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택 “창작 판소리 열두 바탕 만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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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택 “창작 판소리 열두 바탕 만드오”
  • 차완용 기자
  • 승인 2009.02.12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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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택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부회장 인터뷰

박동실(1897~1968)과 박동진(1916~2003)에 이어 창작판소리의 3대 갈래를 이끌고 있는 소리꾼 임진택(59)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부회장.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한 그는 75년 정권진 명창(심청가 예능보유자)을 만나 5년간 소리를 배워 소리꾼이 됐다. 75년 김지하 시인의 담시에 판소리 가락을 입힌 <소리내력>을 작창한 것을 시작으로 <똥바다>(1985), <오월광주>(1990), <오적>(1993) 등 시대정신을 담은 창작 판소리를 발표해 왔다. 특히 김지하의 시(詩)를 바탕으로 한 창작 판소리 '똥바다'로 대학가에서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세상에 이름을 알린 인물이다.

그 후 연희광대패를 창립해 마당극을 통한 사회 문제의식의 비판 등 문화운동에 매진해 왔다. 또한 판소리꾼이자 연극연출가, 예술기관단체인, 영화배우, 환경운동가 등으로 활동해 왔다. 그는 항상 낡은 관습과 틀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온 예술가이며, 불의와 독재에 항거하는 민주화운동에 앞장서온 문화운동가이기도 하다.

이러한 그가 이번에는 우리나라의 역사적 인물 12명을 주인공으로 한 '새로운 판소리 12바탕 창작'이라는 대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에 본지에서는 임진택의 새로운 도전과 함께 민주화운동에 앞장서온 문화운동가로서의 삶을 되돌아 보기위해 지난 1월 23일 인사동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     © 시사오늘

“판소리 12바탕으로 우리 문화 원형을 다시 살려내고 싶어…재정 힘들면 혼자라도 해나갈 것”
 
-우리나라의 역사적 인물 12명을 주인공으로 한 '새로운 판소리 12바탕 창작'이라는 대업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이번에 만드는 판소리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시공을 넘나드는 작품으로 만들 것입니다. 특히 팔도 사투리와 요즘 유행어, 인터넷 용어 등도 섞어가면서 대중이 흥미를 느낄 수 있게 할 것이죠. 판소리는 유네스코에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될 정도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우리의 문화자산입니다. 또 우리의 말과 이야기를 서사적으로 표현한 대표적인 한류 상품이지요.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는 판소리가 옛 유산에 머무르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 문화의 원형으로 다시 살려내고 싶어요.”

그는 이를 위해 최근 ‘창작판소리 열두 바탕 추진위원회’를 조직해 총감독을 맡았다. 추진위가 선정한 인물들은 세종·이순신·정약용·전봉준·김구 등 역사적 인물 5명, 허준·홍길동·김삿갓·대장금 등 문학과 드라마로 알려진 4명, 송흥록·신재효·임방울 등 판소리 명창 3명이다.

“세종대왕을 첫번째 인물로 다루려는 것은 판소리가 우리의 언어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번에 만드는 판소리는 정형화된 틀을 근간으로 삼긴 하겠지만, 새로운 양식도 과감하게 도입할 생각입니다. 이를 테면 2인창, 3인창, 입체창 등으로 남녀노소 누구나 좋아하는 대중적인 판소리로 만들고 싶습니다. 각 바탕은 100분 안팎 분량이 될 것이며 앞으로 3년간 작품별로 사설을 만들고 작창(作唱)을 해 실연까지 할 것입니다.”

그는 이번 작품에 들어가는 총제작비를 30억원으로 잡고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대기업, 공익문화재단 등의 후원을 기대하고 있다.

“혼자만의 작업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재원이 마련되면 사설과 작창 분야의 전문가들과 작업을 시작해 3년이면 가능합니다. 만약 재정적인 어려움에 부닥치면 혼자서 12년이 걸리더라도 해 나가야죠.”

"민중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려 마당극 만들어"
 
-임진택 하면 마당극을 떠올리게 됩니다. 마당극을 어떻게 시작하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서울대 물리과대학 외교학과 1학년 재학 당시 연극반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당시 연극은 번역극 위주였는데, 그것을 보면서 우리 현실을 다루는 창작극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번역극이 특정 애호가들에게만 보여지는 것이라면, 더 많은 사람들과의 교류와 의견교환, 참여가 있는 연극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했지요.”

임진택 부회장은 우리 현실을 담아내고, 현장에서 많은 사람과 호흡한다는 것이 마당극으로 향하게 된 동기라고 설명했다.

“마당극 자체에 몇 번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무대극에 대항하는 개념이었지요. 무대라는 폐쇄 공간에서 특정 애호가들에게 일방적으로 보여주는 무대극과 달리 현장성을 바탕으로 하는 연극이라는 개념입니다. 두 번째 변화는 70년대 탈춤 공연을 보면서 우리 가면극이나 탈춤을 마당에서 공연하는 현대연극은 왜 마당에서 못하나, 꼭 조명이나 의상, 음악효과가 있어야만 하느냐는 생각에서 비롯 됐습니다. 그런 틀에서 벗어난 연극, 민속가면극처럼 열린 공간의 판이 갖는 성격, 민중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는 연극을 생각하게 된 것 입니다.” 
 

▲     © 시사오늘

-‘마당극의 1인자’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1인자’라는 칭호가 부끄럽네요. 1인자라는 말을 처음 들은 때가 한 20년 전일 것입니다. 당시 보안사에서 근무하던 윤석양 일병이 감시 리스트를 폭로한 적이 있었습니다. 300명 쯤 되는 리스트에 내가 올라 있었죠. 간략한 소개도 적혀 있었는데 나의 이름 뒤에 ‘마당극의 1인자’라고 적혀 있었죠. 이 때문에 1인자라고 불리게 된 것 같습니다. 마당극을 잘해서 라기 보다는 70년대부터 마당극을 시작해서 1인자가 된 것 같습니다.”
 
-1985년 김지하의 시를 바탕으로 한 창작 판소리 ‘똥바다’로 대학가에서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똥바다’를 창작하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이 작품으로 본격적인 창작 판소리를 많은 관객들에게 알리는 계기가 됐습니다. ‘똥바다’는 한일관계를 다룬 작품입니다. 과거 일본은 한국과의 관계에서 계속 침략하고 불평등 관계를 강요하며 그 당시 일본의 고도의 산업화의 폐해인 온갖 산업 폐기물들을 모두 한국에 보냈습니다. ‘똥바다’는 일본이 갖다 버린 폐기물들을 똥으로 비유한 한일관계 작품입니다. 5공화국 말기부터 6월 항쟁이 일어난 때까지 내가 공연한 ‘똥바다’가 386세대에겐 굉장한 걸음이 됐습니다. 아쉽게도 이번에 좋은 정치를 해야 되는데 좀 잘못 먹어서 역효과가 나타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김지하 시인과의 만남이 판소리와 연극을 배우게 된 계기”
 
-부회장님의 작품을 보면 김지하 시인과의 인연이 깊은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똥바다’ 이전에 ‘소리내력’이라는 작품이 있었습니다. ‘소리내력’ 역시 ‘똥바다’와 마찬가지로 김지하 시인의 정치적 담시를 바탕으로 창작됐습니다."

그는 사회 속에 살아있는 연극을 찾은 동기 중에는 김지하와의 만남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내가 69학번이니까 대학 2학년 때인 1970년 ‘오적’ 사건으로 고초를 겪은 김지하 시인이 연극반을 찾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남긴 많은 이야기 가운데 연극이 결국 민중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메시지가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이러한 김지하 시인과의 만남이 제가 판소리를 배우게 된 동기가 된 것입니다. 김지하 시인의 담시 중 소리내력, 오적, 똥바다 등을 판소리로 만들었습니다.”
 
-백기완 선생을 비롯한 많은 제야 인사들과 인연이 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바로 백기완 선생입니다. 사내라면 백기완 선생처럼 남자다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우리 문화에 대한 깊은 애정과 민중적 근본에 대해 명철한 논리를 가지고 있는 우리시대 최고의 광대입니다. 현재는 나를 두고 판소리계의 광대라고들 흔히 이야기 하지만 사실 더 넓은 정치, 통일, 한 국가사회의 문제까지 총괄해서 보면 우리시대의 광대는 백기완 선생인 것이지요. 또 다른 광대는 김지하 시인입니다. 그는 내가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이자 존경하는 인물 중에 한명입니다.”
 
-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백기완 선생이 후보로 출마함과 동시에 부회장도 정치에 발을 들여놓게 됐는데요.
“1992년 나를 비롯한 최열 환경재단 대표, 이애주 서울대 교수, 박용일 변호사, 김용태 민예총 회장 등 문화예술인들이 모여 백기완 선생을 민중대통령 후보로 추대하고 선거를 도왔습니다. 당시 나는 백 선생의 특별보좌를 담당했었습니다. 백 선생을 추대를 하게 된 이유는 당시 야당의 후보들이 단일화에 동의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백 선생과 우리는 단일화를 촉진시키기 위해 후보 등록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단일화는 이뤄지지 못했고 선거 하루전날 백 선생은 후보에서 사퇴했습니다. 백 선생의 사퇴 배경은 ‘자신까지도 야당의 표를 분산시킬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제14대 대선 야합 실패가 ‘뒤늦은 민주주의’와 ‘지역주의 잔재 원인’”
 
-제야 인사로 활동하면서 정치적 아쉬움이 많을 것 같은데.
“물론 아쉬움이 많습니다. 지나온 국내 정치사를 돌이켜 보면, 1987년도에 치러진 제14대 대선에서 김영삼, 김대중 후보의 단일화가 이뤄지지 못한 것이 가장 안타깝습니다.”

임 부회장은 당시 김영삼, 김대중 후보 단일화 실패를 ‘뒤늦은 민주주의’와 ‘지역주의 잔재’의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두 후보의 단일화 실패는 민주주의의 퇴보를 불러온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지금은 양 김 선생이 한번씩 대통령을 했지만 당시에 단합했으면 좀 더 일찍 대통령을 했을 것입니다. 양 김 선생이 좀 더 일찍 야합을 해서 민주주의를 정착시켰다면 얼마 전 벌어진 용산 화재 참사와 같은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의 이명박 정권은 대반동 시대나 다름없습니다. 민주주의가 실종되고 있는 상황인 것이죠. 민중의 힘으로 권력을 가졌어야 하는데 아쉬움이 남습니다. 또한 당시 양 김의 분열이 지금까지도 지역감정을 유지하게 된 원인입니다. 그때 단합을 했으면 지금은 지역감정이 남아있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정치인으로써 가장 큰 실패 이고 반성해야 할 부분인데, 아직까지 인식을 못하고 반성을 안 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지난 대선에서 1970, 80년대 민주화운동가들 주축인 최열 환경재단 대표, 양길승 녹색병원장 등 15명과 함께 시민운동가 중심의 ‘창조한국 미래구상’을 출범시켰는데, 어떠한 정치적 구상이 있었던 것인지 궁금합니다.
“당시 지리멸렬했던 여권의 대선 후보 통합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창조한국 미래구상’을 출범 했습니다. 그러나 후보 통합은 이뤄지지 않았고 대부분의 ‘창조한국 미래구상’ 멤버들은 탈퇴 또는 통합민주신당으로 옮겨갔습니다."
 
-다른 민주화운동가들은 대부분 통합민주신당에 들어간 상태에서 부회장님만 문 후보 측에서 일을 하셨는데 어떠한 이유 때문입니까.
“당시 통합민주신당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당은 생겨났지만, 실제로 새로운 인물이나 세력의 중심이 생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당시의 여권 후보 중에는 나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인물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문 후보가 그리는 정치적 청사진은 나와 어느 정도 같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환경과 생태와 인간중심에 서서 새로운 정치를 해 나가자’는 것이었지요. 사실 나는 당시 여권 대선 후보 중 한명인 손학규 전 대표와 친분이 두텁습니다. 손 전 대표에게 큰 빚을 지고 있죠. 도의적으로나 친분으로나 손 전 대표를 도와야 하는 것은 당연했지만 서로 추구하고 있는 정치적 이념이 달랐기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이러한 때에 다행인지 불행인지 몰라도 손 전 대표가 당시 여당 대선 후보 경합에서 패해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문 후보를 지지하게 됐습니다."

“손학규 전 대표에게 큰 빚져…기회가 되면 꼭 돕고 싶다”
 
-손학규 전 대표와 깊은 인연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손 전 대표는 나의 중·고등학교, 대학교 선배입니다. 또한 나한테 있어서는 운동권의 제일 선배이자 연극반 선배이죠. 대학 시절부터 나는 손 전 대표를 잘 따랐고 이러한 나를 손 전 대표는 예뻐했었습니다.”

이러한 말과 함께 임 부회장은 대학시절 손 전 대표에게 큰 빚을 지게 된 사연을 이야기 했다.

“손 전 대표는 나 때문에 감옥까지 다녀왔습니다. 당시 그는 정치학과에 재학 중이였는데 공산주의 이론을 모아놓은 영자판 서적 ‘Essential Works of Marxism’에 대한 내용을 수업에서 배워 노트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 노트를 내가 빌려 보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그 때 나한테 무슨 사건이 벌어져 노트를 당시 공안부에게 빼앗겼습니다.

이 때문에 손 전 대표는 관공법 위반으로 ‘공산주의 서적을 탐독, 탐닉하고 다른 사람에게 유포했다’는 이유로 제판 1심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8개월여 간 옥살이를 하다가 항소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손 전 대표는 나로 인해 감옥살이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남한테나 나한테 이러한 이야기나 원망을 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임 부회장은 이번 인터뷰를 빌어 손 전 대표에게 언젠가 꼭 빚을 갚고 싶다는 뜻을 피력했다.
“손 선배가 다음번에 큰일을 하게 되면 혼신의 힘을 다해 꼭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직접 정치활동을 할 기회도 많았을 것으로 보이고 앞으로도 기회가 있을 것 같은데 이에 대한 생각은 어떻습니까.
“물론 과거에 정치에 대한 유혹이나 교섭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직접 정계에 진출해야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한번은 내 고향인 전라북도 김제에 시장 보궐선거가 있었는데 환경운동연합과 시민단체들이 나를 내새우려고 교섭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사를 했죠. 내가 고향에 살고 있지 않은데 시장을 하기 위해 주소를 옮겨서 출마를 하는 것 자체가 정치 도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그동안 정치에 참여했던 것은 우리나라의 사회와 정치 발전을 위한 일종의 운동을 펼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지금 광대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죠. 만약 마지막으로 한번 더 정치의 길을 걷는다면 그건 아마도 손 전 대표를 돕는 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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