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 지존의 품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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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 지존의 품위는?
  • 환타임스=서상욱 역학자
  • 승인 2010.05.04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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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욱의 주역산책<24> 천택리괘의 괘사와 구오·상구는?
반성은 흉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

구오 - 과감하게 결단을 내려서 이행을 해야 한다. 구오는 득중과 득위를 하였으므로 능력과 권한을 함께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정당한 일이라도 위험성은 있으므로 오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 고형은 《설문》을 인용하여 쾌(夬)를 찢어진 상태(斷裂)라고 했다. 그의 주해는 대체로 문자의 고증에 치중했기 때문에 독창적인 면에서는 일리가 없지는 않으나 소상(小象)에서 설명한 것을 무시했다.
 
소상에 따르면 쾌리(夬履)는 정려(貞厲)니 구오가 차지하고 있는 자리가 정당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쾌리정여는 위태로운 지경에 놓여 있으나 과감하게 결단을 내린다는 뜻이다.

리괘는 43번째 괘인 택천쾌괘(澤天夬卦)가 변한 것이다. 정이(程頤)는 쾌를 강한 결단이라고 했다. 구오는 양효로서 양의 자리를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득중을 하고 있기 때문에 능력과 정당함을 겸비한 존엄한 존재이다. 고형의 설명처럼 떨어진 신발을 신고 있을 존재가 아니다.
 
예를 행할 때도 위엄과 품위를 갖추고 당당하게 처신해야 한다. 천하의 지존으로서 밝은 지혜로 세상을 비추고, 과감하게 결단을 내리며, 위엄으로 제압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고 세간의 인기에 연연하거나 하찮은 무리들에게 휘둘려서 품격을 잃는다면 지존의 자리가 위태롭게 된다. 중정(中正)에 처하여 천하를 끌어안아야 할 지존이 스스로를 치우친 곳에 둔다면 당당함을 잃고 만다.

김영삼의 문민정부,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에 뒤를 이어 참여정부를 세운 노무현은 지존으로서의 존엄성과 중정의 자리를 잃고 스스로를 소수자의 위치에 두었다. 그는 야당이나 보수언론과 투쟁을 펼치느라고 단 한 번도 위엄을 과시하지 못했으며, 거친 표현을 일삼았기 때문에 지존으로서의 품위까지 잃고 말았다. 건국 이래 최초로 탄핵을 받아 대통령의 자리에서 잠시 물러나 있어야 했다.
 
국민들은 위태로운 그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어 총선에서 과반수가 넘는 의석을 확보했다. 국민들은 당신은 절대로 소수가 아니다라고 달랬지만, 그는 여전히 위에서 덜어서 아래에 보태주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주장했다. 그러한 그의 행태가 정려(貞厲)이다. 중정을 잃고 고집을 부리면 위태롭게 된다는 뜻이다. 그의 위태로움은 눈과 귀가 팔방으로 열려있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당연한 결과였다.

상구 - 자신이 과거에 했던 일과 행위를 신중하게 반성하여 미래의 길흉화복을 판단해야 한다. 그렇게 하여 잘못된 것이 있으면 고쳐야 한다. 원만하게 일을 처리하면 크게 길하고 이득이 있을 것이다. 상구는 현실에서 물러나 항룡유회(亢龍有悔)의 상태에 있으나 유순하고 현실적인 감각을 지닌 육삼과 정응을 하고 있으므로 반성을 할 줄 안다. 반성은 흉에서 벗어나 길로 가는 유일한 방법이다.

시리고상(視履考祥)은 예(履)를 지켜서 좋았던(祥) 전례를 자세히 고찰하고 살핀다는 뜻이다. 고형의 주해는 복잡하여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지만, 상(祥)을 상(庠)이라 한 것은 재미있는 견해이다. 《설문》에 따르면 상(庠)은 예관(禮官)이 노인을 봉양하는 곳이다.
 
하왕조에서는 교(校), 은왕조에서는 상(庠), 주왕조에서는 서(序)라고 했다. 《맹자》 등문공에서는 상은 기른다(養)는 뜻이고, 교는 가르친다(敎)는 뜻이며, 서는 활을 쏜다(射)는 뜻이라고 했다. 맹자의 설명에 따르면 상은 오늘날 유치원과 같은 교육기관이고, 교는 지식을 가르치는 곳이며, 서는 무예를 비롯한 체육기관이 아닌가 한다. 최고의 예를 실천하는 길은 교육에 전념하는 것이다.

기선원길(其旋元吉)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가다가 상황이 여의치 못하여 되돌아 와 천하의 길흉을 가늠하면서 교육에 치중하면 크게 길하다는 뜻이다. 기선원길은 공자의 모습과 같다.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상가이자 정치가였으며 교육자였던 공자는 춘추시대 말기에 지금의 산동성 곡부시(曲阜市)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중국은 엄청난 정치적 혼란기였다. 그의 조국 노(魯)나라는 주왕실 최고의 공신이었던 주공단이 세운 나라로 주문화의 정수가 그대로 이어진 특유의 문화를 지니고 있었다. 이미 상(商)의 문화에 대해서도 깊은 식견을 가졌던 공자는 양자를 융합하여 주로문화(周魯文化)를 만들었다. 그것이 후대로 이어지면서 중국의 가장 전통적인 문화로 성장했다.

평생토록 공부하기를 즐겼던 공자는 혼란한 사회현실에 직면하여, 자신이 처한 사회를 관찰하는 동시에 역대의 문화적 유산을 나름대로 정리하여 자신의 사상적 체계를 정립했다. 그것이 완성되자 그는 자기가 꿈꾸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신념을 가졌다. 공자는 제나라에서 자신의 이상을 적용하려는 시도를 했고, 또 노나라에서는 실제 관직을 맡기도 했다.
 
그 밖에도 여러 나라를 찾아다니며, 적극적인 정치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공자의 생각은 이미 약육강식의 패권정치가 자행되던 시대에 맞지 않았다. 그가 꿈꾸었던 ‘인(仁)’의 철학은 씨족 또는 부족 중심의 정치적 상황에서는 적합했지만, 국익을 걸고 치열한 투쟁을 펼치는 국제사회에서는 적합하지 않았다.

공자가 가장 위대한 업적은 아무나 공부할 수 있게 사립학교를 만든 것이다. 그는 ‘학재관부(學在官府)’라 하여 학문을 관청에서 주도했던 전통을 타파하고, ‘회인불권(誨人不倦)’이라는 누구도 가리지 않고 가르치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는 정신으로 학생들을 받아들였다. 교육을 통하여 문화를 전파하는 한 편 수많은 인재를 길러냈던 것이다.
 
사람을 가리지 않고 가르친다는 것은 공자뿐만 아니라 모든 성인들의 위대한 정신이다. 예수도 석가모니도 그들이 성인으로 추앙받는 공통된 점이 있다면 바로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는 평등정신이 아닐까?

공자의 사상은 ‘인(仁)’이 핵심이다. ‘예(禮)’는 행위의 규범이고, ‘중용(中庸)’은 생각의 기준이다. 그가 제시한 사회적 원칙과 이상에는 풍부하고 다양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는 군주, 신하, 아버지, 아들로 대표되는 종법사회의 등급제도를 만들어 각자에게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각 등급에 속하는 한 개인이,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 할 때 사회가 안정이 되며, 부강한 나라가 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개인의 인격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천자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치세(治世)는 물론 개인적 수신(修身)을 위하여, ‘인(仁)’, ‘덕(德)’, ‘충(忠)’, ‘서(恕)’를 중심으로 하는 도덕정신을 함양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의 사상은 정치논리를 도덕화한 것이 특색이다.

예(禮)는 공자의 사상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요소이다. 일종의 사회적 행위규범인 예는 공자 이전에 이미 제시된 개념이다. 공자는 예를 천자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사람마다 누구나 반드시 지켜야 할 행위규범이라고 하였다. 공자가 말한 예는 정신적인 측면과 외재적인 형식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예에는 당시의 종법적(宗法的) 등급제도와 상응하는 각종 윤리적 관계가 포함되어 있다.

그가 말한 행위준칙으로서의 예는 사람들의 성질을 교화함으로서 갖출 수 있는 후천적 도덕률이었다. 개인은 예를 갖추기 위해서 상당한 수양을 해야 하며, 스스로 자기와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관계에서 상대를 해치기를 거리끼지 않은 지나친 경쟁보다는 사회적 협력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예를 통하여 인과 덕이 서로 결합된다고 생각했던 공자는 극기복례위인(克己復禮爲仁)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예와 인을 갖춘 사람을 보고 지금도 인격을 갖춘 사람이라 부른다. 인격이란 지독한 자기극복과정이 없이는 형성되지 않는다. 자신을 극복한다는 것은 석가모니나 예수의 가르침과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다.

‘예’와 함께 ‘인’도 공자사상의 핵심이다. 물론 공자 이전에도 ‘인’이라는 개념이 있었지만, 공자가 ‘인’의 의미를 아주 풍부하게 만들었으므로, ‘인’의 의의가 크게 승화되었다. 인에 대한 공자의 견해를 《논어》를 통해 알아보자.
 
안연편(顔淵篇)에서는 인을 곧 ‘사람을 사랑하는 것(愛人)’이라 했고, 옹야편(雍也篇)에서는 거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인이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 자기가 할 줄 아는 것은 다른 사람도 하도록 하는 것이라 했다. 또 안연편에서는 자기가 하기 싫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않은 것이라 했다. 공자의 인본주의에 관한 깊은 통찰은 그의 사상 전체를 꿰뚫는 핵심개념이다.

공자는 인의 가치와 작용에 관해 특별히 강조했다. 그는 인이란 개인이 수양해야할 것이기도 하지만,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를 위해서는 반드시 갖추어야할 원칙이라 했다. 그는 이러한 인을 실행하기 위하여 치자로서 갖추어야할 5가지의 덕목을 구체적으로 명시했다. 이 5가지는 공손, 관용, 신용, 지혜, 은혜이다.
 
그는 “공손은 업신여기지 않는 것이며, 관용은 사람을 얻는 방법이고, 신뢰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다. 지혜가 있어야 공을 세울 수가 있고, 은혜로워야 사람을 부릴 수가 있다”라고 했다. 이 5가지 덕목의 출발점은 모두 인간을 존중하고 서로 이해하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렇다면 공자가 말한 인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을까? 《논어》에서 인에 대한 설명이 집중된 곳은 이인편(里仁篇)이다. 옛날에 시골서당에서 《논어》를 공부할 때 들었던 엉터리해석이 생각난다. 훈장님께서 ‘里仁’이란 어진 사람이 많은 동네에서 살아야 한다는 뜻이라 하시는 바람에 어른이 될 때까지 그 말이 옳은 줄로 알았다.
 
여기에서 ‘리(里)’는 동사로서 ‘처(處)’, ‘거(居)’, ‘주(住)’와 같은 뜻이다. 즉 어떻게 하면 ‘인’의 경지에 이를 수가 있는가라는 뜻이다. 《논어》 첫 구절인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의 목표는 ‘인’을 배운다는 뜻이다.

인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해석은 ‘널리 사랑한다’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박애(博愛)’라는 풀이를 과연 공자가 했을까? 맹자가 했을까? 그것은 당대(唐代)의 문호이자 유가를 중흥하기 위해 노력했던 꼿꼿한 유학자 한유(韓愈)의 풀이이다. 한유는 원래 겸애(兼愛)를 주장했던 묵자(墨子)를 연구한 사람이다.
 
그는 묵자의 사상을 유가에 융합하는 과정에서 겸애의 ‘겸(兼)’을 ‘박(博)’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한유의 풀이는 인의 쓰임인 ‘용(用)’에 불과할 뿐 본체를 말한 것은 아니다. 유가의 이념을 국시로 삼았던 한(漢)에서 당(唐)에 이르기까지 인에 대하여 설명한 수백만자의 해설이 쌓였지만, 그 본체를 제대로 설명한 것이 드물다.

송대(宋代)에 이르면 성리학자들이 불교를 배격한답시고 오히려 불교의 심학(心學)을 끌어와 인을 ‘과일의 씨앗 속에 있는 빈 곳과 같은 것(仁者核之心也)’이라 했다. 과일의 씨앗은 음과 양 두 쪽으로 나누어져 있고 그 가운데는 비어있으므로, 인은 곧 도체의 속이 비어있는 것과 같은 경지라는 것이다. 당시의 의학자들이 몸의 일부가 마비되거나 저린 것을 ‘불인(不仁)’이라 하는 것으로 미루어 인을 마음의 지각성(知覺性)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이들은 철학적으로 해석하여 인의 본체를 구구하게 설명했다. 하기야 지금 말하는 체용론도 알고 보면 불교의 원리이다. 불교에서는 만물을 ‘체(體)’, ‘상(相)’, ‘용(用)’으로 인식한다. 유리컵을 예로 들어보자. 유리컵의 유리는 체이고, 그 모양은 상이며, 물을 담는다는 기능은 용이다. 공자도 한당의 유학자들처럼 대부분 그 시대의 사회를 겨냥하여 인의 용을 말했다.

문자상으로 보면 인은 두 발로 걸어가는 사람의 형상을 한 ‘亻’과 둘을 의미하는 ‘二’가 결합된 글자이다. 곧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를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인의 체는 인간이며, 상은 인간관계에서 나타나는 사람의 행위이고, 용은 그 작용인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의 현상이 사실이 용이라면 한유가 말한 박애는 인의 선한 측면을 강조한 것이다.

공자의 중용사상은 철학방법론적 의미와 인품과 덕성을 기르는 의미를 함께 갖추고 있다. 방법론적으로는 ‘중(中)’이라는 개념과 ‘화(和)’라는 개념이 있다. 공자는 《논어》 자로편(子路篇)에서 군자화이부동(君子和而不同)이라 하였다. 그가 말한 화이부동은 서로 다른 사물들 사이를 가리키는 말이지, 단순히 한 측면이 또 다른 한 측면에 의존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따라서 양방의 지위와 윤리관계에 있어서도 각자 서로 다른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하며, 심지어 대대관계(待對關係)에 있는 사물의 관점에서도 서로 다른 점을 인정하여 양해와 협조를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공자가 추구했던 이상세계는 분리와 대결이 아니라, 통일과 조화의 세계였던 것이다. 따라서 ‘中’은 Middle의 개념이 아니라 Center의 개념이며, ‘和’는 물리적 결합이 아니라 화학적 결합을 의미한다. [서상욱 역학자]

원본 기사 보기:환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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