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 타살의혹으로 본 박정희 정권의 YS 초산테러
스크롤 이동 상태바
장준하 타살의혹으로 본 박정희 정권의 YS 초산테러
  • 정세운 기자
  • 승인 2012.08.21 15: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정희 정권의 4대테러 의혹②>YS 초산테러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정세운 기자]

유신독재 시절 민주화투쟁에 앞장서다 의문의 죽임을 당한 고(故) 장준하 선생의 타살 의혹이 37년 만에 다시 부각되면서 박정희 정권에서 자행된 테러 의혹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박 정권 시절 수많은 테러 의혹들이 있어왔으나, ‘김영삼(YS) 초산테러’, ‘김대중 납치사건’, ‘장준하 의문사’, ‘김형욱 암살사건’ 등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이 사건을 ‘박정희 정권의 4대 테러의혹’이라고 말할 만하다. 이에 <시사오늘>에서는 이 사건들을 추적해 보기로 했다. <편집자 주>

▲ 1969년 6월 20일 YS는 초산테러를 당했다. ⓒ김영삼 자서전

김영삼(YS) 초산테러가 발생한 시점은 1969년 6월 20일 이다. 이날은 김영삼 의원이 당시 정일권 국무총리를 대상으로 대정부질문을 한지 꼭 1주일 만에 발생했다.

1969년 가을 정국은 온통 삼선개헌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던 시기다. 3선개헌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6월 11일 임시국회가 열렸고, 이틀 뒤인 13일 YS는 우리나라는 독재국가이며, 3선개헌은 박정희의 종신집권 음모라고 선언했다.

특히 YS는 “3선개헌 음모는 제2의 쿠데타다. 5․16 쿠데타에 이어 다시 제2의 쿠데타다”며 “쿠데타 중심은 중앙정보부이며 지금 중앙정보부는 국민의 원부”라고 박정희 정권을 공격했다.

당시는 5․16 쿠데타를 ‘혁명’이라고 부르던 시절이었다. 공포의 상대인 박정희와 중앙정보부를 상대로 이런 얘기를 한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시절이었다. 하지만 YS는 5․16을 쿠데타로 명명하며 박정희를 직접 겨냥했다.

이 일이 있은 후, 김형욱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고흥문 신민당 사무총장을 서울컨트리클럽으로 불러냈다.
김형욱은 고 총장의 배를 손가락으로 푹 찌르면서 “김영삼이 배때기에는 칼이 안들어 가나”라며 노골적으로 협박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YS는 청진동에 있던 음식점 장원에서 유진오 양일동과 3선개헌 반대전략을 숙의하고 돌아가던 길, 집 앞에서 엄청난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집 앞에서 YS의 눈에 들어 온 건 3 명의 사내였다. 이들은 YS 차량이 보이자 그들 중 2명이 싸우면서 차를 막아섰다. 다른 한 명은 YS 차량으로 돌진해 차 뒷문을 열려고 했다. 차 문이 열리지 않자, 오른 손에 든 병을 차량을 향해 내 던졌다.

공업용 초산이었다. 괴한이 던진 초산 병에 자동차 차체의 철판은 녹아 내렸고, 초산이 흘러내린 콘크리트 바닥마저 구멍이 패이며 부글부글 끓었다.

초산테러가 발생하자, 정상천 서울시경 국장은 직접 YS와 만나 “내가 범인 꼭 잡겠다”고 큰소리 쳤지만, 끝내 테러의 진상은 역사 속에 묻혔다.

당시 YS차를 운전했던 김영수(76) 씨는 이와 관련해 "초산 사건은 (박정희 정권의) 김형욱 정보부장 때 일어났다. 그 때 YS 차를 운전했는데, 그러니까 YS가 차를 타고 상도동 집 방향으로 코너를 돌 때 앞에 사람들 셋이서 장난을 치고 있었다.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을 때리고 있었는데 이는 아마도 YS의 호기심을 발동 시켜 차에서 내리게 하려고 한 것 같다. 그러나 YS는 내리지 않았다. 또 YS는 항상 차 문을 잠그고 다녔다. 그래서 테러범들이 차문을 확 잡아 당겼지만 열리지 않았고 차 뒤에서 초산통을 던졌는데 그 때 초산이 묻은 부분에 구멍이 날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계속>


 

담당업무 : 정치, 사회 전 분야를 다룹니다.
좌우명 : YS정신을 계승하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