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의 김영삼으로 본 윤석열의 ‘길’은? [YS서거 8주기]
스크롤 이동 상태바
통합의 김영삼으로 본 윤석열의 ‘길’은? [YS서거 8주기]
  • 정세운 기자,윤진석 기자
  • 승인 2023.11.16 10:36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정세운 기자, 윤진석 기자 ]

故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8주기를 맞아 통합의 YS와 혁신의 윤석열 대통령에 대해 조명해 본다.ⓒ시사오늘
故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8주기를 맞아 통합의 YS와 혁신의 윤석열 대통령에 대해 조명해 본다.ⓒ시사오늘

지금의 보수를 만든 것은 YS(故김영삼 전 대통령)다. 작금의 보수를 개혁하려는 것은 윤석열 대통령이다. 우파 우위의 시대가 저물어갈 무렵 드라마틱하게 등장한 인물들이 있었다. YS와 윤 대통령이었다. 

1987년 이후 한국정당사에서 첫 빅뱅이 일어났다. 3당합당이 그것이다. 정통 민주세력의 적통을 계승하고 있던 김영삼(YS) 통일민주당 총재는 호랑이를 잡으러 들어간다는 명분을 내세워 권위주의 세력과 결합했다. 1970년대 유신에 종지부를 낸 도화선이자 87체제의 최대 공로를 인정받던 그가 신군부 출신의 노태우 대통령이 있던 민정당, 박정희 정권의 2인자였던 김종필(JP)신민주공화당과 깜짝 통합 선언문을 발표한 것이다. 이 얼마나 쇼킹한 일인가? 이후 YS는 다수당내 소수파임에 분명 없었지만 치열한 권력투쟁의 관문을 뚫고 대통령 자리에 올라탔다. 군정을 종식하고 문민의 시대를 개막한 것이다.

30여년이 흘러 우파정당사에서는 또 한 번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는 미증유의 사건이 발생하고 만다. 단기필마로 보수정당에 뛰어들어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와의 단일화를 거쳐 별의 순간을 잡아버린 윤석열 대통령이 그 주역이다. 검찰총장 출신의 정치신인인 그는 대선을 얼마 앞두고 국민의힘에 입당했다. 단박에 20대 대통령에 등극했다. 과연 누가 또 이 같은 기록을 깰 수 있을까 싶게 유례없는 일이었다. 

여기까지 보면 YS와 윤 대통령의 대권 활용법으로 비쳐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우파정당 시각에서는 또 다르다. 이 둘이 아니었으면 존폐 기로에 내몰릴 수 있었는데 비껴갔다. 두 사람과의 짝짓기에 성공했기에 정계가 개편되고 위기가 기회가 되고 심폐가 소생되는 정당의 영속성을 가지게 될 수 있었다는 판단이다. 

87년을 복기하면 노태우 정권은 양김의 분열이 아니었으면 대통령 되기가 어려웠다. 시대적 과제는 군정종식을 가리키고 있었다. 도도한 역사적 물줄기 안에서 민정당은 구체제였다.  새시대를 열기가 어려운 태생적 한계에 직면한 것이다. 13대 총선을 거치면서 이미 여소야대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소선거구제에 의해 지역을 나눠먹게 된 결과였기도 했다. 그렇지만 더 크게는 시대 흐름에 맞물려 입지가 줄어들 수밖에 없는 처지였던 까닭이 컸다.

사회는 노동계의 정당 점거 사태 등 혼란기였다. 5공 청산에 이어 민주 대장정에 쐐기를 박으려던 YS로서는 내심 이러다 군정시대로 회귀하게 되는 것이 아니냐는 조마조마함이 있었을 터였다. 

한편으로 노태우 시각에서는 여소야대 정국 속 최대한으로 국정운영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묘책이 필요했을 거였다. 1988년 정기승 대법원장의 임명동의안이 부결된 데 따른 충격의 여파도 크던 차였다. 후일을 생각하면 집권 세력의 안정적 퇴로도 준비해야 했다. 

그 방법이 야당과의 연정이었다. 중간평가 유보 등 밀약을 나누던 김대중(DJ) 평민당 총재도 연합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DJ에 대해서는 4대 불가론(영남·기업인·공직자·군인의 반대)이란 정서가 있었다. 이에 눈을 돌린 것이 YS였다. 기본적으로 YS는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노태우가 중간평가 대선 공약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영수회담에서 이를 지킬 것을 요구했다. 5공청산과 민주개혁도 압박했다.

노태우가 DJ와 JP와의 교감을 고리로 중간평가 유보에 나서자 YS는 이번엔 장외투쟁까지 불사했다. 그런 유형이었지만 민정당에서 볼 때 합리적 온건보수 성향이었다. YS는 중도세력을 망라하고 외연확장에 필요한 매력적인 대상이었다. YS는 여야 지도자 중 가장 고른 전국적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 4자 구도였던 87년 대선 때도 야당 후보 중에서는 1위였다. 심지어 불리한 선거구조의 13대 총선 하에서도 그가 속한 정당은 지역만큼은 골고루 표를 받았다. 

정치 경력으로 치면 산 증인과도 같았다. 헌정사상 26세 최연소로 국회 입성한 것이 벌써 이승만 정권 때였다.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해 지금의 민주당 모태인 구파로 자리매김한 이래 33세 나이로 최연소 신민당 원내부총무를 맡았다. 6대 대선 때는 박정희에 맞서기 위해 윤보선-유진오를 아우르는 야권의 분열을 막고 통합정당을 구현했다. 선명 노선으로 야당성 회복에 앞장섰다. 1971년 대선을 앞두고는 최초 40대 기수론에 불을 댕겼다. 미국 정치 행사 참석 중 유신이 발표되자 급히 귀국했을 정도로 애민이 강한 정치인이었다. 

1974년 만45세 나이의 최연소 당대표에 올랐다. YH여공들을 위해 신민당 당사를 내주었고, 이들이 핍박받자 강하게 규탄했다. 이런 그였기에 의원직에서 제명당하자 부마항쟁이 일어났다. 박정희가 볼 때 YS는 꽤 껄끄러운 상대였다. 이미 1975년 5월 YS와의 영수회담에서 눈물을 보이며 조금만 시간을 달라, 그러면 민주주의를 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었지만 차일피일 무산시키며 영구독재라도 할 기세였다. 그럴수록 당당하고 거침없이 줄기차게 유신을 끝내라며 압박해오는 YS가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10·26 당일 유신의 심장을 쏜 김재규에 의해 숨을 거두기 앞서까지 박정희는 뉴스를 통해 흘러나오는 YS의 십자포화에 예민해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만큼 라이벌로 여기던 상대였다. 

신군부가 들어선 1980년 때도 YS는 단식투쟁을 통해 야당세력을 규합했고 민주화추진협의회를 조직했다. 12대 총선을 앞두고 신민당을 창당해 관제야당을 갈아치웠다. 사실상 선거혁명으로 잠자고 있던 민주화 물결을 깨웠으며 87년 6월항쟁의 기폭제를 마련했다. 마침내 6·29선언을 받아냄으로써 직선제 쟁취를 이뤄냈다. 이렇듯 오랜 민주화 투쟁의 여정 속에서 국민에게 사랑받는 친근한 지도자가 그였다. 

다시 3당합당 시점으로 돌아와 노태우 연합 제의의 의중을 간파한 YS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한발 나아가 브란트 연정을 모델로 한 3당합당을 주도하고 나섰다. 뜻밖의 일이었다. 왜 그랬을까? 앞서 YS는 구국적 결단으로 호랑이 굴에 들어갈 것도 마다 않을 코페르니쿠스적 정국 구상을 고심하고 있던 중이었다. 바야흐로 시대는 변하고 있었다. 소련과 동구권 체제가 흔들리면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것을 목도한 YS는 북한도 저처럼 급변할 수 있다, 우리는 과연 통일을 맞을 준비가 됐는가를 숙고하던 중이었다. 

시대는 새여명을 향해가고 있는데 더 이상 민주 대 반민주라는 구체제 산물에 발이 묶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볼 때도 4당체제는 불안한 요소가 충분했다. 지역을 쪼개버리고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었다. 또 1김(YS) vs 3노(노태우-DJ-JP)라는 중간평가 유보 대립에서 보듯 일관성 없이 한계도 여실했다. 야당끼리의 정계개편도 고려해봄직 했겠지만 YS 입장에서 DJ는 믿을 사람이 못되었다. 두 대통령 모두 퇴임 후 화해하긴 했지만 그전까지 “자신이 DJ라는 사실 외에는 모두가 거짓말”이라며 신랄하게 혹평할 정도로 그에 대한 불신이 깊었다. 

스스로 회고록을 통해서도 밝혔지만 번번이 뒤통수를 당하가 일쑤였다. YS가 볼 때 DJ는 반독재 전선인 민추협 때도 소극적이었고, 신민당 입당도 시큰둥해했다. 오히려 관제야당 논란의 민한당 편을 드는 모습이었다. 86년 대권 불출마 선언을 했던, DJ말을 믿었지만 이를 지키지 않아 당혹스러운 지경에 처하기도 했다. 87대선을 앞두고는 양김 단일화를 어떻게든 이루고자 동교동계에서 요구한 미창당 지구당수를 받아들였지만 DJ는 이를 번복하고 평민당을 차려 독자출마했다. 88년 13대 총선을 앞두고 YS는 야권통합을 위해 총재직도 내려놓고, 평민당과의 통합에 앞장섰다. DJ가 요구한 소선거구제가 자신에게 불리한 조건임에도 수용하는 대범성을 발휘했다. 그러나 DJ는 합당의 약속을 깼다. 온갖 통합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결과적으로 13대 총선에서 통일민주당은 지역주의 유탄을 맞고 3위 정당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두 번은 속아도 세 번은 어림없다고 본 것일까? 이 때문에 더는 야권통합에 뜻을 두지 않았을 거로 가늠된다. 1990년 1월 22일 3당합당이 선포됐다. 선거는 파이의 싸움이다. 야도로 불리던 부산이 YS로 인해 보수당에 편입되고 JP 충청권도 합해지면서 의석수 200석이 넘는 거대여당이 탄생됐다. 이후 우파정당은 크고 작은 분열과 합종연횡에도 문민정부 시절 15대 총선을 거치며 수도권서 처음으로 이겨보는 등 우파 우위의 시대로 내달리는 전기를 마련했다. 그러기까지 손학규·김문수 영입 및 5·18특별법 제정 등 통합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YS역할이 컸던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는 진단이다.  

하지만 해가 뜨면 저물 듯 보수 우위의 시대는 2010년 6·2 지방선거를 기점으로 기세가 꺾이고 만다. 여기에는 지금의 304050세대 유권자 변화가 큰 역할을 했다는 분석이다. 이들은 당시 203040세대였고, 민주당에 많은 표를 몰아줬다. 586이 20대일 당시인 85년 신민당에 열광한 세대라면 3040대는 노무현 전 대통령 죽음을 계기로 반한나라당 정서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현 20대가 젠더 갈등으로 인해 극단으로 나뉘어 있는 것과 달리 이들 304050대는 또 다른 진영 갈등으로 뭉쳐지고 있던 것이다. 

물론 정치적 상황에 따라 격변을 맞으면서 촛불정국과 이후 3번의 선거까지 결집돼있던 이들 표심은 4·7재보선을 기점으로 나뉘며 다변화를 겪고 있는 상태다. 내년 선거에서 또 어떤 양상을 나타낼지는 좀 더 지켜볼 일이 될 것이다. 이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어쨌거나 우파정당은 탄핵정국과 연이은 선거 참배를 겪으며 막다른 길에 봉착해 있었다. 그때 구심점이 돼주면서 혜성처럼 나타난 인물이 윤석열 검찰총장이었다. 조국 정국을 겪으며 반문(문재인)의 지지를 받게 된 그에게는 박근혜 전 대통령을 수사했던 이력마저도 논외가 될 정도였다. 급기야 윤 대통령을 중심으로 커다란 빅텐트가 형성됐다. 우파정당이 전열을 가다듬는 큰 계기였다. 

마침내 우파정당은 다시금 윤 대통령을 수혈해 정권을 교체했다. 과거 YS를 통해 새 길을 모색했듯 윤 대통령을 통해 정계개편의 막을 올렸다. 그리고 다시 김한길 국민통합위원장 등과 함께 파이를 역전시킬 수 있을 것인가에 주목하고 있다. 총선은 아직 5개월여 남았다. 

담당업무 : 정치, 사회 전 분야를 다룹니다.
좌우명 : YS정신을 계승하자.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꿈은 자산!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우파우위? 2023-11-17 11:55:24
석열이랑 비교하지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