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 '넘나드는' 정치인의 '손익' 계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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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 '넘나드는' 정치인의 '손익' 계산서
  • 오지혜 기자
  • 승인 2016.01.25 17: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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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제·손학규·김영춘 '각기 각색'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오지혜 기자)

▲ 새누리당 이인제 최고위원-더불어민주당 손학규 전 상임고문-김영춘 전 의원 ⓒ 뉴시스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한 조경태 의원이 이틀 만에 새누리당으로 당적을 바꿨다. 야당 현역 의원이 여당으로 이동한 것은 13여 년 만이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평소 조 의원의 생각이 새누리당과 닮았다"며 손을 맞잡았지만, 일각에서는 비난여론이 일었다. 오직 '지역구 사수'를 위해 하루 만에 정치 신념을 손바닥 뒤집 듯 뒤집었다는 것이다.
 
정치계에서 당적을 옮기는 일은 적지 않다. 최근만 보더라도 야권 분열로 인해 더민주를 탈당, 국민의당에 합류한 현역 의원은 10명 이상이다.  
 
그러나 조 의원처럼 여야를 '가로지르는' 경우는 당사자에게도 큰 부담이다. 정치철학과도 직결되기 때문에 기득권을 버린 '소신파'로 거듭날 수 있는 한편, 명분도 실리도 잃은 채 '철새' 낙인만 찍힐 수 있기 때문이다.

<시사오늘>은 여야를 넘나든 정치인들과 그 정치적 손익을 살펴봤다.

◇'당적 14개' 이인제, '생존력'↑ '명분'↓

새누리당 이인제 최고위원은 정치권에 입문한 이래 거쳐간 당적만 13개, 무소속까지 세면 14개에 달한다.

노동인권 변호사 출신인 이 최고위원은 故 김영삼 전 대통령(YS)과의 인연으로 정계에 입문, 1988년 통일민주당 소속으로 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1990년에는 3당 합당으로 개편된 민주자유당에 합류했다. 

그에게 '철새' 이미지가 붙기 시작한 것은 1997년 대선부터다. 이 최고위원은 당시 당내 경선에서 이회창 후보에 패하자 민자당을 탈당, 국민신당을 따로 창당해 대선 후보로 출마했다.

대선에 패한 이 최고위원은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 故 김대중 전 대통령(DJ)과 인연을 맺지만,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와의 당내 경선에서 외압의혹을 제기하며 사퇴, 탈당했다.

이후 자유민주연합에 입당, 17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 최고위원은 국민중심당을 거쳐 다시 민주당에 돌아갔으나 공천에 탈락하자 탈당 후 무소속으로 당선됐다.

그는 2011년 자유선진당에 입당했으나, 자유선진당이 새누리당과 합당하면서 현재는 여당 최고위원직을 맡고 있다.

이 최고위원은 좌우를 수차례 넘나드는 와중에 6선에 당선하는 등 '불사조'로서 저력을 보여줬지만, 대중적 이미지에서는 마이너스(-)였다는 게 정치권의 중론이다.
 
◇'보따리 장사(-)'에서 '합리적 대안(+)'까지, '손학규'

더불어민주당 손학규 전 상임고문도 여야 '협곡'을 건넌 대표적인 사례다.

진보적 재야 인사로 명성을 떨쳤던 손 전 고문은 1993년 정계에 입문, 민주자유당 소속으로 14대 국회 보궐선거에서 당선됐다.

이후 신한국당 의원으로 15대, 한나라당 소속으로 16대 총선에서 내리 당선된 그는 경기도지사로도 선출, 거칠 것 없는 '대선가도'를 달렸다. 

변곡점은 손 전 고문이 2007년 별안간 한나라당과 결별을 선언하면서다.

그는 "낡은 수구와 무능한 좌파의 질곡을 깨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위한 새 길을 창조하기 위한 것"이라며 범여권에 합류했지만, 정치권은 '대권 욕망'으로 받아들였다.

손 전 고문은 이후 대통합민주신당 창당을 이끌었지만 여론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한나라당 소속 경기지사로 역임할 당시, 노무현 정권과 맺은 악연이 그 배경이었다. 故 노무현 대통령은 손 전 고문의 정치행보를 '보따리 정치'에 빗대 직격탄을 날리기도 했다. (관련기사: [文-安-朴연대]문재인은 왜 손학규 손을 안 잡나 http://www.sisa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7574)

17대 대선을 앞둔 당내 경선에서 정동영 후보에 낙선한 손 전 고문은 2008년 당대표로 선출돼 민주당과 통합을 이끄는 등 '리더십'은 보여줬지만 18대 총선에서 새누리당 박진 전 의원에게 덜미가 잡혀 대표직을 사임했다.
  
이후 2010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다시금 당대표로 선출,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당내 경선에 도전했지만 이번에는 문재인 후보에 낙선했다. 그는 2014년 7·30 재보궐선거에서 새누리당 김용남 후보에 패한 후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이로써 한때 유력한 대선 후보였던 손 전 고문의 '대권 꿈'은 확실히 멀어진 듯 보였다.

그러나 최근 야권분열로 인해 손 전 고문은 새로운 정치적 전성기를 맞이했다. 과거 한나라당에서 건너온 이력이 오히려 '합리적'이고 '소신있는' 정치인으로 비치면서 분열된 야권의 틈새를 메꿔줄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기 때문이다.

손 전 고문의 '보따리' 정치행보가 먼 길을 돌고 돌아 야권의 '합리적 대안'이 된 셈이다.

◇'소신 지킨(+)' 정치실험, '김영춘'

80년대 '학생회장' 출신인 더불어민주당 김영춘 전 의원은 YS 오른팔로 불렸던 김덕룡 전 의원과의 인연을 통해 정치권에 몸을 담았다. 이후 YS 정부에서 청와대 정무비서관을 지냈다.

김 전 의원은 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 소속으로 총선에 출마했지만 낙선, 16대에서는 한나라당 공천을 받고 첫 금배지를 달았다.

그랬던 그가 2003년 이부영, 김부겸 등과 함께 한나라당을 탈당, 열린우리당 창당에 참여했다. 이는 상도동계와는 전혀 다른 노선이었다.

김 전 의원이 이같은 결정을 내린 데에는 당시 당내 '지역주의'를 견디기 힘들어했기 때문이라는 후문이다.

부산 출신인 김 전 의원은 "한나라당이 새롭게 변하려면 지역주의가 없어져야 한다"고 역설한 것으로 전해졌다. (관련기사: 김영춘, 안철수 '러브콜' 거부한 이유 http://www.sisa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7687)

그는 '지역주의 타파'를 기치로 내건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을 창당했다. 이는 소신을 가지고 거대야당 꼬리표를 뗀 셈이었다.

김 전 의원은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소속으로 당선됐지만, 노무현 정권의 인기 추락으로 갈기갈기 찢긴 당 사정으로 문국현 대선후보 캠프에 참여했다. 이후 18대 총선에 불출마했다, 19대 총선에서 다시 민주당 간판을 들고 부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거대야당 탈당→여당탈당→민주당 간판으로 부산출마'로 요약되는 김 전 의원의 정치행보는 '음지를 향한 정치실험'으로 평가받는다. 

이처럼 김 전 의원이 복잡한 정치이력에도 '철새' 낙인 없이 대중적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그의 당적 이동이 '기득권 유지'가 아닌 '합리적 소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담당업무 : 국회 및 야당 출입합니다.
좌우명 : 本立道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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