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도의 時代架橋] 국정원장 ‘잔혹史’와 국기문란
[이병도의 時代架橋] 국정원장 ‘잔혹史’와 국기문란
  • 이병도 주필
  • 승인 2017.11.25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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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기능 위상악화…흑(黑)역사 반복
민주화 이후도 기관장 구속 처벌 거듭
전면수술 - 내부 및 구조 쇄신 불가피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이병도 주필)

한국 국가정보원(NIS)의 위상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비슷한 설립 56년을 맞았지만, 현재의 위상과 평판은 실로 선.후진적 양태로 엇갈린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국가정보기관 최고 책임자의 구속과 파행이 되풀이되는 ‘국정원장 잔혹사’가 이를 확인케 한다. 지난 각 정권 출범 후 언제나 '국정원 재탄생'을 소리 높혔지만, 항상 '구두선'에 그쳤고 反국가적 역기능은 거듭 이어졌다.

최근에도 마찬가지다. 박근혜 정부 때 청와대에 수십억원대에 달하는 특수공작사업비를 상납한 혐의를 받고 있는 남재준(2013년 3월~2014년 5월)·이병기(2014년 7월~2015년 3월)·이병호(2015년 3월~2017년 5월) 전 국정원장 세 명에 대한 사법처리가 본격화됐다. 남, 이 전 원장은 이미 구속됐고, 이병호 전 국정원장도 구속은 일단 면했지만,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특활비 상납 혐의로 처벌을 면키 어려운 처지다. 과거 김대중 정부의 임동원·신건 전 국정원장이 불법 도청 혐의로 구속된 적이 있지만, 같은 정부에서 국정원장을 역임한 전원이 동시에 사법 처리를 받는 것은 국가정보기관 역사상 처음있는 일이다. 그만큼 사태는 심각하다.

결국, 이제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의 국정원장들이 줄줄이 법의 심판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됐다. 이 시기 국정원장을 지낸 5명 중 현재 김성호 전 원장을 제외한 3명이 구속됐다. 이명박 정권의 원세훈 원장은 정치 개입 혐의로 앞서 구속됐고, 박근혜 정권의 국정원장 3명 가운데 남, 이 원장은 국정원 특활비 상납으로 대통령 비자금 조성 혐의로 구속됐다. 이·박 정부 9년 동안의 국정원장 가운데 검찰의 칼날을 피해간 사람은 이명박 정부 초기의 김성호 전 원장 단 한사람 뿐이다.

뿐만 아니라, 국정원 핵심간부들에 대한 처벌도 함께 빚어지고 있다. 지난 정권 때 국내 공작정치 의혹이 있는 국가정보원 추명호 전 국익정보국장, 신승균 전 국익정보실장 등 3명에 대해서도 국정원법상 정치관여 금지, 직권남용 위반 혐의 등으로 구속영장이 청구됐다. 혐의 내용에는 민간인 및 공무원 사찰, 야권 정치인에 대한 비판, 블랙리스트 인사들에 대한 세무조사나 압력 행사, 댓글부대 운영 등이 포함돼 있다.

특히 국정원 개혁위원회 발표에 따르면 추 전 국장 경우는 정보기관 핵심 간부임에도 불구, 최근 큰 이슈가 된 '최순실·미르' 관련 주요첩보가 170건이나 됐는데도 상부에 보고는커녕 그냥 덮어버린 것으로 드러났다.  추 전 국장은 국정원장들을 무시하고 우병우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에게 직보하며 누군가를 비호하거나 상황을 왜곡시킨 정황도 드러나고 있다. 이들은 대한민국 안보를 최일선에서 책임졌던 사람들이다. 이들이 모조리 감옥에 가는 것은 혁명 상황이 아니라면 상상키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에 전직 국정원장들과 핵심간부들의 수난과 몰락을 지켜보는 심정은 착잡하다. ‘현대판 사화(士禍)’의 피바람이 불고 있다는 비유까지 나올 정도다.

최고 정보수장 파행사

한국의 이같은 ‘국정원장 잔혹사’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역사가 깊다. 주로 권력자의 최측근이 국정원장 자리에 앉았으며, 정권이 바뀐 뒤에는 대부분이 연속 처벌, 추락하는 현상을 보였다. 정보기관 수장을 지낸 인물들 중엔 전두환 전 대통령, 김종필 전 국무총리 등 권력자도 적지 않았다. 퇴직 후 대통령을 배신했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은 이도, 자신을 임명한 대통령을 살해한 이도 있었다. 그래서 역대 정보기관 수장들의 잔혹사 속에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 그대로 녹아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국정원의 모태는 1961년 창설된 중앙정보부다. 당시 중정은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부가 미국 CIA를 본떠 만들었다. 초대 중정부장은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맡았다.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부훈(府訓)을 그가 만들었다.  중앙정보부(중정),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그리고 국가정보원(국정원)으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정보기관 역사는 56년에 이른다. 국정원은 중정을 이어받아 지금의 서훈 원장을 34대로 친다.

역대 정보기관 수장들은 권력의 정점에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 말로는 험악했다. 가장 논란이 된 인물은 김재규 전 부장이다. 그는 10·26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으로 ‘내란목적살인’과 ‘내란미수죄’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3대 중정부장을 지낸 김형욱은 6년 3개월간 재임해 역대 최장수 부장으로 기록돼있다. 1차 인민혁명당 사건, 동백림사건 등 재심에서 무죄가 확정된 용공조작 사건들이 그의 재임 중 기획됐다. 퇴임 후 그는 정권의 ‘치부’를 너무 많이 알고 있다고 여긴 박 대통령 측에 의해 끊임없이 견제와 감시를 받았다. 1969년 3선 개헌 후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나자 미국으로 망명, 미국 하원 청문회와 회고록을 통해 유신 정권의 폭정을 폭로했다. 이 때문인지 그는 1979년 10월 1일 파리에 도착한 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암살설, 납치설 등 여러 추측이 난무하고 있지만 아직 행방은 확인되지 않고있다. 박 대통령 지시를 받은 중정 요원들이 그를 납치해 살해했다는 게 정설로 통한다.

박 전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는 1976년 8대 중정부장에 올랐다. 그는 박근혜 전 대통령과 가깝던 최태민씨(최순실씨의 아버지)를 뒷조사, 박 전 대통령에게 보고하기도 했다. 1979년 10월 26일 서울 종로구 궁정동 안가에서 박 전 대통령을 시해한 뒤 법정에 선 그는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는 말을 남겼다. 그는 자신을 임명한 박 대통령을 1979년 10월26일 서울 궁정동 안가에서 시해했다. 당시 그는 박 대통령의 신임을 놓고 차지철 청와대 경호실장과 다투는 처지였다. 1980년 5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그를 두고 ‘경호실장만 제거하려다 우발적으로 대통령까지 살해한 것’이란 분석과 ‘유신독재 종식을 위해 박 대통령을 제거하려는 의사가 있었다’는 평가가 엇갈린다.

김재규가 사형당한 뒤 1980년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중정부장 서리에 올랐다. 임기는 3개월로 짧았지만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뒤 중정은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중정부장이 5‧16 군부 실세들의 자리였다면, 안기부장은 12‧12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하나회 소속 장성들인 신군부 세력이 차지했다. 개명 후 첫 안기부장인 유학성을 시작으로 장세동, 안무혁, 박세직이 그들이다. 과거의 음습한 이미지를 벗어나려는 시도였지만, 안기부에서도 '흑역사'는 역시 계속됐다.

이들 또한 김영삼 정권이 들어선 뒤 줄줄이 구속됐다. 전두환·노태우정권에서 안기부장을 지낸 인사들은 1995년 김영삼정부가 두 전직 대통령 비자금과 12·12 군사반란, 5·18 광주민주화운동 등 수사에 전격 착수하면서 줄줄이 철창 안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

이희성·유학성·장세동·안무혁·이현우 전 안기부장이 바로 그들이다. 유 전 부장은 5공화국 시절 최대의 금융사기 사건으로 일컬어진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을 미흡하게 대처했다는 이유로 경질됐다. 이후 국회의원이 됐지만 1996년 12‧12 군사반란 및 5‧18 민주화운동 관련 재판에 회부돼 1‧2심에서 유죄를 받고 상고심 재판 중 지병으로 사망했다.

또한, 전두환 정권 최고 실세 중 한 명인 장세동은 1985년 민주화 요구가 거세질 무렵 안기부장에 임명됐다. 그가 있을 때 수지 김 간첩 조작 사건,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평화의 댐 사건,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사건 등 정치 공작이 벌어졌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물러난 후, 김영삼 문민정부가 들어선 뒤 12‧12 반란 가담 혐의로 법정에 서야 했고, 징역 3년6개월의 옥살이를 해야만 했다. 

민주화 이후 수난사

김영삼.김대중 정부로 이어지면서도 정보기관장 수난사는 끊이지 않았다. 김영삼 정부 시절 권영해 전 안기부장은 15대 대선을 앞두고 당시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후보의 당선을 막기 위해 이른바 ‘북풍’ 사건을 기획한 혐의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권씨는 검찰 조사 도중 미리 준비해 간 흉기로 자해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안기부가 국정원으로 문패를 바꿔 단 김대중정부의 임동원·신건 전 국정원장 또한 노무현정부 들어 불법 도청 혐의가 불거져 구속됐다.

지금의 국가정보원은 1999년 김대중 정부 때 들어섰다. 중정과 안기부처럼 '정권의 하녀'가 아닌 순전한 정보수집 목적의 기관으로 다시 태어나겠다는 의지를 담고 출범했다. 국정원 원훈인 ‘정보는 국력이다’ 역시 김대중 대통령이 직접 썼다. 그러나 국가정보원의 초대 원장이었던 임동원 원장과 신건 원장도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자마자 법의 심판을 받았다. 임 원장은 통일부장관으로 자리를 옮긴 뒤인 이듬해 8월 강정구 동국대 교수의 ‘만경대 방명록 사건’으로 국회에서 해임건의안이 통과돼 경질됐고, 2005년에는 국정원 불법 도청 사건으로 구속되고 말았다. 국민의 정부 마지막 국정원장인 신 전 원장도 이때 함께 구속됐다.

노무현 정부 때는 김만복 전 원장이 논란의 중심에 섰다. 그는 중앙정보부 창설 이후 45년만에 배출된 공채 출신 첫 원장이었다. 2007년 10월 남북정상회담 때 노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의 회담 자리에 배석했고, 그해 12월 방북해 김양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을 만난 뒤 대화록을 언론에 공개했다가 2008년 불명예 퇴진했다. 그는 2010년 10월 자서전에서 10·4 남북정상회담 일화를 공개해 ‘NLL(북방한계선) 포기 발언’ 파문을 일으켰다. 때문에 2011년 국정원으로부터 검찰에 고발당하기도 했다.

이명박정부 들어 4년1개월간 국정원장을 지내 역대 두 번째로 장수한 원세훈 전 원장은 박근혜정부 들어 온라인 댓글 등 정치공작 혐의가 드러나 구속된 바 있다. 한국 역대 정보기관장 '잔혹사'의 실태는 이러했고, 해당시대 권력 최고책임자의 권력 사익추구에 충실해려 했던 흔적과 곳곳에서 '국기문란'을 부른 자취가 역력, 정권변환기 마다 '처벌'의 명분을 제공했다.

국기문란 사례 

최고 정보기관의 이같은 '국기문란'은 최근 들어서도 마찬가지다. 이명박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 취소 요구 서한을 노벨위원회에 발송한 경우는 이를 대표한다. 당시 국정원 심리전단은 2010년 3월 ‘자유주의진보연합’이라는 우파 단체를 조종, 노벨평화상 취소 공작을 벌이겠다는 계획을 원세훈 전 원장 등 지휘부에 보고한 뒤 그해 3월 9일 노벨위원장 앞으로 영문 서한을 보냈다. 이는 최근 국정원 개혁발전위원회가 밝힌 내용이다.

정치 이념이 다르다고 해서 국가적인 명예이자 한국의 유일한 노벨상을 국가기관이 공작을 통해 취소하겠다는 발상 자체는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이는 반(反)국익적 행태와 다름없었으며, 국기문란의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명박 정부 국정원의 정치공작은 지금까지 드러난 것만 해도 민간인 댓글부대 운영, 공영방송 장악 시도, 야당 정치인 동향 파악,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등 하나하나가 국기 문란 및 중대 범죄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정권 비호를 위해선 물불 안 가린 국정원의 이런 막가파 행태가 국가사회의 기틀에 큰 혼란을 불러온 셈이다.

박근혜 정부 국정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국정원의 추명호 전 국장은 최순실의 국정 농단 관련 첩보를 170건 작성하고도 국정원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이른바 '최순실-우병우-추명호 삼각 커넥션'을 의심할 만한 대목이다. 국정원을 일개 사인을 위한 기구로 전락시킨 작태가 아닐 수 없었다. 그 뿐 아니다.

재 검찰은 2013년 4월 국정원이 현대차에 압력을 가해 퇴직 경찰관 모임인 대한민국재향경우회의 자회사에 일감을 주고, 이를 대가로 경우회가 친정부 시위에 가담한 혐의를 포착해 수사 중이다. 최근 들어서도 이명박·박근혜 정부 아래에서 국정원이 저지른 각종 범법 행위의 증거와 정황이 속속 드러나는 만큼, 철저한 조사와 책임자 처벌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특수활동비 폐해
 
더 큰 문제의 핵심은 비밀리에 집행되는 국가정보원의 특수활동비 운용 실상에 있다.  최근 이를 둘러싼 파장이 수사하는 검찰은 물론 국회와 행정부 쪽으로도 번지고, 여야 정치권이 난타전을 벌이는 등 계속 확산되는 국면이다. 연간 1조 원 규모에 이르는 특활비는 세부 항목이 공개되지 않고, 상당 부분은 증빙 서류 없이 사용되고 있어 개혁 필요성이 여러 차례 제기돼 온 사안이다.

국정원 특활비는 기밀 유지가 필요한 정보·보안·수사 활동에 쓰라고 배정된 돈이다. 아무리 증빙자료가 필요 없는 돈이라지만 이 돈이 목적과 달리 청와대에 전달된 것은 불법이다. 박근혜 정부에서 차례로 국정원장을 지낸 남재준 이병기 이병호 전 원장은 매달 5000만 원에서 1억 원의 국정원 특활비를 청와대에 상납한 혐의를 받고 있다. 국가정보원 특수활동비를 청와대에 상납한 의혹을 받던 이 전 원장의 경우 검찰은 뇌물공여, 국고손실 등의 혐의를 적용, 최근 긴급 체포했다.

상납은 이헌수 전 기획조정실장 등 국정원 간부를 통해 이뤄졌다. 국정원 기조실장은 차관급 대우를 받는 고위관료이며 국정원 내에서는 2인자로 불리는 파워맨이다. 그런 그가 청와대 인근 도로에서 매달 은밀하게 007 현찰 가방을 배달했다는 보도는 가히 충격적일 정도다. 받은 쪽은 청와대의 이른바 문고리 3인방이었던 안봉근·이재만씨라고 한다. 이들에게 지급된 돈의 규모는 매달 1억원씩 4년여간 총 40억원에 이른다.

현재로서는 박 전 대통령의 직접 지시와 통제를 부인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검찰이 박 전 대통령에 둔 혐의도 ‘뇌물 수뢰’와 ‘횡령’으로 예상된다.

이와관련, 국정원 특수활동비를 상납받은 혐의로 체포된 이재만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이 이미 검찰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 지시로 국정원 특수활동비를 받아 총무비서관실 비밀금고에 보관했다.”고 진술했다. 이어 따로 관리하면서 박 전 대통령 지시에 따라 사용했다는 주장도 했다.

그가 맡았던 직책인 총무비서관은 청와대의 재무 관리를 담당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정계에 입문했던 1998년부터 보좌해온 그가 신임을 얻은 건 당연해 보인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국정원 예산을 사실상 ‘박근혜 비자금’으로 썼다는 뜻일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농단 혐의에 대해 최근까지도 “1원도 받은 게 없다”며 결백을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국가예산을 몰래 감춰놓고 쌈짓돈처럼 맘대로 꺼내 쓰며 ‘국고 농단’까지 저질렀던 셈이다.

받은 쪽이 있으면 준 쪽도 있는 법. 검찰은 남재준(8일), 이병호(10일) 전 국정원장을 차례로 소환했고, 그들로 부터도 “대통령 지시 때문이었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박 전 대통령이 부당한 돈을 직접 받았다는 것이 확인되면 비선에 의한 국정농단을 자행한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물론, 검찰 안팎에선 “정보수장들은 청와대 지시로 일할 수밖에 없는 구조인데 모두 엄벌하려는 건 무리”라는 지적이 있다. 허나, “상관의 명백히 위법한 명령인 때에는 복종할 의무가 없다”는 대법원 판례를 들이대며 왜 지키지 않았느냐고 하면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국정원 상납금’은 취임 초부터 이듬해 5월 남재준 국정원장 때까지 매달 5천만원이었으나 이병기 원장 때부터 1억원으로 올렸다고 한다. 조윤선·현기환 등 청와대 정무수석들도 별도로 매달 500만원씩을 국정원에서 받아 썼다는 소식도 전해진다.

▲ 박근혜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 특수활동비를 청와대에 정기적으로 상납한 혐의를 받고 있는 전직 국정원장들이 지난 16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출석하고 있다. 왼쪽부터 남재준, 이병호, 이병기 전 국정원장.

부처 및 정치권 로비의혹

그 뿐아니다. 청와대에서 시작된 국정원 특수활동비 수사는 최근들어 정치권으로까지 번지면서 파문이 더 커지고 있는 형국이다. 친박계 실세 최경환 자유한국당 의원이 국정원 돈 1억원을 받은 혐의가 포착된 데 이어, 국정원 특활비가 정보위 소속 의원들에게도 전달됐다는 관측들이 대두하기 시작했다. 내년 예산안을 기준으로 할 때 특활비 중 절반 가량인 4931억 원이 국정원 몫으로 편성돼 있고, 청와대와 각 정부 부처, 국회도 이를 일정 부분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남재준·이병기 전 국정원장과 청와대 ‘문고리 비서관’ 등의 구속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고, 전 부처에 걸쳐 유용·상납이 관행적으로 이뤄져 왔다는 증언이 잇따르고 있다.

2014년 최경환 당시 경제부총리에게 국정원이 1억 원을 건네줬다는 진술은 이미 나왔다. 국정원 예산을 책임졌던 이헌수 전 국정원 기조실장이 이런 진술을 했고, 이병기 전 국정원장도 같은 취지의 진술을 했다고 한다. 최 의원이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있을 때 특수활동비가 건네졌다면, 이는 주요한 의미를 갖는다. 당시 정부 예산을 총괄하던 최 의원에게 거액의 특수활동비를 제공한 혐의는 국정원 예산 증액 등을 노린 뇌물의 성격이 짙다고 봐야 한다는 지적이다. 돈의 성격이나 용처를 따져봐야겠지만, 건넨 쪽이나 받은 쪽이나 뇌물 수수와 국고 손실 등의 혐의를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최 의원은 “특활비를 받은 사실이 없다”고 강하게 부인했다. 수사를 지켜봐야겠지만, 받은 것이 사실이라면 파장이 클 것이다. 국정원 특활비가 박근혜 전 대통령뿐 아니라, 국회와 정부의 핵심 인사들에게 두루 건네졌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역시 그 돈이 최 의원 한 사람에게만 건네졌겠느냐는 의혹이 뒤따른다. 국정원이 친박 실세들이나 국회 핵심 의원들에게 정책 협조나 입법 로비 목적으로 특수활동비를 뿌렸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국회 주변에선 국정원이 여야 의원들에게 평소 거마비 명목으로 100만원 정도의 활동비를 제공했다는 증언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만일, 국회의원들이 특활비를 받아 사적으로 쓴 뒤 국정원 예산 배정이나 정책 집행에 협조했다면 매우 심각한 일이다. 행정부를 감시·견제해야 할 입법부 의원들이 임무를 방기하고 오히려 행정부에 ‘매수’됐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특활비 유용문제

따라서, 이번 기회에 국가정보원 특활비 문제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누구든 특활비를 개인적으로 착복(着服)했다면 엄정하게 처벌해야 한다. 대통령이든 국정원장이든 검찰총장이든 국회의장이든 예외가 있을 수 없다. 전직 국정원장들이 청와대에 ‘상납’했다는 특활비의 경우, 검찰은 모두 70억 원가량이며, 이를 박 전 대통령이 유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횡령죄는 ‘사용처’와 관련이 깊다. 공식 업무와 전혀 상관없는 곳에 사용되었다면 통치자금으로 볼 수 없으므로 불법이다. 친박 세력 유지를 위해 새누리당 총선 경선용 여론조사 100회분의 비용으로 사용한 점은 이미 관련자 진술이 확보되었고, 그 밖에도 수천만원에 달하는 옷값이나 비선진료비, 내곡동 사저 매입 자금 출처 등도 조사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는 상황이다. 국정원의 특수활동비는 어느 기관이나 개인의 것이 아닌 국민의 세금이다. 그런 국민의 혈세가 청와대의 정당한 통치자금이 아니라 박 전 대통령의 불법 비자금으로 사용됐다면, 국민들의 불행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특활비가 유용된 불법적인 행위는 과거 정권에도 있었다. 권위주의 정부 시절 ‘통치자금’ 명목으로 정보기관 특수활동비를 청와대가 갖다 쓴 적은 있다. 그러나 김영삼 전 대통령 때 청와대의 안기부 자금 유용 사실이 드러나면서 없어진 걸로 국민들은 믿어왔다. 노무현 정부 시절 김만복 국정원장도 2007년 12월 17대 대통령 선거 하루 전에 ‘기념 식수 표지석’을 설치한다는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방북, 북한 통일전선부장과의 대화록 등을 언론에 유출했다. 적지 않은 불법적인 행위와 자금 유용이 있었겠지만, 김 전 원장은 그 때 처벌을 받지 않았다.

이후 국정원 특수활동비 중 일부가 정권 실세에게 개별적으로 건네진 적도 있었는데, 이번처럼 ‘대통령 비자금’으로 정기 상납한 건 상식을 뛰어넘는 일이다. 결국 사용처 역시 ‘뇌관’이 될 수 있다. 지난해 4·13총선을 앞두고 새누리당 경선 여론조사 비용 5억원을 국정원 돈으로 지급했다지만,  최소 40억원 이상으로 추정되는 비자금을 박 전대통령이 어디에 썼는지 그 전모는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있다. 정치자금이나 선거에 사용됐을 가능성도 있어 철저한 수사가 필요한 상황이다.

'예산농단' 처방책

국정원은 매년 약 5000억원의 특활비를 배정받는다. 그 중에서 특수공작사업비는 국민 안전, 대북 사업, 해외공작 등의 업무에 배정된 돈으로 특수활동비에 포함된다. 정보보안 관련 예산을 국정원에 배정하면 국정원이 군, 검찰, 경찰, 관련 부처들에 관련 예산을 할당하는 식이다. 정보와 보안 관련 업무는 기밀성과 밀행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따라서 국정원의 특수활동비는 현금으로 지급되며 영수증을 증빙할 필요도 없어 사용처를 모른다. 게다가 기밀이라는 성격 때문에 결산 시 집행 내역도 비공개하는 특례를 받는다. 여러 부처에 걸쳐 있는 큰돈이 이렇듯 ‘깜깜이’ 예산으로 지급되니 눈먼 돈처럼 여겨 부정행위의 소지가 큰 것도 현실이다.

특활비 유용 논란이 적폐로 인식되는 마당에 전면적 손질을 주저할 이유가 없다. 업무 특성상 꼭 필요한 곳이 아니면 폐지하거나 최소화하는 것이 마땅하다. 지금처럼 형식적 통제만 받아서는 도덕적 해이를 피할 수 없다. 유명배우 합성 나체사진을 만든 혐의로 기소된 국정원 직원이 최근 한 재판에서 “상사의 지시를 거부하지 못했다”며 사과한 것도 그런 사례에 속한다. 국가 예산을 용도에 맞지 않게 전용한 것은 중대 범죄다. 여기에 로비 성격까지 가미됐다면 더 큰 범죄가 된다. 관행으로 치부할 일이 아니다. 이 돈은 모두 국민 혈세에서 나왔음으로 이번 기회에 국정원의 ‘예산 농단’ 실태를 철저하게 밝혀내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

국정원법에 국정원 예산 전체를 개별 증빙을 요구하지 않는 총액주의를 적용하고, 비밀활동비를 정부 각 부서 예산으로 분산 배치할 수 있게 한 것(12조 1, 2항)은 좌파·우파 정권 가릴 것 없이 국가적으로 그럴 만한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때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청와대 인사나 청와대가 지정한 인사가 제3국으로 나가 북측 인사를 만나면서 적지 않은 돈을 집어주는 일은 정보사회에선 상식처럼 되어 있다. 이럴 때 청와대가 쓰는 돈은 모두 국정원의 특수활동비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식으로, 국익을 위해 공개할 수 없지만 불가피하게 지출해야 하는 정보·공작비는 어느 나라나 국가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투명한 민주 정부를 자임하는 문재인 정권이 2018년 정부 예산안에 국정원 특수활동비를 4930억원으로 역대 최대 규모로 잡아 국회 동의를 받겠다고 올린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일 것이다. 다만, 특수활동비를 둘러싸고 국정원의 부정부패나 개인 비리, 청와대의 권력 남용 가능성은 철저하게 견제·감시돼야 마땅하다. 또한 검찰 수사를 계기로 국회를 중심으로 이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소하기 위한 다각적인 제도적 장치를 논의할 필요도 있다. 국정원 적폐청산 TF팀도 박근혜·이명박 정권의 정치사건에만 몰두하지 말고 특수활동비 관행의 문제점을 조사해 대안을 내놓는 쪽으로 방향을 틀길 바란다. 이제 그 부패의 관행을 끊어야 할 때다. 다만 정치보복 논란이 일지 않도록 더 정교한 수사와 함께 정무적 판단이 필요하다. 국민 세금인 국정원 예산이 권력자의 비자금이나 쌈짓돈으로 전용된 점은 어떤 명분으로든 합리화할 수 없다. ‘관행’이라는 주장도 변명에 불과하고, 특활비의 쓰임새가 잘못됐다면 바로 잡아야만 한다.

국정원은 물론 각 부처 특활비 예산 편성과 집행의 투명성 확보 방안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대통령부터 강력한 의지를 보이고 국회도 특활비 개혁법안 추진에 앞장서야 한다.  특히, 소위 '권력의 쌈짓돈'으로 사용돼 온 특수활동비 등 국정원 예산에 대한 국회 통제 강화는 시급하다. 과거 수십 년 동안 관행적으로 이뤄진 측면에 대한 고려도 물론 필요하다. 지난 정권만의 문제로 다룬다면 정치 보복 논란이 불가피하고, 그런 정치 공방으로 흐르면 정쟁으로 인해 정작 필요한 본연의 '처방책'이 희석될 개연성도 있다. 개인이 챙긴 것은 단죄하되, 관행적으로 이뤄진 ‘불법 전용’ 부분은 제도(制度) 개혁에 담아내는 게 바람직하다. 국정원 특수공작비용 등 불가피한 최소한의 부문을 제외하고, 특활비의 투명성을 대폭 높일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정보원 개혁방향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 공약에서 국가정보원의 국내 정보수집 업무를 전면 폐지, 해외안보정보원으로 개편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또 국정원 대공수사기능도 경찰 안보수사국을 신설해 이관하겠다고 약속했었다. 이번에 국정원의 이름을 바꾼다면 창설 이래 네 번째 개명이 된다. 하지만 그동안 국정원은 명칭만 바뀌고 권력 비호기관의 역할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에서 개혁 없는 국정원의 개명은 의미 없다.

문 대통령이 당초의 공약대로 '국가정보원의 국내 정치 개입 금지'를 실행에 옮긴다면, 국정원이 앞으로 나가야 할 방향은 분명하다. 국내 정치를 버리고, 국가 안보를 위한 중추적인 정보기관으로 거듭나야 한다. 지금 같은 안보 위기에 국정원의 정보 역량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불법과 탈선을 일삼은 국정원이 다시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받으려면 이제 국내 정치 개입에 대한 유혹을 떨쳐 내고 정권이 아닌 국익과 국가 안위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 그 출발은 결국 내부 개혁이다.

국가정보원의 ‘15대 적폐’ 조사를 마무리한 국정원 개혁위원회는 올해 안에 국정원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대공수사권 이관과 국정원 직무 범위의 구체화, 예산 집행의 투명성 제고, 내ㆍ외부 통제 강화, 위법한 명령에 대한 직원들의 거부권 활성화 등이 그 법안의 골자다.

하지만,  지난 정권들의 관례 대로라면, 언제 또다시 정권 수호의 첨병 노릇을 할 지 알 수가 없다. 이런 의심을 불식시키려면 국정원의 정치개입을 근절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속히 마련하는 수밖에 없다.  역시, 가장 논란이 되는 대목은 대공수사권 이양 문제일 것이다. 문 대통령은 대선 당시 “국정원 대공수사권을 경찰로 넘기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는데, 안보를 빌미로 국정원이 국내 정치에 개입해 온 폐해를 떠올리면 대공수사권 이관은 관철돼야 마땅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국정원의 국내 정보수집 전면 폐지 공약은 재고돼야 할 성격을 포함한다. 우리는 현재 안보와 경제 분야에서 국경이 무의미한 시대에 살고 있다. 외국 국적으로 또는 외국에서 신분을 세탁해 입국한 간첩을 수사할 경우 어떻게 정보 수집을 할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국가 차원의 산업 기밀을 보호하고 유출을 막는 데 국내외로 정보를 분리해 수집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게 된다.  9·11 이후 서방 정보기관들은 현재 테러 예방과 방첩을 위해 국내외 정보 수집을 통합·강화하는 추세다. 국정원 개혁의 초점도 결국, 기능 약화가 아니라 정치 관여나 불법 활동에 대한 통제·감시·처벌을 지금보다 어떻게 더 효율적으로 강화하느냐에 모아져야 할 것이다. 대공수사권 전면폐지 또한 당장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한 기관이 정보 수집과 수사 두 권한을 함께 가짐으로써 일어날 수 있는 폐단은 분명히 있다. 정보활동(CIA)과 수사(FBI)를 분리한 미국 등 선진국 사례를 검토하고 장단점을 비교해 결정할 필요성도 참조해 나가야 할 것이다. 

국가 보루 거듭나야

앞서 역사적 조명에서도 드러났듯 한국 국정원의 상상치 못할 정도의 일탈행위는 거의 고질병에 가깝다. 정보수집기관이라는 본래의 목적은 없고, 집권자 성향에 맞춰 과잉충성을 하다 보니 집권자가 물러간 뒤에는 반드시 처벌받을 수밖에 없는 불법적인 행동들이 되풀이됐다.

그래서 전임 국정원장들이 교도소를 드나든 것은 결코 '오늘'만이 아니었다. 역대 국정원장들의 수난이 끊이지 않는 것은 국정원이 국가의 지킴이가 아닌 정권의 수호자 노릇을 한 탓이 크다.

그 이유는 명료하다. 대통령이 자신과 가까운 인사를 국정원장으로 내세워 권력의 사설 기관으로 쯤으로 여겼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적 권력욕과 권력 연장을 위한 그릇된 충성심 등이 얽혀 국정원이 국가보다 권력자 개인을 위해 일하기 때문에 이런 흑역사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말해, 국정원의 흑역사는 거의 모두가 대통령 또는 정치 실세의 위법한 정보사용 욕구와 국가가 아닌 정권·사람에게 충성하는 내부 관계자의 그릇된 충성심이 어우러져 일어난 것들이다. 국정원의 기능은 죄가 없다. 단지 사용자들이 사악하게 사용(私用)하거나, 자질이 안 되는 이들이 이 기관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국정원이 본연의 임무에 충실할 수 있도록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아야 국정원 흑역사가 비로소 단절될 수 있다. 역대 정부도 이른바 '정보기관 개혁'은 수 없이 해왔다. 창설이래 이름 바꾼 것만 해도 세번이나 된다. 여러 차례 명칭을 바꿨음에도 근본적인 변화는 없었다. 그동안 국정원 개혁문제는 정치공작, 국정농단 행태를 그런 식의 꼬리자르기, 물타기로 넘겨왔으니 여전히 대북 정보엔 무능하고 국내 공작에만 몰두하는 한심한 정보기관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제 ‘국고농단’과 ‘국기문란’ 행위를 더 이상 방치해선 안된다. 해외·대북 정보를 제외하고는 국내 보안정보 수집 권한까지 포함해 근본적인 재검토와 개혁이 절실하다. 국정원 개혁의 핵심은 정권의 색채 및 정치 상황과 상관없이 언제든 중립적이고 독립적인 활동을 보장받을 수 있는 법적 제도적 장치를 확보하는 것이다. 국정원장은 대북 정보 수집과 공작 활동의 최전선에 있는 사람이다. 만약 정보기관의 공작이 자행되면 나라의 근간을 뒤흔드는 범죄행위이자 국가 권력의 사용(私用)이다. 따라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보기관에서 일어나는 흑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 뿌리까지 진상을 밝히고, 확실하게 단죄해야 하며,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그리고 제도적 보완책을 내놓아야 한다. 정치적 오해가 두려워 적당한 선에서 덮으려 한다면 국정원의 적폐 청산은 요원하다. 국정원장 잔혹사를 끝내려면 국정원이 정치적으로나 시스템적으로 완벽하게 독립돼야 한다. 대통령도 국정원을 권력과 정파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지 않겠다고 천명해야 한다.

그 첫 걸음으로 국정원장 임기제를 제시한다. 정권이 바뀌어도 소신껏 일을 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자는 것이다. 정보 선진국들은 정보기관의 독립성 강화를 위해 대부분 이를 도입했다. 미국의 연방수사국(FBI) 국장 임기는 10년이다. 중국의 국가안전부와 캐나다 보안정보부 수장들도 5년 임기를 보장받는다. 설령, 임기제를 채택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해임하지 않는다는 분석들이다. 대표적 사례로, 독일 연방정보부장과 이스라엘 모사드 국장의 경우, 정권교체와 무관하게 평균 6~7년간 재임한다. 반면, 한국 정보기관 수장의 임기는 평균 1년 6개월 정도에 불과하다. 이런 '단절의 상황'에서 최고 정보수장의 정치적 중립은 현실적으로 어려울 수 밖에 없다. 국정원이 달라지기를 바란다면 국정원장 임기제는 필수임을 강조한다. 비밀정보활동이 공정하고 정의로운 활동이 될 수 있도록, 실로 진정한 국가 보루로 거듭날 수 있도록, 이제는 '오욕점철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 특단의 방책이 나와야만 할 것이다.

 

이병도는…

1952년 경남 진양에서 출생했고 서강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 1979년 동양통신 기자로 언론계에 입문한 후 1981년 연합뉴스로 자리를 옮겨 정치부 야당출입 기자로 오랫동안 활동해 왔다. 저서로는 , <6공해제>, <97년 대선 최후의 승자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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