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의 전쟁’은 진행 중 [金亨錫 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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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전쟁’은 진행 중 [金亨錫 시론]
  • 김형석 논설위원
  • 승인 2024.02.18 17: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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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건국전쟁’은 전쟁영웅 이승만 기록”
“공산권과 긴 전쟁 끝에 세운 대한민국”
“어설프게 알던 이승만을 확실하게 알려준 영화”
“잘못 알아 온 史實 뒤늦게라도 바로잡아줘 감사”
“간첩단 암약하는 현재도 ‘李의 전쟁’은 진행 중”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김형석 논설위원]

이승만 전 대통령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이 관객 60만명을 돌파했다. 18일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건국전쟁'은 전날까지 62만6천763명의 누적 관객을 기록했다. 사진은 이날 오전 서울 시내 한 영화관에 '건국전쟁' 포스터가 나오고 있다. ⓒ 연합뉴스
이승만 전 대통령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이 관객 60만명을 돌파했다. 18일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건국전쟁'은 전날까지 62만6763명의 누적 관객을 기록했다. 사진은 이날 오전 서울 시내 한 영화관에 '건국전쟁' 포스터가 나오고 있다. ⓒ 연합뉴스

그렇네…. 대한민국은 일본의 패전으로 인해 운 좋게 생겨난 나라가 아닌 게 맞다. 구소련과 중국을 등에 업은 김일성 일당과의 치열한 싸움 끝에 어렵게 세운 자유민주주의 국가다. 그 건국전쟁을 끈질기게 수행, 승리로 이끈 총사령관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었고. 

이 간단한 사실(史實)을 확실하게 깨닫는 데 수십 년이 걸렸으니 솔직히 부끄럽다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를 만든 김덕영 감독(59)은 지난 15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나 자신 이승만에 대해 너무 무지했고 ‘내가 우리 역사에 대해서 이렇게 몰랐구나’라는 통렬한 반성이 있었어요. 사실 이승만에 대한 거짓말을 만들어내고 고착화시키는 데 양적으로 기여한 게 우리 86세대들이에요”라고 고백했다. 
김 감독뿐만 아니라 필자를 포함, 많은 국민들의 고백이 돼야 마땅한 말이다. 

우리 함께 폄하해 온 국부(國父) 이승만

대부분의 사극은 재미는 있지만 역사를 왜곡하기 일쑤다. ‘다큐멘터리’라는 탈을 쓴 영상기록물들도 별로 신뢰할 만하지 않다. 이런저런 배경을 안고 왜곡되기 일쑤다. 한 예가 태종 이방원에 관한 TV 드라마들이다. 이방원의 캐릭터는 관련 드라마가 만들어질 때마다 작가와 제작진에 의해 제멋대로 미화 또는 폄훼되기 일쑤다. 드라마 시청자들은 ‘이방원의 실체’가 과연 어떤 쪽에 가까운 것인지 헷갈릴 수밖에 없다.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다큐멘터리’들도 각색이 심해 사실(史實)과 거리가 먼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역사를 바로 알기 위해서는, 재미는 없어도 역사학자들이 객관적 사실에 기초해 쓰고 전문적인 해석을 곁들여 내놓는 역사서를 읽는 게 정답이라는 말에 동의한다. ‘팩트’를 조작해 내는 사이비 역사학자들은 물론 제외하고. 

필자는 그래서 이 ‘건국전쟁’에 관한 생각도 애초엔 부정적이었다. 특정인을 치켜세우기 위한 냄새가 풀풀 나는 요즘의 좌편향적 다큐들과의 대척점에서 ‘극우의 시각에서 만든 편향된 다큐이겠거니…’라고 여겨 관람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날이면 날마다 뉴스를 타니 궁금증이 생겨 오래간만에 영화관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제까지 다큐 영화 제작자들에게 가져왔던 편견을 불식시켜 준 수작으로 나름 평가한다. 

이 영화에 대한 그런 호평은 앞에 밝혔듯이 그동안 나 자신이 이승만에 대해 가져온 편견과 오해를 이 영화가 상당 부분 바로잡아 줬다는 부끄러운 고백이기도 하다.  흔히 나이 든 세대는 이승만에 대해 비교적 긍정적이고 젊은 세대는 부정적이라고 편을 갈라놓는다. 그렇지 않다. 나이 든 세대가 겪어온 세월을 반추해 보면 이내 알 수 있는 일이다. 

‘이승만 할아버지’ 노래를 지겹게 부르며 자랐다. 정치깡패들의 으름장은 서민들의 일상생활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평양 점령 후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떨리는 목소리의 그의 연설을 지겹도록 반복해서 들어야 했다. 어린이들까지 사사오입 개헌의 부당함을 알게 됐다. 마침내 경무대로 몰려가던 청춘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해 사상자가 속출했고 시내에서는 정치깡패들에게 대학생들이 무차별 구타당했다. 그가 서거했을 때 국부에 걸맞은 국가적인 예우는 없었다. 가족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이승만에 대한 그런 기억은 아직도 나이 든 세대의 뇌리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젊은 세대보다 더 구체적으로 나쁜 기억을 많이 갖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이승만 폄훼에 앞장섰는지도 모른다. 국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가 가능하지 못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자유대한민국의 건국을 위해 온 생애를 바친 이승만의 그 큰 공은 까맣게 잊고 과(過)만 기억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세상 어느 나라에 국부를 이렇게 폄훼하고 홀대한 나라가 있을까. 영화는 남아공의 만델라, 인도의 간디 등을 예로 들며 상징물 하나 없는 우리의 반성문을 쓰고 있다. 그래서 이 다큐 영화는 ‘이승만이 건국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쟁영웅이었다’라는 그 한 가지를 일깨워준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이승만을 새로 보게 한 것들 

특별히 이 나라의 여성들은 이승만을 더더욱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일제 강점기 때 이승만은 하와이 각 섬을 돌아다니며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언급하고 호놀룰루에 여아들을 보내 기숙학교에 머물게 하도록 설득했다. 교육과 여성 지위 향상에 대한 그의 집념은 단순한 보여주기나 일과성이 아니었다. 건국과 동시에 즉각적으로 여성들에게 참정권을 부여, 신생국 대한민국 여성들이 스위스 등 유럽국가들보다도 먼저 참정권을 갖게 됐다. 그 가난한 나라 살림 속에서도 전체 예산의 20%가량을 교육분야에 할당, 오늘날 우리 국민의 높은 민도와 교육열의 바탕을 이루도록 했다. 그 시절 미국에서 향학열을 불태웠던 청년 이승만의 의지와 안목이 조국 국민을 그렇게 높여줬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어떻게 그에게 고마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영화가 소개한 프란체스코 여사의 영문 일기. 1950년 8월 13일 무초 미국대사가 이승만을 찾아와 대구가 적의 공격권에 들어갔으니, 정부를 제주도로 옮길 것을 건의했다. 무초가 한참 열을 올려 이야기하고 있을 때 이승만이 허리에 차고 있던 모젤 권총을 꺼내 들었다. “이 총으로 공산당이 내 앞까지 왔을 때 내 아내를 쏘고, 적을 죽이고 나머지 한 발로 나를 쏠 것이오. 절대 도망가지 않겠소”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김일성은 국군이 서울 수복을 하면서 전세가 불리해지자 즉각 중국으로 도망갔었다는 사실도 이 영화를 통해 처음 알게 됐다. 반면 이승만은 끝까지 국내에 남아있었다. 그런 김일성은 북한 인민들에 의해 영웅으로 추앙받았고, 그런 이승만은 한국민들에게 한강다리를 끊고 혼자 달아난 ’도망자’로 각인됐다. 공산주의자들의 날조가 작용했다고는 하지만, 이 무슨 역사의 아이러니인가. 

1960년 대통령직에서 하야한 직후 장개석 총통의 위로 전문을 받고 이승만은 이렇게 답했다. “나는 위로받을 필요가 없다. 불의에 궐기한 백만 학도가 있고 정신이 살아 있는 국민이 있으니 나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 나라의 미래는 밝다.”

이기붕 일파가 부정선거를 획책했고 4.19 혁명을 무력진압했다는 따위의 변명은 필요 없을 정도다. 이승만의 이 한마디로 그의 ‘무죄’와 한없는 애국심은 충분히 증명됐다. 

공무원시험 한국사 강사 전한길 씨는 소셜미디어에 관람평을 올려 “영화든, 책이든 민감한 것이 있으면 일단 보고 나서 이야기해라. 보지 않은 인간들은 입 다물어라”라고 썼다. “공을 더 크게 볼 것인지, 과를 더 크게 볼 것인지는 각자의 몫이 될 것”이라고도 했다. 아직까지 ‘이승만 지우기’에 열심인 북한이나 종북세력의 답을 기대할 수는 없겠으나 이 땅의 ‘좌파’들의 반응은 기다려볼 만하다.

2015년에 '트루먼, 진실한 대통령 진정한 리더십'이란 제목의 트루먼 평전을 쓴 한국일보 출신 언론인 정숭호 씨는 이 영화를 보며 남다른 관찰을 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1954년 미국을 국빈 방문한 이승만의 스틸 사진 중 트루먼과 함께 미주리주 인디펜던스 트루먼의 고향집 현관 앞에서 두 노인이 ‘서로 믿는 표정’으로 포즈를 잡고 서 있는 사진. 한국전 참전을 결정해 준 고마운 그 ‘리틀 빅 맨’과 끈끈한 우정을 쌓아온 이승만이 미국 방문길에 그의 고향집을 찾아간 기록이다. 

평전을 쓰기 위한 취재를 하느라, 사진 설명 없이도 그 집이 트루먼의 고향집인 것을 알아봤고 또 두 사람의 우애 깊이를 알 수 있었기에 ‘서로 믿는 표정’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고 정 씨는 밝혔다. 이렇게 영화의 후속으로 이런저런 새로운 사실 확인들이 잇따르고 있다. 영화에서 밝힌 ‘백범 김구가 북한의 남침을 예상했으며 그럼에도 불구, 이승만 정부에 협조하지 않았다’는 증언 및 기록(2015년 미국 외교안보 싱크탱크인 우드로윌슨센터 보고서) 등은 재점검과 함께 보다 입체적인 확인작업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안티 이승만’ 측의 반박을 기다려볼 만하다. 

한반도의 휴전선, 평화 보장 못 한다 

지난해 11월 1일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 씨가 타계했다. (본 칼럼란 2023년 11월 6일 자 ‘이런 삶…1일 별세한 이인수 박사’ 참조.) 이인수 씨는 생전에 4·19 혁명 희생자들과 화해를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여왔다. 타계 전에 63년 만에 가까스로 4·19 민주묘지를 참배할 수 있었다. 92세의 노인이 된 이 씨는 그날 사과문에서 “오늘 저의 참배와 사과에 대해서 항상 국민을 사랑하셨던 아버님께서도 ‘참 잘하였노라’라며 기뻐하실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 앞서 지난해 3월엔 4·19 혁명 인사 50여 명이 국립현충원을 찾아 이승만 묘역을 참배했다. 이승만대통령 기념재단은 기념관 모금액이 지난해 9월 모금 운동을 시작한 이후 5개월 만에 100억 원을 돌파했다고 밝혔다. ‘상식적인 국민들’ 사이에서는 이렇게 국부 이승만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는 모습이다. 

반면 북한과 종북세력들은 여전히 이승만 지우기를 지속하고 있으며 대규모 간첩단 활동도 여전하다. (본칼럼란 2023년 6월 4일 자 ‘총체적 난국, 헷갈리는 국민들’ 참조.) “경애하는 최고 영도자 김정은 동지 만세! 아름찬 투쟁의 역사 조선노동당 만세! 김일성·김정일 주의화 실현 투쟁 만세!” 검찰이 지난해 민주노총 관계자와 진보당 전 대표 등의 공소장에 적시한 내용 중 일부다. 검찰은 역대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 중 가장 많은 지령문과 보고문을 확보했다고 당시에 밝혔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이승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 그들은 이승만이 전쟁에서 패해 이 땅이 공산화되었기를 바랐고 여전히 그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도한 조선일보 지난 16일자 1면 머리기사의 제목이 눈길을 끌었다. 
‘휴전선 긋는다고 평화 오지 않는다’.
한반도의 휴전선 역시 평화를 보장해주지 못한다. 

이승만의 전쟁은 자유민주국가를 세우기 위한 ‘건국전쟁’에서 자유민주국가를 지키기 위한 ‘수호전쟁’으로 여전히 우리가 수행 중이다.   

김형석(金亨錫) 논설위원은…

연합뉴스 지방1부, 사회부, 경제부, 주간부, 산업부, 전국부, 뉴미디어실 기자를 지냈다. 생활경제부장, 산업부장, 논설위원, 전략사업본부장 등을 역임했다. 

정년퇴직 후 경력으로 △2007년 말 창간한 신설 언론사 아주일보(현 아주경제) 편집총괄 전무 △광고대행사 KGT 회장 △물류회사 물류혁명 수석고문 △시설안전공단 사외이사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코바코) 사외이사 △중앙언론사 전·현직 경제분야 논설위원 모임 ‘시장경제포럼’ 창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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