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7.17 화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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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代散策] 우상호 ˝文정부 부담될까 통일부장관 후보서 빼달라 했다˝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국회의원
1987년, 고립감과 싸우며 민주화 운동
88년 전대협 모임˝10년간 정치하지 말자˝
열린우리당은 폄하 안돼…의미있는 실험
"촛불항쟁서 6월항쟁의 결의와 분노 느껴"
文 정권 성공 위해 서울시장 출마 결심
2018년 03월 21일 16:13:03 글=우상호 정리=김병묵 기자 sisaon@sisaon.co.kr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글=우상호 정리=김병묵 기자)

1987년은 한국사회에 중요한 한 해였다. 그러나 내겐 동시에 가슴 아픈 기억의 한 해기도 했다. 세상을 바꿨다고 하는 보람과, 후배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교차하는 기억으로 남았다.

영화 <1987>이 개봉됐다. 영화를 보는 내내 울었다. 승리에 대한 기억보다도, 희생된 이들의 죽음에 대한 것이 되살아나서였다. 30년이 흘렀다. 학생회장이던 나는 여당의 정치인이 됐다. 시대의 소명(召命)도 달라졌다. 민주주의는 찾아왔지만 여전히 세상엔 바꿔야할 것들이 많다.

구술(口述)을 들려달라며 19일 의원회관으로 찾아온 기자 앞에서, 1987년과 2018년을 사는 우상호의 소명을 생각했다.

   
▲ ˝1987년은 세상을 바꿨다고 하는 보람과, 후배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교차하는 기억으로 남았다. 영화 <1987>을 보는 내내 울었다. 승리에 대한 기억보다도, 희생된 이들의 죽음에 대한 것이 되살아나서였다. 30년이 흘렀다. 학생회장이던 나는 여당의 정치인이 됐다. 시대의 소명(召命)도 달라졌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1987년의 기억

21세, 20세, 혹은 19세. 자신의 목숨까지 걸고 민주화 운동을 하기엔 가혹한 나이다. 하지만 그 땐 뭔가에 홀린 듯이 우리의 청춘을 바쳤다. 기억의 시작은 1980년 광주로부터다. 군인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같은 국민을, 동족(同族)을 총으로 쏘고 칼로 찔러죽였다.

이런 현실을 직면하고 나면 처음엔 몸서리가 쳐진다. ‘언제까지 이런 현실을 보고 있어야 하나’라는 자문(自問)에서, ‘바꿔야 하겠다’는 자답(自答)이 이어졌다. 고민이 시작됐다. 평범한 사람으로 사는 것이 옳은 것일까, 아니면 세상을 바꾸려고 사는 것이 필요한 것일까.

실존적 고민을 거의 매일 밤 했던 것 같다. 자식을 대학에 보내놓고 무난하게 출세하기를 바라는 부모님의 마음을 배신해야 했다. 대학생활에서 따라오는 개인적인 즐거움들을 포기해야 했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20대는 불행했던 것 같다.

그래도 민주화 운동을 했다. 괴로웠지만 싸웠다. 불의(不義)한 세상을 바꾸지 않고서는 행복하지 않을 것 같았다. 개인적인 행복과 편안함이 나쁜 것도 아닌데도, 현실을 외면하는 것처럼 느껴졌고 또 참상에서의 도피(逃避) 같았다. 나 하나만을 생각하는 삶은 가식적이고 위선적으로 생각돼서 너무 싫었다. 그래서 미래를 포기하고 현실의 변화에 전념했다.

시작할 땐 굉장히 많은 사람이 시작했다. 나중엔 몇 사람만 남는 초라함을 마주했다. 세상에 우리 밖에 남지 않았다는 고립감을 느낀 적도 많았다. 1986년은 가장 절망적인 해였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다들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집회에 고작 수백 명밖에 참가하지 않았다. 대학교마다 만 명이 넘는 학생들이 있지만, 적으면 200명, 많이 모여도 300명을 넘기가 어려웠다.

언론에서는 우리를 좌경 세력, 빨갱이로 몰았고 이해해주지 못하는 어른들도 많았다. 가두시위에 나가면 우리 발을 걸어서 넘어뜨리고 경찰에 넘기는 상인들도 있었다. 후배들이 찾아와 하소연했다. "우리는 민중을 위해 싸우는데, 미래도 출세도 다 버리고 이 사회를 위해 싸우고 그들을 위해 싸우는데 왜 알아주지 않습니까. 왜 우리를 공격하고 경찰에 넘기는 겁니까"라고 울면서 토로하기도 했다.

나도 외롭고 답답한 마음일 때가 많았다. ‘왜 우리끼리만 싸우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우리가 살아생전에 민주화가 될까? 그런 막막함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우리를 지탱했던, 소명 같은 것이 있었다. ‘그래도 해야지. 목숨을 바쳐서 해야지. 이 세상은 나아질 거다’라고 되뇌었다. 더 이를 악물었던 것 같다. 그래서 1987년 6월 항쟁에서 내가 흘린 눈물은, 우리만이 아니었다는 안도였고 함께해줘서 고맙다는 감동이었다. 앞서 피흘린 선후배들에 대한 슬픔이었고 민주화가 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이었다.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1987년 6월 9일이다. 이날은 원래 대규모 시위가 예정된 날이 아니었다. 6월 10일에 시청 앞에서 총집결을 해야 하니, 학교별로 소위 결의대회, 전진대회를 했다. 그 다음날이 진짜기 때문에 큰 일이 일어날 줄도 모르고 어떤 의미에선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맛보기 집회를 시작했다.

오후 2시에 연세대학교 민주광장에서 모였다. ‘내일 시청 앞으로 갑시다’라고 독려하고 교문을 나서려고 했는데, 그날따라 경찰이 이상했다. 심하게 과잉대응을 했다. 우리가 돌이나 화염병을 준비해서 던지는 것도 아니고 교문 밖만 나서려고 하면 최루탄을 쏘아댔다. 나는 집회를 주도하다가 최루탄이 터져서 주변에 있는 몇몇 후배들을 데리고 뒤로 빠졌다. 다들 ˝오늘 왜들 이렇게 난리야˝라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웅성댔다.

집회를 정리하고 총학생회실에 들어가 있는데 병원에서 달려왔다. 10명 정도가 병원에 실려 갔는데, 그 중에 이한열 군이 크게 다쳤다고 했다. 급하게 뛰어가 보니 의식을 잃은 상태로 누워있었다. 다른 이들은 대부분이 경미한 외상(外傷)이라, 소독하고 귀가했는데 이한열만 상태가 심상치 않아서 홀로 남았다고 했다. 의사가 ˝가족을 불러야 할 것 같다. 연락을 좀 해달라˝고 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11시인가, 12시에 오셨던 것 같다. 가족들을 뵐 낯이 없었다. 내 인생에서 지금도 가장 힘든 날로 기억된다.

1988년의 결의

기자에게 ‘그렇게 힘들게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고, 그 주역이었는데 1987년 대통령선거에서 군정종식에 실패했다. 어떤 심정 이었나’라는 질문을 받았다.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 때의 감정은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지만 목소리로 내기가 쉽지 않았다. 절망이었다. 내가 집시법(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 위반으로 감옥에 갔을 때다. ‘정말 대한민국은 어려운건가?’하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다.

   
▲ ˝1988년 여름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1기, 이인영·김태년 등 당시 1987년의 주역들이 계룡산에서 모여서 10년간 정치권에 발을 들이지 말기로 결의를 했다. 1999년까지 전대협 출신은 단 한명도 지방선거든 기초선거든 나가지 않았다. 약 10여 년을 힘들게 살았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그 수많은 동료 학생들이 죽어가면서 직선제 개헌을 쟁취했는데, 양김(김영삼(YS) 전 대통령,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또 분열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양김 통합을 위해 나름의 노력을 했지만 실패했다. 그래서 1988년 여름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1기, 이인영·김태년 등 당시 1987년의 주역들이 계룡산에서 모여서 결의를 했다. ˝우리는 1987년 정권교체에 실패한 사람들이다. 최소한 10년간은 빛나고 화려한 자리는 가지 말자˝하고, 정말 그동안 아무도 가지 않았다. 1999년까지 전대협 출신은 단 한명도 지방선거든 기초선거든 나가지 않았다. 약 10여 년을 힘들게 살았다.

DJ가 우리 ‘86그룹’들을 대거 영입하면서 정계에 발을 들였다. 이미 1988년에 DJ로부터 한차례 제안을 받은 바 있었다. ˝감사하지만 정치는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거절했었다. 시대가 변하고, 세상을 다시 바꿔보자는 이야기와 함께 제도정치권에 들어왔다. 이미 YS는 대통령을 한 뒤였기 때문에 고민은 없었다. 마침 사회분위기는, 외환위기도 극복하고 하면서 새로운 정치개혁의 흐름도 생길 때다. 남북관계도 변하고 있었고. 우리 86그룹이 들어간 자체만으로도 화제가 됐다. 정치도 바꿔보려고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는 기대에 부응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개인으로선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집단의, 정당의 가치를 완벽하게 만드는 데는 일단 실패했다. 지금 돌아보면, 크게 두 가지 정도 짚이는 원인이 있다.

우선 우리가 여당으로 출발을 했다는 점이다. 대통령께 누가 될 만한 소신발언을 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다음으론 당직을 너무 많이 맡으니, 자기색깔을 보여주기 어려웠다. 당직을 맡으면 보통 중립을 지켜야 하고, 목소리를 내기보단 당론을 따라야 했으니까.

반성했다. 2013년에 우리 86그룹은, 집단반성문을 쓰고 모임도 아예 해체했다. 애초에 계파랄 것도 없었지만 모임마저 흩었다. 다시 새로운 정치인으로 출발하기로 해서다. 지금도 존재하지 않는다.

간혹 내가 무슨 계파니 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역시 내 대답은 같다. 나는 모든 당대표의 대변인을 했다. 정동영 의장 시절엔 내가 정동영계라고 했고, 정세균계, 손학규계, 김근태계…내가 대변인을 맡을 때마다 누구의 계파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대변인으로 도와 달라˝ 하면 그냥 도와 드리는 거지, 내가 누군가의 계파를 하고 싶었다면 그런 식으로 해서 되겠나.

86그룹에 대해선, 최근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성추문 등으로 운동권 출신 인사들의 도덕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최근 일어나고 있는 ‘미투 운동’에 우리 세대도 일부 관련돼 있어서 부끄럽고 참담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대한민국 사회에 그간 쌓여온 잘못된 관행, 남성들의 의식 개선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 86그룹의 문제로 몰 일이 아니다.

우리 86그룹의 의 공과(功過)가 있다면, 평가를 미뤄줬으면 한다. 우리가 이제 한국 정치의 다음 책임세대로서, 정말 최선을 다한 후에 평가받고 싶다.

2003년의 실험

간혹 ‘열린우리당이 왜 실패한 것 같느냐’고 묻는 이들이 있다.

열린우리당은 실패하지 않았다. 정치개혁이란 측면에서, 한국 정치에 큰 의미가 있는 정치실험이었다. 열린우리당은 원내정당화를 주창했고, 지금 원내대표의 위상이 높아진 것은 그 영향이다. 상향식 민주주의를 제시했고, 지금 우리 당의 후보 공천과정에 많이 반영됐다. 나름의 성과들을 거뒀지만 재집권에 실패하면서 열린우리당이 실패한 것으로 판명나고, 또 그렇게 알려졌다.하지만 새로운 시도를, 정치발전을 위한 실험의 의미를 폄하할 수 없다고 본다.

다만 선명한 개혁주의자들이 주도했고 통합적으로 가지 못하면서, 정권을 재창출하지 못했다는 것은 한계로 남았다.

   
▲ ˝열린우리당은 실패하지 않았다. 정치개혁이란 측면에서, 한국 정치에 큰 의미가 있는 정치실험이었다. 원내정당화를 주창했고, 지금 원내대표의 위상이 높아진 것은 그 영향이다. 상향식 민주주의를 제시했고, 지금 우리 당의 후보 공천과정에 많이 반영됐다. 나름의 성과들을 거뒀지만 재집권에 실패하면서 열린우리당이 실패한 것으로 판명나고, 또 그렇게 알려졌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2017년의 촛불

지난 2017년, 촛불집회에 세 번째 집회에 나갔을 때 느꼈다. 6월 항쟁보다도 더 커지겠구나 하는 예감이 들었다. 오는 사람들의 계층이 다양했고, 결의와 분노가 느껴졌다. 대열도 탄탄했다. 6월 항쟁은 아무래도 시작할 땐 다수가 아니었다. 우리 대학생들이 이끌고, 민주화 운동을 하는 정치인들과 재야인사들이 선봉에 섰을 때 우리는 소수에 불과했다. 6월도 그 이전에 비해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거지, 어마어마한 규모가 되기까진 시간이 걸렸다.

촛불은 그렇지 않았다. 고등학생부터 노인까지, 전라도에서 경상도까지 나이에 상관없이 전국적으로 참가했다. 그 원동력은 분노다. 불의한 정권에 대한 인내의 끈이 결국 끊어진 셈이다. ‘이 세상이 좋아졌으면 좋겠다’하는 마음은 누구나 있다. 그저 ‘먹고 살기 바쁜데, 내가 뭘 하겠나. 누군가 하겠지’라고 생각했던 거다. 추운데 집에 있어도 되고, TV로 봐도 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이들이 ‘내가 해야하겠다’라고 마음먹는 순간 세상이 바뀌었다. 투표를 통해 믿고 맡겼더니 시쳇말로 ‘개판 쳐버린’ 정부에 대한 배신감에, ‘내가 참여해야 뭐라도 달라지겠다’면서 국민들이 움직였다.

자신이 주권자로서 행동하는 모습, 이런 것을 민주역량이라 부른다. 우리 국민들의 민주역량 수준에 감탄했고, 또 감동했다. ˝대한민국은 죽지 않았다˝는 혼잣말이 나왔다.

촛불집회장에 서 있다 보면 내게 말을 거는 시민들이 많았다. 6월 항쟁 때 나왔던 이들이 50대가 돼서 다시 나왔다. ˝30년 만에 또 만나네˝하고 인사를 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세월이 흘렀지만 아는 얼굴이 꽤 보였다. ˝내가 그동안 밥벌어먹고 사느라 모른척했는데,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애들을 데리고 나왔다˝고 악수를 청했다.

모르는 사람도 있었지만 ˝내가 그때 6월에 어디어디에서 민주화 운동을 함께했다˝고 자신을 소개하면서 반가워했다. 1987년과 2017년은 이어져 있었다. 내가 원내대표로 있을 당시 용기를 솟게 해 준 심정적 배경이다. 이 사람들을 믿고 정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2018년의 소명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면서 내겐 새로운 사명이 생겼다. 크게 두 가지다.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돕는 것, 그리고 남북 통일의 주춧돌을 놓는 것이다.

촛불혁명의 요구는 대한민국을 담대하게 변화시키라는 요구다. 대통령만 바꾸자고 한 게 아니다. 대한민국의 오랜 기득권의 불의, 불평등, 반칙 등을 과감하게 없애라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출현은 대한민국이 그러한 성과를 낼 수 있는 기회다. 그것을 뒷받침 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다. 정당, 그리고 행정이다. 내게 이번 서울시장 도전은 그런 측면에서의 결심이었다.

문 대통령의 성공을 위해 누가 지자체장을 해야 하는가. 자신이 대통령이 되려는 인물은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살아온 과정을 보면 안다. 문재인 대통령의 성공에 도움이 될 후보가 필요하지 않겠나. 문 대통령이 당 대표 시절 나는 평의원이었다. 86 모임도 깨고 전면에서 한 발 물러서 있을 땐데, 당이 깨지게 생겼었다. 나는 당직자도 아니고, 세력으로서의 ‘친문’도 아니었지만 탈당하려는 사람들을 이리저리 말리고 다녔다. 문 대표께 조언도 많이 드렸다. 우리 당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니 굳이 더 말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물론 내 서울시장 출마 배경에는 문 대통령을 돕겠다는 마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바꾸고 싶은 게 많다. 실제로 시민들이 가장 힘든 분야, 고통받는 분야에 치중해야 한다. 보육과 주거문제가 첫 번째다. 강남북 균형발전도 필요하다.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변화가 필요하다. 나는 1987년에 이어서, 2018년에도 내가 해야 할 일을 찾았다.

   
▲ ˝촛불혁명의 요구는 대한민국을 담대하게 변화시키라는 요구다. 대통령만 바꾸자고 한 게 아니다. 대한민국의 오랜 기득권의 불의, 불평등, 반칙 등을 과감하게 없애라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출현은 대한민국이 그러한 성과를 낼 수 있는 기회다. 그를 뒷받침 하기 위해 행정도 필요하다. 내게 이번 서울시장 도전은 그런 측면에서의 결심이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다음은 통일에 대한 이야기다. 30년 전에도 통일 이야기를 많이 했다. 다만 그 때는 감상적 통일론이었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구호 아래, 통일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수준이었다. 우리 민족이 외세에 의해 분단된 채로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지금은 다르다. 시대도 변했고 나도 달라졌다. 통일은 여전히 이뤄져야 한다. 실리적인 통일이어야 한다. 대한민국의 경제번영이 전제가 돼야 한다. 체제 경쟁은 끝났다. 북한의 적화통일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다. 남한보다 잘 살 수도 없음을 북한도 잘 알고 있다. 공동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경제협력부터 시작해야 한다. ‘같은 민족이니까 가난해도 좋다, 합치기만 하자’, 이런 생각은 절대 안 된다.

실제로 통일을 하고 싶지 않은 야당의 일부 세력이나 흡수통일론 같은 이야기를 여전히 감성적으로 떠들고 있을 뿐이다. 야당 쪽에서도 이성적인 분들, 약 절반 정도는 나와 기본적인 생각은 같다고 알고 있다. 북한의 체제를 유지할 수 있게 해 주고, 핵을 포기시키고, 전쟁이 없는 상태에서 통일을 차츰차츰 진행하면 된다. 그런 측면에서 문재인 정부의 외교통일정책은 대단하다. 엄청난 성과가 이어지고 있는데 내가 생각한 것보다도 최소 6개월에서 1년 정도 빠르다.

통일부 장관 하마평에 내 이름이 올랐었다. 청와대가 뽑은 후보 리스트에 올라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을 만나서 내 이름을 빼달라고 했다. 임 실장이 ˝다른 사람들은 다 서로 해달라고 전화가 오는데, 왜 빼겠다고 하느냐˝고 묻더라. 그래서 ˝전대협 출신이 청와대에 여럿 들어가 있으면 보수층에서 불안해한다. 문 대통령께 누를 끼칠 수도 있다˝고 답했다.

며칠 전에도 태극기 집회장을 지나가다 보니 ˝임종석은 빨갱이˝라고 외치고 있더라. 통일부 장관을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런 모습을 보니 내가 결정을 잘했다고 생각했다. 서울시장이 돼도 남북관계에 기여할 수 있다. 나는 기틀을 만들어주면 된다. 내가 이 시대의 소명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시기에, 과감하게 은퇴하고 후배들에게 정치를 물려줄 생각이다. 그 때까진 쉴 수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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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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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재후 2018-03-27 08:01:54

    우상호 후보의 대북관 통일론이 멋지내요. 봉사적 자세도 좋고요. 정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완화시킬 수 있기를신고 | 삭제

    • 김재경 2018-03-27 07:53:38

      다시금 1987을 보는 듯한, 돌아간 듯한 감회에 젖게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박원순시장이 한번 더 시장일을 해 주시는 게 문재인 정부를 위해 도움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입니다.신고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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