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과 한국교회>함석헌은 야인이자 아웃사이더였다
스크롤 이동 상태바
<함석헌과 한국교회>함석헌은 야인이자 아웃사이더였다
  • 심의석 자유기고가
  • 승인 2012.11.14 17: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5)자기 십자가를 지라-4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심의석 자유기고가)

함석헌은 이 글을 쓸 당시 자기 십자가를 질 각오가 되어있었을까? 그럴 각오가 되어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자신이 그런 각오도 없으면서 남에게 그런 기백이 있기를 주문하는 글을 쓸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때로는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도 있다. 그러므로 함석헌의 진정한 속마음을 들여다보려면 그의 생애를 들여다 볼 수밖에 없다.

함석헌은 주류사회의 일원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함형택(咸亨擇)은 한의원이었고 집안은 농지가 2만 평이 넘는 부농이었다. 함석헌과 그의 동생 함석창을 모두 일본에 유학시킬 만큼 재력이 든든했고 개명한 집안이었다.

그러다가 그가 열 살 때 나라가 망하면서 집안이 일순간에 비주류로 전락할 수도 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주류사회에 남을 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신분과  재산이 있으니 일본에 빌붙으면 주류는 아니지만 주류인 척 자신을 속이면서 살 수가 있었다.

그도 어린 나이 때는 부지불식간에 그 길을 선택한 듯하다. 그리하여 평양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삼일운동 때 평양고보의 연락책임자를 맡으면서 문제가 생겼다. 독립만세사건 후에 퇴학을 당한 것이다. 그래도 학교에 잘못했다는 반성문을 제출하고 복교를 하는 길은 남아있었다.

그러나 일단은 쉬워 보이는 그 길을 그는 가지 않았다. 2년을 허송생활 하다가 “하나님의 발길에 채어서”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정주 오산학교 3학년에 편입학한다.

이때부터 그의 생애는 비주류사회로 내팽개쳐진다. 그래도 동경고등사범학교 재학기간 4년을 거쳐 오산학교 교사 재직기간 10년은 안정적인 생활터전이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수업을 반드시 일본말로 해야 한다는 총독부 학무국의 지시를 따르기가 싫어서 스스로 오산학교 교사직을 그만두고 나서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고정수입이 없었다. 그야말로 야인이요 아웃사이더였다.

그의 생애는 이때부터 고난의 행군이었다. 이 기간의 생애는 그가 반독재민주화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1963년을 분기점으로 하여 앞뒤가 갈린다.

해방 이전에도 ML당사건 연루혐의로 정주경찰서에 수감되는 것을 시작으로 계우회사건, 성서조선사건 등으로 수감되었고 해방 후에는 공산치하에서 평양북도 자치위원회 문교부장으로 있다가 신의주학생사건 책임자 혐의로 수감되는 등 고초를 당했고, 월남 후에는 <사상계>에 발표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글 때문에 또 옥고를 치렀지만, 그때까지는 일본이나 공산정권 또는 이승만 정권에 대항해 싸우자는 분명한 의도가 없었다.

다만 소극적으로 지조를 지키면서 야인으로 지낸 것뿐이었다. 다만 하는 일이라고는 성경을 중심으로 책을 읽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단련이 앞으로 전개될 그의 비폭력저항운동에 밑거름이 될 줄을 누가 알았으랴?  
 
그가 사회참여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5·16군사쿠데타가 계기가 됐다. 쿠데타가 난 다음 달에 그는 <사상계>에 ‘5·16을 어떻게 볼까’(17-126)라는 글을 발표하여 군사정권을 정면으로 공격하였다.

이 글을 당시 주한미국대사관의 문정관인 헨더슨(Henderson)이 영어로 번역하여 본국에 보고했는데, 미국 국무성에서는 군사쿠데타 아래에서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어떤 사람인가 하는 놀라움을 갖게 되어 함석헌을 초청하였다. 그는 3개월 간 미국을 시찰하고 10개월 간 펜들힐의 퀘이커학교에서 공부한 후 독일에 유학 중인 안병무와 합류하여 유럽을 여행했다.

1963년 6월 23일, 함석헌은 한국에서 우송된 신문을 보다가 군정이 실질적으로 연장되어 민정이양이 어려워진다는 소식에 접하고는 눈물을 주르륵 흘리더니 안병무에게 “나, 돌아갈 거야” 하며 일어서더라는 것이다.
 <씨알의 소리> 창간 10주년을 기념하여 함석헌과 안병무가 대담한 내용이 <씨알의 소리> 1980년 4월호에 ‘<씨알의 소리』는 왜 내고 있는가’(4-357)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는데, 여기에 함석헌이 유럽 여행을 접고 급거 귀국하는 과정이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먼저 함석헌이 이렇게 말한다.

“그때 오슬로에서 (안병무가) 날 보고 ‘선생님 빨리 돌아가셔야 합니다. 이번에 돌아가면 가만있으면 안 됩니다’ 한 것은 아주 결정적인 타(打)요. 그래서 나는 그러면 어떻게 하지, 나라 모양이 이쯤 되면 나도 할 말이 있고 그러니까 가만있을 수 없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되고 ….”
 
이어서 안병무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조금 길지만 인용하기로 한다.

“실은 저 자신도 정치현실에 눈을 돌리지 않는 것을 제 삶의 원리처럼 알고 있은 때가 길었습니다. 실존주의에 오래 심취한 것이 그런 경향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따지고 보면 실존사상이 탈 정치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만. 그런데 외국에 유학을 오래 하는 동안, 해방 후 실망해버린 나라에 대한 걱정이 점차 새 모양으로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반서구적 사고와 동양의 재발견이라는 욕구가 생기면서 우리나라를 고쳐 생각하기 시작했지요.

그래서 한국에서 보내오는 신문과 잡지를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러나 제 자신이 무엇을 하리라는 생각은 감히 못하고 있을 때 선생님이 오셨던 것입니다. 저에게는 선생님을 가까이 모시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만,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린 것은 당시 국내정세가 급속한 커브를 돌고 있을 때고 저로서는 큰 위기의 예고로 보여 통탄해 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그 점에서 자기 자각을 못하신 것처럼 보였어요.

선생님은 그때 ―지금도 그런 면이 있어 선생님이지만― 구도자적 자세 그리고 낭만주의자의 냄새를 풍겼습니다. 그런데 우리 민중이 기대하는바 그리고 선생님께 거는 기대와 선생님 여행계획은 너무나 동떨어졌다고 느낀 점입니다. 히브리가 이집트에서 노예적 혹사를 당하고 있는 판에 초야에 묻혀 잠자고 있는 모세를 보는 마음에 비길까요! 그건 선생님의 겸손이지요.

소극적으로 말하면 소명의식의 결핍이라고 할까요. 그래 저는 선생님과 유럽 여행을 즐기면서도 간간이 버릇없이 선생님 비판을 했지요. 그러던 중 어느 날 점심사간에 한국서 온 신문을 보고 군정세력이 자리를 굳힌다는 사실과 대일(對日)태도를 보고 선생님께 자극적인 말씀을 드렸지요. 그때 선생님은 들었던 숟갈을 놓고 낙루(落淚)하시면서 모든 여행계획을 취소하고 급거 귀국하셨지요.”

이리하여 예정되어 있던 인도와 아프리카 여행을 중단하고 귀국한 그는 오산고등학교, 시민회관, 대광고등학교 등지에서 군사정권을 비판하는 대중강연을 하면서 구름떼처럼 모여드는 청중을 보고 ‘씨알은 결코 죽지 않는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이때부터 그는 박정희 정권, 전두환 정권과 맞서 싸우면서 민주화운동의 선봉에 섰다. 때로는 대중 강연으로, 때로는 <씨알의 소리>등을 통한 필봉으로, 때로는 김재준 목사와 함께 3선개헌 반대 투쟁위원회를 조직하여, 때로는 윤보선·김대중 양인과 함께 민주회복국민회의를 조직하여, 기타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많은 활동을 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그는 때로는 투옥을 당하고, 때로는<씨알의 소리>가 폐간당하고, 때로는 원고 중 일부가 잘린 채 발표되고, 때로는 강연 약속이 당국의 압력을 받아 취소되는 등 갖은 핍박을 받았지만,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 25년 동안 시종여일하게 민주화운동을 전개하여 마침내 6·10항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