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과 한국교회> "구원은 십자가의 형틀에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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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과 한국교회> "구원은 십자가의 형틀에 있지 않다"
  • 심의석 자유기고가
  • 승인 2012.07.17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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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십자가와 씨름한 나의 신앙편력-3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심의석 자유기고가)

유다 왕 히스기야는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어버리는’ 종교개혁을 단행했다. 여호와 신앙을 부활시키기 위한 개혁이니 이방종교의 신상들을 깨뜨리고 그 우상들에게 제사하는 산당들을 헐어버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 종교개혁의 일환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던 ‘모세가 만들었던 놋 뱀’을 부수어버리고 그것을 느후스단(놋 조각)이라 부르게 한 사실은 얼른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집트를 출발한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으로 향하여 가던 중에 에돔 땅에 와서 길이 막히자 마음이 상하여 원망하기 시작했다.

“어찌하여 우리를 이집트에서 인도해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여호와께서 이에 불뱀들을 보내 백성들을 물어 죽이게 하였다. 그러자 백성들은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에게 원망하는 잘못을 범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하면서 모세에게 간청하였다.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자 하나님은 구리로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고 뱀에 물린 자들은 모두 쳐다보라고 하였다.

그렇게 하자 쳐다보는 자는 모두 살아났다. 이스라엘 민족은 히스기야 왕 때까지 이 놋뱀에게 생명을 위기에서 구해주는 신통력이 있는 것으로 믿고 분향을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 놋조각에 무슨 그런 신통력이 있겠는가?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을 쳐다보면서 잘못을 진정으로 뉘우치는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이 받으시고 치료해주신 것이지.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려는 의지는 사라지고 그 놋조각 자체에 무슨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상에게 분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히스기야 왕은 그 우상을 부수어버리는 종교개혁을 단행했던 것이다.

예수가 못 박힌 십자가는 왜 오늘 골고다에 서있지 않는가? 그리스도교는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AD 321년에 받아들였는데, 그가 기독교로 개종한 것은 그의 어머니 헬레나의 영향 때문이었다. 이 헬레나는 신통하게도 성지순례 중에 예수가 못 박힌 십자가를 발견했는데,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이곳에 교회를 세우고, 십자가 조각들은 제국 여러 곳으로 보냈다고 한다. 이와 다른 전설도 있다. 11세기 말에 예루살렘을 점령한 십자군 병사들이 십자가를 부수어 그 조각들을 기념품으로 가져갔다는 소문이 전해 온다.

이 전설들이 사실인지 여부는 모르지만 어쨌든 오늘까지 십자가가 원형대로 제 자리에 서 있지 않는 것은 애석한 일이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차라리 잘되었다는 생각도 든다. 오늘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서있다면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앞에 가서 무릎을 꿇었을까?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 십자가 형틀을 우상으로 섬겼을까?

구원은 십자가의 형틀에 있지 않다. 교회마다 성당마다 십자가가 걸려 있지마는 그것이 곧 구원의 능력을 가진 것은 아니다.

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왜 나는 지금 하고 있는가? 내가 심장병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받은 확신을 달라고 기도할 때 나는 은연중 휘황찬란한 십자가의 형틀이 구원의 증거로 내 앞에 나타나기를 기다렸기 때문이다.

명색이 장로라면서 그때까지도 그런 미망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구원은 십자가 형틀에 있지 않다. 구원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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