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강상호 시사평론가)
경제가 힘들다. 소규모 자영업자뿐만 아니라 중견 기업까지도 어려움을 토로한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가정 폭력과 이혼 상담이 급증하고 종국에 가서는 가족해체로 이어진다는 심층보도까지 나온다. 국내 모 재벌 기업의 창업자 외손자 한 사람도 사업실패로 아내와 이혼하고 고시원을 전전하다가 지금은 지방에서 택시운전으로 생계를 이어간다. 경제가 무너지면 가족이 함께 무너진다.
영화 ‘국제시장’은 산업화 세대의 정서를 반영하면서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었다. 가족과 공동체를 중시했던 이 세대를 우리는 국민세대라 부른다. 산업화의 성공은 국민세대의 전통적 가족의식에 기반 한 측면이 있다. 그래서 서구에서 한 때 동양적 가족관계가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80년 대 민주화 세대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면서도 가족과 타인의 권리도 함께 생각하는 세대였다. 그래서 이들 세대를 시민세대라 부른다. 그러나 IMF를 겪으면서 우리사회는 더 이상 국민세대도 시민세대도 아니다. 자신의 권리를 강하게 주장하는 이 세대를 혹자는 IMF세대라 부른다. IMF세대에게 있어서 가족은 출발부터 해체의 대상인지도 모른다.
최근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 가정의 이야기가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어느 날 50대 후반의 한 여성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오피스텔에 세 들어 사는 신혼부부의 시어머니가 된다고 본인을 소개한 이 여성이 내 사무실을 방문했다. 방문 목적은 세 들어 사는 아들 부부의 임대 계약이 만료되어 재계약을 해야 하는데, 본인의 어려운 상황을 설명하고 수용 가능한 임대 조건을 협의하려는 것이었다.
이 여성은 자신이 살아 온 인생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연을 들어 보니 남편이 대기업에 입사하여 30 여 년을 근무하고 중역으로 퇴사 후 사업을 시작해서 작은 성공을 거두었는데, 2 년 여 전 거래처로부터 30 여 억 원 부도를 당하고 경제적으로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빚을 갚기 위해서 살던 집까지 정리하고 손에 쥔 것이 1억 5천 여 만 원이었는데, 아들 신혼집 반 전세 보증금으로 1억 3천 만 원을 주고 부부는 월세 집에 산다는 것이었다. 이 여성은 재기를 꿈꾸며 어려움 속에서도 작은 사무실을 유지하고 있는 남편에게 생활비는 내가 벌어 꾸려 갈 테니 당신은 사업에만 신경을 쓰라고 했다면서 눈시울을 적셨다.
비정규직으로 마트에서 생활비를 버는데 자신이 이렇게 살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고 했다. 부도나기 전 아들과 연애해 결혼한 며느리도 처음에는 무척 당황했지만, 지금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본인도 맞벌이를 하면서 아들과 탈 없이 신혼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IMF세대의 기준으로 본다면 벌써 헤어져야 할 상황이었다.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우리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중산층의 몰락을 눈앞에서 보는 듯 했다. 어떤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망설이다가, ‘남편에게 용기를 주세요. 남들이 다 남편을 외면해도 부인은 절대 남편을 질책하지 마세요. 사업 실패 후 주변의 온갖 비웃음은 견딜 수 있지만 가족이 변하는 것, 특히 아내가 멀어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사례를 많이 보았습니다. 가족이 버리지 않으면 남자는 꼭 재기 합니다’라고 조심스럽게 한 마디를 건넸다.
중년의 여성은 한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저는 남편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남편 때문에 부족함이 없이 행복했습니다. 이젠 파산한 남편과 이 어려움을 함께 할 것입니다”라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결의에 찬 모습이 진흙 속에 핀 연꽃처럼 커다란 감동으로 다가 왔다.
며칠 후 중년 여성의 아들 부부가 작은 화분 하나를 들고 내 사무실을 방문해 주었다. 금년 5월에 첫 아기를 갖게 된다고 했다. 국민세대는 물론 IMF세대에게도 가족은 소중하고 아름답다. 설날을 맞아 이들 가족에게 희망의 한 해가 펼쳐지길 바란다.
강상호 한국정치발전연구소 대표
- 정치학 박사
-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
- 행정자치부 중앙 자문위원
- 경희 대학교 객원교수
- 고려 대학교 연구교수
- 한국정치발전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