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 인물실록] 근·현대 한의학의 대명사, 際光 배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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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 인물실록] 근·현대 한의학의 대명사, 際光 배원식
  • 설동훈 기자
  • 승인 2019.01.11 10: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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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 대가, 한의사 제도 확립 기여 등 한의계 3대 거목으로 칭송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설동훈 기자)

▲ 근현대 한의학의 대명사로 칭송받는 際光(제광) 배원식 선생. ⓒ배원식한의원

2만5000여 명의 회원이 의료현장의 최일선에서 활동하고 있는 대한한의사협회는 국내 의료계의 한 축을 형성하며 국민보건 향상과 각종 질병치료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대한한의사협회가 이처럼 거대 의료단체로 거듭나고 위상을 정립하기까지 많은 한의계 원로들의 수 십 년에 걸친 각고의 노력이 밑거름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한의사 제도의 탄생과 대한한의사협회 설립과 관련해 한의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際光(제광) 배원식(裵元植, 1914~2006) 선생이다.

배원식 선생은 현재의 한의사 제도를 탄생시키고 대한한의사협회의 설립에 초석을 놓은 인물 중 한 사람이다. 한의계 3대 거목으로 칭송받는 배원식 선생은 근·현대 한의학의 대명사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불임을 비롯한 부인과 질환과 각종 난치성 질환의 치료에 성가를 높인 명의임은 말할 나위가 없지만 한의사, 한의학자, 대한한의사협회장, 한의대 교수, 민간외교가, 한방임상전문잡지 발행인 등 몇 개의 단어로 집약해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수많은 업적을 이루어 냈기 때문이다.

배원식 선생의 한의학 사랑과 한의계를 위한 왕성한 활동은 지금도 여전히 후배 한의사들의 귀감이 되고 있고, 그가 남긴 무수한 업적들은 한의계 인프라의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사학동인(斯學同人) 여러분 제(弟)는 먼저 갑니다. 제언(諸彦)님들은 끊임없이 한의학발전에 힘써 주시기 바랍니다." 한의계와 한의학에 대한 그의 남다른 애정은 마지막으로 남긴 유훈에도 그대로 담겨있다.

12일은 배원식 선생이 작고하신지 13년이 되는 날이다. 배원식 선생의 13주기를 맞아 마지막 순간까지도 한의학을, 그리고 한의계를 사랑했던 그의 생애와 한의계 곳곳에 남아 있는 발자취를 2회에 걸쳐 재조명 해본다.

진해의 수재 소년, 예기치 않은 질병으로 한의학에 입문

1914년 경남 진해에서 출생한 배원식 선생은 보통학교를 1등으로 졸업할 정도로 수재 소리를 듣던 터라 진주사범에 진학, 선생님이 되는 것이 어린 시절 꿈이었다. 하지만 진주사범 진학을 앞둔 시점에 예기치 않은 피부병이 온 몸에 발생했다. 가뜩이나 조선인의 수석 졸업을 눈엣 가시처럼 여기던 진해 거주 일본인들이 ‘전염성’을 들먹이며 입학을 반대하고 나서 결국 아버님의 친구였던 김민구 선생의 동제한의원에 유숙하며 치료를 했다.

치료 과정 중 선생의 영특함을 깨우친 김민구 선생께서 한의학 서적인 ‘동의보감’과 ‘의학입문’ 등을 사사했는데 어른들도 어려워하는 한의서를 불과 며칠 만에 줄줄 외울 정도의 비상함을 보이자 김민구 선생이 한의학 공부를 권유,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한의수업에 들어갔다. 예기치 않게 발생한 피부병이 배원식 선생의 평생 진로를, 그리고 운명을 바꾼 셈이다.

배원식 선생은 이곳에서 각종 한의학 서적을 탐독하고 공부하는 동안 한방의 오묘한 진리에 심취했으나 전염성질환과 수술을 필요로 하는 질환의 치료에 대한 열정에 양의학을 배우기 위한 욕심으로 김민구 선생이 제공해 준 학비를 들고 평양기성의학강습소(평양의전 전신)에 입학했다. 원래는 대구지역에서 철도근무자들을 대상으로 치료하던 자혜의원 의학강습소에 입학할 예정이었으나 결원이 없어 평양행을 선택하게 됐다.

본과 2년 과정을 마친 후 의사자격검정시험을 거쳐 양의사로 개업을 꿈꿨지만 마침 시험이 없었고 급우들이 만주에 가면 검정시험을 거치지 않고도 개업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결국 단신의 몸으로 만주행을 결정한다. 여기서 또 한번 한의사로서 배원식 선생의 운명은 변환점을 맞게 된다.

막상 만주 신경(지금의 장춘)에 정착은 했지만 듣던 말과 달리 양의로 개업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결국 그 해 초여름 실시된 한약종상 시험에 합격, 한약상을 잠시 개업했다가 2년 후 실시된 한의국가고시에 응시, 조선인으로서는 드물게 전 과목 수석합격의 영예를 차지하며 마침내 한의사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 배원식 선생의 만주한의사면허증 서류. 599번 달본원식. ⓒ배원식한의원

만주지역에서 수준 높은 의술로 명성, 한국인 위상 높여

배원식 선생이 한의사 자격을 얻어 신경에서 ‘대륙한의원’을 개업한 것은 만주에 온지 3년째 되던 1936년 봄으로 현재 배원식한의원이 ‘1936년 개원’으로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기인하고 있다.

개원 당시 젊은 한의사였음에도 한의원은 연일 환자로 붐볐다. 환자의 분포는 다양했는데 특히 부인과 등 여성질환과 전염성 질환, 각종 난치성 질환 환자들이 입소문을 듣고 중국 각지에서 몰려 들었다.

그 중 특별한 환자는 육당 최남선 선생으로 두 아들이 양의였음에도 한의원을 찾았다. 당시 육당은 신경에 소재하고 있는 만주 건국대에서 조선인으로는 유일하게 교수로 재직 중이었는데 유명하다는 양방병원에서도 치료가 불가했던 간장종양이 선생이 처방한 첩약으로 완쾌되자 배원식 선생의 손을 잡으며 나보다 선생이 더 조선인의 명예를 빛내주는 사람이라고 격려하기도 했다.

그의 의술은 더욱 명성을 떨쳐 1941년에는 신경국립한의학연구소 연구원으로까지 발탁되었으나 해방을 맞게 되자 내 땅에서 내 동포를 진료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해방된 그해에 귀국했다.

배원식 선생이 귀국해 자리를 잡은 곳은 서울 중구 회현동, 현재 배원식 선생의 수제자이면서 2대 원장인 이종안 원장이 진료를 시행하는 ‘배원식한의원’ 부근이었다.

▲ 해방 후 배원식 선생이 현재의 배원식한의원 부근에 개원했던 한의원. ⓒ배원식한의원

한의사 제도 탄생과 대한한의사협회 설립에 초석 역할

국내 귀국 후 배원식 선생은 30세의 젊은 나이에 박호풍, 김영훈, 박성수 등과 함께 한의사들의 모임인 ‘의생협회’에서 ‘동양학관’이라는 강습소를 만들었다. 이후 이들은 6.25사변에 따른 1.4후퇴로 피난지 부산에서 부산 주재 한의사들과 힘을 모아 천신만고 끝에 국민의료법을 통과시켜 이 땅에 현재의 한의사제도를 탄생시켰고 그 후 서울한의과대학(현재 경희대한의대)을 설립하는데 일조한다.

배원식 선생은 강사를 맡아 50~60명의 학생들에게 의학입문, 동의보감 등을 가르치며 고달픈 피난생활 중에도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아 역서 ‘新漢方醫學總論(신한방의학총론)’을 저술했고 이 책은 한의학 교재가 전무했던 당시 최초의 대학교재로 사용되며 한의학 체계정립에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1954년에 실시된 한의사국가고시에서 한의사면허를 취득했다.

휴전 이후 서울로 환도한 배원식 선생은 1954년 한의학을 치료의학으로 진일보시키는 업적을 남기게 되는데 한방의학 월간지‘醫林(의림)’의 창간이 바로 그것이다.

요즘에는 한의학을 소개하는 서적이나 임상전문잡지들을 쉽게 접할 수 있지만 당시 한의계는 전문잡지나 신문이 전무하던 시절이었다. 뻔히 적자가 예상되는 상황에서도 배원식 선생은 한방문화의 계승과 창달을 위해, 또 한방의료의 정보교환과 학술진흥을 위해 누군가 희생해야 한다는 생각에 기꺼이 사재를 출연, 의림지를 창간했다.

하지만 어려움을 무릅쓰고 창간한 ‘의림’지를 통해 외국의 한의계와 인연을 맺고 또 그들로부터 나름 평가받게 됐으며 국제동양의학학술대회 등 각종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지난 1999년 중국 당국으로부터 95인의 ‘20세기 최고의 명의’로 선정되기도 했으니 한의계의 미래를 위한 배원식 선생의 혜안이 그저 놀라울 수밖에 없다.

배원식 선생에게 사사한 효정 한의원 우창영 원장은 “한의대 졸업 후 한의사로 첫 발을 내딛던 시기에 처음으로 배원식 선생님이 주관한 학술세미나에 참가, 교과서의 저자로만 이름을 듣던 당대 명의 분들의 진검승부에 가까운 임상토론을 들으며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며 “배원식 선생님을 비롯한 한의계 원로 분들의 임상학술 발전을 위한 노력이 현대 한의학의 학술적 토대를 만들었음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회고했다.

▲ 국내에서 처음으로 개최한 제1회 국제동양의학학술대회 참가한 각국 대표학자들이 당시 최규하 국무총리와 기념촬영을 했다.ⓒ국제동양의학회

미수를 넘긴 나이에도 영원한 현역 한의사

배원식 선생은 또 1956년에는 소장 한의학자 50여명을 모아 동방장학회를, 1960년에는 육영사업으로 동방장학회를 설립, 회장에 취임했고, 1968년에는 한의사들의 수장인 대한한의사협회 회장직을 연임했다.

또 1970년에는 한국 동양의학회를 조직, 회장에 피선됐으며, 이듬해 제1회 아세아동양의학학술대회를 주재, 일본. 태국. 홍콩. 싱가폴. 대만 등 세계 10여 개국에서 수 백 여명의 한의학자들이 참가하는 등 한국 한의학의 위상을 크게 제고시키며 국내 의학계의 조명을 받기도 했다.

이처럼 세계 한의계에서 마치 고아와도 같이 위상이 미미했던 한국 한의계를 세계 한의계의 지도적인 위치로 위상을 크게 제고시키고 ‘의림’지를 통해 한방문화를 계승 발전시키며 한의학을 국내에 머물지 않고 세계 속의 한의학으로 크게 도약시킨 배원식 선생은 한의사로서 미수(米壽)를 넘겨 작고하기 직전까지도 회현동 ‘배원식한의원’에서 환자를 진료하는 등 영원한 현역 한의사로 후배들의 귀감으로 남았다.

배원식 선생의 수제자로 배원식한의원 2대 원장인 이종안 원장은 “작고하시기 며칠 전까지도 환자를 진료하시고 진료 후에는 한의계를 위한 모임에 참석하시는 등 한의학과 한의계를 위해 왕성한 활동을 하셨다”며 “제자로서, 부원장으로서 배원식 선생님께 배우며 가까이 모실 수 있었던 것은 한의사가 아닌 개인적으로도 큰 영광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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