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조 “YS·JP 손잡았다면, 전두환 정권 없었다” [時代散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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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조 “YS·JP 손잡았다면, 전두환 정권 없었다” [時代散策]
  • 정세운 기자,윤진석 기자
  • 승인 2024.02.21 10: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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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조 민주동지회 회장 
“박정희 서거 후 JP참모그룹 민족중흥동지회서 
YS-JP 손잡고 공동정권 창출하자고 회동 제안
약속시간 불발 되면서 서울의봄 잃은 것 아쉬워”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정세운 기자, 윤진석 기자]

YS 최측근이자 야당성투쟁회복동지회 결성 멤버인 김봉조 민주동지회 회장이 지난해 12월 13일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YS 최측근이자 야당성투쟁회복동지회 결성 멤버인 김봉조 민주동지회 회장이 지난해 12월 13일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지나간 일은 되돌릴 수 없지만 다가올 일은 쫓을 수 있다.’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만약에, 라는 말을 하게 된다. ‘그때 그랬다면 어떻게 달라졌을까?’ 흥망성쇠도, 성패와 승패의 주역들 모두 바뀌었을지 모른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 계승할 것과 청산할 것을 만들어 다음 페이지로 넘기는 것. 그것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몫이다. 

<시사오늘>은 그동안 역사적 증언을 모아왔다. 당대의 시사점을 오늘날에 반추하기 위해서다. 과오가 반복되지 않을 때 미래는 비로소 안개를 거둘 것이다. 오늘도 역사는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어느 시간 모퉁이에서 만난 한 사람 한 사건. ‘재발견’의 묘미가 있다. 시대산책이 현대사와 동행하는 이유다. 
<편집자 주>

 

시대산책 김봉조 편 

  • “야당성투쟁회복동지회 배경, 1974년 전대부터 봐야”
  • “이철승 편 섰던 이충환‧고흥문이 야투 참여한 까닭은…”
  • “신도환‧중정부장 결탁 폭로, YS 최연소 총재된 결정타”
  • “야투가 있어 1979년 YS가 당권 탈환할 수 있었던 것”
  • “YS 큰일 할 분이라던 김재규, 10‧26 우발 아닌 계획”
  • “5‧30 전당대회 DJ 지지는 운신의 폭 넓히기 위한 것”
  • “5‧30 전당대회에서 이기택의 YS 지지는 역사적 순리”
  • “이기택, 3당합당 때 YS 안 따라가서 후일 대권 놓쳐”
  • “박정희 서거 후 YS, JP와 정권 창출할 뻔했지만 불발”
  • “회담 후 배신감 느꼈지만 박정희 장례식장 제일 먼저”
  • “문민정부 직후 '다 생각이 있어' 말한 뒤 하나회 청산”
  • “상도동계 사슴파보단 1세대 7‧5동지회가 정통이라 봐”
1938년 경상남도 거제 출생, 상도동계, YS 비서, 12~14대 국회의원, 마사회 회장, 21세기 정책연구소 회장, 민주동지회 회장 

 

때는 유신. 1974년 1월 박정희 정권은 야당(신민당)의 움직임에 서둘러 긴급조치 1‧2호를 발동했다. 

유신을 비판하면 징역에 처한다고 엄포를 놓았다. 야당의 부총재는 김영삼(YS)이었다. 신민당 총재인 유진산에게 개헌을 통해 유신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설득한 인물도 YS였다. 

박 정권으로서는 YS가 눈엣가시였다. 긴급조치 발동도 YS를 겨냥한 조치였다. 
그러던 중 야당 총재이던 유진산이 갑자기 쓰러졌다. 의사의 진단은 암이었다. 뒤늦게 발견된 터라 손 쓸 길도 없었다. 얼마 못가 4월 28일 별세했다.  

신민당은 공백을 메워야 했다. 그해 8월 22일 명동 예술극장에서 전당대회를 열기로 했다.  

 

8‧22 전당대회 


YS는 선명노선을 기치로 당권에 도전했다. 김의택‧정해영‧고흥문‧이철승 등이 후보에 나섰다. 

전당대회 당일 명동 국립극장 안의 열기는 한여름 온도를 능가했다. 

1차 투표에서 YS는 1등을 했지만 과반을 넘기지 못했다. 결선투표를 해야 했다. YS와 유진산계인 김의택 간 대결이 시작됐다.

그때 김의택 측 청년들이 무대로 난입했다. 편파성을 주장하며 난동을 부려댔다. 이대로는 결선투표를 할 수 없으니 다음날 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YS 측은 말도 안 된다며 펄쩍 뛰었다. 전당대회 순리대로 결선투표까지 같은 날 끝을 봐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다수의 생각도 그러했다. 

반면에 김의택 측은 다음날로 미뤄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들은 왜 다음날 하자고 한 것일까.

“말하자면 중앙정보부 자금을 신민당 당원들에게 살포해 여론을 뒤집어 엎겠다는 의도였다고 보여요.” 
 

YS 최측근이자 야당성투쟁회복동지회 결성 멤버인 김봉조 민주동지회 회장이 지난해 12월 13일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YS 최측근이자 야당성투쟁회복동지회 결성 멤버인 김봉조 민주동지회 회장이 지난해 12월 13일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이 말을 하는 이는 김봉조 민주동지회 회장. 홍조 띤 얼굴로 자신의 추측이 틀림없다는 듯 목소리에 힘을 줬다. 

그는 YS 최측근이다. YS와 동향(경남 거제)이다. 김동영‧김덕룡‧서석재와 함께 YS를 보좌했다. 민주화대장정을 함께한 상도동계 1세대다. 거제에서 12대부터 14대까지 3선을 역임했다. 마사회장을 지낸 뒤 상도동계 민주세력 모임인 민주동지회 회장을 맡고 있다. 

지난해 12월 여의도 민주동지회 사무실에서 만남을 가졌다. 

집무실 안엔 볕이 잘 들었다. 오래되고 변색된 벽지에서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다. 응접실 테이블과 소파 모두 시간의 나이가 느껴졌다. 커다란 창문을 투시해 들어오는 밝은 빛 사이로 그의 움직임처럼 천천히 먼지들이 떠다녔다. 

1938년생이다. 나이 여든을 훌쩍 넘어섰다. 과거를 되짚어나간 어느 대목에서는 시간의 순서가 잠시 엉키기도 했다. 그랬다가도 정정한 뒤 다시금 또렷이 증언했다. 

다시 1974년 8월 전당대회 얘기로 돌아가면, 결선투표까지 당일 끝내야 한다는 YS 측과 다음날로 미루자는 김의택 측은 치열하게 대립했다. 

“그런데 사무총장인 신도환 씨가 극장측과의 계약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며 다음날(8월 23일) 오전 10시에 모여 2차 투표를 하겠다고 선언해 버린 거예요.”

하지만, 이는 김봉조가 확인한 것과 달랐다. 

“국립극장 대관 계약서를 확인하니 애초부터 대관은 양이틀 계약으로 돼 있던 거예요. 그리고 신도환이 중앙정보부 요원과 만나 걸어 나오는 장면을 목격하게 됐어요. 모종의 불길한 뭔가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 즉시 사진을 찍어 훗날 증거가 될 만한 장면을 기록해뒀지요. 이후 전당대회 당일 김의택 측의 소동이 있자 전에 본 상황을 폭로했던 겁니다.”
 
그러자 난리가 났다. 중앙당 소속의 청년당직자들이 금세라도 김봉조를 때릴 듯이 달려들었다. 대의원들이 김봉조를 보호하기 위해 막아섰고 판세는 극적으로 뒤집혀졌다. 
 
김의택 또한 더 이상 손쓸 길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후보직 사퇴를 선언했다. YS는 결선 투표할 필요도 없게 됐다. 자동 총재로 선출됐다. 40대 나이의 최연소 총재가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야투 결성의 시작 


YS는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 종식을 목표로 개헌 요구에 돌입했다. 박정희로서는 YS가 걸림돌이었다. 유신을 비판한 회견을 꼬투리 삼아 긴급조치 9호를 위반했다며 측근인 김덕룡을 구속했다. 

1976년 5월 25일 신민당은 전당대회를 앞두고 있었다. 중정부장인 차지철이 YS 반대파인 이철승을 물밑에서 지원했다. 이철승은 신도환‧고흥문‧정해영‧정운갑‧김원만 등과 반YS파를 만들었다. 대회 당일 이철승 측 불량배들이 각목을 들고 난입해 당원들을 가로막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YS한테 투표하지 못하게 대회장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서기까지 했다. 

우여곡절 끝에 전당대회는 9월에 다시 치러졌다. 이철승은 YS식 단일지도체제에 반대하는 연합전선을 구축했다. 그 결과 집단지도체제를 고리로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됐다. 당권을 거머쥔 이철승은 중도통합론을 내세워 박정희 정권에 협조했다. YS가 당수였을 때만 해도 신민당은 유신에 반대하는 선명야당 노선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이철승 체제가 되면서 당은 유화적 온건 노선의 길을 밟게 됐다.

YS 최측근이자 야당성투쟁회복동지회 결성 멤버인 김봉조 민주동지회 회장이 지난해 12월 13일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YS 최측근이자 야당성투쟁회복동지회 결성 멤버인 김봉조 민주동지회 회장이 지난해 12월 13일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야당성회복투쟁동지회(야투)는 이 같은 배경에서 출범했다. 김봉조도 유신에 저항했던 야투의 멤버였다. 

 YS(김영삼)계는 1977년 4월 18일 서울 종로 신민당 지역 사무실에서 야투를 결성했다. YS계를 비롯해 신민당의 이충환, 유치송, 고흥문, 김재광, 정해영 씨 등 33명 인사가 참여했다. 

많이들 별세하고 김봉조 외에 김태룡 등이 남아있다.

김봉조는 야투에 대해 말하기를,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을 선포하고 난 후 옳게 대응해나갈 정치세력이 없다시피 했어요. 국민의 여망을 받들어 우리가 투쟁하기 시작한 거죠.”
 

 

 

# 다음은 김봉조 회고 

이철승은 극단적인 대결보다 타협적인 길로 가자는 주의였다. 야당의 자세가 아닌 친여당적인 자세였다. 어용야당이 하는 짓에 불과했다. 독재에 항거하지 못하는 야당은 미래도 희망도 없다고 봤다. 친여적인 야당으로 평가를 받게 된 이상 우리는 이 같은 야당을 인정할 수 없다고 보고 야투를 만들었다. 그때는 현역이 아니니까 김태룡 등이 주동이 돼서 처음엔 원외세력 중심으로 만들어 투쟁을 했던 게 야투였다. 

 

관련해 당시 신문을 들췄다. 
 

“이들은 정일형 씨가 위원장으로 있는 신민당 종로 중구 사무실에서 모임을 갖고 최경식, 김기옥, 이우태, 함기환, 김성만 씨를 공동의장으로, 김영배 씨를 총무, 백관옥 씨를 조직, 선전에 김태룡, 재정에 정상준 씨를 각각 책임자로 선정하고 취지문과 결의문을 채택했다.
취지문은 ‘구당이 구국이라는 신념아래 우리의 힘으로 야당성 회복을 위한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빈사에 직면한 당을 구출하기 위해 일어섰다’고 밝혔다. 결의문을 통해 이들은 전통야당 본연의 자세를 되찾을 것을 강조하고, 대표최고위원은 반민주적이며 반당적인 국내외 발언으로 당의 위신을 크게 손상시킨 책임을 명백히 하라고 요구했다.”
-<조선일보> 1977년 4월 19일 기사 중-


- 이충환‧고흥문은 이철승 편에 선 주류였는데 어떻게 야투에 참여하게 된 겁니까. 

김봉조는 이 질문에 딱 떨어지는 답을 하지는 않았지만, 시대의 물줄기를 거스르기 어려웠을 거라는 취지로 답을 했다. 

당이 갈수록 관제야당이 돼간다는 사쿠라 비판을 받게 되면서 이철승 편에 섰던 이충환‧고흥문‧김재광‧정해영 또한 우려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에 당의 노선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야당성 회복 운동에 저마다들 공감을 표했던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다. 전통야당의 본령을 되찾겠다는 생각에서 YS세력이 주축으로 만든 야투에 동참할 수 있었다고 보인다. 

- 실질적으로 야투를 이끈 사람들은 상도동계 사람들이라고 하던데요.

“맞아요.”

- 상도동계 사람들이 주축이 됐던 이유는 뭐였습니까. YS 중심으로 당권을 다시 되찾기 위한 것이었습니까. 

“다른 계파에서는 중책을 맡을 만한 원외 인사들이 없었어요. 기자들도 주로 상도동 사람들에게 몰리니까…. 서석재‧김동영‧심완구‧복진풍 이런 사람들에게 모였지.”

- 야투 활동 때문에 공천을 못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무소속으로 출마해 낙선했지요. 이철승을 공격하는 세력은 공천을 줄 리 없거든.”

- 이철승 입장에서는 해당행위로 봤기 때문일까요. 

“맨날 우리를…. 말하자면 눈엣가시로 여긴 거예요.”

- 1979년 5월 30일 YS가 당권을 재탈환하잖아요. 야투가 구심점 역할을 해줬다고 보는데 이에 동의하나요. 

“야투가 투쟁하지 않았으면 방향을 바로잡을 세력이 없었어요. 국민이 볼 때 야투는 이철승 대항마와 같은 정치세력으로 커버린 거야.”

 

5‧30 전대와 김재규 


1975년 5월 30일 마포에서 열린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총재로 선출된 YS가 지지자들의 환영을 받으며 활짝 웃고 있다.ⓒ연합뉴스
1975년 5월 30일 마포에서 열린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총재로 선출된 YS가 지지자들의 환영을 받으며 활짝 웃고 있다.ⓒ연합뉴스

 

구체적으로 YS가 5‧30 전당대회에서 승리할 수 있던 요인은 무엇일까. 

- 우선 가택연금 중이던 DJ(김대중)가 5‧30 전당대회 하루 전 을지로 아서원(중국집)에 나타나 YS를 지지한다고 선언하지 않습니까. 왜 그랬다고 봅니까.

“DJ는 말하자면 망명파였어요. YS 혼자 국내에서 박정희와 정면으로 맞서고 아스팔트 위에서 투쟁하고 연행됐잖소. DJ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됐거든요. 운신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라도 안 올 수가 없었다고 봐요.”

- 가택연금 당하던 DJ가 아서원에 올 수 있던 것은 당시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가 눈을 감아줬기 때문이라는 얘기들도 있습니다. 어떻게 봅니까.

“감았는지 떴는지는 모르겠는데….”

나름의 유머로 느껴졌다. 

“김재규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 다음은 김봉조 회고 

김재규는 김녕김씨다. 종친회 회장을 하고 있다. 회장이 되던 날 김녕김씨인 김봉조도 총회에 참석했다. 
“축하합니다.”
김봉조는 상도동계 비서를 맡고 있었다. 
“내 사무실에 들리게. 차나 한잔하지.”
인사차 그러는지 모르지만 김재규는 종친회 회원인 김봉조에 관심을 보였다. 중정부장을 만난다는 것이 옳지 못한 것 같아, YS한테 허락을 구했다. 
“어. 가봐.”
YS는 흔쾌히 수락했다. 
김재규 집무실은 광화문에 있는 보안사령관실에 마련돼 있었다. 김재규가 차를 한 잔 내놓으면서 이 말을 꺼냈다.
“김영삼 총재가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할 어른입니다. 잘 모시세요.”

순간 김봉조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고 한다.

- 깜짝 놀랐겠습니다.  

“강신옥 변호사라고….”

강신옥은 10‧26사태 이후 김재규 변론을 맡은 변호사다. 이야기는 10‧26 관련으로 넘어왔다. 

- 10‧26도 말하자면 우발적인 게 아니고 계획적이었다는 얘기가 있잖습니까. 

김봉조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강신옥 변호사가 그러더라고. 박정희를 사사롭게 쏜 게 아니라고 말이요. 부마사태로 말미암아 수습할 길이 없다, 당신이 하야할 수밖에 없다. 이런 뜻이 있었다는 거라.”

- 박정희 정권 당시 김동규 상공부 차관이 있었잖습니까. 김녕김씨거든요. 시해하기 한 달 전 김재규를 만났는데 ‘큰일을 저지를 것’이라고 해서 등골이 서늘했다고 하더라고요.

오래전 만났을 때 김동규로부터 직접 들은 내용이었다. 

“그 얘기는 오늘 처음 듣는데 암튼 사사로운 사람이 아닌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 김재규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됩니까. 

“자상하고 판단력이 올바른 사람. 아주 대단한 사람.”

- JP(김종필)는 발작 증세를 보인다고 회고록에 써놨던데 그런 것은 없던가요.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다면 종친회장을 할 수 없지요. 권력에 아부한다고 되는 자리가 아닙니다.  김녕김씨 원로들이 ‘깜’으로 본거죠. 박정희 꼬봉(부하)으로 본 게 아니고요.”

 

이기택의 선택


- 또 하나 궁금한 게 이기택이 막판에 YS를 지지해서 이겼잖아요. 

이야기는 다시 역전의 드라마와 같은 5‧30 전당대회 때로 돌아갔다. 

마포당사에서 열리던 5‧30 전당대회 1차 투표 결과 YS 267표, 이철승 292표, 이기택 92표, 신도환 87표로 집계됐다. 아무도 과반을 얻지 못해 결선투표를 해야 했다. 신도환은 이철승을 지지했기에 2위이던 YS가 역전에 성공하려면 이기택의 표를 얻어야 했다. 

당사 건물 바깥에서는 구름떼 같은 인파로 가득했다. 이들은 유신에 저항할 지도부가 들어서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YS는 이기택을 창가로 끌고 갔다. YS를 연호하는 군중들의 커다란 함성이 창문을 두들겼다. 이기택의 표정도 변하고 있었다. 얼마 안 가 결선투표의 시간이 왔다.

이기택은 결심을 굳힌 듯 YS 손을 번쩍 들어 지지를 표명했다. YS측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환호성이 쏟아졌다. 378표를 얻은 YS는 이철승(367표)을 제치고 총재로 선출됐다. 1974년 전당대회 이후 당권을 회복한 감동적 날이었다. 

- 박관용(이기택 계보)이나 이기택 증언은 처음부터 YS를 지지하려고 했는데, 중앙정보부 때문에 이철승을 지지하는 것처럼 슬쩍 속인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이철승을 지지했던 고흥문 증언은 좀 달라요. 이기택이 이철승한테 부총재 자리를 달라고 했는데 ‘무슨 부총재냐’며 어그러지는 바람에 YS한테 갔다는 겁니다. 이기택의 선택을 놓고 분석이 엇갈리고 있는데요. 어느 말이 더 신빙성 있다고 보나요. 

“이철승을 지지했다면 자기로서는 정치생명이 끝이야.”

김봉조는 전자에 무게를 뒀다. 

“YS가 박정희와 투쟁할 때 옆에 있어야 자기 성과도 나고 빛이 나는 것이죠. 반대로 이철승 쪽에 있으면 희망이 없는 거였어요.”

- 미래를 본 선택이었네요.

“아, 그럼.” 
 

신민당 5·30 전당대회에서 이기택(맨 왼쪽)은 결선투표에서 YS를 지지해 역전의 드라마를 만들어냈다고 평가되고 있다. 사진은 왼쪽부터 이기택·YS·최형우ⓒ사진제공=김영삼 자서전
신민당 5·30 전당대회에서 이기택(맨 왼쪽)은 결선투표에서 YS를 지지해 역전의 드라마를 만들어냈다고 평가되고 있다. 사진은 왼쪽부터 이기택·YS·최형우ⓒ사진제공=김영삼 자서전

하지만, 이랬던 이기택이 3당합당 때는 참여하지 않았다. 이기택은 3당합당 과정에서 갈지자 행보를 보였다. 처음엔 반대했다가, 찬성으로 돌아서면서는 3당합당 추진위원으로 활동했다. 얼마 안 가서 자신의 말을 또 번복했다. 3당합당에 참여하지 않겠다며 불참을 선언했다. 당시 이기택은 통일민주당 부총재였다. 차차기 대권의지를 품고 있던 그로서는 YS 선택에 의심을 품고 있었을 거란 추측을 해 볼 수 있다.

- 민정계 장경우 전 의원의 증언에 따르면 거기 들어가면 끝이라고 봐서 참여하지 않았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런 것도 일부는 있겠지. 정치인이니까.”

이리 말하며 이기택의 상황을 헤아렸다. 그러면서도 “만약에 이기택 씨가 3당합당에 따라 들어왔다면 대통령 한 번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 거예요”라면서 아쉬움을 드러냈다. 

- 저도 그렇다고 봅니다. 

“그런 순간을 놓치는 사람들은 정치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더라고. 이기택 씨는 누가 뭐래도 자기 결단이 부족했어요.”

박관용 증언에 따르면 훗날 이기택 본인도 YS를 따라가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 또 하나는 당시 상도동계가 일사분란하게 똘똘 뭉칠 것 같았지만 아니었다는 건데요. 79년 당권을 장악한 후 조직국장 자리를 놓고 서석재와 문정수 간 신경전이 펼쳐졌잖습니까.

“둘 다 실무를 맡았죠. 누가 더 충성파고 아니고 등 그런 것은 없어요.”

- 상도동계 내부에서도 7‧5동지회파와 사슴파로 서로 갈렸다고 하던데요. 

“세력은 7‧5동지회가 더 셌지. 김동영과 내가 컨트롤했지.”

7‧5동지회는 김봉조처럼 1세대 때부터 YS와 같이 한 구파, 사슴파는 신파와 같았다.  

- 7‧5동지회 있던 분들은 나중에 박근혜를 지지했고 사슴파는 문재인을 지지했더라고요. 

“그런 분류를 한다면 할 수 있는데…. 정통파는 7‧5동지회지.” 

 

서울의 봄 전후


대화는 서울의 봄 전후로 넘어왔다. 

- 박정희 서거 후 YS가 대권 준비할 때 말인데요. 김중태‧김도현 등 63세대들이 들어오잖아요. 87년 이후 386 세대들이 일부 세력화해서 정치권에 들어올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세력화는 아니고 나름대로 정치관이 부합하는 쪽으로 연줄로 해서 들어온 게 아닌가 싶어요.”

- 그 시기 상도동계에서는 김봉조를 비롯해 김동영‧서석재‧박권흠‧황낙주‧명화섭‧최형우‧김덕룡‧한병채‧문정수 등 이런 인물들이 매일 전략회의를 했다고 하더라고요. 

“응.”

- 주로 어떤 전략회의를 했습니까. 물론 대권이겠죠? 

“대권이지.”

그러면서 유의미한 증언을 이어나갔다. 

“당시에 민족중흥회라고, 공화당 세력 중심의 모임이 있었어요.”

민족중흥회는 JP 참모들 모임을 말했다. JP도 대권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떤 이야기가 있었냐면 이들이 볼 때 JP가 YS 아니면 DJ와 손잡고 정권을 만들 수밖에 없다고 본 거예요. 그런데 JP와 DJ는 서로 극과극의 세력이기 때문에 YS와 손잡는 수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죠. 서울‧강원‧경기 여론도 YS, 강원도는 YS‧JP 반반…. 말하자면 대화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사람이 YS라고 본 것이지. 이후 우리 측에 제안이 왔고, YS와 JP 회동이 성사될 뻔했는데….”
 

10·26 이후 대권을 놓고 여러 셈법이 오갈 때 JP측에서 YS와 손잡을 계획을 세운 바 있다고 김봉조는 회고하고 있다. 사진은 민자당 시절의 YS와 김종필ⓒ연합뉴스
10·26 이후 대권을 놓고 여러 셈법이 오갈 때 JP측에서 YS와 손잡을 계획을 세운 바 있다고 김봉조는 회고하고 있다. 사진은 민자당 시절의 YS와 김종필 ⓒ연합뉴스

- 그런데요.

앞으로 몸을 당겼다.

“YS가 한 시간 정도 약속 시간을 놓쳐서 못 만난 거라.”

탄식이 새어 나왔다. 

“JP측에서 야단법석이 나고…. 내가 정권이 오가는 문젠데 뭐하고 있는 거냐고 막 소리를 지르고 그랬어요.”

떠올리니 화가 치솟는지 별안간 목소리가 켜져 갔다. 하지만 YS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듯했다.

“심각한 상황이었는데 YS는 편안하게 생각한 거야. 사실 그날 만났으면 끝난 거예요. 사전에 YS와 JP가 손잡고 정권을 창출했으면…. 그것을 놓친 게 참 아쉬워.”

- 만약 그때 손잡았다면 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못 나올 수도 있었을까요?

“아. 못 나오지.”

장담하듯 말했다. 

“전두환이 아무리 보안사령관이라 할지언정 JP도 군부세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겁이 나서 들고 일어나지 못했을 거예요.”

 

YS의 낙관  


-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하려 한 의도를 YS나 DJ가 잘 몰랐다고 하던데 맞습니까. 

“잘 몰랐지. 전혀 몰랐지.”

혼탁한 정국 속 신군부가 등장했다. 권력을 찬탈한 것을 막지 못했다. YS는 통렬하게 반성하고 뼈아파했다. 

당시를 살펴보면 YS는 서울의 봄을 열 지도자가 자신임을 자부하고 있었다. 79년 당권탈환, YH사건과 <뉴욕타임스> 인터뷰로 촉발된 의원직 제명, 그리고 부마항쟁을 거쳐 10‧26 사태가 일어났기 때문에 자신의 투쟁이 유신 정권의 결정타였다고 생각했다. 또, 이는 구태여 부정할 필요가 없는 객관적 사실이다. 

YS는 서울의 봄 이후 자신이 집권하는 게 응당 역사의 순리라고 생각했다. 정국이 어수선해지면서 YS는 민주회복을 기치로 DJ를 만나 협력을 모색했다. 하지만 DJ의 신민당 입당부터 쉬운 일이 아니었다. DJ는 YS 주도의 신민당에 입당하면 주도권 경쟁에서 밀릴 수 있다고 보고 돌연 입장을 번복했다. 
 

1987년, 서울 외교구락부에서 대통령 후보 단일화 문제로 최종 담판을 벌이기 전 심각한 표정으로 마주앉아있는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김대중(DJ) 전 대통령. ⓒ김영삼 자서전
1987년, 서울 외교구락부에서 대통령 후보 단일화 문제로 최종 담판을 벌이기 전 심각한 표정으로 마주앉아있는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김대중(DJ) 전 대통령. ⓒ김영삼 자서전

- 80년 봄 DJ가 입당을 포기하거든요. 그런데도 YS는 DJ를 서너 차례 만나면서 그가 반드시 입당할 거라며 낙관적으로 바라봤다고 하더라고요. 심지어 4월 7일 DJ가 입당 포기 선언 및 신당을 창당하겠다는 제스처를 취했음에도 YS는 옆에 있는 사람한테 아니다, DJ는 꼭 돌아올 거다…. 사실상 오판한 거 아닙니까. 왜 이렇게 낙관적으로 보는 건지, 성격 때문인 건지….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둘이서 한 얘기니 전혀 의심의 여지없이 믿을 수밖에 없던 거지.”

- YS가 낙관적인가요. 

“낙관적이지. 상당히 낙관적이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한 일화를 들려줬다. 시계태엽을 감아 박정희 정권 당시로 돌아갔다. YS와의 영수회담 때였다. 

최연소 야당 총재가 된 지 9개월 정도 지난 1975년 5월 21일이었다. YS는 박정희와의 영수회담을 위해 청와대로 들어갔다. 

 

# 다음은 김봉조 회고 
  
청와대에서 나오는 YS.
“박정희가 뭐랍디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봤다. 
“어. 청와대 들어가면 응접실 옆에 새장이 하나 있어. 새 한 마리가 짹짹…. 두 마리도 아니고 한 마리가 짹짹하는 거야.”
YS는 이 말부터 하면서 영수회담 상황을 전하기 시작했다. 

박정희 : 김 총재 이리 와보세요. 
YS가 다가갔다. 
박정희 : (새장을 가리키면서) 내 심정이 저 새하고 같습니다. 내가 이 자리에 오래 있을 사람이 아닙니다. 나를 불신하지 말아요. 때가 되면 나도 조용히 지내는 시간을 가질 겁니다. 
YS가 볼 때 그 말인즉 ‘장기집권은 안 한다’는 말로 들렸다. 


당시 박정희는 눈물을 보였다. 민주주의 하자, 대통령 직접 선거 하자, 유신 철폐하자고 가열하게 추궁하려던 YS는 마음이 다소 누그러졌다. 
 

“‘꼭 민주주의 하겠습니다’ 라는 박정희의 말은 ‘이번 임기를 마지막으로 물러나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그때의 분위기가 그랬다. 비명에 타계한 아내를 들먹이며 눈물을 보이고 인생의 허망함을 털어놓은 뒤라서, 나는 그의 말을 일단 진심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 YS 회고록 중-


하지만 박정희가 약속을 뒤엎는 바람에 둘의 관계는 다시금 첨예한 대립의 끝으로 치달았다.

“그런데도 박정희 죽고 난 후에 YS가 장례식장에 제일 먼저 갔어요.” 

김봉조는 당시의 상황을 전하며 YS에 대해 “순수한 생각을 가졌다”고 말했다. 

 

영원한 군정종식  


YS 최측근이자 야당성투쟁회복동지회 결성 멤버인 김봉조 민주동지회 회장이 지난해 12월 13일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YS 최측근이자 야당성투쟁회복동지회 결성 멤버인 김봉조 민주동지회 회장이 지난해 12월 13일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  근데 또 무서운 면도 있잖습니까. JP가 회고록에서 5‧16에 성공한 뒤 YS를 만나 공화당에 들어오라고 했는데 단칼에 거절했다고 하더라고요. 서슬퍼렇게 무서운 시절이었잖습니까. 박준규 등 야당 정치인들은 박정희 정권을 지지하며 공화당에 들어갔는데 YS는 오히려 JP가 겁을 먹을 정도로 너무도 단호하게 거절했다고 써놨더라고요. 

“옳은 말이야.”

김봉조가 맞장구쳤다. 

“문민정부 때 하나회를 척결하는 것 좀 봐요.”

본인도 깜짝 놀랐다면서 다음의 일화를 들려줬다. 

 

# 다음은 김봉조 회고 

문민정부가 들어선 직후였다. 국회에서도 군부 세력들이 일부 있었다. 하나회에 소속된 중추 세력이었다. 국방위원들 가운데 군 수뇌부도 여럿 있었다. 하루는 자기들끼리 말하는 소리를 우연히 듣게 됐다. YS한테 벼르듯 어디 잘하나 지켜보겠다며 동태를 감시하고 있었다. 상당히 감정적인 표현을 뒤섞었다.

내 귀는 제법 크다. 옆에서 듣고 있는지를 모르고 하는 소리들이었다. 여차하면 쿠데타를 일으킬 듯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곧장 청와대로 들어가 YS한테 오전에 들었던 이야기를 전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YS는 “내가 다 생각이 있어”라고 말했다. 하나회를 해체하기 이틀 전의 일이었다. 

하나회는 YS 측근들도 알지 못할 정도로 극비리에 전광석화처럼 진행됐다. 
 

“1993년 3월 8일 오전 7시 30분 YS는 권영해 국방장관을 청와대로 불러 조찬하는 자리에서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을 교체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바로 후임 인사에 착수하는 것을 시작으로 하나회 청산 작업에 들어갔다. 이후 4시간 5분 만에 후임 임명 절차를 마치고 즉시 부대로 돌아가 취임식을 갖도록 했다. 5월 24일에는 12.12사태와 관련된 고위장성의 예편조치를 단행했고, 하나회 회원 중 3성장군 이상 전원은 물론 소장급 이하 모두 보직을 변경시켰다. 군복을 벗은 장군만 18명이었고, 떨어진 별이 무려 50개에 가까웠다.”
- 2023년 6월 민추협 행사 중 YS 비서실장 김덕룡 회상-
 


군정이 종식되고 비로소 문민의 시대가 첫 걸음을 떼던 역사적 순간이었다. 돌아보면 오랜 군부 독재 기간 많은 야당 정치인들이 정치규제에 묶이고 때로는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회유를 당해 넘어간 정치인들도 있고 그렇지 않고 투쟁하면 가족들까지 핍박을 받기 예사였다. 김봉조는 고문을 당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바짓단을 들어 올렸다. 왼쪽 다리에 상흔이 역력했다. 

시간은 정오로 향했다. 슬슬 마무리할 겸 이 점을 물었다. 

- 상도동계 사람 중 마음 터놓고 얘기할 수 있던 사람은 누구였나요. 

“글쎄. 죽은 서석재나 김동영….”  

- 어떤 분들로 기억됩니까. 

“서석재는 솔직하고 직선적이에요. 김동영은 굉장히 유머러스하고 포용력이 상당히 많은 사람이었지. 또 지략가였고.”

- 혹자는 김봉조가 상도동계 수장이 될 수 있었는데 약간 물러나는 성격이어서 안 됐다고 하더라고요.

“물러나는 성격이기보다도 내가 국회의원을 더 했으면 국회 위상을 바로잡는데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아쉬워하는 내색이 읽혔다.

- YS와 DJ 퇴임 후 화해를 시킨 주인공이지 않습니까. 

“내가 화해시킨 거나 마찬가지지.”

얼굴에 뿌듯함이 스쳤다. 

2009년 8월 DJ가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을 때 병원을 찾은 YS는 이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두 분이 화해한 것으로 봐도 되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봐도 된다”면서 “DJ와 나는 가장 오랜 경쟁관계이자 애증관계다.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특수관계”라고 한 바 있다.

YS는 87년 단일화와 88년 총선 기간 약속을 깨버린 DJ에 크게 실망한 뒤 “입만 열면 거짓말”이라고 할 정도로 불신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서는 앙금을 털어내려는 모습이었다. 

그러기까지 화해를 권유해 온 자신의 노력이 컸다는 데 자부심이 큰 듯했다. 평소 그 성정 또한 화합을 중시하는 품성이라는 평가다. 요즘도 YS와 DJ계가 모여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행사를 연다. 김봉조도 참석해 민주주의와 동서화합 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일화를 여담으로 더하며 시계를 봤다. 마침 점심시간이었다. 일행 모두 김봉조의 뒤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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