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인환 “부친 반대로 접은 김현철 미완의 정치 꿈, 아쉬워” [時代散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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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인환 “부친 반대로 접은 김현철 미완의 정치 꿈, 아쉬워” [時代散策]
  • 정세운 기자, 윤진석 기자
  • 승인 2023.09.27 17: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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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인환 전 공보처 장관
​​​​​​​YS 평전 집필을 통해 말해주고 싶은 것
“YS, 이승만·박정희에 준하는 평가받아야”
 문민정부 사람들 입체적으로 다룬 점 흥미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정세운 기자, 윤진석 기자]

오인환 전 공보처 장관이 지난달 2일 여의도 공삼스튜디오에서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인터뷰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오인환 전 공보처 장관이 지난달 2일 여의도 공삼스튜디오에서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인터뷰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지나간 일은 되돌릴 수 없지만 다가올 일은 쫓을 수 있다.’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만약에, 라는 말을 하게 된다. ‘그때 그랬다면 어떻게 달라졌을까?’ 흥망성쇠도, 성패와 승패의 주역들 모두 바뀌었을지 모른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 계승할 것과 청산할 것을 만들어 다음 페이지로 넘기는 것. 그것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몫이다. 

<시사오늘>은 그동안 역사적 증언을 모아왔다. 당대의 시사점을 오늘날에 반추하기 위해서다. 과오가 반복되지 않을 때 미래는 비로소 안개를 거둘 것이다. 오늘도 역사는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어느 시간 모퉁이에서 만난 한 사람 한 사건. ‘재발견’의 묘미가 있다. 시대산책이 현대사와 동행하는 이유다. 
<편집자 주>

 

시대산책 오인환 편

  • <김영삼 재평가>의 의미
  • 궁정 안팎 권력 충돌의 시사점
1939년생 서울 출생, 경기고-한국외국어대 졸업, 한국일보 입사, 파리대학연수, 한국일보 사회·정치부장·편집국장·주필, 문민정부 공보처 장관 역임



역사 저널리즘을 지향해온 <시사오늘>은 2008년 창간 이후 故김영삼(YS) 전 대통령 재평가 작업을 쉬지 않고 해오고 있다.

YS 공로를 재조명하면서 변화된 것들도 많다. IMF 그림자에 가려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던 역사적 업적들이 재인식되며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잘못된 역사적 왜곡들도 하나둘 바로잡혀가고 있다. 

주목했던 것은 크게 3가지였다. 민주화의 주역, 최대 공로자인 YS를 통해 대한민국은 정의가 반드시 승리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남겼다. 

문민정부 출범 후 금융실명제 도입 등 혁명보다 어려운 개혁적 과제들을 단행함으로써 대한민국은 세계화를 선도하는 선진국 시스템의 대전기를 마련했다. 

의회주의적 소신과 정직과 청렴, 언행일치, 통합적 리더십을 통해 최고 정치 수준의 민주주의 체제에서 요구하는 지도자 덕목의 실천적 모델이 돼줬다. 

 

최장수 장관 


지난 8월 2일 여의도 <시사오늘> 공삼스튜디오에서 오인환 전 공보처 장관을 만났다. 

문민정부 공보 책임자였던 그는 재작년 YS 평전을 펴냈다. <김영삼 재평가>(조갑제닷컴)다. 6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이다. 

YS 일대기를 입체적으로 다뤘다는 평을 받고 있다. YS 사람이기에 치우칠 수 있는 점을 우려했는지 더욱 균형 잡힌 시각으로 쓰려는 분투가 느껴졌다. 다면적 발자취를 전하면서 한국 민주화운동의 정통성은 YS에 있고, 가장 기여도가 높다는 점, IMF 금융위기의 역사적 책임론을 둘러싼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언론인 출신이다. 1992년 대선을 도운 것을 계기로 YS맨이 됐다. 1993년 2월 26일 취임 이후 대통령 임기까지 함께했다. 

헌정사상 전무후무한 최장수 공보처 장관이다. YS가 취임 초 “나와 임기를 같이 하는 장관이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훗날 그를 두고 한 발언이 아니냐는 관측이다. 

스스로도 자신의 거취와 관련해 설이 무성할 때마다 소신껏 제 일을 하며 “장관이란 장기판의 말과 같다.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올 뿐”이라고 했다. 

언론계에서는 “충성심과 몸을 아끼지 않고 업무에 몰두하는 자세 등으로 YS의 신임을 얻었다”고 고 분석했다. 

취임 초부터 전면적 언론 자유, 방송 개혁에 앞장섰다. 각 지방을 다니며 언론사 간부들을 만나 협조를 구하는데 애썼다. 개혁의 전도사로 불렸다. 

 

YS 평전의 이유


오인환 전 공보처 장관은 김영삼 정부 처음과 끝을 함께 한 최장수 장관 기록을 가지고 있다.ⓒ시사오늘
기자 출신의 오인환 전 공보처 장관은 김영삼 정부 처음과 끝을 함께 한 최장수 장관 기록을 가지고 있다. 퇴임 후에는 꾸준한 집필 활동 중이다.ⓒ시사오늘

문민정부의 시작과 끝을 함께한 그. 

- 왜 현실 정치는 안 나섰습니까. 

“우린 누구를 제치는 타입도 못 되고, 굽실거리지도 못해요. 국회의원이 되려면 때로는 그런 것도 잘해야 하잖소. 차라리 책이나 쓰겠다. 그래서 내가 책을 다섯 권 썼어요.”
재작년 출간한 <김영삼 재평가>는 네 번째 작이다.  <위기관리의 리더십>, <고종시대의 리더십>, <이승만의 삶과 국가>에 이어서다.

“다섯 번째 쓴 게 <박정희의 시간들>인데 양김(김영삼·김대중)을 볼 수 있는 다른 관점이 또 나와. 한번 읽어보세요.”

- <김영삼 재평가>를 쓰면서 전달해주고 싶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YS는 이승만·박정희에 준하는 평가를 받아야 하는 사람이다. 그게 메시지에요.”
<이승만 평전>을 처음 써냈으니, 그는 보수를 대표하는 세 지도자에 대해 모두 평전을 쓴 셈이다. 
 

오인환 전 공보처 장관이 지난달 2일 여의도 공삼스튜디오에서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인터뷰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오인환 전 공보처 장관이 지난달 2일 여의도 공삼스튜디오에서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인터뷰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다시 YS 얘기로 돌아와, 인연부터 물었다. 

“사회부장 한 다음 정치부장을 맡게 됐는데 그때 YS를 알게 됐어요.”

1986년 때다. <한국일보> 출신.

“나도 원체 중도보수성향이 강한 사람이에요. YS와는 공감대가 컸지요.”

“군부독재에 투쟁하는 정치인에 대해 호감이 갔던 시절이니까 짧은 시간 안에 돈독하게 됐다”고 한다.

- YS 인상은 어땠습니까.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분이었어요. 시종일관 진지하게 듣는 태도를 보였어요. 아주 깊은 인상을 받았지요. 나뿐 아니라 언론계 대체로 평이 좋았어요. 우호적이었죠.” 

- 1992년 대선 때는 어떻게 돕게 된 겁니까.

“(YS가) 같이 일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해 왔어요.” 

정치에 전혀 관심 없었을 때라, 처음엔 고사했다.

“할 생각 없다, 거절했지요.”

하지만 집에 돌아와 부인과 얘기하면서 생각을 바꾸게 된다. 

“와이프가 그래요. 현역에서 할 것 다 하고 주필 다하면 기자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냐. YS를 도와 민주화 작업을 완성하는 게 더 의미 있지 않냐는 거였죠.”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고심 끝에 민자당 대선후보 비서실의 정치특보를 맡았다.

- 언론계에서 우호적이었다고 했잖습니까. 왜 그런 건가요.

“군부독재에 저항하며 선명성을 유지하고 있었고, 아까도 말했지만, 자세도 좋았고 상도동계 사람들이 언론계에 잘했어요.”

- 언론에 잘했다는 게 김동영·최기선, 이런 상도동계 인사들을 말합니까.

“김동영 전 의원은 초기이고, 그때(문민정부) 내가 관계할 땐 이원종 씨가 들어왔어요.”
오인환 공보부 장관, 이원종 차관이었다.

“당시 자기를 배려해 준 것을 고맙게 생각해서 내게도 잘했어요. 그러다 이원종 씨는 정무수석으로 발탁돼 청와대로 갔지요.”

되새기듯 “실세 중 실세였지요.”

- 실세가 맞았습니까.

“승승장구했잖아요?”

반문해왔다. 

“정치적 센스가 있어서 YS한테 도움이 되니 실세가 된 거죠.”

<김영삼 재평가>에서 그는 이원종에 대해 “YS 표정만 봐도 기분 상태를 알 수 있고, 한마디만 들어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챈다는 YS 의중 읽기의 일인자라는 소리를 듣던 인물”이라고 전했다. 

 

청와대 실세


YS와 42년을 함께 한 이원종 정무수석의 YS에 대한 존경심은 대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시사오늘
이원종 정무수석은 YS와 42년을 함께 했다. 평소 YS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사오늘

1979년 김명윤의 국회 비서관을 시작으로 정계 입문한 이원종은 같은 경복고 출신의 김덕룡 권유로 상도동계에 합류했다. 

42년을 YS와 함께했다. 생전 전화번호 끝자리가 0003이라고 알려질 만큼 존경심이 각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인환 또한 “YS를 아버지보다 존경한 이원종”이라고 회고했다.

“YS와 친구 사이인 변호사 출신 김명윤 의원의 조카이자 보좌관이던 이원종은, 경복고 1년 후배인 김덕룡 비서실장의 권유로 상도동에 합류한 늦깎이였다. 

그런데도 어느 사이에 YS가 성(姓)을 빼고 ‘원종이’ ‘원종이’하고 부를 만큼 신임을 받는 입장이 되었다. 

그는 두 차례 낙선한 뒤 정치인의 꿈을 접고, YS 대통령 만들기에 올인하겠다고 공언한 충성파였다. 아첨할 줄도 모르고 낙선 3수생(=YS는 국회의원에 당선됐는지 여부가 인물 평가의 기준인 사람이다)을 믿고 중용하는 YS를“아버지보다도 더 존경한다”던 사람이었다. 
 

그는 10여 년 동안 YS의 대변인으로, 상도동 출입 기자를 포함한 언론계 상하를 상대로 헌신적으로 일했고 평판이 좋았다.”
-오인환 <김영삼재평가> 중-

 

김현철은 아버지 YS를 닮아 정치적 감각이 남달랐지만 대통령 아버지를 둔 것이 그에게는 또 다른 족쇄와도 같았다는 평가다.ⓒ시사오늘
김현철은 아버지 YS를 닮아 정치적 감각이 남달랐지만 대통령 아버지를 둔 것이 그에게는 또 다른 족쇄와도 같았다는 평가다.ⓒ시사오늘

이원종은 YS 차남 김현철을 비롯해 김무성·홍인길·강삼재 등과 문민정부 7인방으로 불렸다. 

“김현철 씨가 영향력을 발휘할 때 최고의 전성기를 맞았죠.” 

김현철은 아버지를 닮아 정치 감각이 남달랐다. 여의도연구소 모태인 중앙조사연구소를 만든 여론조사계의 1세대이기도 하다. 국내 첫 여론조사 기법을 도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한국당이 승리한 15대 총선서 과학적 분석을 통해 개혁공천의 밑그림을 그렸다. 후에 소통령 논란도 있었지만, 문민정부 초기 긍정적 역할을 해줬다는 평가다.

YS와 김현철

참모적 면모에서 YS 신임도 두터웠다. 

오인환은 이를 두고 “자신과 닮은 둘째 아들을 편애했다”고 한 바 있다.
 

“YS는 외모는 물론 대중 연설에 알맞은 목소리나 도전적인 정치 성향까지 닮은 현철을 편애한다는 소리를 들으면서 아꼈다. 아버지처럼 정치가가 되고 싶다는 점에서 현철은 외아들이나 다름없었다.”
-<김영삼 재평가> 중-

 

 

다만 YS 아들이라는 점이 정치적 꿈을 지니고 있던 김현철에게는 넘기 어려운 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인환도 “모두 국회의원이 된 DJ(김대중) 아들들과 달리 정치적 불운을 겪은 셈”이라며 아쉬워했다. 
 

오인환 전 공보처 장관이 지난달 2일 여의도 공삼스튜디오에서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인터뷰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오인환 전 공보처 장관이 지난달 2일 여의도 공삼스튜디오에서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인터뷰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다음은 그의 관점.

개인적 입장으로 볼 때 같은 처지에 있었던 김대중의 세 아들은 모두 국회의원이 되는 진기록을 세웠다. 김홍일은 15·16·17대, 홍업은 17대를 했고, 홍걸은 2020년 민주당 비례 국회의원이다. 

이에 비하자면 김현철은 아버지의 반대로 정치적 불운을 겪은 셈이었다. YS는 정치 지망생인 아들의 정계 진출에는 긍정적이었으나, 민심을 거스르는 무리한 출마는 허락할 생각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김현철은 스스로도 두 차례에 걸쳐 국회의원 출마를 시도했다. 아버지의 고향인 거제도에 출마할 계획을 세웠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대통령이 내부 반발을 의식한 나머지 반대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대안으로 아버지의 선거구가 있는 부산 서구 출마 계획도 세웠으나 대통령이 반대해 대타로 나선 총무수석 홍인길이 국회에 입성했다. 

YS는 취임 전 중국의 장제스 일화를 들려주며 자숙할 것을 당부했다. 장제스는 국난 시기에 며느리가 보석을 많이 챙긴다는 소문을 듣고 자결하라는 메시지를 전할 만큼 총통 가족으로서 몸가짐을 강조했다. 

YS가 그 일화를 인용할 때 현장에는 김현철도 있었다. 

아버지로부터 신임을 얻었지만, 권력의 견제도 여실했다. 

하루는 이원종에게 ‘이 수석! 현철이를 너무 가까이하지 말라’고 한마디 했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순간 이원종은 ‘이 어른이 무서운 분이구나. 아들을 두고도 견제를 하시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선을 넘지 말라는 경고 메시지를 던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이 모두가 자신에 대한 접근은 엄격히 견제한 가운데서도 나름대로의 정치 수업을 시킨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다.

기본적으로는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정치 지망생의 꿈을 접어야 하는 정치 풍토를 인정하지 않는 원칙론을 고집한 측면도 있던 셈이었다. 

이는 YS와 김현철에 관해 기술한 오인환 책의 일부를 개략한 것이다.

대통령이었기에 아들의 장래에 대해 적극 나서지도, 그렇다고 모른척하기도 어려웠던 YS의 고뇌가 읽힌다.

 

신권력과의 균열


오인환 전 장관은 YS와 민주대장정을 함께한 최형우·김덕룡 민주계 인사들이 볼 때 김현철에 대한 시각은 또 달랐을 것이라고 가늠하고 있다.ⓒ시사오늘
오인환 전 장관은 YS와 민주대장정을 함께한 최형우(오른쪽)·김덕룡 민주계 인사들이 볼 때 김현철에 대한 시각은 또 달랐을 것이라고 가늠하고 있다.ⓒ시사오늘

한편으로 김현철의 부상은 정권 2·3인자(최형우·김덕룡)가 볼 때는 염려되는 일이었다. 대통령 가족이 국정에 개입하는 모양새로 비칠 것이 우려됐기 때문이다.

“각하. ‘현철이를 유학 보내야 합니다.”

일찍부터 이 부분에 대한 고뇌가 컸던 최형우는 관련해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얼마 안 돼 돌아오긴 했지만, 김현철 또한 해외로 나갔다 오기도 했다. 이후 김현철을 사이에 두고 YS와 최형우 간 언쟁은 높아져만 갔다. 

어느 정도였는지 아래는 최형우 측근의 전언.
 


“청와대1부속실 번호가 뜨면 대통령이 전화해달라는 얘기거든요. 도청이 우려돼 공중전화나 식당에 들어갑니다. 그럴 때마다 YS와 통화하는 최 장관 표정이 좋지 않은 거예요. 
‘우리가 이러려고 이랬습니까?’ 

수화기 너머의 YS 말은 들리지 않았지만, 같이 역정을 내는 듯 숨소리가 거칠더라고요. 떨어져 있어도 대충 무슨 얘기하는지가 들리잖아요. 
유추를 해보면 김현철 씨 문제로 다투고 있었던 겁니다.’”
-2023년 1월 <시사오늘> 인터뷰 중-

 

 

그러나 정치적 우려였을 뿐 인간적 감정이 안 좋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애틋했다고 한다. 

“장관은 아들 챙기는 마음으로 대했어요.” 

최형우 부인 원영일 여사는 올초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남편이 김현철을 각별하게 여겼음을 강조했다. 

“어릴 때부터 너무 잘 아니까…. 미국 가서 공부해 박사 학위 받고 오면 얼마든지 정치할 수 있다….”

어디까지나 애정 어린 조언이었다는 것이다.

“또 나도 이 나이만큼 먹고 내 자식들도 보고 하니까….” 

지금에 와서는 더욱 김현철의 애환이 이해가 간다는 말도 보태왔다.

“어떨 땐 현철 씨를 보면 불쌍한 거라. 돌아보면, 정치하던 집 2세들 중 제대로 된 경우가 별로 없어요. 아버지한테 쥐 눌리고…. 밖에 나가면 혹시 아버지에게 누가 될까, 이러면 안 된다, 저러면 안 된다. 항상 애들을 그렇게 누르고 키웠잖아. 특히 YS는 워낙 격동기 세월을 지냈기 때문에 자식들을 따뜻하게 못 보살폈잖아요. 엄마 혼자서 다 키우려니 얼마나 힘들어요.”

 

민주계의 한계 


오인환 전 공보처 장관이 지난달 2일 여의도 공삼스튜디오에서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인터뷰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오인환 전 공보처 장관이 지난달 2일 여의도 공삼스튜디오에서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인터뷰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하지만, 문민정부 당시로 돌아가면 신권력(김현철)과 민주계 간 균열은 불가피한 측면이 없지 않았다. 

반면에 같은 민주계이긴 하나 이원종은 생각이 달랐다. 

- 왜 달랐다고 봅니까. 가까운 관계여서요?

“(최형우나 김덕룡은) 김현철 씨가 초등학생일 때부터 봐왔으니 얼마나 까마득해 보였겠어요. 그러나 이원종 씨는 이제는 어른이고 잘하지 않냐….”

- 제 생각은 말입니다. 이원종은 자기 정치를 하지 않을 사람이니까 김현철과 친분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김덕룡 경우는 달랐다고 봅니다. 최형우와 함께 9룡이라 불리는 대선주자였잖습니까. 김덕룡 경우 자기 정치를 하려는 입장에서 그 같은 스탠스를 취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하거든요.

“…”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다시 질문을 이어갔다.

- 김현철은 정권 재창출을 위해 외연 확대가 최우선이라고 봤을 겁니다. 15대 총선에서 홍준표·이재오·김문수 등을 끌어들였던 것이겠죠. 자기 사람을 많이 심어야 했던 김덕룡 장관으로서는 불편할 수밖에 없지 않았나, 분석하기론 이렇습니다. 

“그 분석이 맞는 얘기에요.”

고개를 끄덕거렸다.

“김덕룡 씨는 YS를 거물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이죠. 다음 세대는 자기다. 독립된 정치인으로 준비하고 있었다고 봐요. 이원종 씨는 실력도 좋고 뛰어난 사람인데 선거 운이 없잖아요. YS를 성공시키는 것이 일생일대의 일이다, 100% YS 모시기에 전력을 다했다고 봐야죠. 그런 측면에서 김현철 씨가 볼 때는 이원종 씨가 더 고마웠을 거 아니에요.”

- YS가 무리하게 최형우를 주저앉히려다가 이회창한테 당권, 대권 모두 넘어간 것이 아니냐. 이런 분들도 있습니다. 이원종 발(發)로는 최형우가 대권에 나오지 말고 당권을 나오게끔 민주계에서 구상했다고 하던데요. 

“이원종 씨는 대통령의 수족, 혀 같은 사람이니까 대책을 강구했을 테죠. 개인적 관점에서 보면 YS가 최형우 씨를 대통령 후보감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 같은 인상을 받았어요.”

- 왜요?

“상도동의 최형우지, 대한민국의 최형우는 아니다 이거죠.”

- 자유 경선을 했다면 이겼지 않겠습니까.(그만큼 조직력이 막강했다)

“근데 쓰러졌잖아요. 도리가 없었던 거지. 침착하게 갔다면 역사가 달라질 수도 있었을지 모르죠.”

대권 행보를 이어가던 최형우는 1997년 3월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서석재 김덕룡 등 민주계 의원들과 조찬을 하던 중 쓰러져 뇌출혈 진단을 받았다. 그때 그 일이 아니었다면 대권은 아니더라도 당대표를 맡아 정권 재창출을 이끌지 않았겠느냐는 아쉬움이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 차라리 당 대선 경선 때 민주계끼리 후보단일화하고, 김덕룡·이인제·이수성 등이 단일대오를 만들었으면 이회창을 이기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글쎄요.”

갸우뚱하며 말을 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다들 뭉친다 해도 과연 이회창을 이길 수 있었겠느냐…. 없었다고 생각해요.”
- 왜 그렇다고 봅니까. 

“대세가 그렇게 가니까….”

이같은 말 줄임표에는 무수한 언어가 내포된 듯 여겨졌다.

문민정부 사람들 간 얽히고설킨 관계도와 주요 인물에 대한 평만 다뤄도 재평가 면에서 요긴할 듯싶었다. 앞서는 김현철을 중심으로 YS를 살펴봤다. 

미처 못다룬 대화를 통해서는 이회창부터 DJ와의 관계 등 재조명해야 할 것들이 많다. 

다음을 기약하며 미완으로 남긴다. 

담당업무 : 정치, 사회 전 분야를 다룹니다.
좌우명 : YS정신을 계승하자.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꿈은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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