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철 “모친도 아쉬워했던 YS의 총리 제안 거절…다 팔자소관” [時代散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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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철 “모친도 아쉬워했던 YS의 총리 제안 거절…다 팔자소관” [時代散策]
  • 정세운 기자,윤진석 기자
  • 승인 2023.07.25 14: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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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철 헌정회장 
“12대 총선서의 민한당 출마 권유는 DJ 오판”
“평민당 창당… DJ 따라간 이유는 의리 때문”
“YS 대통령 때 총리 제안 거절, 솔직히 후회”
“DJ 퇴임 후 미안하다 사과해와…고개 숙여”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정세운 기자, 윤진석 기자]

‘지나간 일은 되돌릴 수 없지만 다가올 일은 쫓을 수 있다.’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만약에, 라는 말을 하게 된다. ‘그때 그랬다면 어떻게 달라졌을까?’ 흥망성쇠도, 성패와 승패의 주역들 모두 바뀌었을지 모른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 계승할 것과 청산할 것을 만들어 다음 페이지로 넘기는 것. 그것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몫이다.

<시사오늘>은 그동안 역사적 증언을 모와왔다. 당대의 시사점을 오늘날에 반추하기 위해서다. 과오가 반복되지 않을 때 미래는 비로소 안개를 거둘 것이다. 오늘도 역사는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어느 시간 모퉁이에서 만난 한 사람 한 사건. ‘재발견’의 묘미가 있다. 시대산책이 현대사와 동행하는 이유다. 
​​​<편집자 주>

 

정대철 헌정회장이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1970년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현대사 사건들에 얽힌 시대를 조명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정대철 헌정회장이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1970년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현대사 사건들에 얽힌 시대를 조명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시대산책 ‖ 정대철 편 

  • 민주당 구파와 신파 계보는
  • 아버지 정일형과 DJ 인연은
  • 1971년 신민당 대선 당시는 
  • 유신 말기 1976년 명동 선언 
  • 77년 종로 무소속 출마 배경 
  • 1985년 민한당으로 나간 이유 
  • 87대선 DJ평민당 따라간 까닭
  • YS대통령 시절 총리 제안 비화 
  • 97년 대권 정대철, 당권 김상현
  • 3당 실패 원인과 옛민주당 복원
1944년 서울 출생, 아버지 정일형, 어머니 이태영, 배우자 김덕신, 장남 정호준 전 국회의원 등 2남 1녀, 경기고, 서울대 정치학 졸업, 미주리 대학 정치학 석·박사, 한양대 전임강사, 5선(9·10·13·14·16대). 민주화추진협의회 통일문제특별위원회 위원장, 평민당 대변인 및 정책위의장, 민주당 최고위원 및 부총재,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 KBO총재, 새천년민주당 대표, 국민의당 상임고문,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 현 헌정회장 

 

정대철 헌정회장을 만났다. 오랜만이다. 15년여 년 전쯤인가. 대담을 나눴을 때부터 가끔 봐왔다. 일정이 빼곡한지 인터뷰는 당초 시간 약속보다 늦어졌다. 이윽고 비서진이 부른다. 

지난 5일 오후 3시께 여의도 국회 헌정회관 로비. “하하하.” 화기애애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 무리의 인사들이 배웅을 받고 헌정회장실 문밖으로 나오고 있다. 손학규 전 바른미래당 대표도 보인다. “안녕하십니까.” 인사를 건넸다. “잘 있었는가?” 반갑게 악수부터 청해준다. 알아봐 주는 게 고마울 때가 있다. 역시 손학규. 

 “껄껄껄.” 

이날도 정 회장(이하 정대철)은 인터뷰 중간중간 화통하게 웃었다. 여느 때와 같이 액티브함이 넘친다. 고심할 때는 눈을 내리깔고 골몰하기 일쑤다. 재미난 일화를 전할 땐 팔 동작이 대범하다. 호탕함이 트레이드마크다. 

 

정치 명망가 집안 


정일형 박사는 국회의원 8선과 외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1982년 4월 27일 정일형 박사에 대한 사회장이 치러지고 있다.ⓒ연합뉴스
정일형 박사는 국회의원 8선과 외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1982년 4월 27일 정일형 박사에 대한 사회장이 치러지고 있다.ⓒ연합뉴스

부친은 정일형 박사다. 

- 부친하고 DJ(김대중)와의 관계 얘기 좀 해주죠. 1971년 DJ 대선 캠프도 부친 자택에서 차렸다고 하던데 맞습니까.

“민주당 신파가 장면·정일형·김대중이고 구파는 신익희·조병옥·유진산·김영삼 이렇게 되는 겁니다.”

대뜸 이 말부터 답한다. 

머릿속으로 어떻게 설명을 할까 도식부터 그리는 눈치다. 사전에 보낸 인터뷰요지에는 없는 질문이었다. 정대철은 굉장히 꼼꼼한 편이다. 손수 볼펜으로 답안을 작성해두고 인터뷰에 응한다. 이번 역시 본인이 직접 답글을 준비해두고 있었다. 이를 염두에 두고 말을 해야지 했다가, 다른 질문이 나오자 재빠르게 생각을 조립해나가는 모습. 인터뷰 초반 그의 눈길은 자주 바닥을 향했다. 생각을 더듬기 바빴다. 

“우리 아버지는 정일형. DJ는 정일형계의 김대중. 존칭은 다 생략합니다.”

이점부터 정립 후 이어갔다. 

“아버지와 DJ가 20년 차, 나와 DJ가 20년 차예요. 내가 고등학교 때부터 담배를 피웠는데 DJ가 가르쳐 준 겁니다(웃음).”

DJ는 정일형 집을 찾을 때가 많았다. 그럴 때면 정대철 방에 들어와 같이 담배를 피웠다. 

“담배를 물려준 거지. 껄껄. 인간적으로 가까웠어요.”

그의 집안은 정치인의 피가 흐른다. 아버지 정일형 박사는 외무부 장관과 국회의원만 8선을 역임했다. 어머니 이태영 박사는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이자 사회운동가였다. 부인은 무임소 장관과 국회의원을 지낸 박현숙 여사의 손녀다. 아들인 정호준은 초선을 지냈다. 정치인으로만 3대째 업을 이어오고 있다. 정일형 8선, 본인 5선, 아들은 초선이니 도합 14선에 이른다. 

 

1971년 대선후보 DJ


다시 옛이야기로 되돌아와 1971년 대선 때를 상기했다. 

“하여간 40대 기수론이 나와서 김대중·김영삼·이철승이 경쟁했잖소. 결과적으로 DJ가 되니까 아버지가 신민당 선대본부장을 맡았어요. 선거운동도 우리 집에서 많이 했고 말이요.”

하루는 선거 중간 불이 났다며 일화를 들려줬다. 

“경찰이 생뚱맞게 뭐라고 발표했냐면 ‘고양이가 불을 냈다!’”

-네? 

“하하하. 순식간에 ‘고양이가 불낸 집’으로 주위에서 통했지 뭐요.”

사람들이 ‘당신네 집은 고양이가 불 낸 집이야’ 놀려댔다고 한다.

흔적이 있을까. 옛날신문을 살펴봤다. 
 

“속보 = 신민당 선거대책본부장 정일형 의원집 화재 사건을 수사해온 서대문 경찰서는 5일 오후 화인을 과열된 연탄 아궁이불이 30cm가량 떨어진 곳에 널려있던 종이 부스러기 등에 옮겨붙으면서 일어난 것으로 단정…(중략)…문틈으로 스며든 바람이나 자주 드나드는 고양이가 물어 옮겼을 가능성은 있다고 덧붙였다.”
-1971년 2월 6일 <동아일보> 정일형 의원 집불…기사 중-


- 진짜 고양이가 불을 낸 겁니까.

“중앙정보부에서 그리 핑계를 댄 거지.”

방해 공작의 일환이라는 얘기였다.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DJ 선거를 도운 정일형 부부. 

“심지어 우리 어머니는 전국을 휩쓸고 다니며 지원 유세하기 바빴어요….”

하지만 “아쉽게 졌지.”

 

유신 저항 명동 선언 


대화는 1976년 명동 선언 당시로 넘어갔다. 부모님 이야기를 좀 더 하고 싶은 기색이 엿보였다. 

“윤보선·함석헌·김대중·정일형·우리 어머니(이태영)·문동환·문익환·함세웅·이문형 이런 분들이 박정희 대통령 물러가라고 한 거야.”

비판이 금지되던 유신 시절 시국선언문을 낭독한 것이었다. 정국이 발칵 뒤집혔다. 명동 사건이 터지자, 당국에서는 ‘정부전복 선동사건’이라며 탄압했다. 관련자들은 모두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기소됐다. 문익환·김대중·함세웅 등 11명은 구속됐고, 윤보선·정일형·함석헌 등 9명은 불구속됐다. 
 

서울삼성의료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한국 최초의 여성변호사 이태영 여사의 빈소에 조문객들이 방문해 애도를 표하고 있다.ⓒ연합뉴스
서울삼성의료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한국 최초의 여성변호사 이태영 여사의 빈소에 조문객들이 방문해 애도를 표하고 있다.ⓒ연합뉴스

“우리 엄마 아빠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불구속되긴 했지만, 유죄 판결받으면서 의원직도 상실되고, 변호사 자격도 박탈됐어요. 감옥 안 간 사람 중 손해가 제일 컸지.”

- 그 전에 궁금한 게 있습니다.

(끼어들며 말했다)

“??”

- 정당사를 정리하다 보니까 말이죠. 어떤 사람이 민주당 구파고, 어떤 사람이 신파입니까. 

“아까 얘기한 그런 맥으로 해서….”

정대철은 인터뷰 서두에 “민주당 신파가 장면·정일형·김대중이고 구파는 신익희·조병옥·유진산·김영삼 이렇게 되는 것”이라며 인물들을 쭉 열거한 바 있다. 

“신파가 미국 교육 좀 받고 개혁적인 칼라가 있었다면 구파는 전통적 지역을 기반으로 지방 토호 지주들이 많이 관여하는 분위기였어요.”

아버지 정일형은 유학파였다. DJ가 그 밑으로 들어갔으니 신파, YS(김영삼)는 신익희·조병옥 계보를 이어 구파가 됐다.

 

종로 무소속 당선 


정대철도 유학파 출신이다. 1977년 한양대 교수였던 그는 부친이 의원직을 상실하자, 지역구인 종로-중구 재보선에 무소속으로 도전했다.

- 왜 무소속으로 출마했습니까. 

“정당에서 공천을 안 줬어요.”

신민당을 말했다. 

- 왜입니까.

“이철승 씨가 당수였는데 정대철을 줄 수도 없고 안 줄 수도 없고 그랬던 것 같아요.”

- 이유가 뭔가요. 

“내가 운동권 강경파잖소.”

서울대 법대 출신으로 학생운동에 나섰다. 

“무기정학을 네 번인가 다섯 번인가 받았어요. 제적이란 게 없었을 땐데, 사실상 제적된 거나 마찬가지지. 말하자면 내가 최초의 운동권이었다, 이 말이야.”

자부심이 큰 듯 목소리 톤도 덩달아 커졌다. 

“문리대 쪽에는 김중태·김도현·현승일 이런 사람들이랑 같이 했었지. 학교에서 학생이 데모한다고 쫓아내기를 하나, 제적을 시키나. 참으로 아름다운 계절이었어.”

낭만을 회고했다. 피 끓는 청춘의 언저리를 더듬는 그의 눈빛에도 아름다운 계절이 스쳤다.

“암튼 이철승 씨 입장에서는 학생운동권 출신의 나를 신민당에 들여놓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게지. 중도통합론을 폈던 그가 볼 때 나는 상당히 거추장스러웠을 거 아니오. ‘저X을 집어넣으면 전체 분위기가 흐려질 것 같다’ 생각했겠지. 한편으론 정일형 박사 아들이니 안 줄 수도 없고 난감했겠지.”
 

정대철 헌정회장이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1970년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현대사 사건들에 얽힌 시대를 조명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정대철 헌정회장이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1970년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현대사 사건들에 얽힌 시대를 조명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우여곡절 끝에 결론은 무소속 출마로 가닥났다. 

- 종로 출마했을 때, 저도 구민이었어요. 유신 정권을 비판하며 유세 연설하던 장면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허허.”

세월이 느껴졌다. 

“내가 막 서른세 살에 나와서…백면서생이었는데 암튼 운 좋게….”

당선됐다. 

“우리 부모님은 유신 말기에 국회에 들어가 봤자 무슨 할 일이 있겠느냐며 반대했어요.” 

“박정희 독재정권을 결과적으로 인정해주는 효과만 있는 거 아니냐”는 뜻에서 만류했다고 한다. 

- 실제 국회에 입성했을 때는 어땠습니까. 

“감히 유신 정권을 비판하지 못하는 분위기였죠. 그러나 나는 쫓겨날 각오를 하고 ‘박정희 하야하라!’ 열두 번을 외쳤어.”

잠시 그때로 돌아간 듯 눈빛도 비장하고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민한당 출마의 변


이듬해 신민당에 입당한 정대철은 1978년 10대 총선에 나가 재선에 선출됐다. 79년에는 5·30 전당대회가 있었다. 유신 말기를 뒤흔든 분기점과도 같았다. 정대철은 DJ를 따라 선명 야당의 기치를 내걸고 출마한 YS(김영삼) 편에 섰다. 온건파이자 주류였던 이철승을 꺾고 총재로 선출된 YS는 당의 야당성을 회복해갔다. YH무역 철야농성을 주도한 데 이어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거침없이 유신 정권을 맹폭했다. 이 일로 YS는 의원직에서 제명되고 총재직도 박탈당했다. 최형우나 예춘호는 YS 총재직 복귀를 위해 의원들을 일일이 만나 서명운동에 동참해줄 것을 호소했다. 유신 정권이 두려워 많이들 망설일 때였다. 그러나 정대철은 시원스레 서명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정의와 기개, 의리가 넘쳤다는 평.

1980년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정치규제법에 활동이 제한됐다. 정대철은 또다시 미국 유학길에 올라 후일을 도모했다. 미주리 대학에서 공부하며 생업을 병행했다. 세탁소 일 등 고생을 많이 했다고 전해진다. 

- 이후 돌아와서는 12대 총선에 출마했잖습니까. 근데 왜 민한당으로 나갔습니까. 

“DJ가 미국서 부르더라고.”

신민당 창당 직전이었다. 
“민한당으로…. 나하고 조윤형하고 거기서 출마하라는 거예요. 정부와 타협하는 당이었는데….”
관제야당 소리를 듣고 있었다. 
“중간에 신민당이 창당됐잖아요? 그런데도 민한당에 나가라는 거야.”
DJ 말대로 민한당으로 출마했다. 결과는 낙선. 12대 총선에서 신당 돌풍은 거셌다. 
“DJ 말 믿다가 다 떨어지고 망신당하고…. 허헛.”

- DJ가 왜 오판한 겁니까.

“오판한 거지.”

질문을 잘못 들었는지 그리 말했다. 

“미안하다고 나중에 그러더라고. 아니. 미안한 건 좋지만, 그 양반 하라는 대로 사쿠라 정당에 들어갔다가 떨어진 것이니 창피한 건 내 몫이잖소? 그렇다고 DJ가 민한당에 들어가라고 했다고 동네방네 떠들 수도 없고.”

웃어넘기면서도 아쉬움이 묻어났다. 

정대철은 예전 본지 인터뷰에서 DJ가 오판한 이유에 대해 “DJ는 민한당이 이길 거로 봤다”며 “훗날 민한당을 접수해서 본인(DJ)이 대권주자가 되겠다는 심산이었을 것”이라고 가늠했다.

 

DJ 따라 평민당 


김대중 총재가 정대철 의원 등이 국회에서 열린 평민당 의원총회에서 현안 관련해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대중 총재가 정대철 의원 등이 국회에서 열린 평민당 의원총회에서 현안 관련해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연합뉴스

- 평민당은 왜 따라간 겁니까. 

“DJ가 가자고 그러니까 내가 갔어.”

- 처음엔 평민당 창당에 반대하지 않았습니까. 

“중간에 DJ한테 막 소리도 치고…. 내가 그랬어요. YS와 단일화하라고요. 안 그러면 안 쫓아가겠다고도 했어요. 근데 결국 3등 한 거 아니요? 단일화 판을 깬 게 결국 야당을 망하게 한 거예요. 돼서는 안 될 사람(노태우)이 된 거 아니오. (DJ가) 미안하다고 한 기억이 있어요.”

1987년 6월 항쟁은 승리했지만, 13대 대선을 앞두고 야권 단일화는 실패로 돌아갔다. 4자 필승론을 내세운 DJ는 새로이 당을 창당했다. YS 양보에도 야권 단일화 판을 깨고 독자 출마했다. 결과는 노태우 당선. 

- 어쨌든 DJ를 따라간 거 아닙니까. 명분으로 보면 YS가 있는 통일민주당에 남아있을 수도 있었는데 말이죠. 그 이유가 뭐냐는 거죠. DJ가 신파라서 그랬습니까.

“첫째는 DJ 인물이 출중하잖소. 물론 민주당 신파라는 것도 있었지. 어렸을 때부터 DJ와 막역한 것도 있고…. 또 호남세력은 늘 천대를 받았잖소. 그에 대한 동정론도 있었고….”

그는 동교동계 중에서는 범동교동계. 이너서클이 아닌 변방인이었다. 그럼에도 뼛속 깊은 DJ 사람임을 스스로 각인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쉽게 떨치지 못하는 속 깊은 애정이 묻어났다. 

“언젠가 국회의원 당선되고 난 직후인데….”

퍼뜩 일화가 생각났는지, 몸을 앞으로 숙이는 정대철.  

“이 양반이 감옥소에 있었을 때예요. 하루는 호남 교도관이 찾아왔어. 담배껍질에다 적은 편지를 주는 거야. 요만한 금박지 알지?”

- 네.

“교도관 말로는 그걸 DJ가 줬다는 거요. 펼쳐보니 ‘존경하는 정대철 당선을 축하합니다. 우리가 집권하려면 군을 막아야 하네. 내무위원으로 들어간 거로 아는데 국방위원으로 즉시 바꾸게. 긴 얘기는 나중에 하세.’ 요게 다야. 껄껄껄.”

- 많이 알려진 얘깁니까? 

“그래서 국방위원에 갔지.”

동문서답하듯 질문을 넘기며 하려던 말을 이어갔다. 

“하여튼 김대중 사기꾼이다, 공산당이다…. 국방위원회에서도 갖은 모함이 들려오는데 내가 군인들 만나 그랬어요. DJ는 그런 사람 아니라고. 엄청 변호하고 다녔지.”

 

YS 영입 거절 


- 근데 스타일은 YS와 더 잘 맞았지 않습니까. 

“DJ가 감옥에 있을 때가 많았잖소. 개인적으로는 DJ 파라고 하지만, 그 양반은 옥고를 치를 때가 빈번했지. 사실상 현실적인 정치는 YS 총재 밑에서 할 때가 많았어요.”

1977년부터 1987년까지 10년간 YS 밑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YS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 적극 영입하려 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고사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명동의 퍼시픽호텔이라고 있어요.”

거기서 만났다. 

#회고, 퍼시픽호텔, YS와 정대철 

YS : 자네는 DJ보다 나하고 잘 맞는 사람이야. 십 년 동안 나하고 같이 고생해 온 동지 아이가? 나와 같이 하세. 자네를 국무총리로 임명하겠네. 또 자네를 따라다니는 현역 국회의원들 말고도 새로 5명의 전국구 국회의원 추천권도 주겠네. 며칠 내 김덕룡 의원한테 Yes라고 말하게. 알겠지?

2009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송년 모임 현장. YS와 그를 존경하는 정치인들이 대거 참석해 있다.ⓒ연합뉴스
2009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송년 모임 현장. YS와 그를 존경하는 정치인들이 대거 참석해 있다.ⓒ연합뉴스

하지만, 정대철은 얼마 안 가 No라고 답했다. 

“YS가 무척 실망하는 모습이었다고, 김덕룡 의원으로부터 전해 들었어.”

이내 미안한 목소리다. 

“내가 국무총리 준다니까 무조건 따라올 줄 알았나 봐. 근데 못 갔어.”

- 왜 못 갔습니까. 

“YS가 삼당합당한 것도 마땅치 않았고, DJ와의 관계도 있고…. 내 성격상 왔다 갔다 하는 게 맞지 않는다고 본 거지.”

- 정치 역정상 갔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하핫.”

주마등처럼 여러 굴곡진 장면들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기라도 한 걸까. 절로 긴 탄식이 새어 나왔다. 

“좀 아쉽지. 가서 총리했으면….”

입맛을 다셨다. 

- 그러게나 말입니다.

“DJ 꼬붕이나, YS 꼬붕이나….”

그는 누구누구 직속 계파를 두고 부하를 가리키는 속어인 ‘꼬붕’에 빗댔다.

“두 양반 오고 가는 일이야 배신하는 것도 아닐 텐데…. 그 당시에는 내가 졸 깔끔했던 거지.”

혼잣말하듯 읊조렸다. 

“DJ가 나중에 나한테 그래. ‘너 나 때문에 안 넘어갔지?’ ‘예’ ‘미안하고 고마워’ 그러더라고.”

- 어쨌든 후회되지요? 

“….”

집요하게 물었다.  

“YS 퇴임 후 상도동에 신년인사차 들렀더니 ‘봐라. 봐라. 내가 뭐라카드나. 니는 김대중 정권 들어서자마자 보복으로 첫째 빳다로 감옥소 가지 않았나. 있을 수 없는 일이데이…’ 하더라고. 상도동을 부랴부랴 나올 수밖에 없었지.”

뼈아픈 후회일까. 이 말로 대신했다. 그는 1998년 KBO(한국야구위원회) 총재 시절 주변인들의 이간으로 DJ에 눈 밖에 나 수뢰 혐의로 구속됐다고 한 바 있다. 

 

97 대선 경선의 오해


DJ를 비롯해 김상현·정대철 대선 경선 후보가 서울 잠실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열린 국민회의 전당대회에 단상에 올라 손을 맞잡고 있다.ⓒ연합뉴스
DJ를 비롯해 김상현·정대철 대선 경선 후보가 서울 잠실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열린 국민회의 전당대회에 단상에 올라 손을 맞잡고 있다.ⓒ연합뉴스

- 사실상 미운 털이 박힌 것은 1997 대선 경선 때부터 아닙니까. 당시 당권은 김상현, 대권은 정대철 연합이 부상하지 않습니까. DJ 대안 인물로 떠오르면서 ‘본선에서 될 사람 밀어달라’며 경선에도 출마했습니다. 

“우리야 당선되리라 생각 안 했지.”

- 차기를 염두에 둔 겁니까. 

“그랬지. 다음엔 우리 거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서 DJ도 찾아갔던 거예요.”

- 찾아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그게 그러니까.”
 

# DJ자택, 김상현과 정대철 

김상현+정대철 : 혼자 나오는 것보다 경선하는 것이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번 경선에서 20~25%밖에 안 나올 것을 저희는 잘 알고 있습니다마는 DJ 이후 사전포석으로 나온 것이니 잘 이해해주십시오.

- DJ는 뭐라고 하던가요.

“그렇게 하라고 격려해주더라고.”

- 하지만 뒤끝이 안 좋았잖습니까.

“양해한다고 그래놓고, 막상 대통령 되고 나니까 자기가 그랬는지, 이너서클에서 그랬는지, 김상현 공천 안 주고, 나는 감옥 넣고…”

기차했다. 

“우리 따라 다니던 50~60명의 비주류 의원들 모두 깡그리 공천을 안 줬지 뭐요.”

- 왜 그랬다고 봅니까.

“보복이지. 보복.”

- 본인은 이미 대통령이 됐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요. 

“밑에 있는 사람들이 주로 그랬을 거예요. 본때를 보여야 한다. 하지 않았겠어?”

- DJ한테 원망이 들지 않았습니까. 

“돌아가시기 전에 만났는데 말요.”

2008년쯤이라고 했다. 

“점심을 먹으러 갔더니 첫마디가 ‘미안해’ 그래. 내가 고개만 이리 숙이고 있었더니 ‘자네가 나갔으면 노무현이가 어떻게 대통령이 됐겠나.’ 그 두 마디가 딱이야. 재판받느라 대권 도전할 기회를 놓치게 돼 미안하게 됐다. 이 소리지.”

담담하게 말했지만 응어리짐이 완전히 풀어져 보이진 않았다. 

“또 뭐라고 했더라….”

생각날 듯 말 듯 양미간을 찌푸렸다.

“아, 맞다!” 

다음은 회상 

# 동교동, DJ와 정대철

DJ: 자네. 통일원 부총리는 왜 안 받았나. 
정대철 : 제가 물어보고 싶은 말입니다.
DJ : 무슨 소리야? 아무개가 청와대에 와서는 자네가 극렬히 반대했다고 하던데?
정대철 : 제가요?

당시를 설명하는 정대철의 눈동자가 그때로 돌아간 듯 동그랗게 커졌다.

- 어떻게 된 일입니까? 

“누구라고 거론은 못하지만, 그 사람이 통일원 부총리를 하더라고.”

의중을 달리 전해 열매를 가로챘다는 말로 들렸다.

“자기가 하고 싶었던 게지. 나중엔 나를 보면 멀리서도 피하더라고.”
 

국민회의 간부회의에서 김상현과 정대철 등 동교동계 정치인들이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민회의 간부회의에서 김상현과 정대철 등 동교동계 정치인들이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 여하튼 DJ정부 아래에서 혜택받은 건 없네요. 
 
“나는 그래도 당대표라도 했지. 하하.”

그는 아무리 아픈 일도 웃음으로 승화하는 재주가 있다. 

“김상현은 그마저도 못했어요. 내가 DJ라면 김상현 같은 사람을 당대표 시켜. 자기를 대통령 만들어준 사람이잖소.”

DJ가 1971년 신민당 대선 후보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망명 와중 민추협을 통해 YS와 양대산맥을 이루는 지도자로서 존재감을 지킬 수 있던 것도 후농 김상현의 공이 컸다는 평가다. 

- 후농과 인터뷰했을 때 그러던데 그 흔한 사무총장 하나 못했다고 하더라고요. 

“사무총장 한번도 못했어요.”

- 또, 궁금한 게 DJ와 YS 성격 말인데요. 

“거꾸로예요.”

뜸 들이는 법 없이 거침이 없다. 

“YS는 주요 인사를 해도 자기 꼬붕들로 다 시켰잖아요. 그뿐이야? 아무 관계없는 이회창·이수성·이홍구까지 국무총리를 시켰어요. 죄다 인물로 키우잖아. 반면에 DJ는 정대철·김상현 등 총리감 될 만한 사람들도 안 시켰어요.”

- 왜 그렇다고 봅니까.

“성격이 다른데 어떡해.”

- 최형우 장관 경우, YS와 밥 먹다가 성을 내며 발로 밥상을 걷어차도 내무부장관 시켜줬다고 하더라고요.

 “발로 차고 분명 그랬을 거야. 껄껄.”

웃느라 어깨가 흔들렸다. 

“최형우는 만나면 욕부터 나와. 그게 반갑다는 표시야. 그 성격 내 잘 알지.”

호탕하게 목을 뒤로 젖히더니 “YS가 폭이 넓긴 넓어”로 마무리했다.

- YS가 부를 때 가서 총리하지 그랬습니까.

“내 아까 말했잖소. 그때는 마음이 걸려서 말이야. 하긴, 우리 엄마(이태영)도 YS와 DJ 사이에서 무슨 배신이냐…. 근데 어떡해. 팔자소관인걸.”

초연함을 견지했다. 

 

여의치 않던 대권 


정대철 헌정회장이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1970년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현대사 사건들에 얽힌 시대를 조명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정대철 헌정회장이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1970년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현대사 사건들에 얽힌 시대를 조명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정치는 팔할, 구할이 운이라고 한다. 그 뒤에도 대권 기회는 여의치 못했다. 노무현 정권 때는 참여정부 출범 1등 공신임에도 정치 휴지기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재판받으며 세월을 보내야 했다. 선거자금법 혐의는 무죄로 끝났지만, 또 훌쩍 5년이 지났다. 

- 노무현 대통령한테도 서운할 법도 한 데 말입니다. 

“아니에요.”

고개를 저었다. 

“나를 좋아했고 나도 그랬어요.”

삼킬 것은 삼켰다. 

- 이것도 궁금한 게 YS·DJ 때는 김영삼 정당, 김대중 정당을 만들어 깃발 꽂으면 됐잖습니까. 노무현 대통령 때도 그 중심으로 정당이 만들어질 수 있었고 말입니다. 지금은 그러기가 사실상 불가능하지 않나 싶은데요.

“새로운 정당?”

- 네.

“지금은 제3정당 만들기가 쉽지 않아요. 강력한 대통령 후보감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잖소.”

- 회장께서도 3지대 새정치 활로 모색에 앞장섰던 때가 있었는데 말이죠. 국민의당과 민주평화당 창당에 관여했는데 실패한 원인은 무엇입니까. 

“국민의당은 안철수 후보가 대통령감이라고 생각해 처음에 동조했던 건데….”

내심 별로 돌이키고 싶지 않은 듯 보였지만, 주섬주섬 말을 이어갔다.

“문재인 후보한테 크게 실망한 데다 이희호 여사도 안철수를 밀면 좋겠다고 했고, 권노갑·박지원 등 동교동계 의원들도 안철수를 밀자고 도원결의했거든요.”

- 아, 그렇습니까. 

“근데 안철수 보니까 저 혼자 옳아. 유승민하고 바른미래당 만들면서 한마디 의논도 없었어요. 우리가 전화해도 안 받고. 또, 돈도 한 푼 안 써. 정치라는 게 사람을 만나는 일이잖소. 밥 먹고 차 마시려면 최소한의 돈이라도 들잖소. 큰일 하려면 자금하고 조직하고 몇 가지가 필요한 일인데 돈도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낼 생각을 안 해.”

두 손 두 발 들어 보였다. 

“식사 한번 사도 되는데, 그런 것도 전혀 없더라고.”

그러면서도 “기본이 안 돼 있어, 내가 나쁘다고 하는 게 아니에요. 돈 안 쓰고 정치하겠다는 나름의 소신인지는 몰라도 더불어 생활하는 정치인으로는 부적격자야.”

돈을 안 쓴다고는 하지만, 지난 대선 윤석열 대통령과의 단일화를 위해 선거자금으로 쓴 개인 돈 70억 원을 포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복심 김도식 전 서울시 정무부시장은 이를 두고 <시사오늘>과의 대화에서 “안 의원의 1500억 원 기부는 익히 잘 알 것이고, 20대 대선 때도 끝까지 완주했다면 선거 비용을 보전받을 수 있었지만, 정권교체를 위해 본인의 희생을 감수하고 윤석열 대통령과의 단일화에 나선 것”이라고 한 바 있다. 

- 한편으로 지금까지 정치인으로서 생존하고 있는 것 보면 대단한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지도자가 안 됐지. 이류 지도자가 되고 말았잖소. 겪어보고는 다들 떨어져 나갔잖아?”

풍문으론 한때 유력 대선주자라는 말이 무색하게 지난 전당대회 이후 조직이 많이 와해됐다고 한다. 

- 고치면 나아질까요. 

“60대인데 고쳐지겠소. 정치하면 안 될 사람이라고 나는 그렇게 정리했어요.”

더는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본인 생각이야 그렇겠지만, 내년 총선을 앞두고 다시금 안철수의 역할론이 대두되는 분위기다. ‘윤석열+안철수 단일화’를 적극 지지했던 신평 전 경북대 교수는 최근 MBC 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안철수 의원만큼 수도권과 중도층 마음을 가져올 수 있는 정치인은 없다”며 선대위원장 등 역할을 줘야 한다고 강변했다. 

갈무리할 겸 민주당 얘기로 전환했다. 

- 지금의 더불어민주당 뿌리는 신파로 보면 됩니까. 

“백 퍼센트 586정당이에요. 옛날 구파·신파와는 관계없다고 보면 돼요. DJ, 노무현, 문재인 중에는 문재인에 가깝고 말이요.”

단언했다. 

“이들에게는 신익희·조병옥·장면·정일형·유진산·김대중·김영삼은 남이에요. 우리 당 기록에 있는 사람 정도지,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던가 그런 게 전혀 없더라고.”

솔직한 생각이었다. 

어쨌든 정대철은 신파구파 모두 민주당의 뿌리로 보는 듯했다. 그러나 굳이 따지자면 민주당 구파의 정통성은 신익희·조병옥 계보를 잇는 YS로 말미암아 국민의힘으로 넘어왔다. 지금의 더불어민주당은 민주당 신파 계보인 DJ부터 시작됐다고 함이 옳다. 

차치하고 다음에 주목하며 물어갔다.

- 왜 586정당이 됐다고 봅니까. 그들 운동권 출신 대다수가 어느 날 정치권에 발탁된 경우가 많긴 한데 말이죠. 아무래도 밑에서부터 배우며 경륜을 다져온 계보정치와는 거리가 멀어서 그런 걸까요. 

“데모하던 사람들 전부 갖다 쓰면서 정통성이 없어진 것이지. 갑자기 계층이 단절돼 버렸어요.”

한숨을 쉬었다. 

“내가 요즘 권노갑·김원기·임채정·문희상 등과 교류하고 있는데 말이요. 정통성을 회복할 수 있는 이들이 다시 (국회로)들어와야 한다는 게 공통된 의견이에요. 박지원부터 전병헌, 천정배, 정동영 등도 내년 총선에 출마한다고 그러고…. 옛날 민주당을 복원시켜야 해요.” 

- 이재명 대표 체제에서 그게 가능할까요. 

“그런 방향으로 가야지.”

- 지난 민주당 대선 경선 당시 이낙연 전 대표를 지지했잖습니까. 이 전 대표가 다시 정치에 복귀했는데 기대는 여전한지도 궁금합니다. 

“정치라는 건 운이 닿아야 하잖소. 열심히 한다니까 지켜봐야지.” 

여전히 그쪽에 기우는 듯했다. 

좀 더 여담 반 질문을 이어가려는 찰나 ‘똑똑’ 비서진이 들어와 다음 일정이 있으니 서둘러 마무리할 것을 독촉했다. 못내 아쉽게 일어났다. 

“또 뵙겠습니다.”

담당업무 : 정치, 사회 전 분야를 다룹니다.
좌우명 : YS정신을 계승하자.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꿈은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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