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한의 긴급진단>명량과 영웅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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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한의 긴급진단>명량과 영웅 만들기
  • 김재한 국제경영전략연구소장
  • 승인 2014.09.26 10: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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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김재한 국제경영전략연구소장)

최근 한국 영화, ‘명랑’이 1,700만 관객을 돌파해 영화사(映畵史)상 신기록을 갱신하는 등 대중의 화제가 되고 있다. 거기에는 최민식 이라는 개성파 영화배우의 호연(好演)도 있었지만, 일본 아베정권의 군국주의 부활과 이순신 장군의 명랑대첩 이라는 상황과 소재가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 이를 계기로 각 언론들은 ‘이순신 신드롬’에 대한 분석 기사를 게재하기에 바쁘다.

‘이순신’과 ‘영웅’이라는 두 단어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그것은 역대 정권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이순신 장군이 영웅화된 면도 많다. 이와 상대적으로 동 시대의 원균 장수는 비하되고 평가 절하되기까지 했다. 우리는 동 시대를 함께 산 이순신과 원균 이라는 두 장수(將帥)를 어떻게 평가하고 바라보고 있는 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순신은 명랑대첩 등 해전에 승리하는 등 긍정적인 면도 있었지만, 정권적 목적에 의해 역사를 수단화한 결과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정도로 역대 정권들이 이순신 영웅 만들기를 적절하게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했다.

TV 드라마에 나타난 이순신 또한 드라마적 요소와 극적인 효과와 반전을 기하기 위해 역사적 사실 보다는 픽션적인 요소를 가미해 역사를 본의 아니게 왜곡하는 경향이 짙어져 가고 있다. 이러한 오락적인 요소와 역사 인식의 상충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 가도 함께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역대 정권에 의한 영웅 만들기 이면에는, 우리는 수많은 민초들의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간과하고 넘어간다. 명랑대첩 또한 이름 없는 민초들의 전쟁 동원과 그들의 희생이 있었다. 그것은 결코 이순신이라는 한 장수의 전과(戰果)만은 아니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 북군이 승리한 것은 링컨 대통령의 영도력만으로 가능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아마도 북부지역의 발명가들이 만들어낸 원추형 탄환이나 칼빈 소총 등의 공로가 더 크게 기여했는지 모른다.

세종대왕의 훌륭한 업적 또한 장영실과 같은 뛰어난 당대 지식인들의 과학적 상상과 노력, 그리고 신분을 뛰어넘는 고민이 가해진 결과이다. 세종대왕이 진정으로 사랑받는 이유는 그 옆에 허조, 맹사성, 황희와 장영실 등 수많은 인재들을 함께 거느리면서 부터였다.

4. 19혁명과 10.26 이후의 민주화 과정에 있어서, 그 성과에 대한 공(功) 또한 마찬가지이다. YS(김영삼 전 대통령)와 DJ(김대중 전 대통령), 그리고 민주당의 전유물이 아닌 국민이 함께 이루어낸 희생의 결과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민주화가 특정인과 특정 정당의 전유물인 양 착각을 하고 있다.

사회 발전은 한 사람의 지도자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지도자의 리더십과 한 사회(단체, 국가)가 총의를 모아 함께 나아갈 때 가능하다.

‘이순신 영웅 만들기’에 희생된 대표적인 사람은 원균이다. 이순신은 ‘영웅’, 원균은 ‘패장, 겁쟁이’로 묘사되며, 이순신은 ‘멸사봉공’으로 원균은 ‘사욕과 무능’으로 대변되고 있다. 이와 같이 역사의 수단화에 의해 역사적 왜곡이 이루어지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이순신에 대한 평가는 원균과 함께 다루어져야 한다. 칠천량해전의 패전을 원균의 무능과 비겁함, 그리고 나약함을 내세우는 데 이용한다. 칠전량해전의 패전에는 도원수 권율과 도체찰사 이원익의 책임은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순신과 원균, 둘 모두 나라를 위해 죽었지만, 산 자(者)의 정치적 이해에 따라서 달리 부각되고 있다. 이순신과 원균이 힘을 합친 옥포해전을 비롯하여 합포해전, 적진포해전, 사천해전, 당포해전, 제1차 당항포해전, 율포해전, 한산도해전, 안골포해전, 부산포전, 웅천해전, 제2차 당항포해전, 제1차 장문포해전, 영등포해전, 제2차 장문포해전 등 모든 해전에서 승리했다.

역사의 가정은 결코 있을 수 없지만, 원균이 패전한 그 전투, 즉 칠전량해전에 이순신이 참전했다면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 까? 승리했을 까? 결과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다. 장수는 단 한 번의 패전으로 수많은 공(功)이 덮어지고, 무시된다.

이순신의 평가에는 원균이 함께 다루어져야 한다는 목소리를 새겨볼 필요가 있다. 1604년 임진왜란 이후 선조에 의해 공적을 인정해 선무1등 공신으로 책록되고 충신으로 인정되던 원균이 점차 사회적 제도적 실패의 대명사, 비판의 대상이 되었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지금도 우리는 역사의 수단화, 사회적 목적으로 이용하는 사례는 없는 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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