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와의 여행 …전영기 “은유와 여백의 정치, 그립다” [時代散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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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와의 여행 …전영기 “은유와 여백의 정치, 그립다” [時代散策]
  • 정세운 기자, 윤진석 기자
  • 승인 2024.01.06 06: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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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 ‘시사저널’ 편집인
“배고픈 민족에겐 자유가 없다고 한 JP
조국 근대화 통해 대한민국 5천만 국민 
배고픔에서 해방시킨 진짜 자유주의자”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정세운 기자, 윤진석 기자]

故 김종필(JP) 전 국무총리 전문기자 전영기 시사오늘 편집인이 여의도 공삼스튜디오에서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인터뷰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故 김종필(JP) 전 국무총리 회고록을 쓴 전영기 시사저널 편집인은 여의도 공삼스튜디오에서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인터뷰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지나간 일은 되돌릴 수 없지만 다가올 일은 쫓을 수 있다.’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만약에, 라는 말을 하게 된다. ‘그때 그랬다면 어떻게 달라졌을까?’ 흥망성쇠도, 성패와 승패의 주역들 모두 바뀌었을지 모른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 계승할 것과 청산할 것을 만들어 다음 페이지로 넘기는 것. 그것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몫이다. 

<시사오늘>은 그동안 역사적 증언을 모아왔다. 당대의 시사점을 오늘날에 반추하기 위해서다. 과오가 반복되지 않을 때 미래는 비로소 안개를 거둘 것이다. 오늘도 역사는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어느 시간 모퉁이에서 만난 한 사람 한 사건. ‘재발견’의 묘미가 있다. 시대산책이 현대사와 동행하는 이유다. 
<편집자 주>

 

시대산책 전영기 편 
 

  • JP, 박정희 권력 뺏을 생각 한 번도 가진 적 없어
  • ‘5‧16 쿠데타’ 쏘아붙인 YS에 JP인생 처음 움찔
  • DJP연합, 이회창 교만에 몽니부린 것도 있다고 봐
  • JP가 DJ 손잡지 않았다면 진보의 씨 말랐을 것
  • 김재규 10‧26 우발적 암살…JP 정보력 믿을만해 
  • JP 생전 마지막 청구동 자택서 부음기사 읽어줘
  • 여백과 함축의 정치인… JP는 시대의 로맨티스트
1961년 서울 출생,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동대학원 정치학 석사, 성균관대 언론학 박사, <중앙일보> 정치부장, 편집국장, 논설위원, JTBC 메인앵커, 현 시사저널 편집인․편집국장

 

이것은 저널리즘의 기록일 수 있다. 운정 김종필(JP) 전 국무총리 서거 이틀 전 그의 청구동 자택을 찾았다. 2018년 6월 21일이었다. 2층으로 올라갔다. 옛날 박정희 대통령 부부와 식사를 했던 곳이 눈에 들어왔다. 침대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박영옥 여사와 같이 있던 그 자리, 이제는 JP 홀로 누워있다. 내복을 입은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며칠째 음식을 넘기지 못했다. 

“총재님 제가 미리 부음을 써왔습니다.”
옆에는 김상윤 보좌관이 자리했다. 
“아마 살아계시면서 부음을 듣는 최초의 인물이 될 겁니다.”
“….”
JP는 말을 하지 못했다. 들을 수만 있었다. 동의하듯 숨소리가 상냥해졌다. 좀 더 바짝 다가갔다. 준비해둔 종이를 꺼내들었다. 빼곡하게 적힌 부음 기사 몇 천자를 읽어 내려갔다. JP가 어떻게 살았고, 유언처럼 남긴 말이 무엇이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한자 한자 천천히 새겨나갔다.

“아 프랑스, 조세핀, 밤하늘의 유성…!”

기억납니까. JP? 
한 달 전 자택을 찾았을 때 당신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라면을 먹다말고 대뜸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폐돼 있다가 세상을 떠난 나폴레옹이 남긴 최후의 말을 낭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아 프랑스, 조세핀, 밤하늘의 유성! 얼마나 낭만적이냐며 환희에 찬 눈으로 감탄할 때 화려한 불꽃의 폭죽들이 당신의 머리 위로 터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팡, 팡팡! 팡팡팡!

JP에게 부음 기사를 들려주면서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다정히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밖에는 초여름이 한창이었다. 연한 풀잎들은 거침없이 생명을 노래했다. 기사는 말미로 향해갔다. 

‘로맨티시스트 하면 JP를 빼놓을 수 없다.’

후반부 구절이다. JP는 평생 박영옥 여사만 사랑했다. 다른 정치인에게 볼 수 없는 면모였다. JP가 아내를 만난 것은 1950년대 전쟁 와중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소개로 만났다. 한눈에 반했다. 그때 준 편지가 ‘한 번, 단 한 번, 단 한 사람에게’라는 로버트 브라우닝이 쓴 시였다.  
 

신혼 시절의 김종필 전 총리와 박영옥 여사. 김 전 총리가 딸 에리씨를 안고 있다.ⓒ사진제공 : 전영기
신혼 시절의 김종필 전 총리와 박영옥 여사. 김 전 총리가 딸 에리씨를 안고 있다.ⓒ사진제공 : 전영기

 

“JP는 생전 유언에 따라 국립 현충원이 아닌 고향 부여에 묻히게 된다. 그는 ‘국무총리 두 번 했으니 국립묘지에 묻힐 수 있다고 하지만 나는 사랑하는 아내(부인 박영옥 여사, 2015년 별세)가 누워 있는 양지바른 고향 땅에 가겠다’고 했다. 명예의 전당 보다 인정(人情)의 터전을 택했다. 아내 박영옥과 순애보적이며 낭만적인 사랑은 널리 알려졌다. 전쟁 때 남자 장교는 여자 교사를 만나 ‘한 번, 단 한 번, 단 한 사람에게(once, only once, and for one only)’라고 쓴 로버트 브라우닝의 시로 프러포즈했다.”
- 2018. 6. 23. <중앙일보> 전영기의 JP 유고기사 중 - 

 

 

김종필 증언록의 힘  


전영기 <시사저널> 편집인은 지난달 14일 여의도 공삼스튜디오에서 진행된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JP에게 직접 유고기사를 들려주던 때를 털어놨다. 웃다가 울고 만감이 교차했다. 그는 자타공인 JP전문기자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JP를 주제로 언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중앙일보> 기자일 당시 자민련 출입을 계기로 30여 년 동안 마크맨으로 가족 같은 사이로 발전했다. JP가 처음 <중앙일보>를 통해 <김종필 증언록>을 연재할 결심을 하게 된 이유 중 하나도 그의 끈질긴 권유 끝에 이뤄졌다. 처음엔 “쓰면 뭐하나. 읽어줄 사람도 없는데….” 손사래를 쳤다. 뚜껑을 열어보니 정반대였다. 신문을 통해 연재되자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멀리 해외에서까지 책으로 엮어달라는 요청이 쇄도했다. 증언록에는 박정희 정권부터 삼김 시대까지 영욕의 현대사가 풍운아 JP 시각에서 드라마틱하게 전개됐다. 입체적 인물평과 더해져  장광을 이뤘다. 증언록팀은 2014년 10월부터 2015년 12월까지 집필 시간을 가졌다. 주 1~2회 청구동 자택에서 JP를 만나 꼼꼼히 증언록을 정리해나갔다. 

- <김종필 증언론>을 꼼꼼히 한두 번 정도 읽었는데….

“아니. 그걸 어떻게 구해서 다 읽었습니까.”

눈이 휘둥그레졌다.  

“구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 책으로 나왔는데. 

“책도 절판이 됐거든요.”

- 처음 출판했을 때부터 사놨습니다.

“특별한 분이네요. 이거 갖고 있는 사람 드물고요. 갖고 있더라도 누가 두 번이나 읽겠습니까(웃음).”

대화는 화기애애하게 시작됐다. <김종필 증언록>은 절판이 된 후 전자책 외에 재판이 따로 없다. 시중에 중고책을 구하는 것도 어려워졌다. 소장가치가 충분하다고 평가되는 만큼 시간이 갈수록 값어치도 올라가는 중이다. 희소가치를 높이려는 <중앙일보> 나름의 전략일 수도 있겠다싶었다.

- 김덕룡 민추협 이사장도 회고록을 준비하고 있는데 제가 그랬습니다. ‘JP 증언록이 재밌다. 최고다.’, ‘왜 최고냐.’, ‘현대사에 얽힌 굵직한 인물평들을 다 해 놨다.’ …

“아 네.”

-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JP 관점뿐이라 한계도 있겠지만, 과감하게 인물평을 할 수 있는 회고록이면 진짜 회고록이다. 암튼 회고록을 쓴다면 JP처럼 써 보라고 건의한 적이 있었는데 쉬운 일은 아니더라고요. 

“하하. 정말 특별한 일을 하고 있네요. 으하하하하.” 

쑥스러운지 웃음소리가 커져갔다. 

 

JP 국가주의인가 vs 아닌가 


故 김종필(JP) 전 국무총리 전문기자 전영기 시사오늘 편집인이 여의도 공삼스튜디오에서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인터뷰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故 김종필(JP) 전 국무총리 전문기자 전영기 시사저널 편집인이 여의도 공삼스튜디오에서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인터뷰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그동안 여러 회고록을 읽어보면….”

본격적인 질문으로 들어갔다.  

- 김영삼-김대중 회고록을 읽으면서는 이 둘은 민주주의자다, 이렇게 느꼈단 말이죠. JP 회고록(증언록이지만 편의상 회고록이라고 한다)은 ‘이분은 국가주의자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국가발전을 위해 국민이 참아줘야 한다는 논조가 읽혔는데요. 그런 것에 동의하는지 궁금합니다. 

“그분을 국가주의자로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회고록을 위한 인터뷰를 거의 백 번 이상 했지만 취재하면서 느낀 것은 철저한 자유주의자, 민주주의자였다는 겁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국가주의적 측면이 일부 있다고 보이지만 그분도 일방적 국가주의자라고 생각 들지 않거든요.”

- 그럼 뭔가요. 

“국가주의자란 국가를 위해 개인이 희생될 수 있다는 것 아닙니까. 북한이랑 베네수엘라 같은 곳이 국가주의적 지도자가 있는 곳이고 말입니다. 북한은 김 씨 일가 체제를 위해 민족주의를 앞세워 모든 국민이 희생되고 있습니다. 베네수엘라 차베스와 마도로는 모두가 평등해야 한다는 신사회주의를 내세워 전 인민을 빈곤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 국가주의를 어떻게 정의내릴 수 있을까요?

“역사적으로 보면 국가주의적 특징은 가난인 것 같습니다. 중국의 모택동 때를 보면, 혁명이라는 미명 아래 4000만 명이 죽어나갔습니다. 소련의 스탈린 체제는 70년간 유지되면서 당대에만 2000만 명이 목숨을 잃었어요. 공산주의적 빈민, 민족주의적 빈민, 평등적 빈민…. 다 빈민으로 귀결됩니다.” 

- 어쨌거나 국가주의는 개인의 희생이 동반됩니다. 박정희 정권 당시 유신은 산업화를 위해 개인의 인권은 접어두자는 분위기였습니다. JP가 삼선개헌을 반대하면서 유신을 찬성한 것 자체가 국가주의적 면모일 수 있지 않을까요?

“글쎄요. 저는 정치학적으로 국가주의는 그런 관점이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겁니다. 개인의 희생과 국가의 번영을 대립적으로 놓고 보려는 질문의 의도는 이해하지만 그런 접근법이 현실적이지 않다고 보는데요.”

그러면서 그는 말을 이어 나갔다.

“1960년대 5․16 혁명이 일어났을 때 정부 예산 중 60%는 미국이 우리한테 원조한 돈이었습니다. 1970년 가까이 될 때까지도 대부분 법전이 일본법을 번역한 수준이었을 정도로 국가적 형식만 갖춰졌지 먹고사는 문제, 인권 이런 종류의 것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빈곤했단 말입니다. 누가 누구를 희생시키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후 시장경제가 도입되고 배가 불러지기 시작한 시점이 1970년대 초반부터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누가 누구를 희생시켰냐. 오히려 되묻고 싶습니다. 김종필 총재가 늘 하는 말이 있습니다. ‘5000년 만에 이 민족을 배곯지 않게 하는 것이 내 인생의 목표다’라고 말입니다. 먹고사는 게 인권이고 자유다, 배고픈 민족에겐 자유가 없다. 입만 열면 하고 다니는 말이었습니다.”

아래는 관련 회고록.
 

“‘자유민주주의를 하려면 경제발전이 우선돼야 한다. 배고픈데 무슨 민주주의가 있고 자유가 있겠는가. 자유나 민주주의는 그것을 누릴 수 있는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것이다. 근대화의 첫 번째는 경제발전이다. 국민이 잘 살 수 있게 되면 민주화를 달성하고 그다음에 복지국가로 이행하면 된다.”
- JP 회고록 중-

 

JP의 철학은 국태민안이라고 전영기 편집인은 전했다. 사진은 JP가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할 당시 해외로 출국하기 전 카메라를 향해 웃고 있다.ⓒ연합뉴스
JP의 철학은 국태민안이라고 전영기 편집인은 전했다. 사진은 JP가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할 당시 해외로 출국하기 전 카메라를 향해 웃고 있다.ⓒ연합뉴스

“그분 인생의 가장 큰 부분은 혁명과 국태민안(國泰民安)이었습니다. 저 또한 1960년대 초등학교를 다녔고 70년대까지 고등학교를 다녔지만 그때 많이들 행복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 말을 하며 기자의 얼굴을 살폈다. 

“연배가 저와 비슷할 것 같기는 한데….”

- 제가 후배입니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일반 노동자, 농민들 등은 희망에 차 열심히 일해 돈 벌고 소득이 늘어나 행복해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가 누구를 희생시킨 것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 유신까지도 같은 평가입니까.
 
“물론 ‘박정희’에 초점을 맞춰보면 1972년 유신이 벌어지고 나서 8년여 동안은 폭압적이었던 것은 맞습니다. 국가를 위해 개인이 희생한 부분이 있고, 유신에 저항했던 우리 선배들 일부도 굉장히 힘들어했던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JP 인생에 초점을 맞추면 국민이 가난을 벗어나는 기나긴 여정, 거기에 헌신했던 사람입니다.”

- 우리나라가 처음엔 북한하고의 경제력이 엎치락뒤치락하다가, 월등한 차이로 잘 살게 된 원인이 뭔가 하고 생각하면 말이죠. 과연 박정희 전 대통령 공일까 싶습니다.

“그럼 뭡니까.”

- 그것보다는 오히려 이승만 전 대통령이 자본주의 체제를 선택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거죠. 또, 민주화가 됐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니냐. 이 두 가지 관점에서 생각하고 있는데 어떻게 봅니까. 

“민주화가 됐기 때문에 더 부자가 됐다? 민주화가 된 때는 이미 우린 부자였어요. 시장경제가 성숙하고 중산층이 두터운 상태가 1987년 그 시점입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근로자들이 자기 이익을 위해 움직이던 게 그때였습니다. 한국에서 자본주의의 긍정적 효곽가 널리 체감될 때는 1995년이었다고 봅니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한국의 주가 상승폭이 폭발적이었을 때였습니다. 민주화가 우리에게 삶의 질은 더 가져다 줬겠지만, 경제력을 더 상승시켰다는 것은 연관관계가 없다고 봅니다.”

하지만 비민주주의 국가보다 민주주의 국가로 전환하는 등 민주화 물결에 동참한 나라일수록 1인당 GDP 성장률이 더 높아진다는 연구결과가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는 분석이다. 1987 민주화가 된 이후 대한민국 경제는 패스트 팔로워(빠른 추격자) 시대로 진입했다. 선진화로의 고속 성장으로 빠르게 전환했다. 산업화와 민주화 모두에서 성공했기에 가능했다는 평가다.

“이승만 대통령에게 공이 있다는 것은 일정 맞는 점이 있다고 봅니다.”

이 점에는 동의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1950년 4월로 기억하는데 토지개혁을 했지요. 어마어마한 거잖습니까.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소작농이라는 개인에게 땅을 나눠준 것입니다. ‘이건 내 땅이야, 내 소유야, 내 사유물이야’, 효능감을 줬지요. 만일 그때 대지주로부터 토지를 유상몰수해 유상분배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북한의 김일성이 쳐들어왔을 때 ‘당신들을 해방시켜줄게’ 했다면 다 동조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게 요새 확립된 정서입니다. 시장경제의 씨앗이 되었다고 충분히 인정합니다. 그렇다면, 그 씨앗을 갖고 열배 스무 배 소득으로 확장시켜 GDP를 역전시킨 시점이 언제냐. ‘박정희’ 때를 빼면 설명할 길이 없는 겁니다.”

 

박정희의 디바이드 앤드 롤 


JP는 회고록 중간중간 박정희의 디바이드 앤드 롤(분열시켜 통치하는 방식)을 비판해놨다.  
 

“박 대통령은 이른바 분할해서 통치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권력의 요직에 앉은 사람들을 갈라놓고 서로 경쟁‧감시하게 만들어 오직 자신에게만 충성을 바치게 하는 용인술이다. 박 대통령이 김형욱에게 ‘JP가 왜 그렇게 당신을 미워하나. 당신을 갈아치우라고 하던데’라고 하면 김형욱은 ‘아니, 지가 뭔데 나를 미워해. 어디 두고 보자’라면서 나한테 앙심을 품게 된다. 박 대통령은 친위부대들로 하여금 나를 끊임없이 감시하고 견제하게 했다. 나는 옆에 있으면 신경 쓰이고 멀리 있으면 아쉬운 존재였다. 내 몸은 진작부터 이상 신호를 보여왔다. 쌓이는 격무와 이런저런 스트레스가 겹쳐 병은 깊어갔다.”
- JP 회고록 중-


- 그것에 지쳐서 총리까지 사퇴했다는데 통치술에 문제가 있었다고 본 것인지, 어떻게 봅니까. (1974년 12월 27일 JP는 병이 깊어졌다고 호소하며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JP 입장에선 문제가 있었고 박정희 입장에서는 통치기술이었겠죠.”

- 가치적 측면에선 어떤 쪽에 더 무게를 둡니까. 

“정치세력 관점에서는 TK파, 비TK파 등 지역을 분할해서 나누는 것이 별로 좋은 것은 아니죠.”

TK파로는 경북 달성 출신의 쌍용그룹 창업자인 김성곤을 비롯해 백남억‧길재호‧김진만 등이 있었다. 1965년 말부터 결성된 이들 4인 체제는 공화당의 재정과 공천권을 좌지우지하는 실세그룹으로 불렸다. 

“그 과정에서 JP란 사람을 봐요. 충청도 사람이기 때문에 TK에 밀리고, 5‧16의 기획자였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점점 위협을 느끼니까 어떤 형태로든 치게 되어 있는 겁니다. 청구동 집 앞이 150평, 200평 정도 되는데 초소를 네 군데나 박아놓고 중앙정보부를 상주시켜 감시하니 얼마나 고통스럽겠어요.”

어느 날은 아무 일 없는 듯 대통령 부부가 찾아오기도 했다. 

“박영옥 여사가 박 대통령 조카잖아요. 2층에서 와인 마시고, 그럼 또 그날은 좋아. 하지만 다음날 다시 핍박받는 일이 벌어지는 거죠. JP로서는 사실 끔찍했어요.”

중앙정보부장이던 김형욱은 JP를 만나러 오는 사람들의 신분을 일일이 확인하고 조사했다. JP는 회고록에서 “백주대낮에 지옥이 따로 없었다”며 몸서리쳤다.
 
“2인자가 반드시 당해야 할 것은 아니지만 거의 모든 2인자가 받는 고통이죠. 어찌 보면 힘과 힘이 부딪치는 권력 세계에서는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을 거라고 얘기하고 싶네요. 그리고 또, 박정희 대통령의 디바이드 앤드 롤이라는 게 부정적인 것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내각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을 모아놓고선 국무회의 할 때 서로 토론을 붙이잖아요. 경제쪽, 정무쪽에서 치열하게 물어뜯을 정도로 입장 차이가 붙는단 말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아주 좋은 안이 도출되는 것이죠. 박정희 대통령은 생각이상으로 정책을 결정할 때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수용했어요. 정책적 관점에서는 디바이드 앤드 롤이 아주 좋다고 생각해요. 그게 없는 지금이 문제죠.” 
 

JP는 박정희의 분열 통치술인 디바이드 앤드 롤에 대해 비판적 시각이지만 전 편집인은 지도자 정책적 관점에서는 평가가 또 다르다는 입장이다.ⓒ연합뉴스
JP는 박정희의 분열 통치술인 디바이드 앤드 롤에 대해 비판적 시각이지만 전 편집인은 지도자 정책적 관점에서는 평가가 또 다르다는 입장이다.ⓒ연합뉴스

- 또 의문점이 드는 것이 JP는 디바이드 앤드 롤을 하면서 김성곤‧김형욱‧이후락‧차지철‧박정규 등 박정희의 측근들에 대한 인물평을 쭉 해놨잖아요. 근데 이 사람들에 대해 JP가 평가한 인간적 면모는 제로수준에 가깝더라고요. 김형욱은 골프 내기 치다가 돈 주기 싫어서 도망가기 일쑤고, 박종규는 JP 덕을 입었던 사람인데도 연행하려고 일부러 바둑 두자고 시간 끌고…. 

“저야 JP를 잘 알지만 김형욱은 만나본 적 없고 박종규도 마찬가지죠. 한 사람 얘기만 들은 것은 한계가 있죠. 근데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JP는 좋은 가정환경, 좋은 교육에 서울대 사범대학 출신이잖아요. 편안한 인간관계에 명민하고 사람이 관대해요. 결단력도 있고요. 저는 그렇게 봤어요. 그쪽만 봤던 한계는 있지만 수평으로 비교하자면 아마 JP란 사람이 제일 나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JP 말속에는 과장도 있어요. 자기가 느낀 것을 얘기하는 거니까.”

- 그럼 결국 박정희 대통령은 이런 수준 이하의 사람들을 측근으로 두고 통치를 했다는 건가. 역설적으로 물어보고 싶단 말이죠. 

“예컨대 박종규는 박종규대로 1974년 8‧15 저격 사건 당시 제일 먼저 몸을 굴려 막잖아요. 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시긴 했지만 자기 몸을 던지려는 충성심은 대단하다고 봅니다. 박정희 대통령 입장에서는 그 같은 행동을 JP한테는 기대하기 어려웠을지 모르죠. 김형욱은 한국 돈을 들고 해외로 튀는 것도 모자라 미국 국회의원들한테 대한민국은 보호할 가치도 없는 나라인양 만들어버렸어요. 카터가 미군을 철수하려는 계획을 세우게 한 원인도 제공했고 말이죠.”

김형욱은 3선개헌 뒤 중앙정보부장직에서 물러나게 되자 反박정희로 돌아섰다. 

“하지만 박 대통령 측근으로 있을 때는 물불 안 가렸어요. JP한테 그런 것을 하라고 하면 하겠습니까. 안 하거든요. 일단 대들잖아요. 통치자 입장에서는 사냥개도 필요하고 애완견도 필요하죠. 근데 이 개는 가끔 짖기도 한단 말이야.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필요로 했다는 점에서 박정희로서는 그럴 수 있지요. 옳다, 아니다를 떠나서 말이죠.”

- 박정희가 견제를 많이 했잖습니까. 

“JP를 무지하게 많이 경계했죠.”

- JP도 국민복지위원회 이런 것 만들어서 실질적으로 차기를 노린 흔적들이 보이긴 했습니다. 그래서 견제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도 합니다만.

“제가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겠습니까마는 재밌는 것은 JP가 대통령 권력을 쟁취하겠다고 탐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권력자 입장에서는 작은 움직임이라도 보이면 찬탈의 위협으로 느꼈을 수 있습니다. 1인 권력이 강하면 그 같은 것이 더 심해질 수 있겠지요.”

국민복지회 사건은 1968년 일어났다. JP는 회고록에서 국민복지회사건은 박정희의 6인방(김성곤‧백남억‧김진만‧길재호‧이후락‧김형욱)그룹 중 특히 김형욱의 음모와 강압으로 이뤄진 일이라고 규정했다. 자신(JP)의 측근인 김용태 의원이 1971년 대통령 선거에 JP를 추대하기 위해 국민복지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3선개헌에 반대하는 시국판단서에 서명을 했다는 내용인데 JP는 “복지회니 뭐니 하는 것을 들은 적도 없다. 시국판단서라는 존재 자체를 알지 못한다”고 펄쩍 뛰었다.

박정희로부터 차기 권력을 준비한다는 의심을 받고 6인방으로부터는 견제와 감시가 심해졌다. 참다못해 JP가 박정희를 찾아갔다. “각하, 제가 나세르입니까?” 격정토로를 쏟아냈다. 가말 압델 나세르는 중령 때 무혈쿠데타로 16년간이나 이집트 권좌를 지켰던 인물이다. 권력의 속성에 염증을 느낀 JP는 1968년 5월 30일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이듬해 실시된 삼선개헌에 대해서는 처음엔 반대 입장을 내비쳤다. 그러나 박정희의 설득 끝에 찬성 쪽으로 다시 돌아섰다. 혈맹관계이던 둘은 거리를 유지해도 결정적일 때는 한배를 타는 관계였다고 볼 수 있다.   

“1961년 혁명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박정희’는 JP가 무슨 짓을 해도 따라갔어요. 자신이 안 선다며 군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을 때도 대통령의 어깨를 두드리며 혁명을 해야 한다면서 끌고 갔던 게 JP예요. 1963년 민정이양이 되고, 65년 한일수교를 타결할 때도 박 대통령은 말하자면 JP를 굉장히 존중했어요. 한일수교협상은 JP가 굉장히 목숨 걸고 한 것이거든요.”
 

1961년 5.16혁명 직후 모습. 앞줄 왼쪽에서 두번 째가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그 뒤 양복입은 이가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사진제공 : 전영기
1961년 5.16혁명 직후 모습. 앞줄 왼쪽에서 두번 째가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그 뒤 양복입은 이가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사진제공 : 전영기

혁명 초기만 해도 리드한 쪽은 JP였다고 전 편집인은 설명했다. JP는 처음에 어떤 점에서 박정희를 지도자로 보고 따랐던 것일까.   

“JP가 볼 때 박 대통령은 5000년 만에 배고픈 민족을 구하기 위해 여러 일을 해야 함에 있어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고 봐요.”

그가 박정희에 대해 처음 매력을 느꼈던 때를 복기하면  1950년 전후로 돌아간다. 둘은 1949년 6월 처음 만났다. 박정희가 작전정보실장으로 있고, JP는 육군본부 정보국 북한과장을 맡고 있었다. 박정희에 대한 첫인상은 키 작고 얼굴이 새까맣다는 거였다. 남로당 이력으로 사형선고까지 받았다가 백선엽 장군의 선처로 간신히 풀려나 문관으로 강제 예편돼 근무하고 있다는 소식이 나돌던 때였다.

“카리스마라고나 할까. 처음엔 박정희 대통령의 과묵함, 그런 것에 끌렸던 것 같아요. 결정적인 것은 6‧25 나기 전 장교들을 다 모아놓고 북한이 남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박정희가 쭉 설명하는데 앞뒤가 논리 정연해 설득력이 있었다는 것이죠.”

6‧25 남침 6개월 전이었다. 박정희는 “여러 걱정스러운 징후가 보이고 있다”며 JP 등과 북한이 1950년 3월 또는 6월에 침략해올 수 있다는 내용의 연말종합적정 판단서를 작성했다. 같이 준비하면서 느낀 박정희 모습에 대해 JP는 머리가 조직적이고 정밀하다고 평한 바 있다. 

“박정희의 통찰력과 예민한 지성, 예견력, 정밀함에 반한 것이었죠. 실제 6월 25일 새벽 3시 북한의 공격이 시작됐잖아요. JP가 전날 24일 불길한 예감에 당직을 교체했는데 올 것이 온 것입니다.”
 

故 김종필(JP) 전 국무총리 전문기자 전영기 시사오늘 편집인이 여의도 공삼스튜디오에서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인터뷰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故 김종필(JP) 전 국무총리 전문기자 전영기 시사저널 편집인이 여의도 공삼스튜디오에서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인터뷰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 JP 회고록을 읽다보면 5‧16을 일으키게 된 이유를 말할 때 부패한 군을 정화하기 위한 정군운동을 얘기하는데요. 정작 본인의 정군운동은 후하게 평가하면서 1980년 당시 박찬종‧오유방‧이태섭 등 소장파가 일으켰던 정풍운동에 대해서는 나라가 이렇게 어지러운데 당을 해치고 있다며 폄훼하더라고요. 

“….”

잠자코 듣고 있었다. 

- 또 모순인 게 5‧16 때는 4‧19 부정선거의 군 부재자 투표 때문에 들고일어났다고 했으면서 사실 박정희 정권 때도 군 부재자 투표 부정 논란이 많았잖아요. 박정희 대통령의 TK 지역주의를 호되게 비판하는 것도 그래요. 스스로는 지역구도 분할 속에서 자민련을 만들어 충청 맹주를 했습니다. 회고록을 읽다 보니 이 분이 너무 자기중심적이다, 내로남불 아니냐. 그런 느낌을 받았단 말이죠. 

“인간이 다 자기중심적이죠.”

쿨하게 답해왔다. 

“그거 갖고 너무 비난하지 마세요. 아마 다들 마찬가질 걸요.”

본인은 그렇지 않으냐는 듯 기자를 응시했다. 

“저야 JP를 옹호하려는 마음이 왜 없겠어요. 그분이랑 30년을 같이 있었는데…. 회고록을 쓰면서 너무 가까워졌고…. 사실 가족 같은 사람이니까.”

이렇게 운을 떼면서 다음 말로 이어갔다. 

“하지만 춘추필법(春秋筆法)을 유지해야 하는 기자로서 보면 JP의 이중성이죠. 내로남불 맞죠. 정풍운동이 일어났던 1979년은 혁명가 JP에서 노회한 JP로 바뀔 때거든요.”

JP는 회고록에서 10‧26이후 공화당은 위태로웠다고 소회했다. 신군부에 줄을 대려는 쪽과 고립돼가는 JP는 물론 정풍운동까지 더해 어수선했다. 박찬종 등 정풍파는 깨끗하지 못한 인물은 당직에서 배제해달라는 결의문을 촉구했다. 당 총재이던 JP는 차츰 이들의 순수성을 의심했다. 1980년 1월 31일 부산 강연에서는 정풍파를 겨냥해 “집안 식구 사이에 일어난 일이나 부부싸움을 이웃에 가서 고해바치는 것과 같다”며 쓴소리를 퍼부었다. 

“당 총재된 지 한 달밖에 안 됐는데 나보고 물러나란 말이냐. 환경의 압박, 강도를 느낄 수 있지요. 누구나 약점, 이중성, 내로남불이 있지 않을까요. 그렇지만 비난할 것은 아니다, 왜냐면 상대적이니까. 적어도 JP는 다른 사람들의 내로남불 보단 비교적 적다. 나는 이렇게 봅니다.”

 

서울의 봄 전후의 쟁점들 


요즘 12‧12를 다룬 영화 <서울의 봄>이 화제다. 1979년 12월 12일 군사 반란이 일어났다.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가 일으킨 쿠데타였다. 하나회는 전두환이 박정희 정권의 비호를 받으며 만든 군 내 사조직과 같다. 전두환‧노태우를 중심으로 육사 11기들이 주축이 돼 만들었다. 윤필용 사건으로 전두환이 제거될 위기에 처했던 기간을 제외하면 군 수뇌부도 건드리기 어려울 정도로 세를 확장해나가는 편이었다. JP는 회고록에서 박정희는 하나회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알면서도 묵인했다”고 기억했다. “하나회가 해로운 조직은 아니며 언젠가는 자신을 뒷받침할 세력이 되겠지 하는 게 박 대통령의 생각이었다”고 술회했다. 

- 하나회는 군 엘리트 조직이었습니다. 통수권자 공백이 생기면서 집권의 기회가 왔다고 볼 수 있잖아요. 전두환 집권은 불가피했다, 역사의 필연이 아니었을까 하는 시각도 있던데 어떻게 봅니까. 

“역사를 필연이라고 보는 것은 어떻게 보면 무책임할 수 있지요.”

그는 이 점부터 지적했다. 

“12‧12때 전두환이 정승화를 잡아넣고 사후승인을 받잖습니까.”

10‧26 이후 정국은 안개국면이었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후 과도정부의 대통령은 최규하 총리가, 비상계엄사령관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맡고 있었다.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이던 전두환은 박정희 시해사건을 수사하며 김재규의 단독 범행이라고 규정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정승화와 전두환 세력 간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전두환은 박정희가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만찬을 하던 10‧26 그날 별채에 정승화가 있었다는 것에 의심의 눈초리를 하고 있었다. 김재규의 저격 사실을 진짜 몰랐는지, 육본으로 이동한 뒤 왜 신속하게 김재규를 붙잡지 않았는지 등에 대해 의문을 보내던 중이었다. 정승화는 전두환을 견제하고자 그와 껄끄러운 관계인 장태완 소장을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했다. JP는 회고록에서 당시에 대해 “전두환을 견제하기 위해 장태완을 중용했다는 신군부의 불만이 공화당에도 들려왔다. 불길한 기운이 느껴졌다”고 기억했다. 
 

“12월 12일 저녁 나는 서울시청 앞 플라자호텔 중식당에서 공화당 당직자, 의원들과 저녁을 먹고 있었다. 당 총재 취임 이후 각 상임위원회 소속 의원들과 돌아가며 만나는 자리였다. 한참 얘기를 나누는 중에 남산 너머 한남동 쪽에서 연달아 총소리가 났다는 정보를 접했다. 국회 업무와 관련해 옆방에 대기하고 있었던 손달용 치안본부장(현재 경찰청장)이 갑자기 호출을 받고 나가면서 알려준 내용이었다. 그렇잖아도 10‧26 이후 비상계엄이 지속되면서 내심 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걱정스러웠다.”
-JP 회고록 중-


이런 맥락 속에서 무력으로 반란을 일으킨 전두환 세력은 정승화부터 체포하기 위해 최규하를 찾아갔다.

“만약 그때 최규하 대통령이 사인을 안 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됐을까요?”

전 편집인이 물어왔다. 

- 안 할 수가 있습니까?

“인간의 자유의지란 말을 얘기하고 싶습니다. (기자를 향해) 그 자리에 발행인이 있었다면, 내가 있었다면, 노재현 국방장관이 있었다면, 장태완 같은 사람이 있었다면…. 열에 두 사람이 거절했다면 또 다른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거죠. 힘으로 움직이는 세상에서는 그런 것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은 것은 알겠어요. 그러나 세상이라는 것은 힘과 힘 사이에 빈공간이 있거든요. JP는 그 공간을 중시했던 사람이에요. 인간적인 약점이 될 수 있겠지만.”

- 서울의 봄 당시 전두환의 행적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합니까. 

“전두환이 악마가 되고 있는데, 역사 속에서 특정인을 악마화 시키는 것은 배우지 않겠다는 태도라고 봅니다. 배워야지요.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하기로 결심하고 정승화를 부르잖아요. 만찬을 하기 전 이미 와있고 말이죠. 수사본부장이었던 전두환 입장에서는 당연히 조사를 해야죠. 합당한 방식으로 정승화를 수사한 거예요. 그런 것조차 쿠데타를 음모하기 위해서였다?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과하다고 봐요. 힘과 힘 사이에 형성돼 있는 빈 공간 사이에 벌어진 어떤 선택. 이런 것들에 대해 교훈을 얻어야 하는 건데, 백대 빵 악마를 만들어버리면 악마를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나요. 대한민국 공간은 8년 동안 빈 공간입니까. 그렇지 않지요. 그래놓고 교훈을 얻을 수가 없어요.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하자. 이런 식의 역사인식이 필요한 거죠.”

 

김재규 계획인가 우발인가 


故 김종필(JP) 전 국무총리 전문기자 전영기 시사오늘 편집인이 여의도 공삼스튜디오에서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인터뷰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故 김종필(JP) 전 국무총리 전문기자 전영기 시사저널 편집인이 여의도 공삼스튜디오에서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인터뷰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 김재규에 대해서는 어떤 평가를 내립니까. 

“김재규는 암살범이죠.”

- JP는 우발적이라고 썼던데. 

"JP는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고 봐요. 이런 말해도 될지 모르지만 JP는 김재규가 옛날 사람들이 쓰던 말로 ‘간질’ 같은게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발작이 벌어지면 아무도 못 말렸다고 해요. 그것을 알면서도 박정희가 기용한 거죠.”

JP는 증언록에서 “김재규는 겉으론 온건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일종의 병인데 욱하는 성질이 지나쳐 한번 흥분하면 전후좌우 분간을 못하고 마구 욕을 해댄다”며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자각하지 못한다. 그땐 발작증이라고 치부했다. 요즘 말로 분노조절장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김재규는 어떤 인간적인 고뇌가 있었냐면 김형욱 죽음과 관련된 게 있었어요.”

김형욱은 10‧26사태가 있기 보름 전 파리에서 죽은 채로 발견됐다. 과거사진실위원회에서는 김재규 지시에 의한 죽음이라고 추론해 발표한 바 있다. 2005년 노무현 참여정부 당시였다. 국정원은 과거사진실위를 구성해 김형욱 실종사건을 다뤘다. 중간 조사 이후 “김형욱은 김재규 중정부장의 지시를 받은 프랑스에 있던 중정 요원들과 제3국인들에게 피랍‧살해됐고 파리 근교에서 시신은 유기됐다”고 발표했다. 

“남은 쟁점은 김재규한테 박정희가 시켰을까 인데, 그건 아직 빈 공간으로 남아 있어요. 김재규로서는 직접 집행한 자로서 갖는 인간적 고통, 발작증을 둘러싼 육체적 불안, 대통령과 차지철로부터 받았을 스트레스 등 이런 게 복합돼 10‧26 당일 폭발했다고 봐요.”

결과적으로 보면 “박정희 대통령 죽음으로 민주화가 열렸다고 할 수 있지요.” 아이러니했다.

유신의 심장을 쏜 김재규를 일컬어 혁명가로 부르기도 한다. 전 편집인은 이 점에 동의하지 않았다.  

“김재규는 과연 혁명가인가? 절대 아닙니다. 혁명이라는 것은 5‧16처럼 정확한 목표를 갖고 있어야죠. 5000만 국민의 가난을 몰아내고 북한의 침략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내겠다. 이런 계획 속에서 움직이는 게 혁명인 거예요. 김재규는 우발적 사건이에요. 애국적 민주화투사로 보지 않습니다.”

- 김동규(박정희 정권 때 상공부 차관하고 YS때 한국토지주택공사 사장하고, 술도 많이 마시기로 유명한 분)전 국회의원의 증언에 따르면요.

“그렇죠. 있었죠.”

- 1985년 제가 직접 들었던 증언입니다. 이분은 자기가 금녕김씨 종친회에서 부회장도 해서 당시 금녕김씨 종친회장이었던 김재규를 잘 아는데 박정희 서거 한 달 전 일식집에서 둘이 만났다고 합니다. 그때 김재규가 ‘앞으로 이 나라를 위해 큰일을 저지르겠다’고 말해 이분이 등골이 오싹하고 식은땀이 흘렀다고 했습니다.

“….”

- YS(故 김영삼 전 대통령)나 그의 최측근인 김봉조 민주동지회장과 인터뷰 했을 때도 ‘그런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계획은 아니었을까싶어요.

“자기 딴에는 계획했을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앞서 이야기한 몇 가지 이유, 그런 것에 기반해 폭발한 한 인간의 분노와 격분 그 이상은 아니라고 봐요.”

그는 잘라 말했지만, 해석은 지금까지 분분하다. 김재규의 국선 변호사인 안동일 변호사는 2019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유신 초기부터 이미 재야 투사인 장준하를 여러모로 도와줬던 행보로 볼 때 10‧26은 민주화에 대한 열망에서 비롯된 계획이라고 추정했다. 

시간이 지나 새로운 증언이나 자료가 나올 수도 있다. 야당 길을 걸어온 김태룡 전 의원은 10‧26 당시 총격 과정에 대한 새로운 증언을 보태주기도 했다. 김 전 의원은 1979년 9월 유신을 비판하다 감옥에 갔을 당시 10‧26 사건으로 붙잡혀 있던 김재규 부하 박선호 의전과장을 만나게 됐다고 했다. 사건 당일 현장에 있던 총격 상황에 대해 들었다며 다음과 같이 이를 본지에 전해준 것이다. 
 

“김재규가 가지고 있던 권총으로 박정희 가슴을 쏘고, 다시 권총 방아쇠를 당기자 총알이 없는 거예요. 권총을 가지러 2층으로 올라가면서 박선호 의전과장에게 확인 사격을 하라고 지시를 한 겁니다. 그 말에 그가 경비원의 M16으로 확인사살을 한 것이죠.”
- 2021년 본지 인터뷰 중-


김재규는 사형 전 최후진술에서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을 쏘았다. 국민 여러분, 자유민주주의를 마음껏 누리십시오. 저는 먼저 갑니다” 라고 한 바 있다. 그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계속 엇갈린 평가가 나올 수 있다. 누구는 부마항쟁을 막고 유신을 끝내려 한 영웅이라며 칭송하고 전 편집인의 말처럼 우발적 암살범으로 규정되기도 할 것이다. 

- 진실은 알 수 없죠.  

“사람 한 명을 보는 데에는 여러 가지 관점이 있잖아요. 저도 당연히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제 말이 더 큰 진실일 걸요?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하하.”

개구지게 웃었다. 

 

JP 제3의 도전…내각제 


대담은 1987 이후로 넘어와 내각제 얘기로 접어들었다. 군사 정권 때는 박정희의 2인자로 불렸던 그이지만, 민주화 시대를 맞이하면서는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으로 묶였다. 민주화 대장정을 마친 양김은 대통령이 됐고 신군부 독재 아래에서도 자신이 유신의 본당임을 부인하지 않았던 그는 87이후  의원내각제 추진에 앞장섰다. 

- 민주화 길목에 JP가 동참하지 못했잖아요. 군부독재 시절에도 대통령이 될 수 없는 한계가 명확했다고 보거든요. 그래서 내각제로 돌아선 것이 아닌가 하는 거죠. 국회의원들 사이에서 인간성이나 품위 면에서 평가도 좋으니 말입니다. 어떻게 봅니까. 

“만약 JP가 1967년 선거에 나갔다면 됐을 거예요. 박정희보다 더 인기가 있었으니까. 세월이 흘러 민주화 시대가 되면서는 어려웠겠지요. 민주화가 머리와 정신이라면 자신은 산업화를 이뤄 시장경제라는 몸체를 만들어준 사람이잖아요. 시대는 민주화로 바뀌었고, 주역도 될 수 없었던 거죠. 본인도 좌절된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지 않습니까. ‘87년에는 내가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판단을 추호도 한 적이 없었다.’”

JP는 “1987년 이래 나의 정치에서 집권 자체는 목적이 아니었다”며 “내가 1987년 대선에 출마한 건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을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정당을 세우려면 깃발을 치켜 흔드는 대통령 후보가 있어야 한다는 정서가 강하다. 정치일선상 대선 뒤 이듬해 봄에 13대 국회의원 선거가 바로 이어질 예정이어서 총선에 참여할 세력들을 규합할 동력을 만들기 위해서는 내가 대선에 출마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10월 30일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면서 총재로서 대선후보가 됐다.”
- JP 회고록 중 -

 

1987년 13대 대통령선거 벽보에는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후보 순으로 포스터가 붙여져 있다.ⓒ연합뉴스
1987년 13대 대통령선거 벽보에는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후보 순으로 포스터가 붙여져 있다.ⓒ연합뉴스

“좋게 말하면 정치의 균형자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고 안 좋게 말하면 끝까지 자기 권력을 조금이라도 끌고 가겠다는 건데 그렇다고 표면화시키지는 않았죠.”

여기까지 얘기하다 그는 JP가 생전 한 말을 더듬었다. 

“이분이 재미난 얘기를 해요. ‘쿠데타를 해봐서 아는데 헌정질서를 뒤바꾼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몰라.’ 그런 표현을 한다고요.”

참여정부 당시 노무현 대통령 탄핵에 반대하면서 한 말이었다. 그는 “시종일관 탄핵에 반대했다”고 했다. “나는 5‧16 혁명으로 나라의 헌정질서를 중단시켰던 사람이다. 헌정을 중지시켜 봤기에 그것이 얼마나 무섭고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든 일인지도 잘 안다. 헌정사에 얽힌 고난과 파란의 사연을 보면서 대통령의 유고가 국민의 불행임을 절감했다”는 이유였다. 

일인에 권력이 집중되니 그럴 만도 했다. 역설적으로 이 점을 경계한 JP는 “나라를 발전시킬 수 있는 새로운 단계로 도약하려면 선진제도가 필요하다”며 “의원내각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창했다. 

JP는 “나의 진정한 정치목표는 의원내각제였고 그것은 내 정치생애 제3의 도전이었다”며 비장한 각오를 드러냈다. 그에게 제1의 도전은 5‧16, 제2의 도전은 박정희 대통령 이후의 민주주의였다.
 
- 내각제 주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예전엔 내각제를 싫어했는데 이제는 생각해요.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몰라도 일인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는 것은 비정상, 비이성적이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내각제가 JP의 정치적 약점을 메우기 위한 동기적 측면도 있겠지만 곪을 대로 곪아있는 상태에서 내각제를 꺼내는 것은 그 자체가 가치있는 일이라고 봅니다.”

- 하지만 당시로 돌아가면 직선제한지 5년 만에 내각제를 한다는 것이 시대착오적인 것이 아닌가 싶어서요. 

“저도 그때는 동의하지 않았어요. JP가 시대를 너무 빨리 앞당긴 거죠. 착오라기보다는 앞으로 올 것을 미리 예견한 거지.”

혼잣말하듯 흘려보냈다. 

- 3당합당 과정에서도요. 본인은 처음에 양당합당을 노태우에 제안하지 않습니까. 저는 그 점이 아쉽더라고요. 민주화가 됐기에 군부세력 입장에서는 설 땅이 없잖아요. 양당합당보다는 정통민주세력인 YS를 끌어들이는 3당합당이 더 옳은 방향이었을 텐데 JP는 양당합당만 생각했으니 말입니다. 

“그건 다 우리집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옳기야 하겠어요. 그게.”

대수롭지 않아 했다. 

- 박정희기념관을 안 세워준 것에 대해서도 YS에 대해 굉장히 서운한 감정을 얘기했잖습니까. 

“사람들이 덜 주목하는 것이긴 한데 YS는 JP한테 인간적인 빚이 있었다고 봐요. 아까 제가 힘의 필연성 사이에 존재하는 빈 공간의 우연성. 그걸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JP란 존재가 없었으면 YS가 죄의식을 갖지 않았을 거예요.”

그는 YS가 내각제 합의각서 파문, 박정희기념관 건립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서 일종의 JP에 대한 그늘이 생길 수밖에 없었을 거로 가늠하는 듯했다. 

 

YS, DJ와 박정희기념관 


JP는 회고록에서 종종 YS에 대한 애증적 시각을 드러낸 바 있다. 특히 "YS가 대통령이 된 후 나와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을 건립하기는커녕 박 대통령 업적을 부정하는 언행을 되풀이했다”며 못마땅하게 여겼다. 

전 편집인도 JP 시각과 궤를 같이 했다. 

“시대별로 그 시대의 그 첫 번째 숙제가 있는 것이겠죠. 그런 면에서 YS는 하나회를 척결함으로써 역사적 과업을 이뤘죠.”

이렇게 운을 떼면서도 “하지만 YS의 가장 큰 단점은 박정희를 모두 부정한 것. 난 그거라고 봐요”잘라 말했다. 

“그건 자기 부정이에요. 정치인 YS는 박정희라는 시대를 통해 태어난 사람이거든. 나무만을 인정하기 위해 터까지 부정한 것이 YS에요. 박정희 공은 인정해 줘야지.”

YS가 박정희의 공을 인정하지 않았을까. 측근인 김봉조 민주동지회 회장은 관련해 고개를 저은 바 있다.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박정희 대통령 서거 때도 가장 먼저 장례식장에 달려간 게 YS였다. 평소에도 산업화의 공을 인정해왔다”고 강조했다.

그렇지만 박정희와 YS는 깊은 대척점에 놓여 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YS는 장기독재의 나라는 반드시 부패하게 되고 결국 가난에 이른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 1960년부터 줄곧 선명야당 노선의 기수가 돼 군사독재를 규탄했다. 초산테러를 당하고 의원직 제명을 당해도 박정희 정권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던 그였다. 1975년 YS와의 영수회담에서 박정희는 그 앞에서 눈물을 보이며 이번을 끝으로 물러난다고 했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에 YS는 더 강력하게 대항했다. 그런 그를 의원직에서 제명하자 이번엔 부마항쟁이 일어났다. YS가 눈엣가시일수록 박정희의 신경은 곤두세워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럴수록 폭주했다. 유신의 종말을 박정희 스스로 앞당기게 된 요인 중 하나였다. 
 

왼쪽부터 김대중 평민당 총재, 김종필 공화당 총재,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가 한 행사장에서 환담을 나누고 있다.©연합뉴스
왼쪽부터 김대중 평민당 총재, 김종필 공화당 총재,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가 한 행사장에서 환담을 나누고 있다.©연합뉴스

차치하고, 이 질문을 해보았다. 

- JP가 박정희기념관을 세워준 DJ에 대해서는 용서와 화합의 지도자로 평했지 않습니까. 

“그런데요.”

- DJ는 통일민주당에서 나와 평민당을 만들었고, 영국에서 돌아와서는 이번엔 민주당에서 나와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습니다. 이 모두가 통합보다는 분열을 가져왔다는 지적입니다. 그 점에서 JP가 DJ를 통합의 정치로 바라본 것은 좀 맞지 않아 보이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민주세력의 분열로 보면 그럴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DJ 경우 저는 시대의 화해라는 관점에서 보고 싶어요.”

시대의 화해.  다시 질문으로 들어갔다. 

- DJ 입장에서 박정희기념관을 세우는 게 국민통합이고 화해면, YS도 마찬가지라는 거죠. YS 입장에서는 3당합당으로 대통령이 됐으니 진영 내 요구인 박정희기념관을 세우기보다 5‧18을 민주화법으로 만들고 전두환‧노태우를 법정에 세워 상대 진영인 호남의 한을 달래는 것이 통합과 화해의 길 아니겠습니까.

“부분적으로는 동의합니다.”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JP처럼 판단할 수도 있지요. 어떤 기준으로 보느냐 아니겠어요?”

 

이회창, JP와 손잡았다면?


시각은 다채로울 수 있다. 이번엔 1997 대선 이야기로 화제를 전환했다. 

제일 물어보고 싶은 질문을 던졌다.  

- 이회창 신한국당 총재가 JP와 손을 잡았으면 역사가 바뀌었을까요.  

“글쎄요. 생각 안 해봤는데(웃음).”

너털웃음을 지어보였다. 

“어쨌든 그때 이회창 총재가 교만했다고 봐요. 자기가 혼자 다 할 수 있다고 본 거죠. JP는 말이죠. 사실은 교만함에 대한 몽니였던 것 같아요. 충청도 말로 심술부리는 거 있잖아요. 너무 자기를 무시하는 거야. 나이도 자기가 위고 정치경력도 위고 모든 면에서 존중받아 마땅한데 너무 무시한 거예요. 그래서 몽니를 부리듯 DJ한테 간 측면도 있다고 봐요.”

증언록에서는 1997년 기간 이회창과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표한 바는 없다. 그러나 이후에도 둘이 얼마나 껄끄러운 관계였는지는 어림잡아 짐작할 수 있기는 하다. 2000년 4월 총선에서 자민련이 17석으로 확 줄어들면서 위기를 맞았을 때다. 한나라당이 제1당의 위치이긴 해도 야당 간 공조가 필요하다고 본 YS 권유에 따라 JP는 그해 7월 22일 경기도 한 컨트리클럽에서 자민련을 원내교섭단체로 만드는 방안을 놓고 이회창과 회동을 가진 바 있다. 
 

“(원내교섭단체 기준을) ‘17명으로 고쳐줄 수 없습니까. 일본은 3명만 돼도 교섭단체로 인정합니다’고 부탁했다. 이 총재는 “제가 혼자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당의 의사를 모아 검토하겠습니다”고 응답했다. 나와 이 총재는 웃으며 손까지 마주잡았다. 하지만 오랫동안 이 총재로부터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회동 내용을 공개했다. 이 총재는 교섭단체 이야기를 나눈 것 자체를 묵살하고 부인했다. 그는 대변인을 통해 ‘단둘이 앉은 시간은 30초에 불과하며 그런 이야기는 없었다.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
- JP 회고록 중-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가 거리를 둔 채 한 행사장에 앉아있다. 둘 사이의 기류에 서먹함이 감돌고 있다.ⓒ연합뉴스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가 거리를 둔 채 한 행사장에 앉아있다. 둘 사이의 기류에 서먹함이 감돌고 있다.ⓒ연합뉴스

이회창이 이런 태도를 취한 것에 대해 JP는 자신이 1997년 15대 대선 기간 DJP연대를 한 것 관련해 앙금을 풀지 못했기 때문으로 추측했다. 하지만 당시 15대 때로 돌아가면 DJP연대는 DJ 측의 적극적인 제안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상황을 보면 이렇다. 

JP는 1996년 가을 DJ 측으로부터 여러 경로를 통해 야당 공조를 제안받기에 이른다. DJP연대를 고안해낸 이는 DJ의 핵심 브레인 역할을 했다고 알려진 이강래 전 의원이었다. DJ는 한 인터뷰에서 야권 후보 단일화를 위해서라면 내각제를 받아들일 수 있다며 JP 마음을 사려고 노력했다. JP측 김용환-DJ측 한광옥이 실무진으로 참여해 물밑에서 접촉했다. DJP(김대중-김종필) 공조가 시작되는 계기였다. JP는 YS 측에서도 “DJ와 손 떼고 나와 내각제 하자”는 제안을 청와대 한 고위간부한테서 들었다 했다. DJ 측은 몸이 바짝 달았다. 

다음은 국민회의 부총재이던 한광옥의 증언. 
 

“내각제 고리로 단일화 협상을 추진한 건데 한 일 년 동안은 애를 먹었어요. 그분들(자민련) 지지율이 5%밖에 안 된다지만 요구사항이 많았거든. 근데 내 생각은 그래요. 100이 있어야 이기는데 1%가 부족하다면, 그 1은 100과 같은 거야. 내가 힐튼호텔에서 김용환 선배를 만났어요. ‘선거 끝나고 단일화할 거요? 담판 지읍시다.’ 건방진 얘기지만 우리 둘이 먼저 합의문에 사인하고 두 분 총재한테 들이밀었어. ‘할 거면 하고, 아니면 깹시다. 그거였지.”
- 2021년 본지 인터뷰 중 - 


DJ 측이 JP 측 요구를 전격 수용하면서 극적 합의에 이르게 됐다는 얘기였다. 한광옥에 따르면 김용환은 합의문에 서명하기 전 세 가지 약속을 더 요청했다. 그중 하나가 “JP 청구동 자택을 DJ가 찾아와 고맙다는 인사를 확실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실제 1997년 10월 27일 저녁 8시 30분경 DJ는 JP 자택을 찾아갔다. 그때의 DJ 모습이 인상에 남았던 JP는 이렇게 회상했다. 
 

“김 총재는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다짜고짜 나를 포옹했다. 감정이 상당히 북받치는 모습이었다. DJ가 이런 식으로 친밀함을 표시하기는 그날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는 거실 소파에 앉아 인사를 한 뒤 갑자기 바닥에 내려앉았다. 그러더니 ‘김 총재님,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간절히 부탁합니다’….”
- JP 회고록 중-


야당 간 공조가 이렇게 이뤄지는 동안 이회창은 JP도 빼앗기고 같은 여권 경쟁자였던 이인제도 놓쳤다. 민정계와 손잡고 대통령이었던 YS와는 반목했다.  

문민정부에서 공보처 장관을 지낸 오인환은 이를 ‘이회창의 배타성’, 마이너스 정치 때문이라고 평했다. 지난 여름 본지 인터뷰에서 “정치를 잘 모르는 법조인이 자만심에 빠져 판단을 그르쳐 패인에 이르게 된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 그럼에도 ‘만약 그때 이회창이 JP와 손을 잡았다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다시 앞서 질문한 것으로 대화는 돌아왔다.

“제 기억엔 그때 40만 표 차인 1점 몇 퍼센트 차로 간신히 이겼는데, 충청도 격차가 그보다 더 컸던 것으로 알아요. 손을 잡았다면 이회창이 당연히 이겼죠. 말할 필요도 없어요. 그렇게 됐다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하듯 뜸을 들였다. 

“이른바 한국은 진보의 씨가 마르게 됐을 거예요. YS도 이회창도 보수잖아요. 50년 만의 정권교체가 불가능했을 테죠. 지금 일본은 자민당 내 당내 파벌만 있지 계속 집권하다시피 해 활력이 없잖아요. 우리는 화력이 너무 커서 문제고요. 저는 그때의 JP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옳았다고 생각해요. 정권교체가 가능한 나라가 됐으니까요. 그 문을 열어놓은 사람이지요.”

큰 흐름으로 보면 JP는 스스로 삼김 정치의 시작과 끝의 균형자 역할로 남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회고록에서 “언론이 3김시대라고 부른 1990년 정치는 나와 김영삼‧김대중의 역정과 신념이 흩어져 부딪히고 새로 조합돼 재구성되던 공간이었다”고 규정했다.  

JP는 1997년 1월 4일 신년회견에서 “이번 대선은 마지막 3김씨의 싸움이다. 제3의 후보가 나오긴 힘들 것이다. 3김의 싸움은 반드시 밟아야 할 과정이고 현실이며 순서다”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시대의 흐름을 간파했다고 볼 수 있다.  

 

밝은 빛의 사나이 YS, 살얼음 걸은 DJ


故 김종필(JP) 전 국무총리 전문기자 전영기 시사오늘 편집인이 여의도 공삼스튜디오에서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인터뷰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故 김종필(JP) 전 국무총리 전문기자 전영기 시사저널 편집인이 여의도 공삼스튜디오에서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인터뷰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 정치부 기자로서 삼김을 평가한다면 어떻습니까. 

“저는 행복하게도 삼김을 아주 잘 압니다. 집도 다 가보고 밥도 같이 먹고(웃음).”

여러 장면이 떠오르는지 얼굴에 웃음이 번져갔다. 

“JP를 제일 존경합니다. 92살인가, 삼김 중 제일 오래 살았잖아요. 그분은 가슴에 못 박는 원한 정치를 못 견뎌하는 사람이었어요. 참 사람이 모질지가 않아요. 이 시대에 필요한 덕목을 갖고 있는 분이었어요. 인간의 향기, 비유와 여백…. 이런 것을 잘 알고 있는 아주 올바른 정치가였다고 생각해요.”

JP는 그림을 그리고 악기를 연주했고 서예에 능했다. 예술에 조예가 깊었다. 그런 다방면의 모습도 그의 정치적 인품을 높이는 계기가 됐을 것으로 가늠됐다.  

“YS는 전광석화처럼 하나회를 척결한 것은 세상을 바꿔낸 제일 큰 불멸의 업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 기질로 보면 화려한 지도자 같아요. 분명하고 강렬한, 밝은 빛의 사나이…. 용기와 결단의 지도자지요.”

‘밝은 빛의 사나이.’ 표현이 멋졌다.  

“JP가 YS한테 움찔한 적이 있었어요. (5‧16)혁명을 하고 나서 중정부장을 하잖아요. YS를 불러서 혁명에 동참하라고 했는데 앙칼지게 대들었다는 거 아니에요. ‘너희들은 쿠데타다’ 막 이렇게 쳐다보는데 주눅이 들 정도였대요. 제 느낌엔 그래요. JP가 딱 멈칫했던 유일한 사람이 YS였던 거지. 젊을 때부터 맹수 같은 강렬함이 YS에게는 있었다고 봐요.”

다음은 DJ에 대한 평을 할 차례였다. 

“DJ한테 제일 고마운 것은 어쨌든 진보의 문을 열었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가치를 인정한 것입니다. 역사적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DJ가 그것을 하지 않았다면 노무현‧문재인 정부를 거치면서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역사가 지워졌을 겁니다. 또 DJ는 그런 관점이 있습니다. 소수파이기 때문에 살얼음 걷듯 움직이는 겁니다. 뭘 하나 하더라도 굉장히 조심조심했습니다. 언제라도 당할지 모르니까. 정약용이 살얼음 걷듯 조심조심 정치하라고 했는데 딱 실천한 사람이죠.”

- 인명진 목사가 증언하기를 6월항쟁 기간 국본(국민운동쟁취운동본부) 대변인으로 있을 땐데 YS는 매일 찾아와 강하게 밀어붙여야 한다고 한 반면, DJ는 살살하라고 했다고 하더라고요.

“개헌 서명운동도 DJ는 백만 명 하자는데 YS는 천만인으로 해야 한다, 했다는 것 아닙니까. 부산사나이가 그렇죠(웃음).”

- DJ의 아쉬운 점 아닐까요?   

“대통령으로서 보면 그런 점이 오히려 장점이라고 봅니다. 권력자는 DJ처럼 내가 언제 뒤집히고 무너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살아야 한다고 봐요. DJ는 소수파이기 때문에 무리하지 않았던 거지요. 김정일과의 남북회담에 너무 매달린 것은 문제였지만 JP와의 약속에 따라 관료들을 40% 맡긴 것, 일본 문화를 확 받아들인 것 등은 대통령으로서 나 아니면 할 수 없다는 사명의식 때문에 했다고 봐요.”

 

여백과 함축의 정치인 JP


1999년 김종필 총리가 자민련 출입 기자들을 부부동반으로 삼청동 총리 공관에 초청해 와인을 따르고 있다. 김종필 총리 오른쪽 두번째로 앉아있는 사람이 전영기 편집인. 그 사이는 전 편집인의 부인.ⓒ사진제공 : 전영기
1999년 김종필 총리가 자민련 출입 기자들을 부부동반으로 삼청동 총리 공관에 초청해 와인을 따르고 있다. 김종필 총리 오른쪽 두번째로 앉아있는 사람이 전영기 편집인. 그 사이는 전 편집인의 부인.ⓒ사진제공 : 전영기

인터뷰 후반부는 다시 JP에 대한 얘기들로 채워졌다. 

- JP한테 인상적이었던 게 연말에 워커힐 호텔에서 지인들 초대해, 기념촬영할 때 배우자도 동반해서 같이 했던 게 기억납니다. 

“아하…! 옛날 생각나네요.”

잃었던 보물을 발견하듯 반가워했다.

“제가 자민련을 35살 때부터 취재했단 말입니다. 그때 JP가 워커힐로 부른 거예요. 아내도 같이 가서 함께 쇼도 보고 스테이크도 먹고…. 저나 아내나 그때 처음 본 거예요. 워커힐쇼….”

잠시지만 황홀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읊조리듯 조용조용 이 말을 해왔다.

“제가 여기 와서 전하고 싶은 하나의 메시지가 있다면 JP의 인간적인 향기와 성품, 은유와 여백의 정치, 이런 부분이 널리 퍼졌으면 좋겠다는 거였어요. 그것을 전하기 위해서 나왔습니다.”

인터뷰하는 의도를 분명히 해두고 싶은 듯했다. 

- 1노 3김의 4당 체제 때도 JP는 ‘편지 정치’로 여백의 정치를 보여줬습니다.  

“그랬지요.”

1988년 13대 총선이 일주일 지날 무렵이었다. 5월의 어느 날 JP는 양김에 편지를 썼다. 붓글씨로 정성스레 써 내려간 한자 편지였다. 
 

“3김이 만나서 정국을 풀어보자는 ‘야3당 영수회담’ 제의였다. 전화나 사람을 보내 뜻을 전할 수도 있었지만 편지라는 것을 선택했다. 정성을 들여 한자 한 자 직접 쓴 편지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성의와 친밀감을 느끼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 JP 회고록 중 - 


JP는 회고록에서 “싸울 때 싸우더라도 인간미 흐르는 정치”를 하고 싶어 편지를 쓰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상대방은 나를 자극하는 경쟁자일 뿐 죽기 살기로 싸워 없애야하는 적은 아니다. 나는 그런 정치 문화를 만들려고 나름대로 노력했다”며 “3김 총재를 언론에선 정치9단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는데 9단들의 정치방식은 좀 달라야 했다. 나는 예의와 격조를 갖춘 짧은 글월로 막힌 정국을 뚫어보려 했다”고 말했다. 

양김도 답신을 보내왔다. 회동 제의에 동의한다는 내용이었다. 3김은 그해 5월 18일 여의도 국회 귀빈식당에서 야3당 총재회담을 가졌다. 

JP는 “3김 정치엔 이렇게 함축과 여운으로 난제를 풀어가는 맛이 있었다. 과거에 보기 어려웠던 편지 정치의 묘미였다”며 당시를 추억했다.

- 또, 어떤 일화가 기억납니까. 

“JP가 민주계 압박에 못 이겨 자민련을 창당했을 때 말입니다. JP 탈당 전 최형우 장관(내무부)이 공세를….”

1995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다. JP는 민자당 당대표를, YS계 최형우는 사무총장을 맡고 있었다. 최형우는 민자당에서 대표 체제는 없어져야 한다며 JP 퇴진을 주장했다. 정치권 전반적으로 JP와 DJ 모두를 겨냥한 ‘정치인 70세 정년론’도 퍼져나갔다. 

“그런 일을 겪으니 JP도 방어해야 할 거 아니에요. 최형우 장관처럼 직설적으로 말하는 사람도 아니니 조그만 책자를 국회에 다 돌린 거예요.”

새뮤얼 울먼의 <청춘>이란 시가 번역돼 있는 시집이었다. 2차 세계대전 뒤 맥아더 장군이 즐겨 암송하는 시였다고 한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느 기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세월을 거듭하는 것만으로 사람은 늙지 않는다. 이상을 잃을 때 비로소 늙게 된다. 세월은 흐르면서 피부에 주름살을 남기지만, 정열을 잃으면 정신이 시든다.”
- 새뮤얼 울먼의 <청춘>-


한 편의 시가 준 여파는 컸다. 양김 퇴출을 외치던 목소리가 쏙 들어갔다. 

“한 방 먹은 거지요(웃음).”

전 편집인이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었다.

JP는 이처럼 여백과 함축의 정치를 보여준 인물이었다. 
 

“나는 직설과 단도직입을 좋아하지 않는다. 은유나 시구를 인용한 비유로 나의 생각을 표현하곤 한다. 시구는 언어의 함축이며 비유는 상상을 부른다. 직설적인 말은 표현 그 자체에 갇혀 버리지만 시를 통한 함축적인 표현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훨씬 풍부하고 호소력 있게 전달한다. 경험적으로 시와 번역, 은유와 여백이 정치 세계의 밀어붙이기보다 위력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 JP 회고록 중 - 


갈등을 위트로 푸는 솜씨에서 요즘 정치에서 보기 어려운 낭만이 느껴졌다. 요즘 정치권은 진영 갈등이 극심한 상태로 치닫고 있다. 급기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피습됐고,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을 향해서는 살해 협박 글이 올라왔다.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 추진도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다. 22대 총선을 앞두고 더욱 어지러운 국면이다. JP와 같은 정치가 그리울 때다.  
 

2015년 서울 신당동 자택에서 김종필 전 총리와 전영기 편집인ⓒ사진제공 : 전영기
2015년 서울 신당동 자택에서 김종필 전 총리와 전영기 편집인ⓒ사진제공 : 전영기

 

환기하며,

- 가장 좋아하는 어록은 무엇입니까. 

“‘정치는 허업(虛業)’이라고 했던 말이 가장 인상적이에요. 맨몸으로 태어나 빈손으로 돌아가는 게 정치다, 그러니 자기가 쌓은 것은 세상에 돌려줘야 한다….”

읊조리듯 조용히 되뇌다가 “어저께(12월 10일) JP 아들이 돌아가셨잖아요. 저와 나이가 같아서 친하게 지냈는데….”

김진 운정장학회 이사장은 지병을 앓다 별세했다. 고인의 얘기를 전하다 목소리가 잠겨왔다. 그러다 생각이 났는지, “JP가 부패하고 타락했다는 풍문도  다 거짓말입니다”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재산도 청구동 자택밖에 없어요. 그 집마저 빚 갚기 위해 팔아서 지금은 자취도 없어요. YS야 원래 청빈한 것을 세상이 알지만, 다른 대통령들도 마찬가지로 부패하지 않았다고 봐요. 박정희 대통령은 스위스은행에, DJ는 일조 원 갖고 있다는 풍문도 다 거짓말이에요. 후세들을 보세요. 단 한 명도 아버지가 축적해놓은 재산을 갖고 있는 흔적이 없습니다.”

그는 JP를 주제로 한국에서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장자의 메타포에 따른 김종필의 정치수사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JP 서거 후 일 년 뒤 완성했다. 그전에는 <한국 보수주의 정치의 가능성 탐색-JP 증언록을 중심으로>(전영기‧강혜수 공동저)라는 내용으로 예비 논문을 썼다. 어떤 점을 통해 보수주의 정치의 가능성을 보고 있는 것일까. 

“그분은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불멸의 가치로 지켰어요. 경제력 없는 민주주의는 껍데기에 불과하다고도 했고요. 20대 장교 시절 미군 보병학교의 유학생활에서 배운 것이 훗날 혁명과 근대화, 국정경영에 도움이 된 것이지요. 경제력과 민주화의 상관관계에 대한 뚜렷한 식견과 안목을 갖고 있었습니다. 민심은 언제든지 조련사를 물어죽일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했던 것도 기억나요. 박정희 대통령을 예로 들면서 한 말이었지요.”

이런 업적 등이 예비 논문 책자에 담겨 있다고 했다. 책장을 넘겼다. JP 어록을 담은 한 단락이 눈에 들어왔다. 

“조국이 얼마나 가난하게 사는지 너희들은 모른다. 나는 근대화를 위해 혁명을 했다. 어떻게 해야 조국이 극빈 상태를 탈피하고 세계무대로 뛰어나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애국·애민 정신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이었다. 그의 몸부림은 성공했으니 행복한 사나이다. 

담당업무 : 정치, 사회 전 분야를 다룹니다.
좌우명 : YS정신을 계승하자.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꿈은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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