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망이 이야기 [이순자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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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망이 이야기 [이순자의 하루]
  • 이순자 자유기고가
  • 승인 2024.03.03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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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이순자 자유기고가]

오래전 아롱이가(고양이) 실종되고 그해 겨울이 지나 따뜻한 봄의 어느 날이었다. 설공주 동네 어느 집 이웃이 새까만 강아지 한 마리를 주면서 “잘 키워서 새끼를 내 봐요” 라고 했다.

새끼 강아지를 준 곳은 마당이 꽤 넓은 염소 기르는 집이었다. 집 주인은 남편이 죽고 부인 혼자 어미 없는 손녀딸 둘을 키우면서 염소를 약 스무 마리 기르고 있었다.

손녀딸들의 아빠는 부인의 둘째 아들로, 아주 커다란 트럭 운전기사였다. 읍내에서 따로 홀아비로 살고 있다고 했다. 큰 아들은 서울에 살고 있다. 모자 지간이 원수가 되어 서로 왕래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 부인은 나보다 두 살이 적었지만 친구처럼 서로 말을 놓고 지내기로 했다.

염소 기르는 것은 몹시 일이 많았고, 힘도 들었다. 여름에는 풀을 리어카로 잔뜩 베어 실어 다가 먹였다. 겨울에는 건초를 산더미처럼 치켜 쌓아놓고는 매일매일 적당량을 주어야만 했다. 어느 때는 시퍼런 소나무를 잔뜩 베어다 염소 우리에 넣어줬다. 염소들이 달려들어 어찌나 맛있게 먹어 대는지 몰랐다. 소나무 가지가 하얗게 모두 벗겨져서 뼈만 앙상하게 남겨져 있기 바빴다.

나는 그런 광경을 보면서 ‘염소란 놈들은 정말 무서운 놈들이구나’ 라는 생각에 두려움마저 느꼈다.

염소는 새카만 얼굴에 두 눈이 반짝거리고 먹이를 먹을 때는 서로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먹었다. 수놈은 뿔이 꽤 단단하게 나있고, 어느 때는 사람이 옆에 가면 받으려고 뿔질을 해댔다.

특히 먹을 것은 남기는 법이 없었다. 어쩌면 주인이 염소들의 먹이를 충분히 주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고 짐작도 해보았다. 이렇듯 염소 스무 마리 기르기도 힘든데, 노오란 털북숭이 개까지 거두고 있으니 부담이 됐다고 본다. 마침 그 노란 털북숭이 암캐가 새끼를 네 마리 낳았는데, 그중 우리 집으로 입양 온 까망이만이 유독 까맸다.

일단 강아지 이름을 까망이라고 짓고 고이고이 기르기로 했다.

까망이는 무럭무럭 커갔다. 한 4개월 지나 양력 칠월이 되니 제법 개 티가 나고 특히 엉덩이가 두리뭉실해졌다. 허리가 늘씬하면서 제법 몸매를 자랑하듯 살랑살랑 걸어댔다.

집안 식구가 여섯 식구인데 둘째딸이 학교에서 돌아올라치면 기어오르고 핥고 난리가 났다. 그토록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처음 입양 왔을 때 둘째딸이 까망이를 안아서 재웠기 때문에 특별히 따르는 것이다.

일요일이면 둘째 딸과 아들이 번갈아서 작은 공을 굴리면서 놀아줬는데 까망이는 재롱도 대단했다.  

한번은 이런 에피소드도 있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않는 일요일이라서 나는 간식거리로 사둔 마른오징어 3마리를 꺼냈다. 살짝 구워주려고 가스버너 위에 올려놓고 잠시 화장실을 다녀왔는데, 감쪽같이 사라지고 만 것이었다. 

온 식구가 샅샅이 찾았지만 한 시간 넘도록 찾아도 결국 찾지를 못했다. 그때 아들이 하는 말이 “엄마, 오징어는 까망이가 몽땅 먹은 것 같아요” 하는 것이었다.

까망이는 봉당에 있었는데, 배를 쭉 깔고 눈은 지그시 감고 숨이 가쁜지 헐떡이고 있었다. 얼핏 봐도 까망이가 마른 오징어를 먹었다는 것은 금세 티가 났다. 

배 모양이 그대로 삼각형 꼴의 오징어 모양이었던 것이다. 얼마나 깜찍한 놈인가...? 들킬까봐 마른오징어 세 마리를 허겁지겁 삼켰으니 오죽 소화하기 버거웠을까. 헐떡대고 있는 것을 보노라니 화가 나기는커녕 허허허 웃음만 났다. 

이렇듯 까망이는 먹성도 좋았고, 우리 아이들 3남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커갔다. 나도 까망이를 좋아했고 남편도 좋아했고, 친정아버지도 좋아하셨다.

까망이가 볼 때 우리 집 마당이 그래도 제법 큼직해서 뛰어놀기도 좋았고, 산 밑이라서 마음대로 대소변을 보기에도 좋았다. 그렇게 행복하게 커갔고, 어느덧 중개가 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남편의 직장이었던 주유소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더 이상 주유소 일을 나갈 수 없게 됐다. 큰 낭패였다.

더구나 나에게는 개와 관련해 안 좋은 징크스가 있었다.

아마 한 열 살 때쯤이었을 거다. 나고 자란 양평 시골집에서의 일인데 어느 늦은 봄날 비가 많이 왔었을 때다. 집 안채 처마 밑에는 커다란 놋세숫대야가 있었다. 그곳에 낙숫물이 떨어져 가득 찼는데 하필이면 기르던 아주 작은 강아지가 그 세숫대야 낙숫물에 빠져 죽어있지 않는가?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이 나였다. 그때 나는 강아지가 불쌍해서 많이 울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렇게 해서 제일 처음 내 앞에서 강아지의 불행한 최후가 목격되었다.

두 번째 개와의 인연은 내가 스물네 살 때에 있었다. 고향집 이웃에서 우연히 강아지 한 마리를 기르라고 주었는데, 이름을 ‘케리’라고 지었다. 케리는 무럭무럭 컸다. 새끼까지 배게 되었다.

어느 몹시 더운 여름날, 내가 옆집으로 마실을 갔는데 그때 케리도 따라왔다

그런데 친척이기도 한 그 집 주인 아저씨가 논두렁에 들쥐를 잡는다고 쥐약을 보리밥에 개어서 헌 그릇에 담아 놓은 것이었다. 

케리가 그만 먹을 것으로 알고 혀를 한 번 댄 것이었다.

순간 케리의 눈동자가 뒤집어지더니 그대로 밖으로 틀고 튀었다. 나도 황급히 따라 나갔는데 케리는 그대로 논으로 논으로 뛰어가더니 어느 논 가운데 웅덩이 물로 풍덩 뛰어 드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케리를 잡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엉덩이를 잡으려 하자 홱하고 케리가 입으로 뿌리치는 바람에 손에 상처가 났다. 케리는 그대로 논으로 논으로 달려 나가더니 어느 논 구역에서 푹하고 쓸어져서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결국 케리는 숨을 거뒀다.

나는 흙으로 범벅이 된 케리를 부여 앉고 집으로 왔다. 우선 케리를 가마니 거적으로 덮어씌웠다. 그때부터 케리의 사체를 지켰다. 혹시 동네 사람들이 케리의 사체를 가져다 삶아 먹을까봐서 지킨 것이다. 밤새워 케리의 사체를 지키고 이튿날 쥐약을 탄 주인과 함께 우리 텃밭 한 귀퉁이에 있는 은행나무 옆에다 정성껏 묻어주었다.

개와의 불행한 인연은 또 있다. 내 나이 스물다섯 살 때였다. 그때는 아버지를 따라 강원도 원주시 학성동으로 이주를 했다.

아버지가 학성동 아줌마와 재혼을 했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 삼남매 중 언니는 시집을 갔고, 남동생은 중학교 3학년이었고, 나는 스물다섯 처녀였다.

그때도 우연히 웬 잿빛 강아지가 집으로 들어와 키우게 됐다. 잘 길러서 중개가 되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는 세 번이나 개와 사별을 하고 만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까망이가 한창 예쁘게 크고 있는데 남편이 졸지에 직장을 잃었으니 집 안에 큰 어려움이 생긴 것이다.

농사지을 땅도 없고 모아놓은 돈도 없고, 값어치 나가는 보석도 없다. 오로지 남편은 주유소 나가서 벌고, 나는 설거지 아줌마 일을 해서 벌어먹고산다. 원래 남편의 직업은 공무원 이었으나 오래전에 퇴직했고 그 후로 남편이 지관(풍수지리) 일을 해서 먹고살았었다. 그때는 지관 일이 퍽 잘 됐었다.

하지만 서기 2000년 들어 매장 문화에서 화장 문화로 장례문화가 바뀌면서 점차 지관일이 줄어들더니 이제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게 됐다. 차선책으로 주유소 주유원으로 일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일마저 끊겼으니 어쩐담...

사는 고장이 시골 인지라 읍내로 나가도 주유소는 한두 곳 밖에 없다. 큰일이 생긴 것은 분명했다. 이러니 자연히 화살은 죄 없는 까망이한테로 쏠렸다. 개와의 인연이 없는데, 괜스레 길러 안 좋은 일만 생긴 것 같다는 결론까지 다다르게 됐다.

나는 남편과 의논을 했다. “여보! 아무래도 까망이를 누구네다가 줘야 할까 봐요.”

“그래 당신 생각대로 해...”

남편은 언제나 내 편이다. 한 번도 싸운 기억이 없다.

생각다 못해 까망이를 개 농장하는 지인네 갔다주기로 했다. 그곳은 우리 집에서 아마도 3KM는 떨어진 듯했다.

목줄을 해서 끌고 가면서도 마음이 너무 아프고 괴로웠다. 둘째 딸의 까망이인데 원망을 어떻게 들어야 하나 하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둘째 딸은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까망이부터 찾았다. 나와 남편은 까망이를 잘 키워줄 사람한테 보냈다고 했다.

둘째 딸은 몸부림을 치면서 엉엉 울어댔다. 나와 남편은 죄인처럼 말도 못하고, 둘째 딸의 울음이 끝나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둘째딸은 거의 몇 달 동안이나 엄마 아빠를 원망하며 정말 잘 길러줄 사람한테 보냈느냐고 되묻곤했다. 그건 나도 바라는 바다.

다행인 것은 까망이는 암놈이기 때문에 새끼 낼 욕심으로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추측뿐이다.

제발 까망이가 오래오래 살아주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결국 까망이는 우리 집에서 이렇게 끝을 맺었다. 나의 그 같은 판단이 비과학적이고, 샤머니즘적인 사고방식일지언정 당장 가정의 경제 파탄이 몰고 오는 참극은 막상 겪어보지 않는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어찌됐던 까망이 일은 까망이한테 미안하고 둘째 딸한테도 몹시 미안한일이 되었다. 나와 남편은 앞으로 많은 날을 까망이와 둘째 딸한테 죄인처럼 지내야 할 것 같다.

까망아 미안하다! 둘째야! 엄마 아빠가 못나서 그래! 정말 미안하다. 까망아! 우리를 용서해다오! 둘째야 엄마, 아빠를 용서해다오!

 

※ 시민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글을 쓰는 이순자 씨는 서울 양천구 신월동에 사는 78세 할머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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