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균 사태'와 '피신처' 종교시설의 역사
스크롤 이동 상태바
'한상균 사태'와 '피신처' 종교시설의 역사
  • 오지혜 기자
  • 승인 2015.12.09 16: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민주화운동에서 노동투쟁으로, 명동성당에서 조계사로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오지혜 기자)

▲ 조계사에서 대치 중인 승려와 경찰 ⓒ 뉴시스

불법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경찰 수배 중인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 24일째 조계사에 피신한 가운데, 경찰이 9일 오후 체포에 나서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한 위원장은 앞서 이날 경찰에 자진출두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지난 7일 "'노동개악(노동5법) 처리를 둘러싼 국회 상황이 끝날 때까지 조계사에서 머물겠다"고 입장을 바꿨다. 반면, 경찰측은 조계사에 병력을 배치, 한 위원장이 머물고 있는 관음전을 잇는 구름다리를 해체하는 등 체포 절차에 들어갔다.

조계종은 이날 기자회견을 열고 "법 집행을 명분으로 경찰 병력이 조계사를 진입하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신중에 신중을 기해달라"고 요구했다. 동시에 한 위원장에게도 거취 문제에 대해 신속히 결단을 내릴 것을 촉구했다.

'한상균 사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종교시설은 정치·사회적 사안과 관련,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해왔다. '신을 모시는 경건한 곳'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경찰이 공권력을 투입하기에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시위 주도자들의 피신처로 역할을 해 온 종교시설은 서울에 위치한 명동성당과 조계사가 대표적이다.

명동성당은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1987년 6월항쟁 당시 시위에 나선 대학생들은 군부독재 탄압을 피해 명동성당에 은신했다. 성당 내 공권력 투입을 반대한 김수환 추기경의 뜻이었다. 당시 김 추기경은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그 뒤에 수녀들이 있을 것이오. 그리고 그 뒤에 학생들이 있을 것이오"라고 말했다.
 
90년대 민주화 세력이 정권을 잡으면서 시위의 성격은 노동 투쟁으로 바뀌었다.

1995년 민영화에 반대하던 한국통신 노조간부들이 명동성당과 조계사에 피신했다. 그러나 이례적으로 공권력이 투입, 13명의 노조간부뿐 아니라 시위에 참여한 대학생들마저 연행되자 종교계가 강하게 반발했다.

명동성당에서도 김 추기경의 주재로 사제평의회, 항의 집회, 대규모 시국미사가 거행됐고, 조계사에서는 스님과 신도 2천여 명이 정부의 공권력 투입에 항의는 시국법회를 열었다.
 
그러나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명동성당은 노조의 장기농성으로 신자들의 불편이 가중된다며 '은신처' 역할을 내려놓았다. 2001년 7월에는 천막농성을 벌이던 민주노총 단병호 전 위원장이 명동성당의 퇴거 요청에 경찰에 자진 출두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피신처' 역할을 도맡게 된 곳이 조계사다.

2013년 12월 철도파업을 주도한 혐의로 수배된 박태만 철도노조 부위원장 등 지도부는 경찰을 피해 조계사로 은신했다. 당시 조계사는 경찰의 검거 협조 요청을 거절하는 대신,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코레일 노사 화해를 이끌어내는 등 중재자 역할을 했다.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를 주도, 집시법 위반 혐의로 수배된 이석행 당시 민주노총 위원장 등도 조계사로 피신해 120여 일을 조계사에 머무른 바 있다. 이들은 경찰의 포위망을 뚫고 달아났으나 해를 넘기기 전 모두 경찰에 검거됐다.

담당업무 : 국회 및 야당 출입합니다.
좌우명 : 本立道生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