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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 58주년] 신문으로 돌아보는 그날의 기억
2·28민주운동부터 4·26하야 성명까지
2018년 04월 19일 16:35:58 정진호 기자 sisaon@sisaon.co.kr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진호 기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우리 헌법 전문은 대한민국이 4·19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명시한다. 1960년 4월, 부정 선거로 재집권한 이승만 정권을 국민의 손으로 끌어내린 이 사건이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뿌리’라는 사실을 명확히 하기 위함이다. 이처럼 큰 의미를 갖는 4·19혁명 58주년을 맞아, <시사오늘>은 당시 신문 보도를 토대로 4·19혁명의 발단부터 결말까지의 전 과정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 “신성한 학원을 정치도구화 하지 말라”며 시위에 나선 대구 지역 고등학생들 ⓒ 4·19혁명 기념도서관

‘혁명의 시작’ 2·28민주운동

역사가들은 4·19혁명의 시작을 대구에서 일어난 2·28민주운동으로 기록한다. 4·19혁명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사건은 아니지만, 자유당 정권의 부패에 맞선 최초의 시민운동이 2·28민주운동이었기 때문이다.

일요일이던 1960년 2월 28일, 당국은 학생들이 민주당 부통령 후보 장면 박사의 선거 유세장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대구의 8개 공립 고등학교(경북고·경북사대부고·경북여고·대구고·대구공고·대구농고·대구여고·대구상고)에 등교 지시를 내렸다. 학생들은 이 조치의 부당함을 지적하며 일요등교 철회를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경북고·대구고·경북여고 등의 학생들은 2월 28일 낮 일요등교에 항의하기 위한 시위를 벌였다. 이것이 바로 2·28민주운동이다. <동아일보>는 당시 상황을 아래와 같이 보도했다.

'민주당의 부통령 후보 장면 씨의 선거 연설이 열릴 무렵인 28일 하오 1시 20분경, 경북고등학교·대구고교·경북여고 학생 1200명은 열을 지어 도청으로 몰려들어 “신성한 학원을 정치도구화 하지 말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들 학생들은 일요일인데도 불구하고 전원을 등교케 한 학교당국의 지시가 장면 씨의 강연을 못 듣게 할 목적 하에 정치적인 영향을 받은 처사라고 지적하고 있다. 학생들은 급히 출동한 사복경찰관 200여 명의 제지로 1시 경찰관과 충돌하여 경찰관의 구타로 인하여 20여 명의 중·경상자를 내는 불상사를 빚어내었고, 데모 중이던 학생 200여 명은 경찰에 연행되어 데모 사건에 관하여 문초를 받았었는데 5시 30분 현재 그중 30명만 남기고 귀가시켰다.
1960년 2월 29일 <동아일보> ‘1200명 학생들이 시위, 학원을 정치도구화 말라고’'

‘시민혁명의 도화선’ 3·15부정선거

고등학생들에게 일요등교 조치까지 내리면서 야당을 견제했던 자유당 정권은, 아니나 다를까 3월 15일 열린 선거를 부정으로 물들였다. 투표장에서 3명 또는 5명씩 짝을 지어 기표하고 자유당원에게 ‘검사’를 받게 했으며, 자유당 후보에게 기표한 표를 미리 투표함에 넣어두는 등의 방법까지 동원했다. 민주당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을 위협하는 자유당 ‘완장부대’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무자비한 폭력이 난무하는 가운데, 제4대 대통령과 제5대 부통령을 뽑는 3·15 정·부통령 선거의 날은 밝아 이날 아침 7시를 기해 전국 각 투표구에서는 일제히 국민들의 권리가 행사되었다. 전례 없이 온갖 살상 행위 속에서 선량한 국민들을 위압하고 공포 속으로 몰아넣는 등 선거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공포 선거’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던 이번 선거는 끝내 우리나라 민주선거사상 그 오점이 점철될 선거의 역사를 남기게 되었다.
국민들의 자유로운 권리를 억압하고 빼앗는 등 무서운 폭력 속에서 시작된 이날의 선거가 전국 각 투표구에서 투표가 일제히 시작되자 야당 입후보자의 투표소 참관인이 괴한들에 의해 축출당하고 또 테러를 당하고, 투표하러 간 유권자가 테러를 당하는 등 예기했던 대로의 무서운 유혈참극이 그대로 속출하고 있으며, 심지어 일부 지방에서는 민주당 측의 투표소 참관인이 축출당하고 테러를 당하는 사실로 인해 선거 포기를 선언하는 등 비참한 사실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유권자에게 번호표를 주지 않아 투표권의 행사를 방해하고, 신성한 주권이 행사되는 날 무수한 무장경찰관을 동원하여 마치 계엄령 하를 방불케 하는 등 ‘공포선거’가 이루어진 이번 선거는 그야말로 엉망진창이다.
1960년 3월 16일 <동아일보> ‘엉망진창 된 주권행사’'

   
▲ 3·15 정·부통령 선거 당일, 부정행위가 목격되자 마산시민들은 시위를 시작했다 ⓒ 4·19혁명 기념도서관

‘본격적인 항거의 시작’ 3·15마산의거

같은 날 아침, 경남 마산. 민주당 참관인과 자유당원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말다툼을 벌이던 참관인은 화를 이기지 못하고 투표함을 엎어버렸다. 그런데 그 순간, 자유당의 추악한 부정선거가 모습을 드러냈다. 투표함 속에 이미 자유당 후보 이승만·이기붕이 찍힌 투표용지가 가득했던 것. 이 사실이 알려지자, 민주당원들은 물론 마산시민들이 시청 앞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탕탕탕.’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는 시위대를 본 경찰은, 결국 국민들을 향해 총알을 발사했다. 사상자 80여 명. 국민들의 분노는 임계점을 통과하고 있었다.

'54명의 사상자를 낸 3·15 마산 소요사건은 사건이 발생한 당일 자정 안으로 완전 진압되어 16일 아침부터 다시 원상회복되었다. 그러나 마산의 거리는 아직도 싸늘한 찬바람이 가시지 않고 있다. 이날 아침부터 아들과 딸을 찾는 사람들이 거리를 헤매고 있었으며, 병원에 입원 중인 환자 가족들은 상오 7시 현재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중성동 차외과에 안치된 시체는 이날 밤 경찰에서 인수해갔다고 하는데, 총 사망자 수는 입원 후 절명한 1명을 포함하여 현재까지 7명에 달하고 있으나, 3개 병원에 분산 중인 중태 환자 23명 중 흉부와 복부 심장을 관통 당한 5~6명이 위독 상태에 있는 사실을 병원 측에서 밝히고 있어 사망자 수는 증가될 것이 확실시 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학생들이며 당초 그들이 데모에 가담하기 직전부터 명찰과 신분증을 뜯어버린 관계로 그 신분은 이날 현재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어 가족들이 나타나야만 그 신원이 판명될 것이다.
1960년 3월 17일 <동아일보> ‘아직도 찬바람 감도는 마산’'

‘4·19혁명의 출발점’ 4·11민주항쟁

3·15마산의거 이후 마산시내 분위기는 계속 뒤숭숭했다. 전북 남원에서 마산상고 입학시험 결과를 확인하러 왔던 김주열 군이 행방불명된 상태였기 때문. 실종된 아들을 찾기 위해 김 군의 어머니는 한 달 가까이 마산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자연히 시민들에게도 ‘김주열’이라는 이름이 알려졌다.

4월 11일,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 시신 한 구가 떠올랐다. 눈에 최루탄이 박힌 김 군의 시신이었다. 참혹한 모습을 목도한 시민들은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학생들이 제일 앞장서 시가행진을 시작했고, 시민들도 하나둘 합류했다. 4·19혁명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11일 밤 6시 반부터 마산시엔 미증유의 중대사태가 발생하였다. 이날 상오 제1차 데모 당시 행방불명이 된 소년 시체가 발견됨으로써 흥분된 3000여 시민이 하오 2시경 마산도립병원에 집결, 시체를 인도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되자 하오 6시 15분부터 일대 데모를 개시, “시체를 내노라”, “살인선거 물리치자”는 구호를 외치는 수만의 군중은 마침내 도처에서 관공서를 파괴하기 시작하였다.
1960년 4월 12일 <동아일보> ‘마산서 11일 밤 또 소요’'

   
▲ 4월 18일부터는 잠잠하던 대학생들이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사진은 국회의사당 앞에 모인 고려대학교 학생들과 시민들의 모습 ⓒ 4·19혁명 기념도서관

‘시위 가담한 대학생들’ 4·18학생의거

그로부터 일주일 후인 4월 18일, 고려대생 3000명은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위를 벌인다. 이들의 요구는 △마산학생 석방 △학원의 자유보장 △기성세대의 각성 촉구 등이었다. 그러나 시위 후 해산하던 이들을 경찰과 모의한 ‘반공청년단’이 폭행하면서, 시민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르게 된다.

'고려대학교 학생 3000여 명은 18일 하오 1시를 기하여 안암동 교정에서 동대문·종로·광화문을 거쳐 국회의사당에 이르는 5킬로의 데모를 감행하였다. 이날 등교한 전 고대생 약 3000명은 데모에 돌입하기 직전 12시 50분 동교 교정에 집합하여 백악의 전당을 바라보면서 △마산학생 석방을 요구한다 △학원의 자유보장을 요구한다 △기성세대를 불신하며 각성을 촉구한다는 건의안을 채택하고 이 건의사항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최후의 일각까지 투쟁한다는 것을 엄숙히 결의하였다. 학생 데모 대중 1000여 명은 도중 경찰의 갖은 방해를 돌파하고 종로를 거쳐 2시 20분경 국회의사당에 도착하여 의사당 정문 앞에 앉아 농성에 들어갔다.
1960년 4월 19일 <동아일보> ‘다시 격발된 학생 데모’'

   
▲ 4월 19일, 거리로 나온 시민들에게 무장경찰들은 폭력을 주저하지 않았다 ⓒ 4·19혁명 기념도서관

‘운명의 날’ 4·19혁명

‘운명의 날’인 4월 19일. 이른 아침부터 학생들과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고등학생들을 시작으로 각 대학에서 수천 명씩의 시위대가 몰려나왔다. 시간이 갈수록 이 수는 점점 불어나, 오후에는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서울 도심을 가득 메웠다. 힘을 얻은 이들은 이승만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 앞까지 다가갔다. 그러자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사격을 가했고, 21명이 죽고 172명이 다치는 참사가 벌어졌다.

이 일은 국민들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시민들은 반공청년단 본부와 왜곡 보도를 일삼은 언론사 등을 불태웠다. 시위 진압을 위해 출동한 소방차를 빼앗고, 경찰서를 습격하기도 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정부는 19일 오후 서울·부산·광주·대전·대구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맨손으로 총칼과 맞서기 어려웠던 시위대는, 결국 자정 무렵 무기를 버리고 해산하게 된다.

'십여만 명의 서울지구 각 대학 혼성 데모대와 이에 합류한 고교생 데모대 수만 시민들은 노도와 같이 19일 장안일대의 질서를 무너뜨렸다. 따라서 이날 하오 정부는 이에 대한 비상책으로서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 5개 도시에는 경비계엄령을 선포하였으며, 일선 지구로부터는 탱크 일개 중대를 포함한 보병 일개사단이 서울로 이동을 개시하는 등 유사 이래 최초의 초비상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데모대들은 경무대 문전과 서대문 이 의장 자택 문전까지 육박, 무차별 사격을 받고 피살자와 총상자가 속출되는 일대 비극을 연출시키고 있다.
하오 5시를 기하여 무장경찰대들은 장갑차까지 동원하고 마침내 장안을 뒤덮은 학생 데모대, 그리고 시민들의 해산을 목적으로 전반적인 무차별 소탕 사격을 시내 도처에서 개시하여 일선 전투를 방불케 하는 총성으로 수도 하늘을 진동, 수십 명의 사망자와 무수한 총상자를 노상에 늘어놓고 있다. 또한 데모대에 의해서 방화된 ‘서울신문’, 반공청년단이 있는 ‘반공회관’, 그리고 태평로파출소, 적선동파출소 등은 흑연을 하늘로 내뿜으며 완전 소각 중에 있고, 시내의 소방차는 데모대에 의하여 소실 혹은 장악되어 소화기능이 마비된 상황에 있다.
1960년 4월 20일 <동아일보> ‘부정선거 규탄 학생 데모 전국에 확대’'

이 일이 있은 후, 월터 매카나기 주한미국대사는 경무대를 방문해 정당한 불만의 해결을 희망한다고 요청했다. 곧이어 그는 대사관으로 돌아가 학생들의 행동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미 국무부장관 역시 주미 한국대사에 항의 각서를 보냈다.

미국이 등을 돌리자, 이승만 정권도 바삐 움직였다. 4월 21일, 국무위원들이 일괄 사퇴한 데 이어 23일에는 장면 부통령이 사임서를 제출했다. 같은 날 이기붕은 부통령 당선 사퇴를 고려하겠다고 발표했다. 다음 날 이승만 대통령도 자유당 총재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한 번 불붙은 국민들의 분노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 자신의 제자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피흘리는 모습을 본 교수들도 시위에 나섰다 ⓒ 4·19혁명 기념도서관

‘혁명의 마침표’ 4·25대학교수단 시위

4월 25일, 4·19혁명에 마침표를 찍는 사건이 발생했다. 대학 교수들이 모여 시국선언문을 채택하고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며 행진을 벌인 것. 이날 모인 교수들은 무려 258명에 이르렀다. 교수들까지 나서자, 시민들은 다시 한 번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비상계엄하의 서울에서 25일 하오 3시 반부터 26일 새벽에 걸쳐 교수·학생·시민들 만여 명이 또 다시 데모를 감행하였다. 4·19 이래 비상계엄령이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는 이날 하오 3시부터 1명의 지방대 학장을 포함하는 258명의 서울시내 각 대학교수들은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 모여 “이번 사태에 대한 철저한 규정 없는 이 민족의 불행한 운명을 만회할 길이 없다”는 전문이 붙은 14개항의 시국선언을 채택 낭독하고 5시 45분 대학을 나와 종로·을지로입구·미국대사관 앞을 거쳐 국회의사당 앞까지 그들의 제자가 흘린 핏자국을 밟으며 약 3킬로의 길을 행진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보는 이 대학교수의 데모에 길 가던 수천 시민들은 열광적인 박수를 보냈다. 7시경 교수들의 데모가 해산한 후 그들의 행렬을 뒤따르던 일부 학생을 포함하는 많은 시민들은 마친 출동한 계엄군의 최루탄 발사 등으로 흥분해 피로 쓴 플래카드를 쳐들고 “부정선거의 원흉을 잡아내라”, “형제들의 피의 대가를 찾자”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일대 데모를 감행하였다. 군대의 대거 출동으로 데모는 하오 9시 반 일부 해산하였으나, 만여 명의 흥분된 군중은 26일 새벽까지 시가를 휩쓸고 곳곳에서 학생·시민 등이 수백 수천 집단화하여 심야의 데모는 삼엄한 군의 경비 속을 뚫고 그침 없이 계속되고 있다.
1960년 4월 26일 <동아일보> ‘계엄하 서울에 또 데모 돌발’'

   
▲ 치솟는 국민들의 열망 앞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은 사퇴밖에 없었다. 사진은 시민들과 계엄군이 뒤섞여 만세를 부르는 모습 ⓒ 4·19혁명 기념도서관

‘승리의 환성’ 4·26하야 성명

4월 26일, 학생들과 시민들은 또 한 번 힘을 모았다. 끝을 모르는 시위의 물결에, 경무대를 지키던 계엄군도 발포를 포기하고 앞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이미 상황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날 오전, 이승만 대통령은 결국 사임을 발표했다. 3·15 부정선거에서 촉발된 약 40일간의 시민혁명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이 대통령은 26일 상오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고 언명하였으며, 또한 3·15선거가 부정하게 실시되었다는 여론에 따라 정·부통령 선거를 다시 실시하도록 지시하였다고 밝혔다.
25일 밤부터 철야하고 이날도 새벽부터 서울거리를 뒤덮은 노도와 같은 수십만 군중의 데모가 이 대통령의 하야를 절규하며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고 있는 도중, 상오 9시 반 발표된 이 대통령의 중대 성명에서는 국민이 원한다면 내각책임제 개헌도 하겠다고 지적되어 있었다. 이러한 소식이 전해지자 거리를 뒤덮은 군중들은 일제히 환성을 올리었으며, 그들의 요구가 관철되었다는 기쁨에 한층 흥분은 최고 절정에 도달하였다.
1960년 4월 27일 <동아일보> ‘이 대통령 하야 결의, 정·부통령 재선거도 실시’'

담당업무 : 국회 및 자유한국당 출입합니다.
좌우명 : 인생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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