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재, "통일은 필연이라고 접근해야 가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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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재, "통일은 필연이라고 접근해야 가능 "
  • 김병묵 기자
  • 승인 2014.10.21 10: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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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에서 통일로(5)>김형욱 회고록 집필 김경재 전 의원
미국에 16년 정치망명…골든타임 놓쳐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김병묵 기자)

<김형욱 회고록>은 1980년대 한국을 강타한 밀리언셀러다. 이 한 권의 책은 300만 부가 넘게 팔리며 사회에 거대한 파장을 던졌다. 유신체제를 뒤흔들며 민주화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평도 나온다. 이 책의 저자가 바로 김경재 전 국회의원이다. 민주화가 이뤄지자 독재를 피해 미국에 망명 중이었던 김 전 의원은 16년 만에 귀국, 정계에 들어와 이번엔 통일을 준비한다. 끊임없이 시대의 소명을 좇아온 그에게 민주화, 그리고 통일에 대해 묻고자 <시사오늘>이 7일 여의도에 있는 김 전 의원의 사무실을 찾았다.

▲ 김경재 전 의원 ⓒ시사오늘

박사학위와 바꾸고 협박 이겨낸 <김형욱 회고록>

-최근 <김형욱 회고록>이 새 판으로 나왔다.

“이번에 인물과 사상사에서 다시 찍자고 연락이 왔다. 이 책이 꽤나 많이 팔렸다. 300만 부 넘게 나가며 90년대 10대 명작 중 5위로 뽑히기도 했다. 내가 그걸로 먹고 살았다. 물론 판매 부수로 치면 어마어마하지만, 그땐 인세가 지금만큼 많지 않았고 또 찔끔찔끔 들어오기 때문에 밥 먹고 살고 아파트 세내고 그러면 남는 것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내가 귀국을 해 보니까, 이미 12개의 해적판이 나와 있더라. 내가 그 해적판을 다 하나씩 구해서 시골집에 갖다 놨다. 그런데 그중에 좀 양심적인 사람은 내가 선거 나갔을 때 전화가 왔었다. ‘제가 당신 책을 허가 없이 해적판을 찍어 팔았다. 그게 미안해서 돈 500만 원을 후원하겠다’고 한 적도 있다.”

-<김형욱 회고록>은 본인에게 어떤 의미인가

“펜실바니아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준비하다가 뛰어들었다. 이 책이 내겐 박사학위 논문 이상이다. 200자 원고지 7천 매, 140만 자의 글이다. 약 27개월 간 주야장천 썼다. 그리고 집필을 중단하라는 협박을 수없이 받고, 심지어 살해 협박까지 받았지만 그것을 이겨낸 인간승리의 기록이라는 것이 내겐 더 중요하다. 또한 등장인물 중에 ‘액티브’하게 움직인 사람만 헤아려도 천여 명이 된다. 그런데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한 적이 없었다. 고소를 당한 적이 한 번 있긴 하다. 책이 나오고 10년도 더 지나서다. 김현섭이라는 선배로 당시 뉴욕에 통신사 특파원으로 와 있었던 사람이다. 내가 ‘아니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서 고소를 하는 이유가 뭐요’하고 물었더니, 그 선배가 전하는 말이 자기 아들이 장성해서 이제 대학생이 돼가지고 <김형욱 회고록>을 읽었는데, 자기 아버지가 중앙정보부의 끄나풀이라고 책에 표현돼 있어 쪽팔려서 다닐 수가 없다는 거였다. 하여튼 그래서 동부지청에 끌려갔다. 검사에게 ‘내겐 증거 테이프가 있으니 난 그 테이프를 틀 거고, 아마도 그게 알려지면 선배가 명예가 더 훼손이 될 것 같은데 알아서 하시오’라고만 말했다. 결국 무혐의 처분됐다. 책 자체로는 나를 먹고살게도 해줬고, 내 청춘을 바쳤고,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큰 의미가 있지만 정치인으로서는 내게 손해가 많았다.”

오랜 망명에 정치 골든타임 놓쳐…“친노가 악의적 숙청”

-구체적으로 어떤 정치적 손해가 있었나.

“너무 오래 미국 망명생활을 했다. 5,6년도 아니고 10년도 아닌 자그마치 16년이다. 정치적 골든타임을 놓친 거다. 나와 비슷한 연배의 민주화 인사들이나 정치인들은 이미 기반을 닦고 있었다. 내겐 그런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다 야권에서 친노에게 악의적 숙청을 당해 속수무책이었다.”

-친노와의 갈등 상황을 들려줄 수 있나.

“노무현 전 대통령 본인과는 문제가 사실 없었다. 친노가 문제다. 2004년에 그렇게 하지 말자고 했던 합당을 했는데, 당시 공천심사위원장이 박재승 변호사였다. 그런데 합당하자마자 갑자기 특별 기자회견을 해서 하는 소리가 ‘김경재 최고위원을 공천 심사에서 배제키로 결정했다’는 거다. 심사 자체를 안 한다는 거다. 심사를 해서 ‘옳다’‘옳지 않다’ 따져야지, 게다가 여론조사 결과도 내가 이기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렇게 나는 억울하게 친노에게 숙청당했다.”

▲ 김경재 전 의원 ⓒ시사오늘

 “통일은 대박이기에 앞서 필연이다”

4·19 때부터 민주화와 반독재의 중심에 섰던 김 전 의원은, 일찌감치 통일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국민의 정부 때는 김대중(DJ)전 대통령의 직속으로 ‘북한통’으로 활약하기도 했던 그다. 김 전 의원이 생각하는 ‘통일’에 대해 물었다.

-통일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했다고 알려졌다.

“1960년 4·19 당시 난 대학교 1학년이었다. 자유민주주의와 반독재를 가장 소리 높여 외쳤지만, 통일도 우리 시대의 이상에 포함돼 있었다. 나는 그 때부터 꾸준히 통일 문제를 붙들고 왔으니, 50년이 넘은 셈이다. 반독재 운동 뿐 아니라 통일운동도 굉장히 많았다. ‘오라 남으로, 가자 북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는 유명한 구호도 있었다. 그중에서 좌파로 흘렀던 사람도 있다. 나는 4년 반을 군대에서 보냈고 반독재운동을 하다 박정희 정권에 밉보여서 16년 간을 미국에서 망명했다. 그리고 돌아와서 의정활동도 두 번 했고 김대중 대통령의 밀사로 평양도 다녀왔다. 그야말로 민주화와 통일을 온몸으로 겪었다고 보면 된다. 이제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화해는 거의 이뤄졌다. 이제 민족의 화해, 즉 통일로 가야 한다.”

-지금 통일과 관련된 정세를 어떻게 보나.

지금 남과 북의 입장을 보자면 삼국시대와 비슷하다. 신라와 백제, 영호남이 있고 북한은 고구려를 이었는데 정치가 잘 안 되는 점도 똑같다. 김일성이 지도자로서는 대단했지만 자식들이 잘 못한다. 과거 고구려 연개소문의 아들들이 나라를 말아먹은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북한의 불안은 결국엔 또 남한의 불안을 초래한다. 우리 스스로를 위해서 자존심을 낮춰 접근할 필요도 있다. 지난 4일 북한 고위층 세 사람이 내려왔다는 건 큰 사건이다. 개인적으로는 지난 10년 간 가장 놀라운 사건의 하나라고 본다. 통일운동을 위한 적극적 전환점이 될 수 있다.“

-과거 북한에 다녀온 적도 있지 않나.

“1999년에 7박8일 동안 방북한 적이 있다.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MBC와 SBS에서 평양공연을 기획하는데 기여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해방 후 최초로 평양에 공식적으로 들어간 최초의 남한 국회의원이더라. 가서 평양의 실상을 보는데 예상보다도 훨씬 못 살았다. 너무 못 살아서 아이들의 가난에 찌든 모습을 보는데 눈물이 나서 볼 수가 없을 지경이더라. 지금도 눈에 선하다.”

-북한에 가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1997년에 DJ가 이제 대통령이 됐는데 북풍 공작 때문에 시끄럽지 않았나. 그래서 국정원 개혁을 하면서 논란되는 인사들을 전부 잘라버렸다. 북한의 김정일도 비슷한 시기에 208명인가를 남한과 내통했다며 숙청했다. 북경 이런 데서는 남과 북 공작원들이 같이 밥 먹기도 하고 라면 박스도 주고받고 그랬단 말이지. 그런데 북에서 이제 그랬던 인사들 다 잘라버렸고,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인사를 싹 정리했고. 그러다 보니 이제 대화 채널이 남지 않은 거다. 그래서 DJ가 날 불러서 ‘김 동지, 이거 북한이랑 채널이 다 끊겼는데 어떻게 좀 해보시오’했다. 그래서 고심하던 차에 한 국제 모임에 참가했다. 거기서 우연히 UNDP 한국 사무소장을 만났는데, 그 기구 사무소가 평양에도 있다는 거다. 그래서 따로 그 사람을 만나서 ‘내가 대통령에게 이런 명령을 하달받았는데 아이디어가 없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북한은 지금 기름이 없어서 차가 움직일 수가 없다. 그래서 긴급 환자들도 이송이 안 되고 죽어가는데 자전거를 보내서 의사의 왕진을 도와라’고 했다. 그래서 보고하고 당시 임동원 통일부 장관의 지원으로 진행하는데 자발적인 성금으로만 몇 억이 모이더라. 그래서 자전거 5천 대 등을 보내면서 다시 대화 채널을 회복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통일 대박론’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나.

“기본적으로 대박론을 지지하긴 한다. 그러나 약간 ‘대박’이라는 단어가 다소 상업적인 표현이 아닌가. 그래서 대박론의 정신은 이해하지만, 나는 한 단계 더 나아가 통일은 ‘필연론’이라고 생각한다. 설사 당장 손해를 볼지라도, 고통과 시련이 올지라도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다. 접근 방법이 약간 차이가 있다. 통일이 대박나면 좋겠지만, 그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장애물이 있더라도 한민족의 정서를 함양하는, 그런 식의 통일이 이뤄져야 한다. 어떤 정권에서 통일을 이루든 역대 한국 정권 중 가장 위대한 정권으로 평가받을 거다. 그 반대의 경우는 상상도 하기 싫어서 언급하지 않겠다. 나라에 할 일이 많다. 정치에 다시 직접 나설 생각은 아직 없지만, 나는 통일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을 하든 누군가를 지원할 수도 있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담당업무 : 게임·공기업 / 국회 정무위원회
좌우명 : 행동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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