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와 김영삼, 그리고 혁명의 주역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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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와 김영삼, 그리고 혁명의 주역들은?
  • 박근홍 기자
  • 승인 2016.04.19 16: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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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진풍 문정수 박희부 등 4·19주역 YS함께 민주주의 투쟁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박근홍 기자)

Prologue.

"4·19 혁명은 정의사회를 구현하는 위대한 혁명이었습니다"

▲ 1993년 역대 대통령 최초로 4·19 묘소를 헌화 참배하는 고 김영삼 전 대통령(YS) ⓒ 김영삼민주센터

1993년 4월 19일 YS(故 김영삼 전 대통령)가 역대 대통령 가운데 처음으로 4·19 묘소를 헌화 참배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한국 민주화 운동의 시발이며 위대한 국민의 승리였습니다. 그 의미가 재조명돼야 합니다. 문민정부의 출현으로 4·19 혁명이 미완의 혁명에서 완성 단계로 접어들게 됐습니다"라고 말했다.

YS는 그 후 '4·19 혁명 기념 사업'을 추진, '4·19 의거'를 '4·19 혁명'으로 격상시켰고 수유리 4·19 묘소 부지를 이전보다 3배 늘려 '국립묘지'로 승격시켰다. 그는 임기를 마칠 때까지 단 한 차례도 빼놓지 않고 이곳을 참배했다.

YS는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로 발돋움하는 데 이바지했던 4·19 혁명 주역들의 거산(巨山)이었다.

#1. 이승만 면전에서 3선개헌을 반대하다

"이승만 박사님, 개헌하면 안 됩니다. 국부(國父)로 남아야 합니다."

1954년 어느 가을날, 약관의 YS(故 김영삼 전 대통령)가 경무대(당시 일제 총독 관저) 응접실에서 이승만에게 일갈했다. 이승만은 YS의 말을 듣고 고개를 숙인 채 손을 부르르 떨더니 일언반구도 없이 응접실 뒷문으로 사라졌다.

그해 11월 28일 개헌선을 확보한 집권여당 자유당은 '초대 대통령 연임 제한 철폐'를 골자로 한 '3선개헌'을 사사오입이라는 얼토당토 않은 계산을 적용해 통과시켰다.

'이 당은 안 되겠다'고 판단한 YS는 10명의 동지를 데리고 자유당을 집단 탈당했다. 그리고 신익희, 조병옥 등과 함께 정통 야당의 모태 민주당 창당발기인으로 나서기에 이른다.

#2.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다

1958년 4대 총선 때 민주당 지도부의 요청으로 거제를 떠나 부산 서구로 지역구를 옮긴 YS는 정계입문 이래 처음으로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탈당한 YS에게 보복하고자 자유당에서 부정선거를 강행한 것이다.

그러나 YS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국회 재입성이 좌절된 후에도 원내외를 넘나들며 정치 활동과 민주화 투쟁을 선도적으로 펼쳐나갔다.

원내에서는 유석청년회를 이끌며 소장파를 결집해 자신이 몸담았던 구파의 대부 조병옥을 1960년 민주당 대선 후보로 만들었다. 유석(維石)은 조병옥의 아호다.

바깥에서는 술집과 다방 등에서 비밀리에 시민, 학생들과 만나 투쟁의 용의를 교환했다. 그렇게 YS는 헌정을 유린하고 민주주의를 억압한 이승만 정권에 분노한 이들에게 불을 지폈다.

#3. 4·19 혁명, 그리고 주역들이 YS 아래 집결하다

1960년 4대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이 세상을 떠나자, 세간의 이목은 부통령이 누가 되느냐에 집중됐다. 대통령이 소천하면 부통령이 그 자리를 물려받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이승만은 우리나이로 86세였다.

집권여당인 자유당에서는 이기붕을, 민주당에서는 장면을 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이승만 정권은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이것이 바로 3·15 부정선거다.

학생들을 중심으로 부산, 마산에서 시작된 시위는 그해 4월 11일 최루탄이 눈에 박힌 고등학생 김주열 군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분노한 국민들은 4월 19일 궐기했다. 이승만은 계엄령까지 선포해 가며 버티기에 나섰지만 결국 일주일 뒤인 26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똥두간에 빠지는 한이 있어도 나오지 마"

이 과정에서 수많은 혁명의 주역들이 YS 아래 집결해 상도동계의 태동을 이끌었다.

건국대 출신 복진풍 전 환경관리공단 이사장이 대표적이다. 4·19 혁명 당시 학생 운동을 주도했던 복 전 이사장은 YS 자택에 우연찮게 몸을 숨기면서 YS와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그는 2011년 <시사오늘>과 한 인터뷰에서 아래와 같은 일화를 공개했다.

"계엄령이 선포되고 몸을 피하다가 뒷골목으로 들어갔는데 어느 한옥집 문패에 '김영삼'이라고 쓰여 있었다. 반드시 도와줄 것이라는 생각에 초인종을 누르자 손명순 여사가 누구냐고 묻기에 '학생운동을 하다가 쫓기고 있다. 배가 고파서 그러니 먹을 것을 달라'고 말했다. 손 여사는 문을 열고 상을 차려줬다.

나는 이내 YS와 통화할 수 있었다. YS는 내게 '복진풍이 네가 살려니까 운명이 희한하구나. 꼼짝 말고 계엄 해제 때까지 문간방에 묵어라. 너는 지금 체포령이 내려져 있어. 지금 나가서 잡히면 죽어. 똥두간에 빠지는 한이 있어도 나오지 마'라고 말했다. 그래서 일주일 정도 거기서 먹고 자고 했다."

그 외에도 박관용 전 국회의장, 문정수 전 부산시장, 故 김우석 전 장관, 김현규 전 민주당 원내총무, 박희부 전 의원, 최동화 전 통일민주당 평택지구당 위원장 등이 4·19 혁명을 계기로 YS와 손을 맞잡았다.

상도동계에 투신한 4·19 세대는 YS를 필두로 군사독재정권에 맹렬히 맞서 싸웠다. 이 과정에 그들이 흘린 피와 땀은 후에 문민정부 창출이라는 결정체를 낳게 된다.

Epilogue.

"4·19 혁명, 민주화 운동의 자랑스러운 유산"

▲ YS 캐리커처 ⓒ 시사오늘

YS는 퇴임 이후에도 여러 차례 4·19 국립묘지를 참배하고, 기념 사업에 참석하는 등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YS는 2014년 4·19 혁명 국가조찬기도회에 격려사를 보내 "4·19 혁명은 우리 국민이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의지를 국내외에 선언한 민주화 운동의 자랑스러운 유산"이라며 "세계사에 길이 빛나기 위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있다"고 말했다.

4·19 혁명 공로자와 유족들도 YS를 높게 평가했다. 이들은 지난 18일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열린 4·19 혁명 국가조찬기도회에서 "YS는 혁명 정신을 민주 이념으로 계승시키고 발전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며 YS에게 특별봉사대상을 수여했다.

대리 수상한 YS 차남 김현철 국민대 특임교수는 "아버지께서는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노력해 왔다. 특히 임기 동안 4·19 혁명을 재평가하는 일을 했다. 이를 기점으로 마침내 민주주의가 확립되고 쟁취한 민주주의를 다시 확립하는 자리가 마련된 것이다. 이 모든 게 통합과 화합의 정신으로 이뤄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소감을 전했다.

1999년 YS는 4·19 국립묘지를 참배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민주주의의 시계를 거꾸로 돌릴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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