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명순 여사 별세…“YS 대통령 만들기, 1등 공신” [정병국이 본 손명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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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명순 여사 별세…“YS 대통령 만들기, 1등 공신” [정병국이 본 손명순] 
  • 윤진석 기자
  • 승인 2024.03.08 16: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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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민주화 대장정 함께 한 평생 동지…생전 YS 신뢰하며 조력
“YS 대통령 되기까지 진정한 숨은 일등공신은 손 여사라 생각”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진석 기자]

1983년 5월 18일 민주화 조치를 촉구하며 곡기를 끊은 YS는 이후 23일 간의 목숨 건 단식투쟁에 들어간다. 사진은 누워 있는 YS와 안타깝게 지켜보고 있는 손명순 여사와 딸 혜영 씨ⓒYS 회고록 갈무리
1983년 5월 18일 민주화 조치를 촉구하며 곡기를 끊은 YS는 이후 23일 간의 목숨 건 단식투쟁에 들어간다. 사진은 누워 있는 YS와 안타깝게 지켜보고 있는 손명순 여사와 딸 혜영 씨ⓒYS 회고록 갈무리

위 사진은 YS(故김영삼 전 대통령)가 군부 독재에 항거하기 위해 1983년 5월 목숨을 건 단식투쟁에 들어갔을 때 모습이다. 생명이 위독해질 때까지 단식을 이어가던 YS는 사진에서처럼 눈을 뜨지 못하고 누워 있다. 옆에는 부인인 손명순 여사와 딸 혜영 씨가 걱정스러운 모습으로 이를 지키고 있다. 손 여사 또한 남편이 걱정돼 음식을 거의 먹지 못했는지 앙상한 채로 있다.

지금의 국민의힘은 민주화 최대 주역인 YS가 3당합당을 통해 만들었다. 이는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물론 많은 우파 진영의 인사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지점일 것이다. 

손명순 여사는 평생을 YS를 도와 조용한 내조로 뒷바라지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사진제공 : 유족 측

 

지난 7일 저녁 이 땅에 민주화가 이룩되기까지 YS를 뒷바라지한 영원한 동지 故손명순 여사가 9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손 여사는 일생을 국민과 동행한 YS가 자신의 직분을 다할 수 있도록 평생을 뒤에서 내조하며 조력을 아끼지 않았다. 14대 대선 기간 YS가 감기몸살 한 번 걸리지 않았던 것도 여사의 내조 덕분이었다고 전해진다. 

신혼 생활이 채 가시지 않은 1954년, YS가 만 26세 최연소 나이에 경남 거제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것을 시작으로 민주화 대장정을 거쳐 대통령이 되기까지 YS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을 세심히 돌보는 등 조용한 내조로 존경을 받아왔다는 평가다.

 

 

정치 9단 YS처럼 내조 9단 평가 받아


YS가 정치9단이라면 손 여사는 내조9단이라는 평가다. 
 

 “남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는 성격 탓인지 ‘조용한 내조’로 일관했지만 손 여사는 지난 2년 동안 김 대통령 못지않게 바쁜 하루하루를 보냈다. 각종 행사 참석은 차치하더라도 김 대통령 취임 이후 지난해 말까지 22개월 동안 92회에 걸쳐 각계각층 인사 9800여 명을 청와대로 초청, 공휴일을 포함해 하루 평균 15명꼴로 만났다는 것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이렇듯 조용한 가운데 손 여사가 지난 2년 동안 관심을 기울인 분야는 환경보전 실천과 자원봉사활동지원, 문화예술지원, 소외된 이웃 격려 및 여성정책 지원 등이었다는 게 청와대 측 설명이다. 지난 1년간 손 여사가 국민들로부터 받은 민원과 격려편지 등 서신은 모두 1천5백여 통에 이른다.”
-1995년 2월 23일 <매일경제> 기사 중-


대통령비서실 제2부속실장을 지내면서 영부인 시절의 손 여사를 가장 오랫동안 보필했던 정병국 전 의원(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도 관련해 <시사오늘>과의 대화에서 “생전 손 여사는 평생을 조용한 내조로 헌신한 분”이라며 “YS 대통령 되기까지 진정한 숨은 일등공신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병국 “YS 대통령 일등공신은 손 여사
영부인 시절 봉사활동 등에 헌신” 


손명순 여사는 생전 김영삼 전 대통령을 도와 조용히 내조한 것으로 유명하다. 사진은 14대 대통령 취임식에서의 김영삼 전 대통령과 부인 손명순 여사가 환호를 받으며 걸음을 옮기고 있다. ⓒ연합뉴스
손명순 여사는 생전 김영삼 전 대통령을 도와 조용히 내조한 것으로 유명하다. 사진은 14대 대통령 취임식에서의 김영삼 전 대통령과 부인 손명순 여사가 환호를 받으며 걸음을 옮기고 있다. ⓒ연합뉴스

정 전 의원에게 평소 어떤 인물로 기억되는지 등 좀 더 물었다.

다음을 일문일답

- 평소 어떤 분으로 기억되나?

“겉으로는 온유한 분이지만 내면은 강한 분이다. 제가 YS한테 정치를 배웠다고 하지만, 진짜 정치를 하는 데 있어 신조나 원칙이랄까, 그런 가르침을 주신 분은 손 여사였다. 선거할 때 선대위에서 ‘이러이러한 사람들이 사모님께 접근하면 만나게 하면 안된다. 이 사람들은 좀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다’ 면서 리스트를 준 적이 있다.

하루는 아침에 상도동으로 갔는데 손 여사가 누구를 만나고 계셨다. 리스트에 있는 분이었다. ‘사모님 이분은 이러이러한 분이라서 가능하면 안 만나시는 게 좋습니다’고 했다. 또 누구를 만나고 계셨는데 리스트에 나온 사람이었다. 똑같이 말씀드렸다. 손 여사께서 ‘예, 알았어요’ 했다. 세 번째에도 리스트에 있는 사람을 만나고 계셔서 말씀드렸더니 ‘잠깐만요’ 했다

그러시면서 ‘좋은 사람도 한 표, 나쁜 사람도 한 표, 잘난 사람도 한 표, 못난 사람도 한 표입니다. 이 사람은 이래서 재끼고, 저 사람은 저래서 재끼면 누구하고 정치하나요’ 이리 말씀하는 것이었다. 순간 뒤통수 한 대를 '빵' 하고 맞은 기분이었다. 편 가름 없는 정치를 배운 거였다. 이후 저의 정치 신조가 됐다. 또 한 번은 선거운동 나가는데 안내하는 분께서 이 집은 우리 편이 아니니까 그냥 가도 된다고 했다. 그럼에도 손 여사는 한 번도 재끼지 않았다. 일일이 악수하고 가는 분이었다. 내 편, 네 편 가리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저도 많이 배웠다.”

- 또 생각나는 추억담이 있다면 뭔가. 

“YS가 대통령이 되기 전 3당합당을 결심하면서 상도동계 중에서도 처음에는 많이들 이탈했다. 대표적으로 최형우 장관(내무부)이 계셨다. 그분도 이탈하셨는데 손 여사께서 직접 찾아갔다. ‘최 장관님,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몇 번이고 설득했다. 최 장관께서 마음을 돌렸는데 ‘YS 때문이 아니라 사모님 때문에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라고 할 정도였다. 선거할 때 중요한 역할을 할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여사께서 한 분 한 분 모두 댁을 방문했다. 꽃을 사 갖고 간다거나, 여름에는 수박 한 덩이를 사갖고 간다거나…. 지방에 있는 의원들까지도 일일이 챙기셨던 분이다. 

청와대 계셨을 때도 신문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샅샅이 읽으셨다. 독자 투고란을 보시다가 한번은 평창의 한 임업시험소에서 야생화를 보급하기 위해 묘판을 만들었다는 것을 보신 일이 있다. 도와줄 방법이 없을까 하다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물어왔다. ‘청와대에 한 번 심어보시죠’ 건의 드렸다. 그러자 ‘너무 좋은 생각이다’며 여사께서 청와대에 손수 심은 거다.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여러 곳에서들 조경할 때 야생화를 심게 됐다. 전국적으로 야생화가 보급된 것이 손 여사 때문에 시작된 것이다. 그 일로 야생화협회에서 감사패도 받았다.

또 한 번은 독자투고란 관련 일화다. 한 초등학생이 콩쿠르에서 우승을 했는데 첼로가 없어 빌리느라 애를 먹었다는 사연을 보시고는 안타깝게 여기셨다. 그 초등학생은 훗날 훌륭한 첼리스트가 된 장한나 학생이었다. 여사께서는 해당 기사를 보시고는 도와줄 방법을 강구하시겠다며 MBC사장과 메세나협회 회장을 만났다. 그것이 계기가 돼 협회 측에서 장한나 양에게 첼로를 장기 임대해 주게 됐다. 장 양이 큰 꿈을 키울 수 있게 된 데에는 그런 숨은 뒷얘기가 있었다.”
 

정병국 전 의원은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발전하는 데 87체제의 영향이 컸다고 말했다. 정 전 의원이 지난 8일 시사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사진기자
정병국 전 의원은 YS가 대통령이 되기까지 부인 손명순 여사의 공이 컸다고 기억한다.ⓒ시사오늘 권희정 사진기자

 

-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얘기인가?

“그렇다. 여사께서는 대통령이 미처 미치지 못하는 틈새도 돌보시고 민생을 살폈다. 좋은 일을 해도 언론에 내지 못하게 하고 소리 소문 없이 뒷바라지를 했던 분이다. 대통령이 되기 이전부터 그런 많은 활동을 했다. YS가 대통령이 될 수 있던 데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살펴온 손 여사의 조력이 절대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숨은 일등공신이셨다.

YS는 워낙에 선이 굵어 잔잔한 것을 챙기지 못한다면, 이를 메꿔준 분이 손 여사였다. 특히 YS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데에는 당시만 해도 민정계 대선후보 쪽에 돌아섰던 불교계의 마음을 얻었던 기여도 또한 크다. 그러기까지 노력한 분이 손 여사였다.

여사께서 전국의 웬만한 절은 다 찾아다녔다. 숫자로만 세어도 어림잡아 280 몇 군데를 다녔다. 이렇듯 조력하면서도 본인이 한 것을 내세우지 않는 분이었다. 대통령 재임 중 언론 접촉을 한 번도 안 하다가 1년에 딱 한 번 하는 것이 취임 1주기 될 때였다. 그때 딱 정리해서 만나니 잡음이 한 번도 없었다. 사회복지시설이나 꽃동네 봉사활동 등 대외적으로 활동도 정말 많이 했다. 그런 선행들도 언론에 내지 못하게 했다. 그분이 행한 아름다운 일들은 오웅진 신부께 문의해도 아마 많이 들을 수 있을 거다.”

 - YS에 이어 손 여사의 손자 김인규 전 대통령실 행정관이 이번에 부산 서구‧동구에 출마한다. 예비후보로써 8일부터 12일까지 경선을 앞두고 있다. 상도동계 정치인으로서 YS 손자의 정치 출마에 대해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김인규 후보는 제가 교장으로 있던 청년 정치학교 출신이기도 하지만 처음 인턴을 시작한 곳이 국회의원일 당시 제 사무실이었다. 같은 방에 있는 친구들이 모두 그가 YS 손자라는 사실을 거의 끝날 때쯤 알 정도로 티 안 내고 겸손하게 생활했다. 그만큼 색다른 친구였다. 학교 졸업하자마자 정치를 하려 했는데 그때는 아버지(YS 차남 김현철)가 반대를 했다. 하지만 제가 볼 땐 할아버지처럼 강한 의지가 있고, 손 여사처럼 부드럽고 겸손한 면이 있어 충분히 자질이 있다고 생각했다. 정치하면 잘 할 것이다.”

 

평생을 신뢰와 믿음으로 


생전 YS는 잠들기 전 손 여사를 보면서 경상도 사투리로 “우리 명순이 잘 자래~” 라고 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만큼 부부간의 정이 두터웠다고 한다. 손 여사는 부부금슬이 좋은 이유에 대해 생전 “믿음이 크기 때문”이라고 한 바 있다. 1992년 YS가 대통령 당선됐을 당시 당선자 부인 인터뷰에서 “결혼할 때부터 아빠(YS)를 믿어왔다”며 “평생 흔들리는 모습을 본 적이 없기에 믿고 따랐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런 믿음이 있었기에 피 말릴 일이 많았을 민주화 투쟁과 정치 역정의 시기를 함께 이겨낼 수 있었을 것이다. 

손 여사는 1929년 2월 25일 경남 김해에서 태어났다. 2남 7녀 중 장녀로, 아버지는 고무신 공장을 운영했다. 이화여대 약대 수석 입학 후 재학 시절 중매로 당시 서울대 철학과 4학년 재학 중인 YS를 만났다. 청춘남녀는 꽃피는 3월 결혼식을 올렸다. 슬하에 2남 3녀를 뒀다. 

빈소는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에 마련됐다. 5일간 가족장으로 진행된다. YS가 전재산을 기부해 건립된 동작구 상도동의 김영삼도서관 지하 대강당에서도 빈소가 마련됐다. YS를 존경하는 동네 주민들이 조문을 할 수 있도록 동작구에서 준비했다.

오는 11일 오전에는 YS가 잠들어 있는 국립현충원에서 영결식이 거행된다. 정병국 전 의원이 사회를,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가 여사의 약력을 소개한다. 한덕수 총리가 조사를, 김덕룡 이사장이 추도사를 맡는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꿈은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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