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삶…1일 별세한 이인수 박사 [金亨錫 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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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삶…1일 별세한 이인수 박사 [金亨錫 시론]
  • 김형석 논설위원
  • 승인 2023.11.06 11: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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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 결정 받아들여 4·19 이후 이승만의 양자로”
“친부, ‘네 삶이 편치만은 않을 테지만 잘 모셔라’”
“이승만 대통령 명예 회복 위해 평생 노력”
“소설 ‘태백산맥’ 작가 조정래 고발하기도”
“4·19묘역 참배·사과로 ‘과제’ 마무리”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김형석 논설위원]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아들 이인수 박사가 지난 1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2세. 사진은 11월 2일 오후 서울 마포구 연세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이 박사의 빈소. ⓒ 연합뉴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아들 이인수 박사가 지난 1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2세. 사진은 11월 2일 오후 서울 마포구 연세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이 박사의 빈소. ⓒ 연합뉴스

지난 1일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 박사가 별세했다. 92세. 두 달 전인 9월 1일 서울 강북구 수유동에 있는 4·19 묘역의 유영봉안소를 참배하고 4·19 혁명 희생자와 유가족에게 사과했다. 그는 2011년 4월에도 참배하려다가 4·19 단체들이 “갑작스럽다”고 저지해 발길을 돌린 적이 있었다. 

이승만의 功은 알리고 過는 대신 사과하며… 

이인수 박사는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해 하와이에 머물던 86세 때 양자로 입적됐다. 그해 11월 전주 이씨 문중이 그에게 양자 입적을 권유했다. 1931년생인 이 박사가 서른이 채 안 됐을 때였다.

“대학 졸업자였으면 좋겠고 프란체스카 여사를 생각해 영어를 할 줄 알아야 하며, 미혼에 가정교육이 바른 집안이어야 한다”라는 문중의 조건에 이인수 씨가 적합했다고 한다.

경기도 양주군 초대 교육감이었던 이 박사의 친부도 문중의 권유를 받고 ‘어려운 자리라 네 삶이 편치만은 않을 것이지만 열심히 모시라’며 권유했다고 전해진다.

문중의 결정이고 친부의 동의도 있었다고는 하지만 20대 청년이 당시 온 나라에서 지탄받던 이승만의 양자로 들어가는 건 별로 내키지 않는 일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4·19 혁명 직후인 4월 28일에 그때까지 이승만의 양자였던 이강석(이기붕 전 부통령의 아들)이 생부 이기붕과 생모 박마리아를 살해하고 자살한 끔찍한 일도 있었다. 그런 뒤숭숭한 분위기에서 ‘멀쩡한’ 청년 이인수가 이강석의 뒤를 이어 이승만의 양아들로 입적하는 건 대단한 결심이 필요한 일이었다.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다니고 있었던 청년 이인수는 결국 문중의 결정을 받아들인다. 독일 유학의 꿈을 접고 쉽지만은 않은 그 길을 걷게 된다. 적지 않은 희생을 각오한 선택이었다.

이승만은 그 해 12월 인수 씨가 하와이에 도착하자 손을 잡고 등을 어루만지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며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일찍이 친자를 잃고 양아들 이강석마저 자살해, 대를 이을 후손을 아쉬워하던 이승만으로서는 반듯한 청년 이인수의 양아들 입적이 너무 반갑고 고마웠을 것이다.

이 박사는 모두 세 차례 하와이를 찾아 몇 달간씩 아버지 이승만을 모셨으며 1965년 7월 초에 마우나라니 요양병원으로 가서 7월 19일에 임종을 지켰다. 이승만에 대한 국내의 부정적 분위기가 여전히 심할 때였다.

이승만은 고국에 돌아와 마지막을 맞게 해달라고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정부에 전달했으나 꿈을 이루지 못 한 채 하와이에서 숨을 거뒀었다. 나라를 세운 초대 대통령에 대한 예우는 아니었다고 많은 이들이 뒤늦게 아쉬워했던 대목이다.

그러나 양부 이승만에 대한 이인수의 효도는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이후 50여 년간 이승만의 명예 회복을 위해 길고도 힘든 싸움을 계속해야 했다.

이승만 명예 회복을 위한 기나긴 싸움 

이 박사는 우선 4·19 혁명 희생자들과 화해를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지난 9월 드디어 63년 만에 4·19 민주묘지를 참배해 희생자들의 넋을 기릴 수 있게 되기까지 ‘4.19’에 대한 그의 사죄는 계속돼야만 했다.

92세의 노인이 된 이 박사는 그날 사과문에서 “오늘 저의 참배와 사과에 대해서 항상 국민을 사랑하셨던 아버님께서도 ‘참 잘하였노라’라며 기뻐하실 것”이라고 말했다. 그로서는 일생 동안 안고 온 숙제를 그날 마친 셈이었다.

뉴욕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명지대학교 법대 학장을 지내고 건국 60주년 기념사업 준비위원회 위원 등 직책도 맡아 일했지만 그 모든 일에 앞서 이승만의 명예 회복을 위한 작업은 그에게 일생 최대의 과업이 돼왔다.

1994년에 소설 ‘태백산맥’이 이적 표현물이라며 작가 조정래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했다. 같은 해 1월 방영된 KBS 1TV <다큐멘터리 극장> ‘대통령에 도전한다 최능진’ 내용이 “북한의 대남 전력과 궤를 같이 하고, 우리의 건국사를 왜곡·날조했으며 건국원훈에 대한 터무니없는 중상모략과 음해를 했다”며 KBS 홍두표 사장 등 3명을 이승만의 명예훼손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소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이승만의 명예를 훼손한 드라마에 대한 소송을 잇따라 제기했다.

대부분의 소송에서 바로 뜻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그의 노력 덕분에 많은 국민들이 이승만의 업적과 일부 왜곡된 사실에 관해 바로 알 수 있는 효과는 거둘 수 있었다. 그는 이 체제 안에 살면서 건국 대통령을 폄훼하는 세태가 안타깝다고 했다.

기회 있을 때마다 “그분의 공적은 독립운동은 물론 자유민주주의 노선 선택, 60만 국군 양성, 한미방위조약 체결 등 일일이 열거하기가 힘들 정도”라고 강조해왔다. ‘공구 과일(功九 過一)’이라는 학자의 평을 소개하기도 했다.

친부모한테도 막 대하는 요즘 세태에 비추어 우리를 숙연케 하는 이 박사의 진심 어린 일생의 발자취다.

정치권, 패싸움 그치고 긴 역사 보고 배울 때

세월이 지나면서 종북좌파를 제외한 우리 사회 전반에서 건국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당연히 이인수 박사의 끊임없고 헌신적인 노력도 한몫했다.

정치권 주변은 여전히 이념과 진영으로 나뉘어 반목하는 중이지만 한편에서는 진영을 초월해 화합의 전조를 보이는 일도 눈에 띄기 시작했다. 지난 3월엔 4·19혁명 인사 50여 명이 서울 동작동의 국립현충원을 찾아 이승만 묘역을 참배했다. 8월의 김대중 14주기 추도식에는 박정희·김영삼·노태우·노무현 전 대통령의 아들들도 함께했다.

이인수 박사의 별세 소식을 들으며, 여전히 진영 간 싸움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많은 정치인들이 역사의식만이라도 제대로 갖춰 ‘멀리 좀 내다봤으면’ 하는 꿈을 꿔봤다.

김형석(金亨錫) 논설위원은…

연합뉴스 지방1부, 사회부, 경제부, 주간부, 산업부, 전국부, 뉴미디어실 기자를 지냈다. 생활경제부장, 산업부장, 논설위원, 전략사업본부장 등을 역임했다. 

정년퇴직 후 경력으로 △2007년 말 창간한 신설 언론사 아주일보(현 아주경제) 편집총괄 전무 △광고대행사 KGT 회장 △물류회사 물류혁명 수석고문 △시설안전공단 사외이사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코바코) 사외이사 △중앙언론사 전·현직 경제분야 논설위원 모임 ‘시장경제포럼’ 창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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