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농 김상현은 왜 통합·포용의 정치인으로 불렸나? [옛날신문보기+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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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농 김상현은 왜 통합·포용의 정치인으로 불렸나? [옛날신문보기+영상]
  • 윤진석 기자
  • 승인 2024.04.21 18: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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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진석 기자]

통합과 포용, 화해와 조정의 정신 후농 김상현 선생의 6주기 추도식을 돌아보며 그의 통합과 포용의 정치력에 대해 상기해본다.사진은 민추협에서 제작한 추도식 팸플릿ⓒ시사오늘
통합과 포용, 화해와 조정의 정신 후농 김상현 선생의 6주기 추도식을 돌아보며 그의 통합과 포용의 정치력에 대해 상기해본다.사진은 민추협에서 제작한 추도식 팸플릿ⓒ시사오늘

故후농 김상현 전 민주당 상임고문(5선)은 왜 통합‧포용의 정치인으로 불렸을까. 지난 18일 경기 파주시 나사렛 묘원에서 거행된 민주화추진협의회 주최 후농 김상현 서거 6주기 추도식에서 그 답을 좇아 보았다. 

“우리 남편 성격은 누구나 만나는 호탕한 성격이에요. 우리가 살기 어렵지만 돈이 있으면 그냥 호주머니에서 꺼내서 나눠요. 내가 고생을 많이 했지요(웃음). 나를 항상 동지라고 불러줬어요. 내자라고 하지 않고 동지라고요. 돌아가셨을 때 가슴이 참 아팠어요. 어렵게 생활하는 가운데 내조해줘서 고맙다고 내게 말해줬어요.”

김상현 전 고문의 아내 정희원 여사는 이 말을 하면서 흐느꼈다. 처음엔 남편에 대해 추억하며 웃음꽃을 피웠지만 임종 당시를 떠올릴 때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눈물을 보였다. 

김 전 고문의 호는 후농. 후반기에라도 수확을 많이 하라는 뜻에서 시인 고은 선생이 지어줬다고 한다.

후농의 부인 정 여사는 경기도 화성에서 양조장 등 사업체를 운영하는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다. 숙명여대를 졸업하고 후농을 만났다. 이상은 크고 현실은 가난한 청년과의 결혼을  부모님이 찬성할 리 없었다. 

곱게 자란 정 여사와 달리 후농은 어린 시절부터 힘겹게 살았다. 전쟁 통에 어머니마저 여의고 구두닦이, 신문팔이 등을 해서 어린 동생을 먹여 살렸다. 형편이 어려워 대학에 못 들어갔지만 다방면에 식견이 풍부했고 정치가로서의 큰 꿈을 가진 야심찬 청년이었다. 그렇지만 정 여사 집안의 반대는 심했고, 하는 수 없이 허름한 가옥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슬하에 4남매를 뒀다. 더불어민주당 김영호 의원은 삼남이다.

 

“아낌없이 나눠준 것으로 기억”


후농은 DJ(故김대중 전 대통령)와의 인연을 계기로 정치를 시작했다. DJ가 웅변학원 선생이었을 때 제자로 만났다. YS(故김영삼 전 대통령)와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를 만든 주역이다. 신민당의 모체인 민추협은 1987년 6월항쟁을 성공시킨 산실과 같은 조직이다. 박정희-전두환 정권에 걸쳐 독재에 맞섰다. 투옥도 되고 정치 탄압도 많이 받았다. 광주북갑, 전국구, 서울 서대문 등에서 당선됐다. 

6주기 추도식에서 만난 후농의 고향 후배 김성수 씨는 후농이 5선을 역임했음에도 평생 부자인 적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돈이 생겨도 주머니에 남아나질 않아요. 한번은 목돈이 좀 생겼는데, 마침 후배가 와서는 생활비가 필요하다고 한 겁니다. ‘너 참 운 좋다. 마침 내가 돈이 생겼다’ 면서 지폐 두 장만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그 후배에게 준 거예요.”

김 씨의 말도 앞선 정 여사 말처럼 후농이 아낌없이 베풀고 살았다는 얘기였다. 어는 때는 빚보증을 살 못 서 벼랑 끝에 내몰리기도 했다. 
 

“국민회의 김상현 의원이 빚보증을 섰다가 파산 지경에 이르게 됐다.(중략) 김 의원은 6월 9일 파산법정에 서게 됐다. 김 의원은 평소 남에게 거리낌 없이 도움을 청하기도 하지만 남의 어려움을 보면 선뜻 도움을 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정가에서는 이런 김 의원의 성품이 화를 자초했다며 동정을 보내고 있다. 김 의원은 ‘간곡한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어음에 배서해 준 것이 이제 와서 문제 될 줄 몰랐다’며 난감해 하고 있다.”
- 1998년 5월 29일 <동아일보> 기사 중 


정 여사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법하다. 
 

자상한 하숙집 아줌마 알고 보니 ‘국회의원 사모님’ 
하숙집 아줌마 정희원(62) 씨는 아침 일찍 닭다리 12개를 구웠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게 노릇노릇 보기에도 먹음직스럽다.(중략) 서대문구 창천동 조용한 주택가 하숙집. 지난해 새로 문 연 100번지 32호 하숙집 주인아줌마는 유명인사 아내다. 그 스스로도 지역에서는 잘 알려진 인사다. 남편이 5선의 국민회의 김상현 의원. 30호 김 의원 집과 나란히 붙은 집, 안쪽에서 샛문으로 연결된 1층 양옥이 정 씨의 사업장 하숙집이다. ‘37년 결혼 생활 내내 김 의원 빚 갚으며 살았어요. 빚내서 선거 치르고 갚다보면 다음 선거더군요. 첫아이 한 살 때 돼지 3마리를 키우기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안 해 본 게 없네요.’”
- 1997년 9월 22일 <조선일보> 기사 중 


닥치는 대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영업도 했고, 어느 때는 돼지 사업도 했다. 생계를 어떻게 책임져나갔는지는 옛날신문을 통해서도 엿보이고 있다. 
 

“맏아들 돌 축의금을 헐어 돼지를 3마리 샀다. ‘이거 안 하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이 악물고 했어요. 동네 집집마다 뜨물 받아달라고 해서 새벽이면 걷으러 다녔어요. 양동이에 담아 몇 번씩이나 날랐지요. 동네 사람들이 자기 아이 타이를 때면 양조장집 딸 봐라. 부잣집 딸도 저 정도인데 했어요.’ 3년 만에 1백28마리가 됐다. 30여 년 전 일인데도 숫자를 다 외고 있다.”
-1997년 9월 22일 <조선일보>기사 중 


부인을 일컬어 동지라고 할 만하다. 정 여사가 없었다면 마음 놓고 큰 정치를 할 수 있었을까 싶다. 

 

후농의 포용력과 조정력


후농 김상현 전 민주당 상임고문의 서거 6주기 추도식이 경기 파주시 나사렛 묘원에서 거행되고 있다. 이날 추도 미사는 함세웅 신부가 맡고 있다.ⓒ시사오늘
후농 김상현 전 민주당 상임고문의 서거 6주기 추도식이 경기 파주시 나사렛 묘원에서 거행되고 있다. 이날 추도 미사는 함세웅 신부가 맡고 있다.ⓒ시사오늘

서거 6주기 팸플릿에는 ‘통합과 포용 화해와 조정의 정신 후농 김상현 선생’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후농은 품이 넓은 정치인이었다. 그릇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되는 일화가 있다. 후농은 가톨릭 신자였다.

서거 6주기 추도식 미사는 함세웅 신부 맡았다. 함 신부는 후농에 대해 인상 깊었던 당시를 돌이켰다. 

“후농 김상현 선생과 만난 적이 있습니다. 당신(김상현)이 경주교도소에 계실 때 전두환을 위해 기도를 바쳤다는 겁니다. 제가 ‘김 의원님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신부지만 전두환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이분께서 ‘신부님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정말로 진심으로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감옥에 갇혀 있어 다 통제받으니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당시, 그때 간절한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다는 겁니다. ‘하느님, 전두환이 불법 총칼로 정권을 잡았지만 정권을 잡은 이상 그래도 잘 해서 우리나라 공동체가 잘 됐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진심으로 기도를 바쳤다는 거예요. 제가 그 말 듣고 반성을 했습니다. 저는 사제인데도 전두환이를 위해서 그런 기도를 바친 적이 없거든요.”

후농은 나라를 위해서는 누구든 만나 협상을 벌여 문제를 해결하는 정치력을 발휘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에도 대통령과의 단독 회동을 요청했을 정도였다.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이 3선 개헌을 추진하면서 여야는 경색 국면에 빠져들었다. 그때 후농이 나섰다. 
 

“여야 관계가 경색될 대로 경색되자 68년 2월 초 재선의 김상현 의원은 당시 유진오 당수에게 여야 영수회담을 제안하라고 촉구했다. 유 당수가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자 김 의원은 영수회담을 제안하라고 촉구했다. 유 당수가 외의적인 반응을 보이자 김 의원은 ‘그러면 나라도 대통령을 만나 영수회담을 건의하겠다’며 직접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박 대통령과의 단독면담을 요청, 1시간 40분간에 걸친 면담이 이뤄졌다. ‘대통령이 김 의원과 국내 정세 전반에 관해 단독요담을 했다’는 게 당시 신범식 청와대 대변인의 공식 발표였다.”
-1995년 2월 13일 <동아일보> 기사 중


포용력과 조정력으로 난맥을 풀어가려는 의지가 읽히는 대목이다. 후농은 생전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도 “포용력이야말로 정치의 덕목”이라는 점을 강조한 바 있다.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상대방 입장을 먼저 고려하는 자세입니다. 내 입장을 고집해서는 안 되지요. 서구의 전술에서는 도망가는 적에게 황금의 다리를 놓아 주고 퇴로를 열어주라고 했습니다. 우리 정치는 그 반대입니다. 상생을 추구하는 포용력이 중요합니다.”
-2009년 11월 8일 <시사오늘> 김상현 인터뷰 중

 

 

정가 제1의 마당발로 정치력 발휘 


정가에서는 제1의 마당발로 통했다.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에 많은 외부인사들이 영입된 것도 후농 때문이었다고 전해진다. 거미줄 인맥의 조련사로 불렸다. 친화력이 좋은 모습은 외교력에서도 유감없이 빛을 발휘했다.  
 

“그는(고르바초프)는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 김영삼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을 면담하고 공개 강연 등도 적지 않았다. 고르바초프의 현란한 활동의 숨은 기획자는 민주당 김상현 고문이었다. 그는 한국 그린크로스의 3인의 공동의장 중 한 사람이지만 사실상 모든 행사를 만들어낸 주인공이다. 그가 이번에 유감없이 보여준 것은 마당발 정치인으로서의 면모이다. 그는 민주당의 계선 조직에 있지 않은 사람이다. 공식직함으로는 한명의 평의원일 뿐이다. 이런 그의 행사에 레스 애스핀 전 미국방장관이 참석했다. 애스핀은 김 고문과 특별대담을 갖기도 했다.”
-1995년 2월 10일 <조선일보> 기사 중


그의 마당발의 기저에는 타고난 성실함이 한몫을 했던 듯하다. 동교동계를 대표해 발언한 이석현 민추협 공동회장도 추도식에서 이 점을 높이 샀다.  

“김상현 의장하면 화합, 포용, 조정의 정치이잖아요. 또 하나, 가장 떠오르는 추억은 이분이 누구보다 성실했다는 겁니다. 그 기억이 생생해요. 새벽 6시 30분에도 전화를 받는 분이 김상현 의장이었어요. 정치가 인생의 모든 것이었어요. 그렇게 열심히 돌아다니고 모든 일을 다 해결한 분입니다. 동교동-상도동은 물론 비 민추협 인사들까지 모두 포용했습니다. 문제를 풀어내는 데 그렇게 열심히 하는 분이었습니다. 어떤 때는 모욕을 당하는 것도 내가 봤거든요. 그런데도 거침없이 해내더라고요.”

 

통합과 명분의 정치인


후농 김상현은 50여 년 정치를 해 오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형, 동생'하는 사이였지만 명분이 없는 곳엔 따라가지 않았다. ⓒ시사오늘 김유종
후농 김상현은 50여 년 정치를 해 오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형, 동생'하는 사이였지만 명분이 없는 곳엔 따라가지 않았다. ⓒ시사오늘 김유종

후농은 민추협 발족 때도 YS를 도와 범정치결사체 통합에 나섰다. 미국 망명 중인 DJ는 동교동계 조직이 와해되고 YS에 주도권이 넘어갈 것을 우려해 반대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에 측근을 통해 반대 의사를 전했지만 후농은 반독재 전선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야권이 규합돼야 한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YS는 민추협 의장, 후농은 DJ를 대신해 권한대행을 맡았다. 이후 YS와 함께 신민당 창당을 중심으로 야당 통합을 추진해갔다. 

상도동계 좌장 김덕룡 민추협 공동이사장은 이런 과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는 민추협의 의미를 되돌아보며 후농의 역할이 컸다고 회상했다. 

“우리가 민추협을 만들면서 지도적인 역량을 발휘한 분이 후농 김상현 선생이었습니다. 저는 우리 민주화 운동사에서 참으로 안타까운 것이 민추협이 했던 역할이 제대로 평가받고 기록되지 못한 것입니다. 그 시대에 보여줬던 후농 김상현 선생의 지도력과 통합의 정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정치권을 보면서 더욱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오늘 후농을 존경하고 흠모하는 옛 민추협 동지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된 것도 후농의 훈훈한 정치력과 리더십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재야 신당 추진 작업은 민주화추진협의회가 11일 신당과 12대 총선에 참여키로 결정함으로써 민추협-비민추협 실행 대표 간에 구체화하게 되었다. 민추협의 김영삼 공동의장과 김상현 공동의장 권한대행은 이날 오전 기자회견을 갖고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민주적인 자생정당이 창당된다면 전폭적인 지지와 성원을 보낼 수 있다’고 밝혔다. 이들은 민추협 소속 정당추진 인사들에게 원칙과 전제조건이 제시될 것이며 앞으로 온 국민과 함께 그 추이를 주시할 것‘이라고 밝혔다. 공동의장단은 또 “민추협은 민주화 국민운동기구로서 조직을 계속 확대강화할 것’이라고 말하고 ‘범국민적 민주화 추진의 일환으로 12대 총선에서 선거투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들은 ‘선거투쟁은 민정당에 대한 반대투쟁을 핵심으로 한다’고 밝혔다.”
-1984년 12월 12일 <조선일보> 중 


1987년 대선을 앞두고도 후농은 통합을 강조했다. DJ계 유준상 전 국회의원은 추도식에서 당시를 소회했다. 

“제가 하는 후농 선생은 김대중 선생을 통해서 정치에 입문했고 40대 기수론을 펼칠 때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정치인입니다. 87년 대선 당시 DJ(김영삼), YS(김영삼)가 분열했을 때 나는 분열의 편에 서지 않겠다는 소신의 정치인이었습니다.”
 

“87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DJ가 ‘대통령 출마’를 위해 통일민주당을 뛰쳐나가 평화민주당을 만들었을 때도 김상현은 쫓아가지 않았다. 그만큼 그는 군정종식을 위한 ‘야권통합’에 온힘을 기울였다. YS는 이에 대해 ‘그가 김대중과 나 사이에서 개인적으로 나를 선택했다기보다는 야당의 정통성을 깨지 않으려는 정치인으로서의 충정 때문’이라고 술회했다. 김상현도 ‘야권이 분열되는 상황에서 어떻게 인연만으로 DJ를 따라갈 수 있느냐’고 회고한 적이 있다.”
-2009년 11월 8일 <시사오늘> 김상현 인터뷰  중


당시 후농과 인터뷰한 정세운 정치평론가는 “후농은 DJ가 그림 속 과일도 꺼내먹을 사람이라고 평했을 만큼 어떠한 정치적 난관 앞에서도 버텨내고 돌파할 저력이 있었다”며 “그 힘 안에는 언제나 명분이 있었다”고 후술한 바 있다. 
 

“특히 옳지 않다고 판단되면 ‘정치적 사망선고’를 받을지언정 행동하지 않았다. 삼선개헌과 유신 반대투쟁,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등 독재정권으로부터 5년여의 옥고와 17년간의 공민권 박탈, 73차례의 가택연금을 당했지만, 불의에는 눈감지 않았다. 또 호남사람이었지만, DJ를 따라가지 않을 만큼 소신 있게 정치를 해왔다.”
- 2020년 4월 24일, 후농 서거 4주기 <시사오늘> 기사 중


정 평론가는 “정국은 윤석열 정부여당인 국민의힘, 이재명의 더불어민주당, 조국신당으로 삼분지계 됐으며 갈수록 정치 내전 양상이 가열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대한민국의 시대정신은 통합과 포용일 수밖에 없다”며 “분열과 타협하지 않았던 후농의 정신을 계승할 때”라고 말했다.  

추도식을 주최한 민추협의 조찬옥 사무총장은 “후농은 YS와 DJ에 버금갈 만큼 민추협에서 역할을 많이 했고 마땅히 조명받아야 할 분이다. 앞으로도 해마다 후농의 정신이 추모됐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한편, 후농의 삼남인 더불어민주당 김영호 의원은 유족을 대표해 말하는 자리에서 아버지에 대한 뒤늦은 고백을 전했다. 그 말을 끝으로 서거 6주기를 마친다. 

“처음 정치를 하면서 세 번의 낙선이 있었고, 이번까지 세 번의 당선이 있었습니다. 낙선하는 과정 속에서 제가 사실 아버지께 마음속으로 굉장히 죄송한 일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현장을 거의 안 나오시다가 제가 두 번 낙선하고 세 번째 낙선했을 때 한 번 유세현장에 오셨는데 그때 제가 참 어린 나이에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간 적이 있습니다.

아마 그때는 제 마음속에는 세습 정치라는 것에 대한 국민들의 부정적인 평가, 제 낙선이 그런 세습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냉험한 심판, 이런 것이 작용해서 아버지가 제 정치 과정 속에서 관여되는 게 정말 저 스스로도 너무 좀 기피했던 것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근데 요즘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고 나서 저의 이 3선 과정 속에서 아버지의 역할과 정치 과정 속에서 남은 족적들을 보면서 이런 것이 정말 후광이구나, 정치인 아들로서 의 후광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만 아버지의 후광을 받고 있었구나 라는 것을 고백을 하게 됩니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꿈은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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