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死者들의 정치③] 노무현의 발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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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死者들의 정치③] 노무현의 발자국
  • 김병묵 기자
  • 승인 2016.02.19 16: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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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세력의 아이콘으로…親盧는 야권 계파갈등 중심에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김병묵 기자)

정치판엔 늘 새로운 세대가 탄생한다. 아무리 큰 거목(巨木)이 져도, 그 후신들이 정치를 이어나간다. 그러나 가끔 이미 사라진 사람들이지만 영향력이 아주 강력했던 경우, 혹은 치열한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경우에 그들은 현실의 정치판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승만 전 대통령, 박정희 전 대통령, 노무현 전 대통령 등이 대표적이다. 과연 죽은 자들의 정치는 끝나지 않았는지, <시사오늘>이 짚어봤다.

▲ 故 노무현 전 대통령 ⓒ뉴시스

이승만 전 대통령과 박정희 전 대통령이 현 보수들의 아이콘으로 변모할 때, 진보 진영도 그들의 상징을 찾았다. 바로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작고 시기가 2009년으로 비교적 최근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만으론 설명할 수 없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이가 바로 노 전 대통령이다. 그가 한국 정치판에 남긴 발자국은 사후(死後)에 더 깊게 패이며 다방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호남을 넘어선 진보진영의 구심점이 되어 주고 있지만, 야권 계파갈등의 진앙지인 친노(親盧)계를 남기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이 대통령직에 있었던 시간은 단 5년으로 박 전 대통령 재임 기간의 3분의 1도 되지 않음에도, 그에 대한 향수는 박 전 대통령 못지않게 진하다. 국내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인 ‘노사모’가 결성되기도 했다. 게다가 이전 진보진영의 정치적 아이콘이었던 故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호남이라는 지역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반면, 노 전 대통령은 한국 내 범진보진영 전체를 아우르는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물론 DJ와 함께 진보정권 10년으로 한데 묶여서 지목되는 일도 많다). 여론조사전문기관 <리서치뷰>의 지난 1월 29~31일 3일간 정기조사 결과 전ㆍ현직 대통령 호감도에서 노 전 대통령은 35.3%를 기록하며 박 전 대통령을 제치고 1위에 올랐다.

▲ 2009년 5월 29일 노무현 전 대통령 운구행렬과 조문인파 ⓒ뉴시스

노 전 대통령의 작금의 이러한 인기는 생전 그가 가진 것보다도 더하다. 노 전 대통령의 지지율은 재임시절 한 때 최저 한자릿 수 까지도 떨어졌다. 퇴임을 앞두고 상당 부분의 지지율이 회복되긴 했지만, 이를 넘어 대통령 호감도 1위까지 오를 정도가 된 것은 그의 비극적 죽음에 기인한다.

상고 출신으로 사법고시를 패스했고, 청문회 스타를 거쳐 지역주의에 도전했으며 아무도 예상치 못한 대통령 당선까지 그의 삶은 드라마틱했다. 그리고 자진(自盡)으로 마감됐다. 1979년 박 전 대통령 이후 다른 전직 대통령들이 아무도 세상을 떠나지 않은 상태에서, ‘대통령의 죽음’을 오랜만에 접한 국민들에겐 슬픔을 불러일으켰고 그에게 지지를 보내온 진보진영을 결집케 했다. 고향 봉하마을엔 100만여명의 조문객이 찾았다. 분향소를 찾은 DJ는 “내 몸이 절반이 무너지는 것 같다”며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고, 이미 많은 업적을 남겼다”며 통곡했다. 그리고 며칠 뒤 병상에 눕는다.

"너무 빨리 ‘역사’가 되었지만, 노무현의 죽음은 흩어진 민주진보세력을 하나로 뭉치게 했다" -<노무현 평전>(김삼웅 지음) 中

하지만 이러한 진보진영의 결집은 반작용을 불러왔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해서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던 이들의 감정도 함께 격해졌다. 그 가시적인 현상 중 하나가 소위 ‘일베’로 불리는 <일간베스트> 사이트다. 일베에서 노 전 대통령은 어느 순간부터 희화화의 주요대상으로 떠올랐다. 노 전 대통령이 진보진영의 핵심 상징이 된 만큼 보수진영의 핵심 공세 대상이 된 것이다. 노 전 대통령 사후 그에 대한 평가가 더욱 양극화된 셈이다.

이와 함께 노 전 대통령의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친노(親盧)’세력이 남겨졌다. 이는 한국 정치 역사에 처음 등장한 ‘친(親)인물’의 이름을 단 최초의 세력이다. 이후 한나라당에서는 친이(親이명박), 친박(親박근혜) 등의 계파가 등장한다. 故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상도동계나 DJ의 동교동계처럼 한국 정치사의 거대 계보와는 궤를 달리하는 조직이다. 이들은 진보 진영 내에서 일정 세력을 형성했으며, 노 전 대통령 사후 오히려 더욱 강고한 응집력을 보였다.

세월의 흐름에 밀려 동교동계가 흐릿해진 가운데, 친노는 사실상 자신의 이름을 가진 야권 정국의 유일한 계파가 됐다. 노 전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친노인사 한명숙 전 국무총리나 이해찬 전 국무총리 등이 야권의 전면에 나섰고, 2012년엔 노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이었던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대선주자로 나서는 등 친노계는 야권의 정국을 주도했다.

▲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안경에 비친 故 노무현 전 대통령 사진 ⓒ뉴시스

친노는 수가 많지 않았지만 그 이외에는 야권 내에 딱히 응집력 있는 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세를 떨쳤다. 대신 비(非)친노, 일명 비노와 끊임없는 갈등을 빚게 된다. 친노계의 요직 독식 의혹은 야권 갈등의 단골 의제였다. 최근엔 김한길 전 민주통합당 대표와 함께 새정치민주연합을 구성했던 안철수 의원이 탈당, 국민의당을 만들었다. 그 핵심 명분도 문재인 대표 체제 하의 ‘친노패권주의’였다.

친노 내에서도 분열이 오가고, 서로 내가 진짜 ‘친노’라고 나서기도 했다. ‘원조 친노’임을 자임했던 조경태 의원은 지난달 21일 아예 새누리당으로 적을 옮겼다. 노 전 대통령의 참여정부에서 일했던 몇몇 주요 인사들도 국민의당으로 떠나갔다.

이와 관련 친노계로 분류되는 더불어민주당의 한 당직자는 지난 16일 <시사오늘>과의 만남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친노계는 내부에서 뭉친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역으로 분리돼서 만들어졌다. 지금 실제로 그렇게(친노라고) 분류되는 인사들이 있으니 친노란 것이 없다고는 할 수 없겠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의 뜻을 이어가는 데 계파가 어디있고, 지금 돌아가신 마당에 더 측근이고 덜 측근인 것이 어디 있겠나. 친노계가 야권 갈등의 원흉으로 지목받는 것은 억울하다. 나 자신을 포함, 문(재인) 대표도 스스로 ‘특권을 가진 친노’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다만 친노계가 중심에 서 있다는 것까진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담당업무 : 게임·공기업 / 국회 정무위원회
좌우명 : 행동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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