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구도] 대통령 선거, 양자 구도였을까?
[대선 구도] 대통령 선거, 양자 구도였을까?
  • 조서영 기자
  • 승인 2021.04.20 19: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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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본 정치史〉
김대중 김영삼 노무현 노태우 이명박 전두환 등이 말하는 진실은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조서영 기자)

ⓒ시사오늘 김유종
이번 서른세 번째 ‘대통령 회고사’는 역대 대통령 선거 구도다.ⓒ시사오늘 김유종

선거는 구도 싸움이다. 어떤 대결 구도인지에 따라 선거의 승패가 달라진다. 두 후보 간 양자 구도인지, 세 후보 이상의 다자 구도인지. 또 그 과정에서 여야 중 어느 쪽이 분열하고, 통합하는지 등은 선거의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중요한 변수였다.

이번 서울시장 보궐선거도 마찬가지였다. 국민의힘과 국민의당 간 야권 후보 단일화에 촉각을 세운 이유는 바로 ‘구도’에 있었다. 야권 단일화를 이뤄내며 형성된 양자 대결 구도는 국민의힘 승리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이제 남은 건 대통령 선거다. 2022년 차기 대선 주자로 거론되는 후보는 여럿이다. 이 가운데 야권에서 어떤 구도를 만들어내느냐가 최대 관건이다. 국민의힘과 국민의당의 합당,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합류, 무소속 홍준표 복당 등이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지난 16일 <시사오늘>과 만난 국민의힘의 한 관계자는 “차기 대선 승리를 위해 당이 기대하고 있는 건 윤 총장의 합류”라고 귀띔한 바 있다.

차기 대통령 선거 구도는 어떻게 될까. 1987년 민주화 이후 역대 대선은 다자 대결 구도로 형성됐다. <시사오늘>은 매번 역대 대통령들의 입을 빌려 당신에게 일종의 ‘기억재생장치’를 선사해왔다. 이번 서른세 번째 ‘대통령 회고사’는 역대 대통령 선거 구도다.

 

1987년, 노태우-YS-DJ-JP…4자 구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는 4자 구도였다.ⓒ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이버선거역사관 갈무리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는 4자 구도였다. △민주정의당 노태우 △통일민주당 김영삼(YS) △평화민주당 김대중(DJ)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후보가 맞붙었다. 이 선거의 변수는 ‘YS와 DJ 간 야권 후보 단일화 여부’였다. 양 김은 민주화 투쟁으로 6·29 선언을 함께 이끌어냈으나, 단일화에 실패하며 갈등의 서막으로 탈바꿈됐다.

YS는 1986년 DJ의 “직선제가 수용되면 불출마할 것”이란 약속을, DJ는 YS의 “김대중 씨가 사면·복권되면 대통령 후보를 양보할 것”이란 입장을 내세웠다. 단일화 시도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두 사람은 9월 여러 차례 회동했다. 결국 회담은 두 사람의 입장 차를 확인하는 데 그쳤다.

대선이 한 달 반 정도 남았을 무렵, YS가 최후의 방법을 제안했다. 바로 경선이었다. 그러나 DJ는 측근을 통해 후보 출마를 포기할 수 없어 부득이 탈당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두 사람은 후보 단일화 실패를 넘어 민주당 분열 사태까지 맞게 됐다. 결국 YS는 통일민주당, DJ는 평화민주당 후보로 각각 출마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DJ의 행보에는 ‘4자 필승론’ 논리가 숨겨져 있었다. 이는 4명의 후보가 출마했을 때, 노태우·YS가 영남 표를 나눠 갖고, JP가 충청, DJ가 호남과 수도권 표를 가져가면 DJ가 승리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DJ의 논리와 달리 4자 필승론의 승자는 노태우였다.

네 명의 후보가 맞붙은 13대 대선의 대결 구도를 제3자는 어떻게 분석했을까. 전두환은 김대중의 사면·복권에서 양 김의 분열을 예견했으며, 그러한 구도 속 노태우 승리를 예측했다.

내가 6.29선언을 예비하는 과정에서 직선제 수용과 함께 김대중 씨의 사면복권을 생각한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중략) 김대중 씨의 사면복권이 ‘민주화’를 향한 필연적인 절차였듯이, 김대중 씨의 사면복권은 필연적으로 야권의 분열, 양 김 씨의 동시 출마로 이어질 것이라는 것은 당시 야당의 속내를 아는 사람은 누구나 다 내다볼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김대중 씨를 풀어준다고 했을 때 나는 이미 양 김씨의 동시 출마를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고, 양 김 씨가 동시 출마하면 노태우 후보에게 승산이 있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김대중 씨의 사면복권→양 김 씨의 동시 출마→노태우 후보의 당선이라는 진행은 나의 전략적 판단에 따른 선택의 결과가 아니고, 상황의 산물이었고 나는 그러한 상황을 정확히 읽고 있었을 뿐인 것이다. 또한 그러한 상황을 만든 것은 바로 양 김 씨 자신들이지 내가 아닌 것이다. (중략) 1987년 노태우 후보에게 당선증을 헌납한 사람들 역시 3김 씨였다는 사실은 1980년대 우리의 정치사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하겠다.

- 전두환 회고록 2권, 652~653쪽.

 

1992년, YS-DJ-정주영…3자 구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이버선거역사관 갈무리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는 3자 구도였다.ⓒ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이버선거역사관 갈무리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는 3자 구도였다. △민주자유당 김영삼 △민주당 김대중 △통일국민당 정주영 후보가 맞붙었다. 이 선거의 변수는 ‘기업인의 출마 여부’였다.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의 출마 여부가, 공고한 양 김 구도를 뒤바꿀 수 있을지 주목받았다.

당시는 ‘경제’가 선거의 주요한 이슈로 자리 잡던 시기였다. 이는 1987년 이후 상대적으로 비(非)정치적인 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한국정치학회보>는 “과거의 선거에서 절대적 중요성을 지녔던 민주화나 정권의 정통성과 같은 정치적 사안이 사라짐에 따라 비정치적이고 구체적인 정책을 둘러싼 논의가 부각되는 것은 당연하다(박경산·1993)”고 분석했다.

김우중은 새한국당 후보 추대 논란 끝에 최종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러나 정주영은 “기업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 출마를 택했다. 통일국민당을 창당한 그는, 14대 총선에서 31석을 획득하며 돌풍을 일으켰다. 기업인의 창당이 국민들에게 새로운 하나의 대안으로 부상한 결과였다. 그러나 국민당의 바람은 대선까지 이어지진 않았다. 정주영은 16.3%의 득표율에 그쳤다.

총선에서 정주영에게 보여준 국민들의 지지는 ‘대안 세력’에 대한 기대의 의미였다. 공고한 양 김 구도에 대한 반발이자, ‘양 김 청산’이라는 정치적 관점에서 표를 줬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는 다시 양 김 구도로 돌아갔다. 유권자들은 영남과 호남인지에 따른 지역 투표 행태를 보였다. “우리가 남이가”라며 지역감정을 조장했던 ‘초원복집 사건’도 선거 3일 전 발생했다.

나는 초원복집 사건이 일어났을 때 예감이 좋았다. 아무리 여당 후보지만 김영삼 씨도 별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것으로 선거는 이기지 않을까.’ 또한 이 사건을 계기로 선거판에서 지역감정이 사라질 것으로 기대했다. (중략) 경상도 유권자들도 여당과 정부의 태도에 격분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순진한 생각이었다.

개표 결과는 초반부터 지역 대결 양상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부산 초원복집 사건은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엄청난 역풍을 불러왔다. 악재가 호재로 둔갑하여 경상도 지역에서 김영삼 후보의 몰표가 쏟아졌다. 지역감정과 색깔론이 모든 이성적 판단을 삼켜 버렸다. 반(反)전라도 지역 정서가 경상도 외 다른 지역까지 파급되었다. 서울과 전라도를 밴 나머지 지역에서 모두 패했다. (중략) 그들의 바람대로 지역감정 조장은 성공을 거둔 셈이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603~605쪽.

 

1997년, 이회창-DJ-이인제…3자 구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이버선거역사관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 역시 3자 구도였다.ⓒ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이버선거역사관 갈무리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 역시 3자 구도였다. △한나라당 이회창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가 맞붙었다. 이 선거의 변수는 ‘여권 분열과 야권 연대’였다. 야권의 DJ와 JP가 연대한 반면, 여권에서는 2인자였던 이인제가 탈당 및 독자 출마하면서 분열했다. 이에 따른 3자 구도는 1.6%포인트 격차로 DJ에게 승리를 안겨줬다.

당시 신한국당(後한나라당)에는 9룡이라 불리는 9명의 후보가 있었다. 이회창·이홍구·이수성·최형우·김덕룡·이인제·김윤환·이한동·박찬종이 9룡상쟁(九龍相爭)의 주인공이었다. 2차 결선 투표를 통해 이회창이 2300표 차로 이인제를 꺾고 최종 후보로 7월 결정됐다.

그런데 1위였던 이회창에게 두 아들 병역 비리 의혹이 불거졌다. 이에 따라 2위로 밀려났던 이인제가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여당 내부에서는 두 사람을 둘러싼 내분이 발생했다. 결국 선거 세 달 앞두고, 이인제는 신한국당을 탈당하고 국민신당으로 출마했다.

결국 여권 분열에 따른 3자 구도는 김대중의 승리를 안겨줬다. 김영삼과 이회창은 패인을 대결 구도를 통해 분석했다.

이회창 후보의 제일 큰 패인은 여당의 지지기반이던 부산, 경남에서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의 표가 30% 가까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 김영삼 회고록 下권, 371쪽.

나는 왜 졌는가? 대선이 끝난 후 언론이나 논평가들은 나의 대선 패배 원인에 대해 여러 가지 분석을 내놓았다. (중략) 언론이나 논평가들이 내놓은 원인 분석은 대체로 ①여권 분열(이인제 탈당, 출마), ②야권 연대(DJP연합), ③병역 문제, ④IMF 외환위기 등을 패배 원인으로 꼽았다.

(중략) 그러나 이것은 결과를 보고 꿰맞추는 전형적인 사후약방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중략) 결국 이인제 후보의 배신 행위와 DJP연합은 결과적으로 승패를 갈랐지만 그것이 당연히 내가 패배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라고 분석하는 것은 결과에 맞춘 견강부회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 이회창 회고록2, 388~391쪽(e북 기준).

 

2002년, 이회창-노무현-정몽준…3자 구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이버선거역사관 갈무리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도 3자 구도였다.ⓒ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이버선거역사관 갈무리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도 3자 구도였다. △한나라당 이회창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정몽준 후보가 맞붙었다. 이 선거의 변수는 뒤늦게 떠오른 ‘정몽준’이었다.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 모두 경선을 통해 후보를 선출했다. 한나라당은 4명의 후보 가운데 이회창이, 새천년민주당은 7명 가운데 노무현이 당선됐다.

그렇게 양강 구도로 갈 것 같았던 16대 대선에도 변수가 등장했다. 민주당이 6월 지방선거와 8월 재보궐선거에서 잇따라 참패하면서, 노풍이 위태로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당내에서 ‘제3의 후보 영입론’이 제기됐다. 마침 월드컵 열기가 달아오르던 때라, 월드컵 조직위원장을 맡고 있던 정몽준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그렇게 선거를 한 달 앞둔 11월, 노무현은 정몽준에게 후보 단일화를 제안했다. 단일화 과정을 통해 노무현이 또 한 번 선출됐다. 그렇게 다자 구도로 갈 뻔한 16대 대선은 다시 양자 구도로 돌아가는 듯 했다. 노무현은 당시 승부수를 던진 이유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서술했다.

언론사 두 곳의 여론조사에서 이회창 후보 지지도가 처음으로 40%를 넘었다. 나는 정몽준 후보에게 근소하게 뒤지는 3위였다. 결단할 때가 온 것이다. 이대로 가면 선거에서 이길 확률은 0%였다. 단일후보가 될 확률은 50%에 조금 모자랐다. 일단 단일후보가 되기만 하면 대통령이 될 확률은 100%에 가까웠다. 복잡하게 계산할 일이 아니었다. 한나라당에 정권을 다시 넘길 수는 없었다. 그보다는 정몽준 씨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연립정부를 세우는 것이 낫다고 보았다.

-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 195쪽.

그러나 선거 전 날, 명동-종로 유세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노무현이 정동영과 추미애를 단상 위로 올라오게 하며 했던 발언이 문제였다. 그날 밤 정몽준은 성명을 통해 단일화 철회를 선언했다. 노무현이 정몽준 자택을 찾아가 문전박대 당하던 모습은 국민 정서를 건드렸다. 결국 다음 날 노무현은 2.3%포인트 앞서 승리를 거뒀다.

이회창은 패인을 두 사람 간의 단일화에 따른 양자 구도를 넘어, 노무현(흙수저)-정몽준(금수저)란 대결 구도로 분석했다.

불리한 처지에 있던 노무현 후보는 건곤일척(乾坤一擲)의 모험수로 정 후보와의 TV 토론과 여론조사라는 승부수를 던졌고 이것이 적중했다. 마치 도박판에서 돈을 잃고 있던 도박사가 모든 것을 한판승부에 걸어 도박판을 휩쓰는 것과 같았다. 많은 국민들은 이런 모험과 승부에 열광했고 대역전의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의 역전의 요인(아마도 결정적 요인일 수 있다)은 노무현과 정몽준의 절묘한 조합이었다. 노무현은 요즘말로 흙수저 출신이고 정몽준은 대표적인 금수저 출신이다. 한쪽은 무산대중과 서민을 대변하고 다른 층은 재벌과 기득권층을 대변하는 모양새였다. 이 대결에서 흙수저 출신이 금수저 출신을 쓰러뜨렸으니 관중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마치 새로운 세력의 구세력, 기득권 세력에 대한 혁신과 변화처럼 느끼게 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 이회창 회고록 2권, 1003~1004쪽.

 

2007년, 정동영-MB-이회창…3자 구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이버선거역사관 갈무리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도 3자 구도였다.ⓒ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이버선거역사관 갈무리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도 3자 구도였다.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한나라당 이명박(MB) △무소속 이회창 후보가 맞붙었다. 이 선거의 변수는 ‘이회창’이었다.

임기 말 참여정부는 부동산 정책 등으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열린우리당은 2004년 이후 열린 모든 선거에서 참패했다. 이러한 상황 속 한나라당에서는 “경선만 승리하면 대통령 된다”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한나라당에서는 이명박, 박근혜, 손학규가 ‘빅3’로 거론됐다. 이 가운데 MB-박근혜 두 사람의 경선 과정에서 수많은 네거티브 공세가 오갔다. 당시 논란이 된 부분이 투자운용회사인 BBK, 다스 그리고 국정농단이었다.

민주신당 역시 9명의 후보 가운데 최종 3명, 손학규·정동영·이해찬이 경선을 치렀다. 이 가운데 최종 정동영이 대선 후보가 됐다.

마지막으로 대선 출마를 알린 인물은 이회창이었다. 그의 출마 선언은 정동영-MB 간 양강 구도를 3자 구도로 바꿔놓았다. 특히 그는 MB의 보수 표를 분산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변수로 작용했다. 결과적으로 15.1%를 득표한 이회창은 승패를 바꿔놓지는 못했다. 그러나 TK·PK 표 일부를 흡수하며, 결론적으로 보수 표를 일정 부분 분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런 그가 무소속으로 출마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2002년 대선이 끝난 후 현실정치에서 나는 떠났고 나의 역할은 끝났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현실정치의 상황을 보면서 누군가는 나서서 경고음을 울려 정치가 나갈 방향을 가리켜야 되는데 그것은 두 번이나 대선에 패배해 좌파 정권 시대를 열게 만든 장본인인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을 떨쳐져버릴 수 없었다. (중략) 결국 나는 경고음을 울리는 충격적인 방법으로 내가 다시 한 번 대선에 출마해 내 생각을 국민께 직접 호소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 이회창 회고록 2권, 1144~1145쪽.

 

2012년·2017년…3자 구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이버선거역사관 갈무리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와 2017년 제19대 대선도 모두 3자 구도였다.ⓒ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이버선거역사관 갈무리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이버선거역사관 갈무리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이버선거역사관 갈무리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와 2017년 제19대 대선도 모두 3자 구도였다. 18대 대선은 △새누리당 박근혜 △민주통합당 문재인 △무소속 안철수 후보가, 19대 대선은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자유한국당 홍준표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가 맞붙었다. 두 선거의 공통된 변수는 ‘안철수’였다. 차이가 있다면 그가 후보 단일화를 했느냐, 끝까지 제3지대에서 완주했느냐의 차이다.

18대 대선 새누리당 경선에서는 5명 후보 가운데 84%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박근혜가 당선됐다. 민주통합당 경선 역시 5명 가운데 56.5%로 문재인이 결선 투표 없이 당선됐다. 양강 구도로 형성되는 듯 보였던 선거는 안철수의 부상으로 흐름이 달라졌다. 그는 서울시장 재보궐선거에서 박원순을 지지하면서 급부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문재인과의 단일화 합의에 실패했다. 선거를 한 달 앞두고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19대 대선에서는 민주당의 문재인과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 외에도 많은 후보가 참여했다. 그 외에도 국민의당 안철수, 바른정당 유승민, 정의당 심상정 후보가 단일화 없이 각각 출마해 다자 구도를 형성했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행복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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