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필담] 박지원과 TV조선 ‘강적들’에 묻는 ‘김영삼-박정희 회담’
[주간필담] 박지원과 TV조선 ‘강적들’에 묻는 ‘김영삼-박정희 회담’
  • 윤진석 기자
  • 승인 2019.06.23 22: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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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라 회동”이라는 폄훼 발언,
그냥 넘어가기엔 아쉬운 대목 다수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윤진석 기자)

1975년 5월 '김영삼-박정희' 간의 영수회담이 진행됐다. 이후 회담 내용에 대해 YS가 함구하면서 갖가지 억측이 난무했다.ⓒ김영삼 자서전
1975년 5월 '김영삼-박정희' 간의 영수회담이 진행됐다. 이후 회담 내용에 대해 YS가 함구하면서 갖가지 억측이 난무했다.ⓒ김영삼 자서전

장기 독재 무너트린 터닝 포인트 
YS의 결기, 그것이 중요한 이유 

멈춰야 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제3공화국 군사독재 정권까지만 하고 끝냈더라면 그나마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더 강한 폭압을 택했다. 용수철을 더 세게 눌렀다. 1972년 10월 17일 장기집권 체제로의 유신헌법을 공포했다. 다시금 피로 얼룩진 공포 정치의 시작, 제4공화국의 도래였다. 정치권 재야 학생들이 반발하자, 1974년 1월 긴급조치 1호부터 1975년 5월 9호까지 발동했다. 강압 정치로 정국을 옭아맸다. 어디서든 개헌에 대해 논할 수도, 공공연히 비판할 수도, 대놓고 시위할 수도 없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자유민주주의 체제 아래에서 가해진 자유의 금지. 그것은 박정희 정권의 실질적 몰락의 전야제가 됐다.

잠시 눈 가리고 아웅 할 수는 있어도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의 장기독재는 용납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1공화국 자유당 정부가 3·15 부정 선거를 하면서까지 장기집권의 끈을 놓지 않자, 결국은 4‧19 혁명에 의해 무너졌다. 제3‧4공화국 박정희 정권의 뒤틀린 유신체제는 부메랑이 돼 10‧26사태로 막을 내렸다. 제5공화국 전두환 정권은 장기 집권 연장선의 ‘호헌 조치’를 강행하다 1987년 6‧10 민주항쟁에 의해 무너졌다.

거슬러 올라가 전두환 신군부의 퇴진에 있어, 역사적 터닝 포인트가 돼준 것이 있었다. 그것은 85년 2월 총선에서 신민당 돌풍의 계기를 열어준 YS(김영삼)의 단식투쟁이었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는 5‧17 비상계엄령을 확대하고 YS를 집에 가뒀다. 그 시기 ‘내란음모사건’에 휘말려 간신히 죽을 고비를 넘긴 DJ(김대중)는 신군부에 '반성문'을 남긴채 미국으로 망명해 있던 때였다.

이 기간 YS는 가택연금 당한 동안에도 “신군부 폭거” 라며 날을 세웠다. “날 감금할 수는 있어. 그러나 내가 가려고 하는 민주주의의 길은 말이야. 내 양심을, 마음을 전두환이가 뺏지는 못해”라고 규탄했다. 만 3년째 되던 1983년 5월 18일, YS는 80년 5‧18 광주민주화항쟁의 희생자들을 위로하고, 민주화운동 인사들의 전원 석방 등을 요구하며 무기한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곡기를 끊으면 결국은 죽게 돼 있고, 단식 투쟁이 무서운 것은 제로섬 게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죽든 상대방이 죽든 어느 한 명은 끝장을 봐야 한다. 그래서 죽음을 불사한 투쟁이고, 함부로 할 수 없다며 함운경 전 미 문화원 주도의 삼민투 위원장은 얼마 전 만나 얘기한 바 있다. YS도 죽음을 각오했고, 백기를 든 쪽은 신군부였다. 처음엔 언론보도조차 금지됐지만, 단식투쟁이 장기화되자 외신 등을 타고 전 세계에 알려지기에 이르렀다. 급기야 국내 언론에서조차 이를 생중계하지 않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타협은 없다. 죽기로 했소’라고 하는 YS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만약 그대로 죽으면 뒷감당, 후폭풍은 돌이킬 수 없는 영역이 됨을 신군부는 잘 알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23일 단식 끝에 가택연금은 해제됐고, 또 그 힘을 규합해 당을 창당했다. 다시 상도동계(김영삼 계파)와 동교동계(김대중 계파)가 뭉치는 마중물이 돼줬다. 덕분에 DJ도 미국에서부터 올 수 있었다. 그리고 민의를 담는 그릇이 돼 총선에 나가 제1야당으로 우뚝 섰다. 전두환 신군부와 싸워 이길 체급을 키워낼 수 있던 것이다. 따라서 전두환이 진 것은 YS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식투쟁의 결기가 서슬 퍼렇던 신군부의 무릎을 꿇게 만든 중요한 변곡점이 됐다는 평가다.  

83년 5월 YS는 목숨을 건 23일간의 단식투쟁을 벌여 3년 여간의 가택연금에서 풀려나 가열찬 독재에 항거하는 투쟁을 벌여나갈 수 있었다. ⓒ김영삼 회고록
83년 5월 YS는 목숨을 건 23일간의 단식투쟁을 벌여 3년 여간의 가택연금에서 풀려나 가열찬 독재에 항거하는 투쟁을 벌여나갈 수 있었다. ⓒ김영삼 회고록

이런 YS건만 그보다 앞선
박정희 회담 땐 사쿠라 짓을?

말이 길었다. 이 말을 왜 하냐면, 지난 1일 TV조선 <강적들>에서 전해진 민주평화당 박지원 의원의 발언 때문이다. ‘여야 강 대 강 대치 출구는 없나’를 주제로 정국을 풀어갈 해법을 과거의 사례에 비춰 찾아보던 시간이었다. 당시 박 의원은 문재인 대통령이 일대일 회담을 제안한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의 청을 들어주는 것도 고려해봄 직하다고 제언했다. 그러다 김갑수 평론가의 운을 시작으로 대단히 유명했던 여야 협상 사례라며 조명된 것이 1975년 5월 21일 있던 ‘박정희-김영삼 회담’이었다.

먼저 김 평론가는 밀약설을 제기하며 “유신 후반부, YS가 신민당 야당 총재가 되면서 엄청 강경했다. 어느 날 전격적으로 ‘박정희 김영삼 청와대 회담’이 있었다”며 “이후 사자처럼 맹공을 퍼붓던 YS 태도가 매우 달라졌다”고 말문을 열었다. 배경에 대해 “박 대통령이 YS를 불러놓고 ‘임자도 대통령 한번 해야지’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고 전했다. 또 그것이 “YS가 야권의 원 톱이 된 계기였다”며 “문재인 대통령한테 (박 대통령과 같은)트릭을 쓰라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줄게 있어야 받을 게 있지 않냐”고 여야 회담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DJ 동교동계의 대표 정치인 박 의원도 당시 회담 상황에 대해 말을 보태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함축적으로 평하기를 “대표적인 사쿠라 회담”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그 이유에 대해 “신민당의 대변인인 이택돈 의원이 있다. 그분은 DJ 사람”이라며 말을 이어갔다.

“YS가 박정희와 회담하고 나서 ‘이 대변인님 드라이브 한번 하자’, 그래서 삼청동 뒤로 드라이브를 하는데, 너무 기분이 좋아 보이더란다. ‘무슨 좋은 일이 있습니까.’ 그랬더니 ‘박정희가 임자가 다음에 대통령 해라’ 라고 하더라.”

뒤이어 박 의원은 회담에 대해 “사쿠라로 협력하니까”그리 된 것이라며 “사실 정치는 사쿠라가 많아야 잘 된다. 구정치라고 비난할 게 아니다”라고 묘한 웃음으로 마무리했다.

하지만, 이 말은 신빙성이 있을까. 폄훼 왜곡에 가깝다는 지적이다. <시사오늘>은 지난 2015년부터 2016년에 걸쳐 ‘YS-박정희 회담’을 주제로 억측과 추측이 아닌 진실은 무엇인지, 당시의 정치 상황과 관계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사실 규명을 추적한 글을 본 매체에 연작으로 게재한 바 있다.  이를 토대로 박 의원이 전한 이택돈 대변인의 증언이 왜 설득력이 떨어지는지, YS가 왜 회담에 대해 박 대통령이 죽기 전까지 함구했는지, 또 실제 두 사람 사이에서 어떤 말이 오갔는지에 대해 다시 한번 기술해보고자 한다.

김대중 동교동계의 측근으로 꼽히는 민주평화당 박지원 의원은 'YS-박정희 영수 회담'을 사쿠라 회담이라고 평했지만, 이는 왜곡 폄훼라는 게 YS 상도동계 전문가의 지적이다. ⓒ뉴시스
김대중 동교동계의 측근으로 꼽히는 민주평화당 박지원 의원은 'YS-박정희 영수 회담'을 사쿠라 회담이라고 평했지만, 이는 왜곡 폄훼라는 게 YS 상도동계 전문가의 지적이다. ⓒ뉴시스

상도동계 측근도 아닌,
동교동계에 진실을 말한다?

요체는 이렇다.

첫째. 주장의 신빙성, YS가 상도동계 측근한테도 하지 않은 말을 DJ 측근(이택돈)한테 했을까 이다.

우선은 그 전에 ‘YS와 박정희 회담’ 당시 정치적 상황을 먼저 볼 필요가 있다. 1974년 최연소의 나이로 신민당 총재가 된 YS는 민주 회복을 위한 개헌을 요구하며 박정희 정권에 맞선 강한 대여투쟁을 전개했다. 급기야 이듬해인 75년 4월에는 상도동계의 최형우와 동교동계의 김상현 등 국회의원 13명이 유신헌법 제정 당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았다고 폭로하며 정권의 폭압정치를 정면으로 겨눴다. 처음엔 긴급조치 9호 등으로 제압하려던 정권이었다. 그러나 월남 패망 등 국제 정치마저 불리한 상황으로 돌아가자, 뒤늦게 YS가 제안해 온 것이 ‘단독 영수 회담’이었다.

그런데 회담을 끝내고 돌아온 YS는 대화 내용을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는 점을 이유로 입을 닫았다. 이와 함께 신민당의 투쟁마저 약화되니, 둘 사이의 밀약설부터 금품수수설까지 당내 라이벌 진영인 DJ 동교동계를 중심으로 커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YS는 함구하기로 했다는 약속을 이유로 얘기하지 않았다. 급기야 동교동계의 이택돈 당시 대변인은 ‘대변인인 나에게마저 얘기를 안 한다’며 회담 후 3개월도 채 되지 않아 대변인직을 사임하고야 만다. 여기까지만 들어도 박 의원이 전한 말과 비교하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대체 이 대변인의 그 증언은 어떻게 나온 것일까. 박 의원이 언급한 이택돈 대변인의 증언은 그가 생전에  현대한국구술자료관을 통해 육성으로 남긴 것이다. 육성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YS는 나에게 ‘요는 말이야 이거야. 여당은 지(박정희)가 하고 말이야. 야당은 내가 하라 이 얘기야.’ 그 말에 내가 ‘DJ는 어떻게 하고요?’그랬더니, ‘갔어’라고 전해.  그러면서 ‘내가(박정희) 누가 있느냐. 다음은 네(YS) 차례다’고 박정희가 회담에서 했다며 YS가 들떠있었다." (신민당 이택돈 전 대변인 <현대한국구술자료관 육성> 내용中)

YS가 아무 말도 안 해 사퇴했다던 이 대변인이 나중에 이 말을 들었다고 한 점은 사뭇 이해가 가지 않는다. 더군다나 DJ 사람인 이 대변인에게 ‘DJ가 끝났다’는 말을 한다는 것조차 납득이 가지 않는 논리다.

이 비슷한 말은 상도동계 故노병구 전 민주동지회장도 문제제기한 바 있다. 노 전 회장은 살아생전 “만약 DJ가 YS의 최측근인 최형우나 김덕룡을 만나 ‘YS는 끝났어’라고 할 수 있겠느냐”며 “설사 박정희가 후계자는 당신이야라고 해도 측근도 아닌 사람에게 말을 하고 다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또한, 회담 때 YS를 수행한 이는 동교동계의 이 대변인만이 아니었다. 상도동계 박권흠 비서실장도 함께 있었다. 그런데 이 대변인이 들었다는 얘기를 정작 측근인 상도동계 박 실장은 전혀 알지 못했다. 따라서 이 대변인의 증언을 신빙성 있게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는 YS 비서출신이자 김봉조 전 의원이 2010년 <시사오늘>에서 회고한 것과도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상도동계의 1세대인 김 전 의원은 당시를 되돌아보며 “비서인 나한테도 회담내용을 일체 얘기해 주지 않았다. 말해달라고 하면, YS는 그냥 웃기만 했다”고 전했다.

둘째, 그렇다면 YS는 왜 함구했나. 회담 때 어떤 내용이 오갔길래 대여투쟁이 약화됐냐는 것이다. 이를 알려면 YS 회고록을 통해 엿볼 수 있다. YS는 ‘박정희 서거’ 후 2시간  가량 진행됐던 당시 만남에 대해 이렇게 전했다. 


“박정희는 창밖의 새를 가리키며 ‘김 총재, 내 신세가 저 새 같습니다’라고 하고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인간적으로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박정희에게 ‘민주주의 하자, 대통령 직선제 하자’고 말을 꺼냈다. 그러자 박정희는 ‘김 총재, 나 욕심 없습니다. 집 사람은 공산당 총 맞아 죽고(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육영수 여사는 재일교포 문세광에 의해 총을 맞고 운명을 달리했다.) 이런 절간 같은데서 오래할 생각 없습니다. 민주주의 하겠습니다.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박정희는 ‘김 총재, 이 이야기는 절대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합시다. 내가 정권을 내려놓는다고 하면 대통령으로 일하는 데 여러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고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을 일단 진심으로 믿어보기로 했다.”(YS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중)

당시 YS를 수행했던 상도동계의 박권흠 비서실장도 훗날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YS는 ‘민주주의를 하겠다’는 박정희 얘기를 그대로 믿는 눈치였다”고 말했다. 그는 “YS는 ‘민주주의 될 거요’만 되풀이했지, 그 외에는 일절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다만, 박 비서실장은 “YS가 박정희로부터 받아낸 비밀 약속이 있다”며 “<동아일보> 광고탄압을 중지하고 구속 중인 정치인이 석방될 것”이라고 귀뜸했다는 것. 실제 회담 후 <동아일보>의 광고탄압은 중지됐다. 또 투옥돼 있던 민주화 운동을 벌이던 정치인들도 석방됐기 때문이다. 대여투쟁이 약화된 원인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여기에는 ‘한번 믿으면 철석같이 믿는다’는 YS 특유의 정치스타일도 대여 투쟁을 누그러뜨리는 데 한몫했다. 평소 정치는 정직해야 한다고 했던 YS는 박정희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1978년 8대 대통령의 임기를 끝으로 개헌해 민주주의 체제로 나아갈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박정희는 그해 9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민주주의 약속이 허구임을 깨달은 YS는 다시금 대여투쟁의 강도를 높였다.

그 시기를 반추하는 일련의 심정은 YS 회고록에서도 소회되고 있다.

“박정희가 울지만 않았으면, 나는 ‘그럼 언제 할 거냐’고 따지고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눈물 때문에 추궁하려던 나의 마음은 다소 누그러져 있었다. ‘꼭 민주주의 하겠다’는 박정희의 말은 ‘이번 임기를 마지막으로 물러나겠다’는 뜻으로 들렸다.”(YS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중)

만약 TV조선 <강적들>이 박 의원의 주장만 싣지 않고, 사실 확인을 위한 반론권에 대한 부연설명을 추가로 했다면 어땠을까. 상도동계 인사들의 말을 추적해 보거나, YS회고록에서 소상히 밝혔던 대목이나마 옮겨야 했던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YS에 대한 펨훼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3일 간의 단식 투쟁 중 YS가 보름달 빵을 먹었다는 음해설이 나돈 적도 있다. 수십년도 지나지 않은 현대정치사가 왜곡되지 않을 노력이 필요하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꿈은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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