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 동지 손명순…숨은 일화, ‘여섯’ [영결식 後]
스크롤 이동 상태바
YS 동지 손명순…숨은 일화, ‘여섯’ [영결식 後]
  • 윤진석 기자
  • 승인 2024.03.14 13: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YS 인사들이 전해준
언론에 잘 알려지지 않은
손명순 여사에 대한 이야기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진석 기자]

8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고 김영삼 전 대통령 부인 손명순 여사 빈소가 마련되어 있다. ⓒ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8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고 김영삼 전 대통령 부인 손명순 여사 빈소가 마련되어 있다. ⓒ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지난 11일 YS(김영삼) 부인 故손명순 여사에 대한 영결식이 끝났다. 손 여사는 어떤 분이었을까? YS(김영삼) 부인 故손명순 여사에 대한 일화를 찾아 나섰다. 잘 알려지지 않은 내용을 위주로 수집해 봤다.   

근처 식당에 문민정부 공신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상도동계를 대표하는 김덕룡 김영삼민주센터 이사장, 김봉조 민주동지회 회장, 홍인길 전 청와대 총무수석 비서관,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 김기수 전 수행실장, 손학규 전 보건복지 장관 등이 참석했다. 

저마다 손 여사를 추억했다. 어느 대목에서는 절로 탄복이 쏟아졌다. 

다음의 에피소드는 이 자리에서 나온 얘기다. 
 

YS 부인 故 손명순 여사의 서예 작품이다. 1981년 손명순 여사의 서예 작품으로 붓글씨로 믿음·소망·사랑이라고 써 있다.ⓒ사진제공 : 민추화추진협의회
YS 부인 故 손명순 여사의 서예 작품이다. 1981년 손명순 여사의 서예 작품으로 붓글씨로 믿음·소망·사랑이라고 써 있다.ⓒ사진제공 : 민추화추진협의회

 

# 에피소드 1. 
“YS보다 명필이란 얘기 듣고 그날로 절필”

 

영결식 팸플릿 뒷장에 적힌 서예 ‘信望愛(신망애)’는 손명순 여사의 생전 쓴 글씨다. 명필이란 칭찬이 자자했다. 손 여사가 서예에 취미를 붙이기 시작한 것은 1980년 YS가 가택연금을 당하면서다. 남편이 밖을 못 나가니 손 여사도 곁을 지켰다. YS에게 허락된 범위는 마당을 오가는 게 다였다. 손 여사는 붓글씨를 쓰면서 답답함을 달랬다. 워낙 잘 쓰다 보니 입소문이 났다. 시간이 지나 손 여사에게 붓글씨 청탁을 하는 이들이 많았다. 

어느 날 상도동계 인사 가운데 ‘YS보다 잘 씁니다!’

누군가 말했다.

관련 일화가 테이블 위에서 오가던 중 홍인길 전 수석은 “내가 그 말을 했다”고 나섰다. “사모님이 최고예요. YS보다 낫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놀라운 것은 손 여사의 행동이었다. 

YS보다 잘 쓴다는 말이 돌자, 그날로 절필을 해버렸다. 누가 좀 써서 달라고 해도 일체 주지 않았다. 남편을 위해 자기가 그렇게 좋아하는 붓글씨를 접었다는 얘기였다. 

# 에피소드 2 
“원래 의사가 꿈, 아이 낳고 몰래 이대 졸업”

 

손 여사는 1929년 2월 25일 경남 김해에서 태어났다. 학구열이 대단했다. 마산여고를 수석 졸업하고 19살 혼자 서울로 유학했다. 원래 꿈은 의대를 가는 것이었다. 손 여사에게는 꿈이 있었다. 어려운 사람들을 치료해 주는 꿈이었다. ‘여자애가 어떻게 남녀공학을 다니느냐.’ 집안의 반대에 부딪혔다. 여학생들만 다니는 이대를 선택했다. 그곳엔 의대가 없었다. 약대가 그나마 가까웠다. 손 여사는 약대를 수석 입학했다. 재학 시절 중매가 들어왔다. 만나러 나갔더니 YS가 앉아있었다. 동년배였다. YS는 서울대 철학과 4학년생이었다. 청춘남녀는 꽃피는 3월 결혼식을 올렸다.

문제가 생겼다. 학생이 결혼하면 퇴학을 당하던 때였다. 손 여사는 꿈을 버리기 어려웠다. 결혼한 사실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아기를 낳은 뒤에도 몰래 수업을 들으러 갔다. 가까스로 1953년 졸업했다. 

기쁨이 차올랐다. 약사가 돼 약자를 돕고 싶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듬해 YS가 25살의 나이에 최연소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하려던 일을 접었다. 남편 뒷바라지가 시작됐다. 슬하에 2남 3녀를 뒀다. 

 

“YS와 함께 버텼다” 


1983년 5월 18일 민주화 조치를 촉구하며 곡기를 끊은 YS는 이후 23일 간의 목숨 건 단식투쟁에 들어간다. 사진은 누워 있는 YS와 안타깝게 지켜보고 있는 손명순 여사와 딸 혜영 씨ⓒYS 회고록 갈무리
1983년 5월 18일 민주화 조치를 촉구하며 곡기를 끊은 YS는 이후 23일 간의 목숨 건 단식투쟁에 들어간다. 사진은 누워 있는 YS와 안타깝게 지켜보고 있는 손명순 여사와 딸 혜영 씨ⓒYS 회고록 갈무리

YS는 민주화 최대 주역으로 꼽힌다. 

“손 여사도 민주투사나 다름없다.”

상도동계 인사들은 입을 모았다. 

김무성 전 대표는 “손명순 여사는 탄압을 받았던 정치 지도자의 아내로 최선을 다한 분”이라고 기억했다. 

그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라며 83년 YS 단식 투쟁 때를 돌이켰다. 
 

# 에피소드 3
YS 수술 동의서에 싸인 안 한 일화

 

YS는 1983년 5월 18일 대통령직선제, 정치재개 등 5개의 요구조건을 갖고 단식투쟁을 시작했다. 15일째 되는 날 경찰 특수부대들이 들이닥쳤다. YS를 납치하다시피 해서 데리고 나갔다. 몇 시간 동안 수소문한 끝에 서울대병원에 왔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의사는 손 여사에게 남편이 굉장히 위독한 상황이라고 경고했다. 오늘을 넘기면 산소가 부족해져 뇌세포가 파괴돼 회복이 불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장이 파손됐기 때문에 수술을 해야 한다고도 했다. 남은 인생을 힘들게 살 수 있다고 했다.  

YS는 계속 버텼다. 경찰들은 병원 바깥에서 고기를 구워 먹으면서 단식을 방해했다. 냄새가 환자실을 가득 메웠다. 의사가 손 여사에게 수술동의서를 써 달라고 내밀었다. 손 여사는 남편의 뜻을 거역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죽어도 좋다, 버티었다. YS는 8일간 더 버텼다. 23일째 돼서야 단식을 멈췄다.

“그러한 면모를 볼 때 손 여사는 대단한 분이었다.” 

김 전 대표가 극찬했다. 

김덕룡 이사장에 따르면 손 여사는 YS 단식을 외신에 알리는 데 힘쓴 인물이기도 했다. YS가 단식하는 동안 손 여사도 고난을 같이 했다고 전해진다. 

YS 회고록 집필에 참여했던 김동일 전 김영삼민주센터 사무처장은 지난 10일 대화에서 “YS가 단식하는 동안 손 여사도 같이 굶었다고 하더라. 단식 당시 사진을 보면 손 여사 모습도 피골이 상접해 있다”고 언급했다. 

 

부인들 이끌고 거리로


YS 단식을 계기로 신군부는 움찔했다. 민주계 인사들도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민주화추진협의회가 만들어졌다. 신민당 승리와 6월항쟁, 87 직선제 쟁취까지 승리의 역사를 써내려갔다. 

최형우 장관의 부인 원영일 여사는 지난 11일 통화에서 “손 여사를 중심으로 야당 국회의원들 부인들이 모여 함께 투쟁했던 때가 지금도 또렷하다”며 “우리집 양반(최형우)은 손 여사를 가리켜 ‘무공해 부인’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이어 “참말로 마음이 맑고 정의롭고 아주 정확하고 흔들림이 없었다. 자기 주관대로 움직이는 분이어서 그리 표현한 것 같다”고 가늠했다. 

야당 인사의 부인들도 거리로 나가 투쟁을 할 때였다. 원 여사는 “어떤 지침을 받아서라기보다 우리도 그냥 이렇게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 부인들끼리 의기투합했던 것”이라며 “부인들을 이끌었던 분은 손 여사였다. 데모하다보면 닭장차(경찰차)로 끌려가 어딘지 모를 길가에 던져진 적도 많았다”고 회상했다. 

YS는 일찍이 3‧15부정선거와 5‧16, 유신정권을 거치며 야당 지도자로 성장해 반독재 투쟁의 선봉에 섰다. 손 여사가 겪은 고생도 오래됐다. 50~60년대 때도 투쟁 자금을 모으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손 여사의 몫이었다.  

다음은 김동일 전 처장이 들려준 얘기.  
 

# 에피소드 4
투쟁 자금 마련도 손 여사 몫

 

YS는 자금이 필요했다. 손 여사가 남편을 대신해 거제 시댁이나 김해 친정댁에 자주 내려갔다. 시댁은 멸치잡이 어장을 운영했다. 선명 야당 노선을 걸었던 YS로 인해 가산이 남아나기 어려웠다. 평생을 청렴하게 살았던 YS는 말년에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다. 차치하고, 손 여사는 돈을 또 타기 위해 시골로 내렸다. 시골 어른들은 “돈을 준 지가 언제인데 뭘 또 달라고 하느냐”며 서울로 쫓아 보냈다. 하는수 없이 올라오면 이번엔 YS가 ‘그냥 오면 어떻게 하느냐’며 불같이 화를 냈다. 다시 내려가 사정사정해 돈을 타왔다. 그렇게 야당의 투쟁 자금을 마련했다.

정세운 정치평론가는 민주화 최대 주역인 YS가 있었지만, 손 여사의 공도 컸다고 총평했다. 그는 손 여사가 세상을 떠나자 일제히 언론에서 ‘조용한 내조’라고 보도하는 것에 못마땅해했다. 

손 여사를 민주투사로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손명순’은 학생 때 바라본 모습이다. 신군부 독재 아래 동토의 계절이 아니었나. DJ(김대중)는 미국에 가 있고, YS는 연금당해 있을 때였다. 지금도 눈에 선한 것은 12대 총선 유세에서 신민당 지지를 호소했던 손명순 여사의 모습이다. 관제야당들 틈바구니에서 YS 부인 손 여사가 직접 유세장에 나서줌으로써 신민당이야말로 정통 민주세력임을 시민들한테 알리는 계기가 됐다. 신민당 승리에 어마어마한 기여를 가져온 일이었다. 그 폭발력을 갖고 신민당이 승리했고 훗날 직선제 쟁취로 연결될 수 있었다. 손 여사도 당연히 민주화 주역이다. 큰 획을 그은 인물이다.” 

여타 보도에서는 왜 ‘내조’에 방점을 찍었을까.

정 평론가는 “아마도 YS와 민주화투쟁을 함께했던 상도동계와 87이후 인연을 맺게 문민정부 인사들 간의 차이점에서 비롯돼 보도가 달린 듯싶다”고 유추했다.
 
그는 “고락을 함께한 상도동계 인사들 기억 속 손 여사의 모습은 민주투사로 더 많이 기억될 것”이라며 “그러나 문민정부 인사들이 볼 땐 상도동 집을 찾은 사람들에게 멸치에 된장을 푼 시래깃국을 대접하며 내조에 전념했던 손 여사의 모습이 더 인상에 남았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또, “그것이 여러 번 회자되면서 민주 투사적 이미지보다 조용히 내조했던 모습이 강조돼 언론에도 각인된 것 같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손명순


상도동 자택을 방문한 손님들에게 YS 부인 손명순 여사는 항상 손수 끓인 시래깃국을 대접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상도동 자택을 방문한 손님들에게 YS 부인 손명순 여사는 항상 손수 끓인 시래깃국을 대접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꼭 그래서는 아니겠지만 문민정부 인사들이 전해준 손 여사에 대한 일화는 온유함에 더 방점이 찍힌 듯 비쳤다. 

영부인 시절 손 여사를 오랫동안 보좌했던 정병국 전 청와대 제2부속실장은 지난 7일 통화에서 “손 여사야말로 평생을 티내지 않고 뒤에서 헌신한 분이다. YS 대통령을 만들어낸 숨은 일등공신이었다”고 강조했다. 

지난 8일 서울대장례식장에 마련된 손 여사 빈소에서 만난 김기수 전 청와대 수행비서실장은 “손 여사는 현모양처의 표본과 같다”, 김한규 전 총무처장관은 “육영수 여사에 버금가는 분”이라고 회상했다. 

<김영삼재평가>의 저자 오인환 전 공보처 장관은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한 중재자 역할의 또 다른 일화를 들려줬다. 
 

# 에피소드 5
아랫사람 혼날 땐 중재 나서줘 

 

1993년 6월 YS, 손명순 여사, 오인환 공보처장관이 시정연설 문제로 국회로 향했다. <중앙일보> 기자가 정부 관계자와 얽혀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구속돼 사회적으로 떠들썩할 때였다. 공보담당인 오 장관은 해당 기자가 추후 불구속될 수 있다고 말했는데 이것이 보도되고 있던 중이었다. YS는 심기가 불편했다. 대통령이 발표해야 할 일을 공보처장관이 말해 김을 빼버렸다는 지적이었다. 

“장관이 뭐 일일이 다 결정하고 발표하나.”
YS가 차를 타고 가면서 절차가 잘못됐다며 역정을 냈다. 오 장관도 아차 싶었다. 스스로 경솔했다고 생각해 가시방석에 앉은 느낌이었다.  
그때 손 여사가 조용히 있다가 딱 한마디 했다. 
“언론 담당 장관이 그런 얘기도 못하나요.” 
“….” 

오 전 장관은 당시를 떠올리며 “그 뒤부터 YS도 가만히 계시더라”며 “곤경에 빠졌다가 손 여사 덕분에 이를 면한 적이 있다”고 웃었다. 뒤이어 “YS가 화를 벌컥 내면 밑의 사람들이 당황하거나 의기소침해질 수 있는데 여사께서 나서서는 중화작용 역할을 해줬다.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줬다”고 회상했다. 

부드러운 면모도 있었지만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 지점이 있었다.  

다음은 김덕룡 이사장이 들려준 얘기다. 
 

# 에피소드 6
일요일에는 무슨 일 있어도 교회로

 

손 여사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장로교 중에서도 아주 보수적인 교파에 속했다. YS가 장로가 되기는 했지만은 어떤 의미로서는 손 여사에게 끌려 교회에 다닌 덕택일 수도 있다. 일요일에는 으레 정치적인 모임이 많다. YS가 모임에 나가려고 하면, 손 여사는 ‘안 된다. 교회부터 가야 한다’고 앞장섰다. 선거운동을 해야 할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요일이 되면 손 여사는 단호했다.  

1992년 12월 18일께로 기억된다. 대통령 선거 기간이었다. 김덕룡 비서실장을 비롯해 비서진들은 부산에서부터 서울 광화문 행사까지의 유세 동선을 짰다. 출발을 부산에서부터 해야 하는데 그날이 일요일이었다. 손명순 여사는‘교회부터 가야 한다’고 막아섰다. 비서진들이 ‘안 됩니다. 사모님’하면서 설득에 나섰지만 손 여사는 꿈쩍하지 않았다. ‘교회가야 합니다.’ 

김덕룡 이사장은 당시를 소회하며 “그때 비서진들과 얼마나 갈등이 있었는지 모르다. 여사께서 다른 것은 다 양보해도 일요일 교회가는 일 만큼은 타협하지 않았다. 정말 못 말렸다”며 너털웃음을 보였다.

김석우 전 청와대 의전비서관은 새로운 시각을 보탰다. 빈소 조문 당시 그는 “여사께서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분이기도 하지만 영부인 시절 여권 신장 개선에도 많이 힘쓴 분이었다”며 “대한민국에서 여성의 지위가 어떻고, 앞으로 어떻게 해나가야 한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고 평했다.

정대철 국회헌정회장은 통화에서 “손 여사하면 ‘참을인자 손명순’이라고 불렸던 것이 생각난다. 정말 대단한 분이었다. 무슨 얘기인지는 상상에 맡긴다”며 특유의 장난스러운 웃음을 보냈다.   

퇴임 후 쓸쓸한 이야기도 전해졌다. 빈소에서 만난 길태근 전 김영삼 대통령 비서실 정무행정관은 “YS와 여사께서는 산을 자주 오르내리셨다. 한때 인기가 최절정이었던 YS였지만 당시 IMF 문제로 오가던 등산객들이 야유를 퍼붓고는 했다. 묵묵히 들으며 산을 내려오시던 부부의 모습을 기억하면 지금도 가슴이 너무 아프다”며 침통해했다. 
  
손 여사에 대한 장례는 가족장으로 지난 8일부터 11일까지 치러졌다. YS 손자 김인규 전 대통령실 행정관은 22대 총선 경선 기간임에도 부친(김현철 김영삼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과 함께 할머니 빈소를 내내 지켰다. 

김 전 행정관의 눈은 초췌하고 충혈돼 있었다. 그는 손 여사 관련 일화를 묻는 질문에 “할머니가 근 일이년 아프셔서 병원에 입원해 있으셨다. 대통령실을 나와 할머니를 찾아뵙고 정치를 하겠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었다”며 “의식도 없고 말씀도 못하셨을 때인데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모르나 할머니가 손을 꼭 잡아주셨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너무 힘이 난다”고 말했다.  

빈소를 찾은 15대 총선 시절 영입됐던 김문수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과 권영세 전 통일부 장관도 “손 여사는 YS가 있기까지 숨은 주역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한편, 일각에서는 “손 여사 장례는 DJ 부인 故이희호 여사 때처럼 사회장으로 했어야 했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꿈은 자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