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추협 되짚기③] 한화갑 “DJ, 의장대행에 김상현 아닌 예춘호 낙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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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추협 되짚기③] 한화갑 “DJ, 의장대행에 김상현 아닌 예춘호 낙점”
  • 정세운 기자,윤진석 기자
  • 승인 2020.09.19 08: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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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갑 전 대표 (새천년민주당)
○ “김홍일 전갈, YS에 전했지만 김상현 등과 타협”
○ “DJ, 국민 통합 위해 박근혜 지도자로 키우려 해”
○ “포스트 노무현 설계 위해 한화갑 죽이기 한 것”
○ “文정부, 패거리 정치에 기반 해 장기집권 전략”
○ “영남 보수당 사람들이 호남 밀어줘야 국민화합”
○ “솔직히 나는 DJ의 정치적 기생충이었다고 생각”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세운 기자, 윤진석 기자]

한화갑 전 새천년민주당 대표는 동교동계 가신 그룹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권노갑 전 고문과 양갑으로 불렸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한화갑 전 새천년민주당 대표는 동교동계 가신 그룹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권노갑 전 고문과 양갑으로 불렸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주문한 커피는 함흥차사.
지난달 24일 서울 상암동 근처 커피숍.
원로는 따스한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재촉하듯 카운터 쪽을 보자,
“놔두세요. 독촉하면 안 좋아. 허허허.”

기다리는 동안 중절모를 벗고는

“염색하기 싫어서 안 했더니 사방에서 항의가 들어와.(웃음) 할 수 없이 염색을 했더니 머리 길이도 짧아졌어요. 모자를 쓰면 따스하고 좋아요. 예전엔 카메라가 하도 많이 쫓아와서 실수할까 봐 멀리했어요. 지금은 카메라가 필요해도 오지를 않아. 하하하…”

화통한 웃음소리에 허탈함이 담겼다.

민추협(민주화추진협의회) 일로 만난 우촌(牛村) 한화갑 전 새천년민주당 대표.

동교동계에서 그는 권노갑 전 고문과 함께 양갑(兩甲)으로 통했다. 실세의 한 축을 이뤘기 때문. DJ(김대중) 비서로 정계 입문해 14~17대 4선 국회의원, 새정치국민회의 원내총무, 새천년민주당 대표 등을 역임했다. '리틀 DJ' '포스트 DJ'로 불렸다. 유력 대선주자이던 시절을 지나 여든 두 살이 됐다. 현재는 한반도평화재단 이사장. 한 살 적은 김종인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의 광폭 행보에 비추면 아쉬움이 남아 있을 듯싶다.

커피가 왔다. 다시 인터뷰.

 

1. 민추협과 DJ 동교동계
“DJ, 참여하라 말라 안 했소”


한화갑 전 새천년민주당 대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민추협 참여를 반대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한화갑 전 새천년민주당 대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민추협 참여를 반대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YS(김영삼)와 DJ(김대중)계의 합작품인 민추협. 84년 태동 당시 동교동(DJ 계파)은 반쪽으로 나뉘었다. 김상현, 예춘호, 조연하, 김녹영, 박종률 등은 민추협에 참여했다. 가신 그룹이었던 권노갑, 한화갑, 김옥두 등은 불참했다. (나중엔 합류했지만) DJ가 초기 가담하는 것을 반대해 양쪽으로 갈라졌다는 후문이다.

배경을 놓고는 설왕설래가 있어왔다. “DJ가 독자 노선을 추구하려 했다” “해외 망명 때라 국내 사정에 어두웠다” “YS에 대한 견제 의식 때문이다”….

뭐가 맞을까. 지난번엔 참여한 쪽의 시각에서 되짚어봤다. 민추협 주역 고(故) 김상현 전 민주당 의원과의 과거 인터뷰 재구성을 통해서였다. 이번엔 그 반대다. 초창기 불참한 인사의 입장에서 들여다봤다. 한화갑 전 대표(이하 한화갑)의 시야에서다.

※ 인터뷰 당시의 느낌을 살려 억양 등 일부는 구어체를 살리는 방향으로 했다.

- DJ가 나중에는 민추협을 참여했습니다만 소극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았잖아요. 처음엔 동교동계의 참여를 반대했다는 얘기도 있던데요, 맞나요.

“아니오.”

고개를 젓는 한화갑.

"아는 건 아는 대로, 모르는 건 모르는 대로 답할 것이오.”

- 그럼 어떻게 된 건가요. 

“참여하라, 불참해라. 이런 건 없었어요. 다만 미국에서 DJ로부터 지령이 오길 우리 쪽 대표로 예춘호 선생을 세우라고 했어요. DJ는 김상현이 아닌 예춘호였어요.”

처음 알려진 일화였다.

DJ는 그 무렵 미국 워싱턴 DC에서 망명 중이었다. YS와 공동의장을 할 형편이 못 됐다. 이 때문에 84년 5월 18일 외교구락부에서의 민추협 결성 선언에 앞서 자신을 대신할 권한대행으로 예춘호를 앉히려 했다는 얘기였다. 민주화 투사이자 국회의원을 세 번 역임한 예춘호는 민추협 초대 부회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향년 94세의 일기로 지난 7월 23일 별세했다.

- 상황에 대해 좀 더 들려주십시오.

“우리가 예춘호 선생 집에서 회의를 하고 있는데 (DJ 장남) 김홍일 의원이 워싱턴DC에 가서 지령을 받고 온 거예요.  ‘아버지가 말이오….’  DJ 뜻을 YS 쪽에 전해줬는데 그 말을 안 듣고 ‘김상현‧조연하’ 쪽과 타협을 한 거예요.”

YS가 예춘호가 아닌 후농 김상현을 공동의장 권한대행으로 밀었다는 말이었다. 경험은 각자의 입장에서 달리 해석될 수 있다. 당사자가 아닌 이상 정확히 알기란 어렵다. 김상현은 민추협이 결성되기까지 동교동계의 참여를 이끈 결정적 주역이었다. YS와는 동교동계를 대신해 머리를 맞대왔다. 민추협을 구상한 정치적 동지의 관계였다. YS로서는 김상현을 배제하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 물론 뒤늦게 합류했다고 볼 수 있지만 가신 그룹들 쪽에서는 그런 이유 때문에 초반에 참여를 안 한 건가요. 처음부터 참여하면 좋았겠다고 후회하지는 않았나요.

“그런 거 없었어요. 우리는 어디까지나 DJ 사람들이니까. DJ 뜻에 의해 순응하는 사람들이니까. 우리로서는 그의 뜻을 따르지 않는 후농(김상현)을 인정할 수가 없었어요. 그 뒤 실질적으로 민추협 참여를 안 했고요.”

- 후농은 왜 그랬다고 보나요.

“자기가 동교동계를 대표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겠지요. 정치인이 그런 마음이 없으면 허수아비지. 허허.”

그러나 후농 없이 DJ의 민추협 참여도, 대통령으로의 영광도 없었을 거라는 가정이 나오곤 한다. 71년 YS가 40대 기수론을 처음 들고 나올 당시다. DJ는 나서지 않으려다, 후농의 설득 끝에 신민당 경선에 뛰어들었다. 그 뒤 DJ는 대선 후보가 됐다. 전국적 거물로 발돋움하는 계기였다.

반박하듯 재차 물었다.

- 후농이 DJ를 대통령 만들기 위해 정말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하잖아요.

“그럴 수도 있겠죠. 근데 DJ 다음엔 나다, 내가 지도자다, 이런 생각을 안 했다고 할 수도 없겠죠.”

 

2. 괘씸죄라는 이름
“감정은 공자왈 맹자왈이 아냐”


한화갑 전 새천년 민주당은 사람의 감정은 공자왈 맹자왈로 정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한화갑 전 새천년 민주당은 사람의 감정은 공자왈 맹자왈로 정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85년 2‧12 12대 총선을 앞두고
민추협 인사들을 중심으로 신민당이 창당됐다.
이때도 DJ는 동교동계 참여를 반대했다고 알려진다.

- 그렇다면 왜 신민당 참여도 하지 말라고 한 건가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추측건대 DJ로서는 정치의 힘으로 과연 민주화를 이룩할 수 있겠느냐, 회의를 가졌던 것 같아요. 야당인 민한당 후보까지 정보국에서 정해줄 때였잖아요. 5공 시절 민한당은 정권의 이중대 같았으니 말이죠. DJ는 늦더라도 국민이 주도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바랐던 것 같아요.”

다만 이 일로 동교동계 내에서는 낭패를 겪은 인물도 있다고 알려진다.

- 정대철 전 민주당 대표 경우 12대 총선 당시 신민당에 입당하고 싶었는데 미국에 있던 DJ가 민한당으로 나가라고 독려해 못 갔다고 하더라고요.

“글쎄요. 정대철 그이가 신민당 가서 활동하겠다는데 가지 말라고 할 이유가 있겠어요.”

하지만 정대철에 따르면 DJ 때문에 민한당 후보로 출마했다고 한다. 그런데 DJ 본인은 정작 귀국해서는 민추협 행을 택해 황당했다는 것. 종로로 나가 신민당 돌풍에 부딪쳐 낙선한 정대철로서는 배신감이 들었던 상황.

- 나중에 DJ가 정대철 전 대표한데 사과를 했다던데요. (정대철이 DJ에게 따지자 '자네한테 사과하네’ 했다는 전언이다.) 신민당을 만드는 데 앞장선 후농에게도 자신이 잘못 판단했다, 신민당이 이렇게 흥행할 줄 몰랐다며 사과했다고 합니다.

“모르겠어요. 우린(비서진) 그때 현역에서 정치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요. 후농이나 정대철 고문은 당시 현실 정치인이었고요. 자신의 정치적 생각을 갖고 움직이는 사람이니 우리와는 달랐겠지요. 근데 DJ가 사과했다는 건 내가 알지 못해요. 사실이라면 DJ로서는 아주 솔직하게 얘기한 거네요. 허허.”

- 네?

“DJ는 사과가 거의 없어요. 칭찬도 인색해요. 후농과 정대철 고문에게 사과했다는 것은…. 그들 말이니 그 말이 맞겠죠.”

또 궁금했다. 후농과 정대철이 97년 15대 대선을 앞두고 새정치국민회의 대선 후보 경선에서 ‘김상현 당권-정대철 대권’을 내세운 것과 관련해서다.

- 이 일로 동교동계에서 두 사람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DJ 승리를 위한 대의명분 차원의 행보였잖아요.

“글쎄요.”

선뜻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듯한 표정.

- 사실상 DJ가 유일한 당내 대권후보였던 만큼 그들이 경선에 나간 것은 흥행을 일으키려는 심산이 아니었나 싶은데요.

“그럴 수 있겠죠. 경쟁구도를 만들 심산일 수도 있겠죠. 다만 DJ 입장에서는 ‘내가 느그들을 키워줬는데 감히 나한테 도전을 해’ 이런 맘을 안 가질 수도 없는 거죠. 당연한 것 아니겠어요. 그리고요 사람의 감정은 절대 ‘공자왈 맹자왈’이 아니에요. 석가모니가 아니요. 사람이여.”

- 두 사람으로서는 억울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국민회의라는 게 DJ가 민주당을 쪼개고 만든 당이잖아요. 아무리해도 후농이나 정대철이 DJ를 이길 수 없는 구조란 말이죠. 현실적으로 본인들이 DJ를 누르고 대선후보가 된다는 생각은 못 했을 것 같은데요. 그러니 경선 바람을….

“그건 자기변명이고.”

- 뒤집어엎을 수도 있다, 생각했다고 보는지요.

“누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겠어요. 단지 우리 입장에서는 ‘저것들이 말이여 왜 우리가 하려는 것에 순종을 안 하냐’ 이런 식이었지. 솔직히 말하면. 허허허.”

14대 대선에서 YS 패한 뒤 정계은퇴 선언을 한 DJ는 영국 유학길에 오른 바 있다. 95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돌아와 대권 도전을 재차 선언했다. 뒤이어 표면적 후농의 지지를 받으며 당내 경선에 뛰어든 정대철을 누르고 본선에 올랐다. 이후 DJP(김대중+김종필)연대 등에 힘입어 97년 12월 끝내 숙원 했던 대통령에 당선되기에 이른다. 국민의정부 시대를 연 것이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 때부터 DJ의 대통령 만들기에 노력했던 후농은 장관 등 요직에 기용되지 못했다. 정대철 편에 선 것이 원인이라는 분석.

한마디로 괘씸죄가 적용됐다는 얘기였다. 정대철도 괘씸죄라는 표현으로 당시를 소회한 적이 있다. 몇개 월 전 <시사오늘>과의 통화에서 후농과의 일화를 들려준 대목에서다.  

“당시 경선에 나간 것은 정권교체의 대의를 위한 선택이었지만 그 일로 DJ 눈 밖에 났다.”

후농의 경우 따지고 보면 민추협 참여 때부터 괘씸죄가 따라다녔다고 봐야 한다. 후농 뿐 아니라 민추협에 참여했던 인사들은 동교동계 내에서 인정을 받지 못했다. 자연스레 소외 그룹이 형성됐다.

YS 상도동계의 적자인 김무성 전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 대표는 관련해 <시사오늘>과의 대화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후농하고, 조연하‧박종률 이런 분들은 민추협은 '해야 될 일이다'며 나섰다. 같은 동교동 쪽에서 은근 반대하고 방해해도 이분들은 나섰다. DJ 눈에 벗어나 굉장히들 고생을 했다. 박종률 의원 경우 민추협의 간사장을 했는데, 동교동에 밉보여서 상도동에서 같이 하다 5·18 묘지에 안장됐다.”  - 김무성 <시사오늘> 인터뷰 중-

 

3. 정치의 속성
“1% 오해하면 100% 없어지는 것”


한화갑 전 새천년민주당 대표는 김대중 전 대통령 비서로 정계에 입문했다. 그는 민추협 태동 당시 김 전 대통령의 뜻을 따르는데 충실해 처음에 불참한 쪽이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한화갑 전 새천년민주당 대표는 김대중 전 대통령 비서로 정계에 입문했다. 그는 민추협 태동 당시 김 전 대통령의 뜻을 따르는데 충실해 처음에 불참한 쪽이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얘기는 정치의 속성으로 이어졌다.

“정치는요, 오늘까지 99% 충성하고 99% 내 사람이어도요. 어떤 1%의 오해가 생기면 99%가 없어져버려요. DJ 입장에서는 71년도 대선 나갈 때 후농이 기여한 것은 사실이죠. 그러나 도중에 어려울 땐 후농이 배신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거요. 87 대선 때 YS 밀었지 않냐, 이 말이요. 물론 내 입장에서는 정치에 있어 배신이란 것은 성립이 안 된다고 보지만…”

87년 대선을 앞두고 DJ는 YS와의 단일화 약속을 깨고 신민당의 후신인 통일민주당을 탈당했다. 평화민주당(평민당)을 창당해 4자 필승론을 무기로 독자 출마한 것이다.

당시 후농은 DJ를 따라가지 않고 YS 곁에 남았다. 그 이유에 대해 과거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전한 바 있다.
 

“당시 나는 양김(YS, DJ)의 후보 단일화를 촉구하는 100만인 서명운동을 펼쳤습니다. 양김이 모두 출마하는 것은 노태우를 당선시키는 일이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평민당 창당에 반대했던 겁니다. 나는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눈물로 호소하며 평민당 창당을 막아보려 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정치는 후세가 평가할 겁니다. 국회의원이라도 한 번 더 하려면 평민당에 참여해야 했지만 지역주의에 편승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대의를 좇아 통일민주당에 남았습니다.” - 김상현 <시사오늘> 인터뷰 중-


어렵지만, 양심을 택했다는 말로도 풀이됐다.

- 후보단일화를 위한 우국충정의 선택이었다는….

“어찌 보면 자기변명 아니겠소. 왜냐면 후농은 동교동 사람이었지 YS 사람이 아니었잖소.”

일찍이 국회의원을 하며 DJ와는 동지적 관계로 정치를 하던 후농과 달리 비서진 그룹과의 생각은 갭이 있어 보였다.

다시 민추협 얘기로 돌아왔다.

- 민추협에 대한 성과, 역사적 의의는 뭐라고 보나요.

“민추협이 말이죠. 양김(김영삼, 김대중)이 힘을 합쳐서 국민 속에서 민주화 투쟁의 모체가 된 건 사실이에요. 학생들이 대학가에서 희생을 많이 당하고 독재와 싸웠다면 정치권 밖에서는 양김이 맞서 싸웠잖아요. 6‧10 항쟁도 말입니다. 학생들 호응도 있었지만 양순직, 예춘호 선생 등을 파견해 세실극장에서 기획하고… 그런 데서 DJ가 국민을 리드해온 거죠.”

- 당시의 공으로 볼 때 DJ보다 YS에 대해 높이 평가하기도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도망가지 않고 체제 안에서 저항해 싸웠잖아요. 목숨 건 단식투쟁으로 민추협, 신민당 결성, 2‧12 총선 승리, 6월 항쟁까지….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공으로 볼 때 DJ보다는 YS에 있다는 시각에 대해 어찌 보나요.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YS는 한 번도 감옥 간 적이 없어요. 닭장차(경찰차)에 실려 갔다고 자랑하지만.”

- YS도 감옥에 갔습니다. 박정희 군사정권 직후인 61년 내란 음모죄로 구속됐죠. 일명 백조그릴 사건입니다. 그 뒤 초산 테러도 당할 뻔했고요.

“박정희 정권의 주타깃은 DJ였어요.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었으니까.”

- DJ가 타깃이었던 것은 독재 정권에서 악용한 호남 프레임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또한 국민적 지지가 YS에 비해 떨어진 면도 있고요.

“그것도 있겠죠. 그런데 YS가 더 지지를 받은 건 그가 경상도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봐요. DJ가 호남이라는 이유로 더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면 YS는 그 반대였어요. 독재 정권이 YS에게 위해를 끼치면 경상도 여론이 가만히 안 있었으니까요. (사이) 아, 그런데 말요….”

오랫동안 몸에 밴 듯 상도동계와 동교동계 간 라이벌 의식이 엿보이던 순간 퍼뜩 한 일화가 생각난 모습.

“YS가 대통령 취임하고 내가 그분의 비서실장인 김덕룡(DR) 씨한테 그랬다고요. 내 중학교 동창인 전윤철(전 감사원장) 좀 잘 봐주라고요. YS가 이 말을 전해 듣고는 ‘한화갑이 그랬어? 신경써야지’ 했다네요. 상도동, 동교도 간 라이벌 의식도 있지만 함께 민주화 투쟁을 한 동지 의식이 크다는 걸 느끼는 순간이었죠. 내가 YS와 같은 대학(서울대 문리과대학) 나온 후배여서 잘 봐줬는지도 모르지요. 아무튼 YS가 그런 게 있더라고. 깜짝 놀랐죠.”

나름으로 YS에 대한 미담을 전하고 싶은 듯했다. 늦게나마 고마움을 표시한 것을 수도 있겠다. 한화갑 얘기 중 상도동계의 ‘김덕룡’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그에 대한 한 일화도 생각났다.

- 상도동 경조사에 김덕룡 전 비서실장은 YS를 대신한다는 생각으로 항상 간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김덕룡 비서실장이 말이요. 전라도 출신이잖아요. (YS 오른팔로 불린) 최형우, 김덕룡 씨 모두 한자리에 있는데, 딱 헤어질 때는 김덕룡 빼고 즈그들끼리 술을 먹었대요. 한 번은 내가 원내총무 할 땐데 김덕룡 씨 부인이 찾아온 거예요.”

김덕룡과 한화갑은 고향이 호남.

“아니 상도동의 그 쟁쟁한 분들이 있는데 즈그들이 해결도 안 해주고 나를 찾아왔을까 싶은 거예요.”

다시 정치의 쓴맛에 대한 정의가 내려졌다.

“정치는 말이요. 적하고는 언제든지 대화가 되지만 같은 족속끼리는 영원한 적이요. 권력 다툼이 있는 거여.”

 

4. YS와 DJ
"강력한 리더십의 한계”


한화갑 전 새천년민주당 대표는 동교동계가 상교동계보다 충성스럽다고 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한화갑 전 새천년민주당 대표는 동교동계가 상교동계보다 충성스럽다고 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허심탄회한 얘기들의 연장선.

- 상도동계와 동교동계의 차이는 뭔가요.

“동교동계가 훨씬 충성스럽지. 보스하고의 관계는 상도동계가 훨씬 부드럽고 말이요.”

- DJ 리더십을 본다면요.

“권위주의 리더십, 강력한 리더십이었죠. 어찌 보면 그때는 자신을 위해 전부 봉사하라는 리더십이었다고 봐요. ‘더불어 봉사하자’ ‘공존하자’ 리더십은 아니었어요. 오히려 그런 것은 노무현이 훨씬 더 앞서갔지. 같이 맞담배질하고 술 먹고….”

- YS, DJ가 상도동과 동교동계에서 자기 후계자를 내세웠으면 저평가 되지는 않았을 거라는 의견이 있는데 어떻게 보나요.

“그건 분명해요. 설사 대통령이 못 됐어도 그 세력은 이어갔을 거요. 근데 대통령도, 세력도 못 이어갔잖아요. 노무현 세력은 즈그들끼리 이어가고 있는데 말이죠. 지금까지 전부 즈그 패들하고 청와대 들어가고 말이요. 그러니까 노무현 세력들이 대를 이어나가는 거요. DJ는 우리가 그렇게 감옥살이하고 유신을 극복하면서 대통령 만들었지만 어디 다들 장관을 하거나 욕심을 내봤나요?”

DJ는 자신을 죽이려한 가해자도 용서한 화해의 정치인이다. 정적을 기용하는 너그러움을 보였다. 하지만 정작 측근들의 기용에는 인색했다. YS는 최형우 내무부 장관, 김덕룡 정무장관 등 자신의 최측근을 요직에 앉혔다. 반면 동교동계는 딱히 생각이 나지 않는다. 상도동계 정치인들은 최근까지도 김무성, 정병국 등 현역으로 많이 포진돼 있었다. 박재호도 건재하다. 동교동계는 설훈 의원이 그나마 현역인 정도.

“나도 장관 안 시켜준다고 원망한 적 없어요. 오히려 97년 대선 기간 우리(동교동계)가 성명 발표를 해버렸잖아요. DJ가 대통령에 당선돼도 청와대 안 가겠다. 내각도 안 가겠다…. 그나마 나는 DJ 정부 시절 잘 나갔잖아요. 국회의원도 하고 대표도 하고…. (그러면서도) 아무튼 강력한 스트롱 리더십은 당대에는 돋보일지 몰라도 후대는 없어.”

여러 감정의 파편들이 순서 없이 오가는 듯했다.

- 세월이 지나고 나서 보니까 강력한 리더십이 아니었으면 호남 대통령을 만들 수 있었을까 싶거든요.

“당시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지요. 시대적 요청에 의한 리더십일 수도 있고. 그런데 DJ 경우는 참모가 필요 없어요. 심부름을 시키면 한 사람을 시켜서 완결을 안 봐. 톡 톡 잘라서 부분 부분을 시켜.”

- 왜 그랬을까요.

“안전을 위해서.”

엄혹한 시기를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그러고 동교동에 들어오면 말이요. 어디에 갔는지 물어본 놈이 사쿠라(변절자)여. 서로들 말을 안 했어요.”

독재 정권 하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는 정치인들의 생활상이 가늠됐다. 터놓고 대화할만한 여유조차 허락되지 않는 시간들인 듯했다.

 

5. DJ와 한화갑
“구사일생 DJ, 대통령 될 거라 확신”


한화갑 전 새천년민주당 대표는 대학 졸업 후 지인을 통해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나게 됐다고 한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한화갑 전 새천년민주당 대표는 대학 졸업 후 지인을 통해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나게 됐다고 한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대화는 DJ와 한화갑의 일화로 넘어갔다. “어떻게 처음 만났나요.” 거슬러 올라가면 한화갑의 고향은 전남 신안군 우이도다. DJ 고향인 하의도와 멀지 않은 곳. 처음 만나게 된 것도 고향과 연이 있다. 한화갑이 졸업한 목포 동광 고등학교에서 교감으로 있던 지인은 DJ와는 목포상고 선후배 간이었다. 한 번은 지인이 서울로 상경해서는 “DJ를 만나러 가지 않겠느냐”며 물었다고 한다.

한화갑의 구술을 기록한 <월간조선>의 2014년 5월 기사에 따르면 63년 어느 날이었다. DJ는 목포 젊은이들의 우상이었다고 한다. 61년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에서 처음 당선된 뒤 5‧16 쿠데타로 등원의 꿈이 멀어진 적도 있었다. 그러나 다시 도전해 63년 목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기에 이른다. 연설도 잘하고, 대정부 질문도 날카로워 인기가 좋았단다.

DJ를 만나 자신에 대해 소개할 당시 한화갑은 서울대를 졸업한 후였다. 전공은 외교학이었다. 안 그래도 정치할 뜻을 품고 있던 차였다. 그 뒤로 DJ를 따라다녔다. 67년 7대 총선에서의 자원봉사부터 시작했다. 이후 공보와 외신 담당 등 비서진으로 들어간 경우다.

- 독재 정권 때니 고초도 많이 겪었지요.

“끌려가 많이 얻어맞고 등허리 디스크 수술도 하고 그랬죠.”

- 도중에 너무 힘들어 비서를 안 하고 싶다 등 후회한 적은 없나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DJ를 위해 나를 바치자는 생각이었으니까. DJ가 ‘너 필요 없어’ 쫓아 보내도 다리 붙들고 대통령 될 때까지 있겠습니다, 할 판이었어요. 왜냐면 나는 확신이 있었거든요. DJ는 반드시 대통령이 된다는 확신이 있었어요. 신념과도 같은 거였죠.”

-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단순해요. DJ는 네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어요. 6‧25 때, 71년 대선 끝나고, 72년 총선 때 교통사고, 이후 박정희 정권하에서의 납치. 처음엔 호텔에서 죽이려다 못 죽이자 배에 태워 죽이려 했잖아요. 전두환 정권에서는 내란 음모를 씌어 사형 선고까지…. 전쟁으로, 정치인으로, 민주화 운동으로 목숨이 위태로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살아났잖아요. 하나님이 DJ를 살려주신 것은 써먹을 일이 있어 그런다. 대통령이 돼서 좋은 정치해라. 그러니 절대로 안 죽는다….”

한화갑은 철칙으로 믿었다. 동교동계 내에서 “걱정 마라 대통령 된다”며 호언장담했다고 한다.

또 이런 일화도 있다.

“한 번은 DJ와 자동차를 같이 타고 민추협 모임에 갈 때였어요. 마포대교 건너 쌍둥이 빌딩을 돌아 좌회전하는 코스가 있어요. 그리로 가면 샛길이 나와요. 지나가는데 저쪽에서 택시가 무조건 내리질러 오더라고요. 운전하는 친구가 얼른 피했어요. DJ가 ‘큰일 날 뻔했다’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총재님은 하나님이 보호해 주십니다. 뭘 걱정하십니까.’ 아부하는 발언이기도 했지만 내 진심이었어.”

더 파고들어 속내에 대해 물었다.

- 대표께서는 동교동 비서시절에 학력이 너무 좋아 견제도 받았다면서요.

“나 스스로는 무시하고 살았지만 차별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DJ 대통령이 칭찬할 일 있으면 ‘이 사람 서울대학교 나왔다’ 그러고. 꾸짖을 일 있으면 ‘서울대학교 나온 사람이 저 모양’이라 그러고.(웃음)”

동교동계 비서진 중 서울대 출신은 한화갑뿐이었다. 오히려 그것이 한화갑을 미더워하지 못하는 이유가 됐다고 한다. 지식인이라 대가 약할 거라며 비밀 회담에서 배제되는 등 소외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DJ 역시 자신과 거리를 두는 느낌이었단다. 한 번은 DJ가 “일류대 나왔다고 재기만 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2류‧3류 대학 나온 사람들이 성실하게 일을 잘하더라” 했다고 한다.  “여기에도 일류대 나온 사람이 있구먼” 하고 말해 꼭 자신을 가리키는 듯해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  DJ도 학력 콤플렉스가 있었다고 보는지요.(DJ는 독학으로 공부했다.)

“아예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죠.”

 

6. 박근혜 키우기 프로젝트
“DJ, 국민 통합 위해 朴 키우려 해”


한화갑 전 새천년민주당 대표는 YS와 DJ 리더십은 강력한 카리스마라는 공통점이 있다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한화갑 전 새천년민주당 대표는 지역 차별을 없애는 것이 정치를 하게 된 이유라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화제를 돌렸다.

- 자료를 찾아보니 정치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게 지역차별 때문이라던데 맞나요.

“대학생 때 서울서 가정교사를 하려고 했어요. 전라도 사람이라 안 받아 주대요. 호남 차별 없애는 게 내 평생 과업이 된 계기였죠.”

- DJ도 ‘호남 불가론’으로 고생한 분인데요 실제 어느 정도였나요.

“DJ가 대통령에서 세 번 떨어졌잖아요. 국회에서 발언하고 그러면요 여야 모두 ‘진짜 인물이다’ 그래요. 근데 전부 하는 말이 ‘전라도 사람이라 안 된다’ 였어요. 호남 불가론이란 말이 그렇게 얘기가 돼 온 것이오.”

- 사실 호남 차별은 박정희 정권에서 만들었지 않습니까.

“만들었죠.”

- 근데 어떻게 지난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박정희 딸인) 박근혜 전 대통령을 지지하게 된 건지요.(18대 대선에서 한화갑은 한광옥‧김경재 등과 함께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를 지지한다고 선언한 바 있다.)

“그건 간단해요. 우리가 DJ 대통령을 통해 한을 풀어서 전라도 대통령을 만들었어요. 한번은 (박근혜가) 찾아와 나보고 도와달라고 하대요. 그래 좋아. 당신 봐줄 수 있어. 민주화도 됐고, DJ가 용서도 했다. 박정희 용서하고 전두환 사면 복권도 시켰는데 내가 감정 갖고 당신 미워할 이유 없어. 내 한 표 준다. 이렇게 된 거예요. 다만 지지한다는 말만 해줄 수 있다, 선거 캠프 들어가고 이런 건 못한다고 한 거죠”

- 나름 인정하는 면이 있어 지지한 것이 아닌가요.

“그렇죠. 당시는요. 박근혜 당선이 대세였어요. 더 큰 것은 우리가 용서했으니 여유가 있다는 걸 보여준 거였어요. 그리고 이걸 알아야 해요. 라종일 박사(DJ정부 때 국정원 1차장 역임)가 말이요. 그런 얘기를 해준 적이 있어요. DJ를 만났는데 박근혜를 도와주라 그러더래요. DJ는 박근혜를 지도자로 키울 생각이었어요.”

- 진짜요?

“여담이지만 98년 DJ가 대통령 취임하고 나서 내가 원내총무 할 때예요. 허주 김윤환 의원으로부터 만나자고 연락이 왔더라고. 세 번을 만났는데 그때마다 허주가 한 얘기를 DJ한테 전했어요.”

- 무슨 얘기들이 오갔나요.

“핵심은 그거였어. 5공 때 인사들도 정치하게 해주라. 우리도 당신 밀어줄게. 한마디로  DJ 당신의 힘이 돼줄 테니 전두환 정권 정치인들이 활동할 수 있게 해주라. 허주의 이 말을 전했더니 DJ가 그래요. ‘한 (원내)총무 말이여. 자네가 허주의 술수를 당해낼 수 있겠어?’ ‘나는 그 사람하고 협상한 게 아닙니다. 그 사람이 한 얘기를 대통령님께 그대로 전한 겁니다. 판단은 대통령님이 하십시오.’ 생각해보면 허주가 그 말을 전했던 것은 이유가 있어요. 포스트 DJ가 한화갑이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허주와 만난 98년에서 2년이 지난 어느 날.

“DJ가 어떤 결심을 하고 허주와 권노갑 고문을 부르게 돼요.”

- 어떤 결심인가요.

“‘박근혜를 키워야겠다. 대통령이 돼서도 국민 통합을 이룩할 수가 없다. 나의 최대 정적이었던 박정희의 딸을 정치 지도자로 키워낸다면 우리 국민들이 ‘아, DJ가 정말로 국민 통합을 하려는 구나', 알아줄 것이다. 그러면 정서적으로 영호남 통합, 국민 통합도 되지 않겠나.’ 이후 권노갑 고문이 지령 받으면 허주가 구체화해 (박근혜 키우기) 실행위도 만들었지요. 책임자는 이혜훈(전 의원) 시아버지인 울산의 김태호(전 내무부장관) 그 양반이었고요.

그런데 2001년인가 권노갑 고문에게 위기가 오고, 2002년 민주당에서는 대통령 후보 경선이 진행돼서 결실을 못 보게 돼요. 그런 얘기가 <1급 비밀, 그랜드 플랜>이란 책에 담겨 있어요. 김태호 전 장관의 보좌관을 했던 이태호 씨가 쓴 책이지요.”

- 꽤 놀라운 얘기지만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았네요.

“2011년 책을 썼는데 관심을 갖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나중에 이태호 씨가 책 쓴 이유를 나한테 말해줬어요.”

- 어떤 얘긴가요.

“‘DJ 그 말을 한 이유를 꼭 남기고 싶었다….’ ”

즉 영호남 국민 통합을 위해 박근혜를 지도자로 키우려 한 지도자로서의 진심을 기록해 알리고 싶었다는 말이었다.

“자신(이태호)은 ‘경남 함양 출신이고 부산서 고등학교를 나왔다’고 하대요. ‘김대중은 빨갱이’란 말만 들었대요. 그러다 박근혜 키우는 이런 얘기를 들으니 자기가 가장 존경한 왕이 세종대왕인데 그다음으로 국민을 걱정하는 대통령이 DJ구나, 생각하게 됐다는 거예요.”

 

7. 한화갑과 노무현
“포스트 DJ길, 박지원이 막아”


한화갑 전 새천년민주당 대표는 한번 비서면 영원한 비서로 낙인 찍히고 만다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한화갑 전 새천년민주당 대표는 한번 비서면 영원한 비서로 낙인 찍히고 만다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여러 호남 대망론 중 한화갑도 있었다.
그는 포스트 DJ로 불렸다. 그런데 왜 안 됐을까.

- 포스트 DJ가 못 된 결정적 이유는 뭐라고 보나요.

“내가 2002년도 대통령 경선 후보로 나왔을 때예요. ‘전라도 사람은 안 된다’ ‘한화갑이 후보가 되면 정권재창출을 못 한다’…. 박지원 비서실장이 DJ를 설득한 거예요. TV에 나와서 자랑하대요. 자신이 그렇게 했다고.”

- 왜 그랬을까요. 내부의 권력 다툼 때문인지요.

“내부에서야 치열하지만 그걸 얘기하는 건 못난 놈들이에요. 한화갑이가 미워서일 수도 있고, 자기가 볼 때 전라도 사람은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일 수도 있겠지.”

- 당시는 호남 필패론이 정서적으로 작용했던 때아닌가요. 유시민 노무현 재단 이사장도 15대 대선때 DJ 필패론 등을 우려했던 적이 있었고요.

“유시민 씨가 그런 게 있었어요. 전라도는 경상도와의 대결이 아니라, 전국이 호남을 혐오한다고…. 주장의 골자가 그랬던 적이 있었죠. 호남은 어렵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많았어요. 요즘도 이낙연 대표가 호남 출신이라는 이유로 영남 출신인 이재명 (경기도)지사한테 대권 경쟁에서 밀릴 거라고 그러잖아요. 친문에서 특히 더 그런 생각을 많이 할 수도 있겠죠.”

- 그런 정서가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대세론을 만든 걸까요.

“그렇겠죠. 경상도 사람이 유리하니 대선주자로 만들어야 한다….”

- DJ를 찾아가 지지를 호소했을 법도 한데요.

“찾아가고 그럴 것도 없었어요. 이미 DJ는 내가 아니라는 걸 규정지어버렸거든. 절대로 나를 점찍어 키워주지 않을 것이다. 내 생각이 그랬어요.”

- 왜였나요.

“…. 그때는 그랬어요.”

- 그럼 누구였나요.

“모르죠.”

뜸 들이다,

“그리고 말이요. 한번 비서면 영원한 비서로 낙인찍혀 버려요. 심지어 내가 당 대표 전당대회에 나가니까 박상천 전 법무부 장관이 어디 비서가 나가냐고 했어요. 내가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갔을 때 박지원 비서실장이 또 어디 비서가 나가냐고 하더군요. 자신은 비서 출신이 아니다 이거여. 허허허 참….”

쓴웃음이 흘러갔다.

“YS도 장택상 총리의 비서 출신이었는데 말이요.”

서울대 졸업 후 YS는 장택상 전 국무총리 비서로 정치를 시작했다.

- 역으로 보면 DJ 지지를 못 받은 건 한화갑 캠프의 전략 부재일 수 있는 것 아니냐. 이런 생각도 듭니다.

“그럴 수도 있죠. 근데 박지원 실장이 어떻게 했나. 내 주변의 선거 운동한 사람들한테 전화를 했대요. ‘한화갑이 아니다. 노무현이다’  ‘오늘부터 노무현을 밀어라’ ‘DJ 뜻이다’….”

- 어쩌면 정말로 DJ 의중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있던 게 아닐까요.

“그때 DJ는요 정권 재창출이 목표였어요.”

-무심이군요.

“(고개를 끄덕이며) 당선 가능성이 있으면 누구든지 밀 수 있었단 말이오. 그리고 DJ 성격이 그래요. 어제 욕하던 사람도 오늘 잘하면 그냥 받아줘요.”

- 권노갑 고문은 이인제 당시 후보였잖아요.

“처음엔 이인제 의원이었지만 DJ 뜻이 아닌데 계속 밀겠어요. 나중에 안 될 것 같아 철회했지요.”

우여곡절 끝에 2002년 새천년민주당 경선은 3파전이었다. 경선 결과 한화갑은 제주 등에서 1위를 했지만 전통 텃밭인 광주에서 노무현‧이인제 후보에 이어 3위에 그치고 만다. 호남발 노풍이 본격 시작됐다면 기대 이하의 저조한 성적표를 받은 한화갑으로서는 충격의 시간이었을 터다. 이후 한화갑은 ‘노무현 대선후보-한화갑 당 대표’ 체제로 잠시 있다, 얼마 안 있어 내려오게 된다.

- 왜 물러난 건가요.

“새 권력이 나왔는데 내 말이 먹혀들겠어요. 내 대표 비서실장까지 그쪽(노무현)에 줄 서러 가는 마당에…. 권력이 그런 거예요. 허허허.”

당시로서는 참담한 심정이었겠지만 이 역시 웃음으로 승화하는 듯했다. 어찌 됐든 당시 한화갑은 ‘노무현 세력이 당을 좌지우지한다’는 비판 등을 쏟아냈고 양 측은 감정의 골이 깊어지면서 오래가지 못했다.

- 노무현 참여 정부 말기인 2006년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어려움을 겪었잖아요. 어떻게 된 건가요.

“원래 노무현 대통령이 그랬어요. 대선후보 경선 자금은 조사 안 하겠다고. 그런데 나만 조사했어요. 왜 그랬느냐. 내가 판단할 땐 그래요. 그때만 하더라도 전라도에서 한화갑이만 없어지면 호남을 대표할만한 인물이 없다. 앞으로 전라도는 무시해도 된다. 그들은 ‘포스트 노무현’까지 설계하고 정리 작업을 한 거요.”

- ‘호남 인물 죽이기’란 말인가요.

“한화갑이 죽이기죠.”

 

8. 호남 대망론
“보수에서도 호남 대통령 나와야”


한화갑 전 새천년민주당 대표는 보수 야당에서도 호남 대통령이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한화갑 전 새천년민주당 대표는 보수 야당에서도 호남 대통령이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한화갑은 이후 정치 재기에 성공하지 못했다. 창당도 해봤고, 무소속 출마도 했지만 잇따라 실패했다. 그렇지만 지역 차별적 상황을 타파하려 했던 정치 입문의 소신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듯 보였다. 제2, 제3의 호남 대망론을 기다리는 눈치.

- 대표께서는 DJ 이후 호남 대통령이 나올 수 있다고 보는 쪽이지요.

“나올 수 있지요. 민주당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보수 야당에서도 길게 보면 호남 대통령이 나와야 해요. 전라도가 경상도 출신인 노무현‧문재인을 밀었듯 경상도에서도 전라도 출신을 전폭 밀어줘야 해요. 그래야 국민 화합이 돼요.”

- 보수 야당(국민의힘)에서도 가능하다고 보는 건가요?

“언젠가는 나올 수 있는 거예요. 예를 들면 (호남 출신의) 이정현 씨가 박근혜 정부여당 때 당 대표를 했잖아요. 순천에서 두 번이나 당선이 됐잖아요.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하는 거요. 내 영역이 아니라고 포기하면 영원히 발을 못 붙여요.”

- 요즘 호남이 선거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말들도 나옵니다.

“호남의 지지를 받으면 이겨요. 나는 문재인 정권이 180석(범여)을 얻은 것은 전부 전라도 표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호남 표는 호남만 있는 게 아니요. 수도권에서도 압도적이지만 전국별로도 그 수가 엄청나요. 옛날 평민당 때도 거제나 포항, 울산 등의 지역위원장이나 당원 해준 분들을 보면 호남이었어요.”

- 그분들이 다 문 정부를 지지한다는 거죠.

“근데 말이요. 전라도 사람들이 뒤집어지면 하루아침에 다 뒤집어져요.”

중요한 게 생각났는지.

“내가요, 이 말은 꼭 전하고 싶어. 어떤 일이든지 문제를 해결할 책임은 현재의 담당자야. 과거 누가 했느냐에 답이 있는 게 아니에요. 현재 책임자가 해결해야지. 과거 핑계를 댄다는 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거요. 안 그래요? 보세요. 지금 한 삼 년 지났죠. 부동산 정책만 스물두세 번이 바뀌었어요. 이런 정책 가지고 통치한 나라가 있어요. 말도 안 돼요.”

- 국민 통합이 실종돼간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노무현 후예들이 정치를 그렇게 끌고 간 거예요. 최대한 그 사람들이 머리를 쓴 전략이란 말이요. 선거는요. 지금과 같은 제도면 51%만 얻어도 천년만년 이겨요. 그러니 49%가 욕해도 이들을 버리는 거요. 노무현 세력이 이 전략을 쓰는 거요. 이해찬 씨가 20년 후에도 계속 집권하겠다고 한 게 바로 그거요. 내 패거리 정치를 하는 거예요. 지금 코로나 사태 등을 선포하면서 국가에서 비용 대고 하잖아요. 길게 보면 장기 집권을 위한 정권 차원의 투자가 아니겠어요.”

- 장기 집권이 가능하다고 보는지요.

“민주주의 위기라는 말이 많잖아요. 순간적으로 성공할지는 모르지만 길게 끌기는 어렵다고 봐요. 암흑 같던 유신 독재도 끝이 있었잖아요. 국론 분열. 이 사람들은 그런 걸 걱정하는 게 아니에요. (차기 대권도) 친문은 끝까지 친문을 내세울 거요.”

- 이낙연 대표가 어렵다는 말인가요. 옛날 동교동 사람들과 협력해 대권 구도를 유리하게 만들려는 행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내가 볼 땐 그게 이낙연의 사는 길이에요. 매사에 신중을 기하다보면 대응이 늦어요. 좌고우면하지 않는 건 좋지만 자칫 실기해 버려.  YS 스타일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과거에 YS 보면 용어도 간단하게 얘기하잖아요.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이런 말들이 얼마나 가슴을 때리느냐 말이요. 이낙연도 그런 순발력이 필요해요. (DJ 생각이 났는지) 우리 DJ는 논리가 길었어요. 첫째, 둘째, 셋째 이렇게 나와. 처음에 듣기야 듣지만 마지막 셋째만 기억하게 되지. 첫째, 둘째는 잊어버려.(웃음)”

- 민주당 내 DJ 정신이 있다고 보나요.

“DJ는 ‘남’이 됐다고 봐요. DJ때 공천 받아서 국회 입성하고 장관까지 지낸 사람들이 노무현 정권에도 있었어요. 하지만 전부 노무현 사람이 돼버린 거예요. 한명숙, 이해찬, 임채정 등 모두가 DJ 사람이었지만 노무현에 충성하고 했잖아요. 내가 예전에 어느 지역 당사를 갔는데 '노무현 사진'은 있는데 DJ 사진은 없는 거예요. 아마 더 가면 '문재인 사진'만 걸어놓고 말 거요.(중앙당사에는 DJ-노무현 두 대통령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다.)”

마무리 겸 이 말을 물었다.

- 지금도 DJ가 무오류 정치인이라고 생각하나요. (DJ는 정치 로드맵에 있어 불리한 여건 하에서도 유리한 구도를 만들 줄 알아 동교동계 안팎에서는 무오류 정치인으로 불렸다.)

“나는 그렇게 봐요. DJ는 자기 철학을 정립한 분이에요. 자아가 강한 정치 지도자였어요. 바위로 치면 그에게 와 부딪치는 파도는 물거품돼도 자신은 무너지지는 않는 사람…. DJ 생각은 무오류다. 옳은 생각을 하니까 무조건 따른다. 우리 비서실 생각이 그랬어요. (사이) 그래서 내가 정치 기생충이란 말을 써요. 솔직히 나는 DJ의 기생충이었어.”

- 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라고 있죠. 정치적으로 엄밀히 따지면  내가  '김대중의 기생충’이요.  DJ가 없으면 우리가 없는 거요. 모체가 없으면 영양분이 없잖소. 지금 생각해보니 그렇더라고. 기생충은 절대 정치 지도자가 못 돼요. 그니까 나는 정치 지도자가 아니었던 거요.

386이란 애들 있잖소. 유신 말기에는 박정희 독재와, 5공 때는 전두환 독재와 싸웠어요. 우리처럼 ‘이렇게 싸울까요, 저렇게 싸울까요’ DJ한테 물어보지 않았어. 오히려 DJ 쪽으로 몰릴까 봐 즈그들이 피하면서 학생 때부터 리더십을 발휘했지요. 전대협 경우 임종석, 이인영, 허인회 등 말이요. 독재와의 싸움을 리드했어요. 전략전술이 있던 애들이에요. 기생충이 아닌 정치 리더십이 있던 애들이지. 우리는 완전히 정치적 기생충이니까 DJ 생각을 따라간 거요. 내 생각을 반영한 게 아니었어요.”

그의 말을 통해 회환과 통찰 등이 뒤섞여 나왔다. 기생충에 빗대 무조건 추종했던 때를 돌아보는 듯했다.

하지만 한화갑도 그만의 청사진을 갖고 정치를 하려 했던 적이 있었다. 국민회의 원내대표, 새천년민주당 대표와 창당 등이 그에겐 포스트 DJ가 되고자 하는 도전의 정치사였다. 다만 성공했을 당시를 보니 그것은 자신의 입지전적인 발자취로 이뤄낸 결실이 아닌 DJ가 있어 가능했다는 것을 깨달아 그런 말(기생충)을 한 것이 아닌가 싶다. DJ 후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그림자 밟기에 지나지 않았구나. 그런 생각들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정치는 현실이기 때문에 내 밑천이 있어야 돼. 내 정치사상, 내 정책이 있어야 해요.”

본질적 폐부를 찌르는 말들이 스산한 가을바람처럼 휘감겨 왔다. 끝으로 이런 말들도 전해졌다. 'DJ는 동교동계인 우리들한테 YS에 대해 나쁜 말을 한 적이 없어요. YS에 대한 비판도 못하게 했어요’ ‘외모도 억양도 비슷해 리틀 DJ가 불렸지. 진짜 아들인 김홍일은 안 좋았겠지요(웃음)’ ‘민추협도 동교동‧상도동계 세대를 넘어 계승되려면 외연을 넓혀야 해요’ ‘후농은 참으로 발이 넓고 친화적이었어요. 그런 점이 나는 부러웠지’ …. 다시 만나면 막걸리를 마시자 했다. 또 어떤 숙성된 이야기들이 술과 함께 빚어질지 모르겠다.

담당업무 : 정치, 사회 전 분야를 다룹니다.
좌우명 : YS정신을 계승하자.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꿈은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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