다 항상 원서를 먼저 산다. 보통 6개월 전에 영어원서가 먼저 출판되는 이유에서다. ‘이번에는 원서를 끝내버리겠어’라는 포부는 매번 첫 페이지를 펴는 순간부터 무너지고야만다.
 
▲     © 시사오늘
 
일단 어지러운 영어들이 춤추고 있는 것을 보면 머리가 아프고 읽기 싫어진다. 읽기 싫은 것을 극복하고 ‘그래 나는 유학생이지. 쪽팔리게...’ 라고 마음을 다잡으며 한쪽 두 쪽 읽어 내려가지만, 내용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다. 원서를 해석하는 머리와 내용을 이해하는 머리가 따로 놀기 시작한다.
 
겨우 따로 노는 내 뇌의 조각들을 달래놓지만, 이내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사실 유심히 살펴보면 모르는 단어들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그리고 막상 해석을 하면 대부분이 해석 가능한 문장들이다. 하지만 속 시원히 내 가려운 곳을 긁어 줄 수는 없다. ‘해리포터 Mania’로서 모든 문장 하나하나를 완벽하게 다 이해하고 싶은 욕구가 크지만, 원서는 이런 내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해리포터’ 한글판을 읽으면 행복하고 집에 온 느낌이지만, 원서를 읽으면 답답하고 사이즈가 꽉 끼는 남의 옷을 입고 있는 기분이 든다.

결국 답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6개월을 기다려서 기어코 한글판을 손에 얻는다. 한글판을 읽으면서 모든 문장들을 완벽하게 내 것으로 만들면서 희열을 느낀다. 왜 원서를 읽으면서는 이런 희열을 느끼지 못할까? 미국에 오래 살았지만, 무엇이 이토록 원서를 싫어하도록 만들었을까?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내가 처음 유학 갔을 때로 시간을 되돌렸다.
‘English I’ 시간이었다. 과정 중 영어책읽기 숙제가 포함돼 있었다. 처음 정통 영어를 접하고 처음 영어책을 읽는 터라 힘들게 읽을 수밖에 없었다. 사전을 일일이 찾아가며 이해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원어민 고등학교 1학년 정규과정의 ‘English Class’에서 요구하는 수준의 영어책은 이런 나에게 버거웠고, Test나 Quiz에서 좋은 성적을 낼 수가 없었다.

이런 나에게 유혹의 손길이 다가왔다. 한국 친구들을 통해서 시험이나 과제물에 필요한 영어책은 다 한국말 Version의 책으로 존재하고 있고 충분히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당장 중간고사를 대비해 읽어야할 ‘두 도시 이야기A Tale Of Two Cities’ 책을 한국말 Version으로 구입했고, 한국말로 책을 읽으면서 시험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시험성적은 전보다 훨씬 잘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한국 유학생들끼리 뭉치니 못 구하는 책이 없었다. 심지어는 교과서에 나오는 시마저 한국말로 된 책을 구해 보기 까지 했다. 그 때 있었던 한국학생들 대부분이 이런 전략으로 시험공부를 했다. 하지만 남들이 한국 책을 찾아서 보던 말든 영어로 된 책만을 고집하는 한 학생이 눈에 띄었다.
Todd였다. 우리는 Todd의 어리석음을 비웃었다.

그렇게 한국말로 쉽게 모든 것을 이해하다보니, 영어로 된 책을 보면서 내용 파악을 하려던 시도를 전적으로 멈추게 되었다. 한국 Version의 책을 구하지 못한 것들은 어쩔 수 없이 영어원서로 읽었지만 한번 쉬운 길을 택한 탓에 영어 문장들은 쉽게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문장을 읽어나가면서 자연스럽게 내용이 파악 된 것이 아니고, 하나하나 해석을 하고 그 문장들을 종합해가면서 내용을 인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프로세스는 공부하는 시간을 엄청나게 늘렸으며 결국 남들보다 더 노력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물론 피땀을 흘려서 공부한 결과 성적은 좋았으나, 아직까지도 원서를 읽지 못한다는 사실은 참 창피한일이다. 반면에 Todd라는 학생은 어느 순간부터 원서를 읽으면서 한국 책과 동일하게 내용 파악이 되기 시작했다. 학교 성적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으나, 그 친구는 원어민들과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원서를 읽어나갔다. 미련해보이기만 했던 그 학생은 처음에 더 힘든 길을 택했지만, 결국 지금은 쉬운 길을 택한 우리들을 앞서 나갔다. 적어도 원서를 읽는 부분에서는 말이다.

학부모님들께서 상담 중 이런 질문들을 많이 하신다.
“우리 애가 내용을 너무 궁금해 해서 자막을 틀어주고 영화를 보여주면 하는데 괜찮을까요?”
“영어 책을 보면서 답답해하고 스토리를 궁금해 하는데 한국 책을 보여주면 안 될까요?”
단호하게 대답한다.

“절대로 안 됩니다.”
Todd의 스토리를 들려주고 이어 말한다.

“자막을 보여주거나 한국말 책을 보여주게 되면 지금 당장은 완벽하게 이해돼서 좋겠지만, 그 이후부터는 스스로 유추해서 이해하려는 노력을 더 이상 안하게 됩니다. 지금 당장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면 나중 가서는 결국 후회할 것입니다. 저처럼요..."
 
유재호 (서초 Toss English 영어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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