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권의 책③>유성환 "분단된 조국에서는 통일이 국시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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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권의 책③>유성환 "분단된 조국에서는 통일이 국시여야"
  • 윤종희 기자
  • 승인 2012.05.15 11: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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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세월에도 변치 않는 소신…"반공, 가장 중요한 정책이지만 國是가 될 수는 없어"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종희 기자]

유성환 전 의원은 자서전 '최후진술'에서 지난 1986년 '통일국시사건(統一國是事件)'에 대해 소상히 밝혔다. 이와 관련해, 그의 육성을 직접 들어봤다. 아울러 책에서 소개된 중학생 시절 전기고문 사건과 그 밖에 궁금증을 유발하는 대목에 대해서도 물어봤다. 인터뷰는 2012년 5월 8일 서울 사당역 인근의 한 까페에서 진행됐다.

▲유성환 전 의원은 헌법을 자의적으로 바꿔 정권을 연장한 권력자들은 후대에 혹독한 평가를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유 전 의원은 책 서문에서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의 전제, 독재, 파쇼 타도를 위한 재야 26년의 투쟁은 신이 명령한 참으로 처절하고 가혹한 진리와 정의를 위한 싸움이었다"고 적었다. 이에 대한 그의 얘기를 듣는 것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제가 전직 대통령의 사람됨을 평가하는 건 적절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분들이 행한 정치에 대해 얘기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민간인(civlian) 출신입니다. 박정희·전두환 대통령은 군인 출신입니다. 이들 세 대통령의 공통점은 세계가 아름다운 헌법이라고 칭찬했던 우리 (초대)헌법을 누더기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대통령이 헌법을 권력자 자의대로 바꿔서 정권을 연장하는 길을 터놨습니다. 박정희 대통령과 전두환 대통령은 선배의 전례를 따른 것입니다. 백년, 천년 뒤에는 이에 대한 혹독한 평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유 전 의원은 그러면서 흥미로운 주장을 펼쳤다.

"대통령 재임기간 평가와 관련해선 우선, 독재자가 하는 1년의 권력행사는 민주국가 대통령이 하는 권력행사의 2~3년에 해당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반대자의 입을 막으면서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이승만 대통령의 12년은 24년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18년은 36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의 사실상 10년(79년~88년) 기간은 20년으로 봐야 합니다. 이런 점을 알고 평가를 해야 합니다."

유 전 의원의 이 같은 논리라면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전 대통령의 업적에 대해 높은 점수를 줄 수 없을 것 같다. 엄청나게 긴 집권 기간과 비교하면 그 업적은 작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반면, 반대편의 얘기를 들어가면서 정책을 추진했던 문민정부 등 민주정부 대통령들의 쉽지 않은 국정운영도 짐작케 한다.  

"전두환, 물질에 대한 탐욕을 가진 부패한 사람"

-세 대통령의 통치스타일에 대해선 어떻게 평가하나요.  

▲ 유성환 전 의원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먼저 이 말부터 해야겠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청렴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도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청빈했습니다. 그러나 전두환 대통령은 물질에 대한 탐욕을 가진 부패한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통치스타일을 따진다면 이승만 대통령은 권위주의적이고, 박정희 대통령은 독재적인 이미지가 있고, 전두환 대통령에게선 파쇼적인 스타일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67년 모처에서 군수자리를 주겠다는 회유가 있었다는데 어떻게 뿌리쳤나요.

"사실 군수 자리 제안을 받고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제 생활이 너무나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제안을 받아들이면 당장 배고픈 것은 면하고 몸이 아프면 약을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제안을 들은 날 밤, 저는 잠을 한숨도 못잤습니다. 제 아내도 그랬습니다. 제가 새벽 2시쯤 한숨을 쉬는데 제 옆에서도 한숨 소리가 나오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아직도 안 자나'하고 물으니 '지금 잠이 옵니꺼'라고 하더라구요. 사실 그 당시 제가 몸이 아팠지만 병원에 갈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 아내가 직접 '마이신'을 놔주고는 했습니다. 그 다음달 달성 목욕탕에서 강철호와 만나 의논 한 결과, 그래도 우리는 정치인으로서 군사독재에 항거해야 한다는 점과 김영삼과 이철승, 이 분들에 대한 각각의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점에서 회유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궁금증이 일었다. 전문적 지식이 없는 유 전 의원의 부인이 어떻게 '마이신' 주사를 놓았는지. 유 전 의원은 "황소가 급하면 담을 뛰어 넘는 것처럼 사람도 급하면 그렇게 하게 된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서 당시 상황을 술회했다.

"제가 누워있는 집에서 50m 떨어진 곳에 병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병이 워낙 심하고 돈도 없으니까 아무리 불러도 의사가 안 오는 겁니다. 하는 수 없이 제 집사람이 그 옆에 있는 약국에 가서 약사에게 얘기를 했고, 약사가 주사기를 주면서 제 엉덩이에 놓으면 된다고 설명을 해줬어요. 그래서 집사람이 '마이신'을 사서 제 엉덩이에 직접 주사를 놓은 겁니다."

-1967년 6·8 총선을 헌정사상 최악의 무법타락선거라고 주장했습니다. 구체적 사례가 있나요.

"6·8 선거는 총체적 부정선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국에서 불법선거에 연루된 사람이 9,600 명이었고 이 중 4,000여 명이 입건됐습니다. 경북에서는 885 명이 경찰조사를 받았고 120여 명이 입건됐습니다. 영천에서는 1,000여 명이 경찰조사를 받았습니다. 저희 야당이 부정선거를 강력 규탄하며 압박한 결과 박정희 정권이 조사를 한 결과입니다. 대리투표, 개표부정, 향응제공, 허위사실 유포, 투표행위 방해 등이 자행됐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 삐라를 뿌렸다는 누명을 쓰고 전기고문을 받았다고 썼습니다. 정말 전기고문을 받았습니까.

"엄지손가락에 고리를 걸어서 전기고문을 했습니다. 저를 고문한 김태욱을 죽이겠다는 마음을 먹었던 적이 있습니다. 전기고문을 받으니까 개구리에게 전기를 통하게 하면 쭉 뻗는 것과 똑같이 되더라구요.  그런데 제가 전기고문을 받을 때 뇌가 파괴된다고 생각하면서 '아저씨 전기고문 하지 말고 작대기로 때려주이소'라고 말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어린 소년이 너무 사랑스럽습니다. 그 어린 소년이 공부해서 성공해야 된다는 생각에 그렇게 말했다는 게 참 사랑스러워요.

▲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집에 돌아오니까 할아버지가 제 옷을 가위로 잘라서 벗겼어요. 몸이 퉁퉁부어서 옷이 안 벗겨질 것으로 생각한 거죠. 그렇게 옷을 벗긴 후에 온 몸에 아까쟁끼(머큐롬)를 발랐어요. 그 때는 약이 그 것밖에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제가 전기고문을 받은 시점이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기 직전인데 그 당시에는 법에 대한 인식이 없었어요."

유 전 의원은 1947년 어느 날 오후 5시경 성주경찰서 수사계에 연행됐다. 곧 신문이 시작됐다. 사찰계 김택욱이 성주 장터 일대에 삐라를 뿌린 것을 자복하라고 강요했다. 대질신문 등 가장 기초적인 절차도 없었다. 김태욱은 유 전 의원이 부인하자 작대기로 때렸고 이어 전기고문까지 했다. 그러다 한 낯익은 경찰 간부가 김태욱의 귀에 대고 속삭였고 고문은 중지됐다. 다음날 이 사건은 유 전 의원의 중학교 2년 동기생인 이건영이 유성환은 문제가 되어도 아버지가 '유지'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고 무턱대고 유성환이가 했다고 허위 자백한 사건으로 드러났다. 

-국가로부터 엄청난 피해를 입었는데도 6·25 때 직접 총을 들고 나선 이유는 무엇인가요.

"6·25가 터졌을 때 초급대학 1학년이었는데 국가와 제 고장의 안전을 위해서 뭔가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학생결사대'에 들어가서 낙동강 상황에 대한 정보를 국군과 경찰에게 제공하고 음식 등도 지원했습니다. '학생결사대'에서는 전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인민군이 제가 살고 있는 곳까지 점령하게 됐어요. 저는 잡히면 죽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산에 숨었습니다.

그러다 다시 국군이 우리 지역을 점령했을 때는 사기가 오르면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됐습니다. '의용전투학생대'에 들어가서 3번의 전투를 했고 포로도 잡았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총알을 얻기 위해 군인들과 하늘에 나는 솔개를 맞추는 내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먼저 솔개를 잡아서 총알 200발을 얻어 냈습니다. 또 100m 앞에 있는 풀을 맞추는 시합을 해서 총알을 얻어 내기도 했습니다. 제가 그 때 M1 소총을 가지고 했는데 나름 사격을 잘했습니다."

당시 '의용전투학생대'에는 총알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았다. 때문에 '의용전투학생대' 대원들은 국군들이 트럭을 타고 나무를 하러 산에 오면 일부러 산 속에서 총을 쏴서 국군들을 놀라게 했다. 국군들이 '이게 무슨 소리냐'고 물으면 대원들은 '공비들이 총을 쏘는 것이다. 공비를 잡아야 하니까 총알을 달라'고 말해 총알을 얻기도 했다.  

"민주화운동, 보상 바라고 하지 않았다"

-민주화운동을 하셨는데 이에 대한 보상신청을 안 했어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예전에 독립투사들이 나중에 보상 받을 것을 생각하고 독립운동을 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독재와 싸워서 승리하는 게 목적이지 보상이나 변상은 이와 상관 없는 것입니다. 문민정부에서 민주화운동에 대한 보상법이 만들어졌는데, 어떤 민주화운동을 했는지 본인이 직접 적어서 보고서를 내게 돼있었습니다. 그런데 본인이 직접 보고서를 만드는 건 객관성이 없다고 봐요. 정부가 공적인 기관을 통해 그 사람들을 평가하는게 객관성이 있지요. 그리고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신청을 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신청도 못합니다. 저는 조지워싱턴 대학에서 받은 인권상(1994.6.20)이 의미 있는 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나라에서 직접 객관적으로 조사해서 저한테 표창을 준 게 아닙니까."

유 전 의원은 이날 "내가 자서전을 쓸 때 기도를 며칠이나 했다. 남 욕하지 않고, 내 자랑 하지 않고, 평가는 역사에 맡긴다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다. 나 자신의 일을 객관적으로 보려고 했다"면서 객관적 평가를 강조했다.

-12대 총선에서 당선된 직후에 조갑제 기자와 인터뷰를 했다고 하는데 당시 조 기자의 첫 인상은 어떠했습니까.

"그 때 조갑제 기자가 '예상 외로 당선된 사람들과 인터뷰를 한다'면서 저를 찾아왔어요. 그래서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조 기자가 말미에 '신민당에는 YS계와 DJ계가 있는데 기자가 유 당선자는 YS계로 알고있다. 그 선택기준이 무엇이야'고 슬쩍 물어요. 기사화 하려는 것으로 보이지 않고 개인적으로 궁금해 하는 것 같더라구요. 조갑제 기자가 이데올로기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게 됐습니다. 조 기자의 질문에 저는 '김영삼 총재는 어머니께서 간첩에 의해 아까운 목숨을 잃으셨다. 그리고 노선에서 YS가 DJ보다 더 안정적이고 보편타당성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YS계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조 기자가 고개를 끄덕끄덕 하더라구요."

유 전 의원은 이날 조갑제 기자를 높이 평가했다.

"조갑제 기자는 제가 중정원들로부터 수모를 당한 것에 대해서도 기사를 썼습니다. 남산 아래에 있는 퍼시픽 호텔에 느닷없이 저를 데리고 가서는 문을 잠그고 중정원 소속 네 사람이 둘러 앉아 저에게 심문을 한 것입니다. 제가 이 일에 대해 이철 의원과 의논하니 '어떻게 국회의원을 영장도 없이 그렇게 함부로 모욕할 수 있느냐'고 울분을 터뜨리더라구요. 저는 얼마 후에 이 사건을 폭로했고 조 기자가 그 기사를 썼습니다. 그런데 조 기자는 헌법정신과 국가관에 대한 확실한 신념에서 글을 씁니다."

인터뷰 주제를 통일국시사건으로 돌렸다.

-통일국시 발언에는 공산주의 통일도 가능하다는 의미가 들어있다는 지적이 있는데요.

▲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저는 분명히 '반공정책은 더 발전시키되 이 나라의 국시는 반공이 아니라 통일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반공정책은 더 발전시키되'가 없다면 통일국시에 공산주의 통일도 포함될 수 있지만 분명이 '반공정책은 더 발전시키되'가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1970년대에 조홍래·윤길중 의원이 당시 김종필 총리에게 '반공이 국시냐'고 물었고, 처음에는 김 총리가 '그렇다'고 답을 했습니다. 그러다 얼마후 다시 똑같은 질문을 하니까 그 때에는 '아니다. 자유민주주의이다'라고 했어요.

또 1980년대 국정교과서에서는 남북통일은 하나의 문화적 차원에서 검토돼야 한다고 했어요. 그 때는 전쟁 없는 평화통일이 국시였습니다. 그러니까 제 통일국시 발언은 문제가 될 게 없었습니다."

유 전 의원은 통일국시 발언의 핵심에 대해 "반공정책은 더 강화하되 분단된 이 나라에서는 통일이 국시여야 한다는 것"이라면서 "반공정책은 국책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정책이지만 반공이 국시가 될 수는 없다. 국시는 통일이어야 한다"고 이날 여러번 강조했다. 유 전 의원은 대한민국 건국 이후 '통일이 국시'라고 직접 발언한 최초의 인물이다.

"전두환 정권이 억지로 통일국시에 삼민이념 결부"

-통일국시 발언과 삼민(三民)이념을 연결시키면서 이념적 문제를 제기하는 시각이 있는데요.

"통일국시 발언과 삼민이념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전두환 정권이 통일국시 발언과 삼민이념을 연결시킨 건 통일국시 발언만으로는 도저히 저를 감옥에 넣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통일국시 발언만으로는 죄형법정주의 요건 조차 갖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삼민이념을 억지로 넣어 보안법으로 엮은 것입니다. 제가 국회 학원문제 특별 운영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는데 이재오 씨가 '한국학생운동사'라는 책을 썼고 해서 한번 얘기를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에서 전화를 했습니다.

때마침 이재오 씨가 병원에 입원하고 있어서 제가 직접 찾아가 '내가 대정부 질문을 하는데 삼민이념이 무엇인지 설명해 달라. 말로 하지 말고 원고지에 간단히 메모를 해서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간단한 정의만 적어서 보내줬어요. '삼민 이념은 반외세 민족 자주, 반독재 민주화, 민중생존권 투쟁'이라는 내용이에요. 그래서 저는 정부를 상대로 한번 물은 겁니다.  삼민이념은 이런 것인데 이를 주장하는 학생들을 왜 잡아가느냐고요. 아주 간단히 물었어요. 저는 그 당시 민주화운동을 하는 학생들이 탄압받는 것에 대해 한 정치인으로서 너무나 가슴이 아팠기에 그렇게 질의한 것입니다."

-이재오 의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재오 의원은 제 통일국시 발언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이재오 의원이 제 통일국시 발언의 일부 원고를 작성했다는 것도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유 전 의원은 현역 정치인에 대해 말하는 건 적절치 않다면서 이 의원에 대해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았다.

-통일국시 발언 이후에 현직 국회의원임에도 포승줄에 묶이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이에 대해 하실 말씀이 있나요.

▲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얘기할 필요가 없지요. 다만 그 얘기가 나와서 생각나는데 교도소에 가서 보면 학생들 몸이 온통 빨간 포승줄로 묶여 있어요. 그런데 저도 빨간 포승줄로 묶더라고요. 다른 사람들은 파란줄인데. 알고보니 보안법 위반한 사람은 빨간 포승줄을 쓴다고 해요. 그래서 제가 따졌지요. 우리나라는 3심제도가 원칙이다. 대법원에서 빨갱이라고 결정 내리기 전에는 마음대로 빨갱이로 단정지어서는 안 된다. 그랬더니 담당자가 법무부 교도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본 뒤에 허가를 받아서, 제 포승줄을 파란색으로 하고 다만 가슴에 붙이는 번호만 빨간색으로 하자고 해요.

저는 그러면 학생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의원님 그것만은…'이라면서 그 쪽에서 저한테 부탁을 하더라구요. 그런데 그 당시 전두환 정권은 '김일성은 공산주의자다. 김일성은 사람이다. 너도 사람이니까 공산주의자다', 이와 유사한 논리를 적용하지 않았는가 하는 의심이 들정도로 학생들을 몰아붙였습니다. 참으로 개탄스러웠죠. 1982년에서 1984년까지 학생들 데모가 5천 번 있어고, '페퍼포그'가 1억 개 사용됐으며 경찰이 1천5백만 명이 동원됐습니다."

"이한동, '시대의 아픔'이라며 나를 위로"

-통일국시 발언으로 9개월간 수감된 뒤에 풀려나서 국회에서 신상발언을 했습니다. 당시 여당인 민정당 의원들 가운데 미안하다며 몰래 사과하는 사람은 없었나요.

"석방되어서 신상발언을 국회에서 했는데 '마음에도 없이 동료 의원의 체포동의안에 찬성한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아무도 말을 안 하더라구요. 제가 통일국시 발언을 할 때 난리를 쳤던 것과는 완전히 다르더라구요. 그 사람들이 그렇게 조용히 있었던 것이 저에 대한 미안한 마음의 표시라고 생각합니다."

-사과한 민정당 의원은 없었나 보네요.

"사과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민정당 이용택 의원이 저와 영남대학 초급대학 동기인데 고생했다면 봉투를 줬습니다. 봉투를 뜯어보니 5만원이 들어있었습니다. 민정당 이한동 의원은 어느날 조용한 자리에서 '유 의원 사건은 정말 이 시대의 아픔'이라고 말했는데 제게는 큰 위로가 됐습니다."
당시 이한동 의원은 유성환 의원의 통일국시 발언이 구속 요건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판단, 전두환 대통령에게 신중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유 전 의원은 이 대목에서 이한동 전 의원과 관련한 일화를 들려줬다.

"1985년에 이한동 의원과 프랑스에서 스위스로 기차를 타고 가는데 드넓은 평원을 보게 됐습니다. 그 때 제 마음속에 '우리에게는 왜 저런 땅이 없는가'하는 생각이 들면서 화가 났습니다. 그렇게 스위스에 도착했는데 그날 밤 이한동 의원이 술을 벌컥벌컥 마시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오늘 기차타고 오면서 그 넓은 들판을 못봤느냐'고 말해요. 그래서 제가 '나도 이 의원과 똑같은 심경이었다'며 통음했습니다.

다음날 저는 시계 상점에 가서 제 사위가 될 사람에게 선물할 시계를 골랐어요.  시계 두개를 놓고 고민하고 있었는데 하나는 1,500달러이고 다른 하나는 1,000달러였습니다. 사실 비싼게 마음에 들었지만 제게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망설이고 있는데 뒤에서 이 의원이 1,500달러를 주는 겁니다. '내가 유 의원이 필요한 거라면 절대 안 산다. 유 의원이 가을에 사위 본다고 하니 사는 거다. 인간 이한동으로서 사는 것이다'라고 해요. 제가 그 시계를 사위에게 줬는데 시계를 안 차고 다녀요. 그래서 '잃어버렸느냐'고 물으니 '장인어른이 준 이 시계는 가보(家寶)와 같은 건데 어떻게 차고 다닙니까. 농 안에 보관하고 있습니다'라고 해요. 이한동 의원에겐 아직 그 얘기를 안 했어요."

▲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통일국시 발언에 대한 왜곡, 엄청난 피해 초래" 

-통일국시 발언이 안 좋은 쪽으로 부풀려지면서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지 않았습니까.

"통일국시 발언 이후 13대와 15대 총선에 출마했는데 제 사상을 가지고 상대 후보들이 공격을 했습니다. 억울했는데 언론에서도 제대로 해명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저를 적극 지지했던 아주머니들이 '유 의원 보고 빨갱이라고 한다. 무서워서 못 찍겠다'고 하더라구요. 또 '우리는 유 의원 팬인데 상대방 운동원들이 유성환은 간첩이라고 한다. 그래서 겁이 나서 도울 수 없다'고도 했어요. 15대 대구 중구 선거에서는 박준규 후보가 '유성환 통일국시는 김일성 통일방식과 똑같다'고 얘기를 하더라구요. 대구 사람들은 이념에 아주 민감합니다. 결국은 500표 차이로 떨어졌습니다."

유 전 의원은 민주산악회(민산)에서도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특히 그는 민산이 결성되기에 앞서 경민산악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1980년 10월 27일 팔공산에서 모이기로 했는데 나가보니 저 혼자만 있더라구요. (군사정권이) 다른 회원들이 못나오도록 했으니까요. 그해 11월 27일에 다시 모이기로 했지만 그 때도 실패했습니다.  결국은 그해 12월에 식당에서 12명이 모여서 경북민주산악회(경민 산악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다 1981년도에 YS가 민주산악회를 만들면서 경민산악회가 동참하게 됩니다."

유 전 의원은 "경민산악회와 민주산악회의 별개 단체였다"고도 이날 덧붙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집권 직후 민산을 해체한 것에 대한 생각은 무엇인가요.

"최형우 동지를 통해서 YS의 민산해체 명령을 들었습니다. 최형우 동지와 마찬가지로 저도 즉각 반발했습니다. 최형우 동지가 '저도 반대하지만 대통령 말을 반대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형님인들 안 그렇습니까'라고 해요. 저는 조직을 축소하되 민주산악회의 정신과 뿌리는 이어갔어야 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제가 통일에 대한 열정이 컸던 만큼 민주산악회가 통일을 위한 운동단체로 남았으면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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