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과 아리고 사키]세상을 뒤집은 비주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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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과 아리고 사키]세상을 뒤집은 비주류들
  • 정진호 기자
  • 승인 2016.02.19 09: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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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로 풀어본 정치인(9)>‘고졸 대통령’ 노무현과 ‘축구 역사를 바꾼 구두 판매원’ 아리고 사키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진호 기자)

정치는 축구와 비슷하다. 정해진 규칙 안에서 겨뤄야 하고, 승자와 패자도 생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비슷한 점은, ‘사람’의 게임이라는 점이다. 축구 팬들은 잔디 위에서 뛰는 ‘사람’에게 멋진 플레이를 기대하고, 국민들은 정치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희망을 투영하고 미래를 건다. 다른 듯 닮은 정치계와 축구계의 ‘사람’을 비교해 본다.

‘고졸 대통령’ 노무현과 ‘축구 역사를 바꾼 구두 판매원’ 아리고 사키

故 노무현 전 대통령과 아리고 사키 전 AC밀란 감독은 닮은 점이 많다. 비주류 출신임에도 혁명적인 과정을 통해 최고의 자리에 올랐고, 아직까지도 그들의 뜻을 따르는 추종자들이 많다는 점도 공통점이다. 

▲ 故 노무현 전 대통령 ⓒ 뉴시스

주류에 도전한 비주류들

노 전 대통령은 ‘개천에서 용 나는’ 모델의 전형이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가까스로 중학교를 졸업했고, 부산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해야 했으며, 졸업 후에도 대학에 가지 못하고 생업에 종사해야 했다. 막노동과 시험 준비를 병행, 어렵사리 사법고시에 합격했으나 학교를 중심으로 끼리끼리 뭉치는 법조계에 ‘상고 출신’인 그가 설 자리는 없었다.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혈연·지연·학연 중 어느 하나도 갖지 못했던 노 대통령은 영원한 ‘아웃사이더’였다.

사키 전 감독은 축구선수 출신이 아니었다. 프로선수를 꿈꿨으나, 재능의 한계를 느끼고 구두 판매원으로 일하며 틈틈이 전술 공부를 했던 ‘아마추어 선수’였다. 어렵사리 고향의 아마추어 팀 감독을 맡는 기회를 잡았지만 베테랑 선수들과의 마찰로 지휘봉을 놓은 뒤 하부리그를 전전했다.

당시 3부 리그 팀이었던 파르마FC를 맡아 인상적인 모습을 보인 사키 전 감독은 이탈리아의 전통 명문 AC밀란의 감독으로 임명됐지만, 아마추어 선수 출신의 구두 판매원 감독을 호의적으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소속 선수들조차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한 감독’이라며 그를 조롱할 정도였다.

세상을 뒤집은 비주류들

그러나 잃을 것이 없었던 두 사람은, 그랬기 때문에 오히려 더 당당했다. 노 전 대통령은 부림 사건을 계기로 인권 변호사 활동에 투신한다. 이후 6월 민주항쟁에 앞장서는 등 재야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그는 故 김영삼 전 대통령(YS)과의 인연으로 정계에 입문, 제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1988년 11월에는 노 전 대통령을 일약 스타로 만든 사건이 벌어진다. 제5공화국 비리 특별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논리적이고 날카로운 질의로 국민적인 관심을 받은 것이다. 이어 죄가 없다고 주장한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명패를 집어던지며 국민들에게 자신의 이름 석 자를 각인시킨다.

노 전 대통령의 ‘원칙주의’는 계속됐다. 자신의 정치적 후원자였던 YS가 3당 합당을 선언하자 YS와 결별, 이른바 ‘꼬마 민주당’의 일원이 된다. 이후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부산시장 후보로 출마해 낙선하고, 16대 총선에서는 민주당 부산 북·강서을 지역구 후보로 나서 고배를 마시는 등 좌절을 거듭한다. 하지만 결국 이것은 ‘인생 대역전’의 발판이 된다.

지역주의에 대한 거듭된 도전으로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명을 얻은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도전장을 내민다. 당시 민주당 부동의 1위는 이인제 후보였고, 노 전 대통령은 지지율 10% 미만의 군소 후보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는 조금씩 바람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인상적인 연설을 펼친 울산에서 1위를 거머쥔 노 전 대통령은 대선주자 지지도 여론조사에서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1위에 오르며 이인제 후보의 대세론을 꺾어버린다. 그리고 민주당의 ‘안방’이라고 할 수 있는 광주에서도 1위를 차지하면서 사실상 승부를 결정짓는다.

‘노풍(盧風)’은 대선까지 이어졌다. 민주당 내부에서 비토 세력이 등장하고, 정몽준 후보의 단일화 파기 등 악재가 연이어 터졌지만 ‘노무현 바람’은 멎을 줄을 몰랐다. 결국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12월 19일,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국내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인 ‘노사모’의 등장, 온라인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선거운동 등 정치 문화를 송두리째 바꿔놓은 역사적인 승리였다. 

▲ 아리고 사키 전 AC밀란 감독(왼쪽), 카를로 안첼로티 전 레알 마드리드 감독 ⓒ AC밀란 공식 홈페이지

사키 전 감독의 성공 스토리도 드라마틱하다. 프로선수 경력이 없다는 약점은 그에게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했다. AC밀란 감독을 맡은 사키 전 감독은 리누스 미헬스가 제시한 ‘토털 풋볼’을 개량해 현대 축구 전술의 기틀을 잡았다. 이는 당시까지 존재했던 전술의 패러다임을 뒤바꾼 것으로, ‘전술 혁명’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는 토털 풋볼의 압박 축구 개념을 받아들이되, 밸런스가 좋은 4-4-2 포메이션을 도입해 압박의 개념을 팀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이전까지의 토털 풋볼이 볼을 가진 선수를 서너 명의 선수가 따라다니는 수준이었다면, 사키 전 감독의 축구는 최전방과 최후방의 간격을 25m 이내로 좁게 유지하면서 공간을 선점, 볼을 가진 선수뿐만 아니라 볼을 갖지 않은 선수까지도 압박하는 축구였다. 기존의 토털 풋볼이 ‘선수’에 대한 압박이라면 사키 전 감독의 축구는 압박의 개념에 조직력을 더해 ‘선수’와 ‘공간’을 모두 압박했던 것이다. '사키이즘‘으로 불리는 이 개념은 현대 축구의 모든 팀들이 적용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전술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꾼 사키 전 감독은 부임 첫 해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자신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를 모두 찬사로 바꿔놓는다. 1988-89 시즌에는 ‘전설’ 그 자체인 오렌지 삼총사(마르코 반 바스텐, 루드 굴리트, 프랑크 레이카르트)를 완성해 유러피안컵(UEFA 챔피언스리그의 전신)에서 우승했고, 이듬해인 1989-90 시즌에도 유러피안컵을 들어올리며 1980년 이후 이 대회에서 연속 우승한 최초의 팀이 된다.

새로운 전술과 그에 수반된 우승 트로피로 축구계에 충격을 선사한 사키 전 감독은 1991년 AC밀란을 떠나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기에 이른다. ‘구두 판매원’의 화려한 성공이었다.

그들이 남긴 것들

두 사람 모두 남긴 것이 많다. 노 전 대통령을 따랐던 ‘친노’ 세력은 아직도 대한민국 정계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그의 비서실장이었던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2012년 대선에서 후보로 나섰고, 다가오는 2017년 대선에서도 야권의 유력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문 전 대표뿐만 아니라 아직도 야권에는 노 전 대통령의 뜻을 따르는 정치인들과 지지자들이 많이 남아있다.

사키 전 감독은 축구 역사를 바꿨다. 현대 축구 모든 팀들의 전술에는 ‘사키이즘’이 녹아있고, 특히 2003-04 시즌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에서 무패 우승을 거뒀던 아스널은 사키이즘을 극대화한 팀으로 평가받는다. 이외에도 디에고 시메오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감독, 위르겐 클롭 리버풀 감독, 카를로 안첼로티 전 레알 마드리드 감독 등 유럽 축구의 내로라하는 명장들도 모두 ‘사키의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한 바 있다.

담당업무 : 국회 및 국민의힘 출입합니다.
좌우명 : 인생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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