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뭐 수도권까지 달라니…˝, 국민회의vs자민련 공천갈등
스크롤 이동 상태바
˝이건 뭐 수도권까지 달라니…˝, 국민회의vs자민련 공천갈등
  • 김병묵 기자
  • 승인 2014.02.09 07:4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②1998년 지방선거-下>DJP 연합 종말 촉발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김병묵 기자)

2014년은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열리는 해다. 6월4일로 예정된 이번 선거는 여야뿐 아니라 안철수 신당이 참전을 예고하며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YS가 지방선거를 30년 만에 부활시켜 1995년 제1회 선거가 치러진 이래, 지방선거는 한국 지방자치제의 핵심으로 자리해 왔다. 또한 수많은 정치인들의 등용문으로, 이명박, 이인제, 손학규 등이 지방선거를 발판삼아 대권도전에 나서기도 했다.

수많은 인재들이 지역의 대표 자리를 걸고 펼쳐온 다섯 차례에 걸친 선거대전. <시사오늘>이 그 치열했던 역사의 현장, 지난 지방선거를 되짚어 봤다. 두 번째로 한국 최초의 정권교체가 있었던 직후인 1998년으로 들어가 봤다. <편집자 주>

1998년 4월 29일 <동아일보>에 다음과 같은 문답이 보도된다.

“그물 치는 사람 따로 있고, 고기 건져 가는 사람 따로 있다” - 자민련 조영장 총재비서실장

“수도권은 오래 전부터 국민회의의 지지기반이 강한 지역인데 여기에 자민련이 그물을 쳐놓았다는 얘기는 무리다” -국민회의 정균환 사무총장

이는 98년 지방선거의 또 하나의 기류,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공천갈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내용이다.

지방선거에서 DJ는 정치가냐, 행정가냐를 놓고  고심했다. 이는 국민회의 당내의 일이었다. 당 외에서는 자민련과의 공천 갈등이 가장 큰 문제였다.

권력이 가진 유명한 속성 중 하나는 나눠 갖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 1998년 지방선거의 공천과정은 이를 또 한차례 증명한 사례다.

1997년 대선에서 DJP(김대중-김종필)연합을 통해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공동 여당이 됐다. DJP연합에서 그 효과를 톡톡히 본 이들은 ‘연합공천’을 적극 추진해 6·4 지방선거에 나선다.

호남은 국민회의가, 충청은 자민련이 필승을 자신하는 터다. 문제는 수도권이었다. 수도권 공천을 놓고 국민회의와 자민련 연합은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DJ는 김중권 비서실장과 만난 자리에서 “이건 뭐 수도권까지 (자민련을)공천해달라니…” 라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물론 정권 출범과 함께 이미 불신의 씨앗은 싹트고 있었다. 내각 조직 당시 핵심부처의 인선문제를 놓고 JP는 “DJ가 너무 욕심을 부린다”고 불만스러워 했다.

총리인준이 한나라당의 반대로 늦어졌다. JP가 '서리' 딱지를 떼지 못하자 불만이 DJ로 향했다. DJ의 대처가 충분하지 못했다는 JP의 서운함은 둘 사이를 급속도로 멀어지게 만들었다.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갈등은 결국 수도권 공천의 가시적인 혼란으로 나타났다.

1998년 4월 8일 박태준(TJ) 당시 자민련 총재는 국민회의 조세형 총재권한대행과 회동을 갖고 임창열 전 장관을 자민련 경기지사 후보로 공천키로 합의했다. 대신 최기선 현 인천시장을 국민회의에서 공천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JP의 거부로 무산된다. JP의 속내는 최기선 인천시장의 자민련 공천이었기 때문이다. 4월 6일 JP는 DJ에게 전화를 걸어 최기선 인천시장을 자민련 후보로 공천하자고 이야기했다.

13일 DJ와 JP는 ‘막판 담판’을 벌인다. 그 결과 임창열 전 장관은 국민회의 행, 최기선 시장은 자민련행이 결정된다.

이러한 초대형 ‘맞 트레이드’에는 다음과 같은 배경이 존재한다.

잠시 시간을 돌려 1997년 대선을 앞둔 11월 10일경, 서울 인사동의 한 음식점.

국민회의 박상규 부총재는 임창렬 경제부장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나라가 망하느냐 사느냐 하는 중대한 시점이다. 정말 도와 달라.”

“…알았습니다, 생각할 여유를 주십시오.”

박 부총재는 임 장관을 만나 영입작업에 들어갔다. 한 시간을 침묵하던 임 장관으로부터 긍정적인 답변을 얻어냈으나, 결국 11월 19일 그는 IMF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부총리로 임명되며 영입은 무산됐다. 그러나 당시부터 국민회의가 그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는 방증이다.

최기선 전 시장은 관선시절 YS가 인천시장에 임명했던 ‘상도동계’인사다. 내심 그의 자민련 행은 이협 전 의원의 설득이 있었다고 알려졌다.

서울대 법대 동기이자 4선 의원을 지낸 동교동계 인사인 이 전 의원은 최기선 전 시장과 각별한 사이다. 그는 최 전 시장의 부인 故 최영숙 여사를 소개시켜 준 장본인이며, 정계 입문 당시 동교동계로 강력 권유한 바 있다.(아이러니하게도 최 여사의 설득으로 최 전 시장은 상도동계로 들어간다.)

동교동계 수장 DJ로서는 상도동계 정치인 최 전 시장보다, 오랫동안 눈독들여온 행정가 임 전 장관이 내심 반가울 터다. 그 결과 후보 안배차원에서 이 전 의원을 통해 최 전 시장을 설득했던 것이다.

수도권은 이렇듯 잡음 속에서 교통정리가 됐다. 속에 앙금은 남겼을지언정 수도권 싹쓸이를 하며 1차 목표는 달성했다.

▲ 1998년 지방선거를 기점으로 DJP연합은 붕괴되기 시작했다. 사진은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자민련 대선후보로 선정된 직후의 JP 모습. ⓒ시사오늘

그런데 정작 뇌관이 폭발한 곳은 강원도였다.

당시 강원에서는 국민회의 이상룡 전 지사와 자민련 한호선 전 의원이 경합 중이었다. 그런데 연합공천의 잡음 끝에 공천에서 탈락한 이 전 지사가 탈당, 무소속으로 출마한다. 그 결과 자민련 한호선 후보가 34.1%, 무소속 이상룡 후보가 26.8%를 기록하며 한나라당 김진선 후보(39.1%)에게 둘 다 패한다.

자민련 측에서는 다 잡은 지역에 재를 뿌린 꼴이고, 국민회의 입장에서는 충청에 인천까지 양보하고 강원마저 줄 수 없었다는 입장이다. 어부지리로 강원은 그렇게 한나라당이 가져간다.

결과적으로 DJ가 구상했던 '영남포위론'은 무산된다. 오히려 강원을 빼앗김에 따라 동서로 양분되는 구도가 나왔다.

이로부터 촉발된 DJP공동정권의 갈등은 이후 DJP연합 해체로 이어진다. 이후 새천년 민주당으로 이름을 바꾼 국민회의는 각종 선거에서 연전연패한다.

98년 6·4 지방선거는 한국 정치사에 남을 정치실험이었던 ‘거대 공동 여당’의 종료를 알린 선거였던 셈이다. <1998년 지방선거편 끝>

 

담당업무 : 게임·공기업 / 국회 정무위원회
좌우명 : 행동하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