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곡성〉, 방대함을 채우는 의문과 기괴의 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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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곡성〉, 방대함을 채우는 의문과 기괴의 혼재
  • 김기범 영화평론가
  • 승인 2016.05.12 14: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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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범의 시네 리플릿> 대중과 철학의 경계에서 던져진 미끼 한 토막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김기범 영화평론가) 

▲ 영화 <곡성> 포스터

최첨단의 오늘을 사는 ‘현대인’ 이란 작위는 희구하는 물질적 풍요로움이 줄 수 있는 안정이나 여유 등의 단어와 으레 연계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지난한 삶에 찌든 '세인'들의 현실은 결핍과 범죄로부터 비롯된 혼란이나 불행에 노출돼, 오히려 이에 대한 무감각에 익숙해져 있을 따름이다.

부정적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어쩌면 그 신산하고 각박한 삶의 여정 속에서 소외와 상실의 가능성에 대해 증폭되는 의심과 불안이야말로 동서고금의 인간사에 늘 상존하는 업보일 수도 있겠다. 

경쟁자와 적들이 난무하는 이 자본주의의 도시적 삶 속에서 그나마 그 외로움과 초조함을 버티게 하는 원동력은 결국 그 힘듦을 같이 헤쳐 나가는 가족과 친구라는 울타리뿐이다. 

영화 <곡성> 은 도시가 던져준 그 문제적 삶에 지친 현대인의 모습을 동떨어진 외딴 시골 마을의 목가적 풍광을 통해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누구나 현실의 도피처로 바라는 전원의 전형적인 따사롭고 밝은 햇살이 아닌, 이성과 논리와는 유리된 한 시골 마을의 비 내리는 장면에서 시작된 음침과 괴이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차츰 극대화된다. 

결국 그 공간적 배경은 도시의 삶에 찌든 이들에게 그 울림의 폭을 크게 배가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한편으로는 영화를 통해 지친 영혼을 치유하기보다는, 열린 결말이라는 미명 아래 남겨진 많은 의문과 해석의 여지가 우중에 질퍽거리는 진흙탕처럼 관객을 더욱 심난하게 만든다. 

하기는 그것이 어느새 한국 스릴러 장르의 독보적 거장으로 거듭난 감독의 원천일지도 모른다. 

<곡성> 은 영화 전편에 걸쳐 숱한 장르를 넘나든다. 

소심한 경찰관 가장이 등장하는 <거북이 달린다> 의 코믹한 드라마를 연상시키는 초반 분위기는 어느덧 예고대로 스릴러 공식으로 내달린다. (비가 쏟아지는 시골 마을의 범죄 현장에 모여드는 경찰 관계자들의 시퀀스는 <살인의 추억> 에 대한 오마주일 수도 있겠다.) 

범죄 스릴러 특유의 숱한 의혹에서 출발한 긴장과 서스펜스는 결국 좀비가 출현하는 초현실적 오컬트의 괴기로 빠져나가, 말미에는 토속 신앙과 기독교적 종교관을 거쳐 인간의 존재론까지 꿰뚫는 철학적 메시지를 투척한다. 

마치 현재 인간 세상의 혼란을 표현하듯, 모든 장르 요소의 혼재로 만든 극적 효과들을 자연과 어우러진 영상미 속에서 최대로 꿰어 맞추는 감독의 연출력은 찬사를 받아 마땅하다. 

여기에 최초의 주연 자리를 꿰찬 곽도원은 한 아버지와 경찰을 지나, 미약한 자연인으로서의 모습을 있는 힘껏 보여주며 러닝 타임을 내내 압도한다. 그간 조연에만 자리매김 되어 있던 한 배우에 대한 또 다른 의혹 한 점은 이 영화 한 편으로 그렇게 말끔하게 사라진다. 

그러한 곽도원의 뒤를 모처럼 조연으로 분한 황정민과 연기력에 있어서 이의 제기가 필요 없는 천우희가 받치며, 끝까지 관객들에게 정체불명의 의구심을 선사한다. 

그야말로 신들린 연기를 한 아역 김환희는 분명 신선한 발견이고, 쿠니무라 준의 표정 연기는 이국적이다. 미지의 외부인이 주는 극단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데에 일본 배우의 투입은 더할 나위 없다. 

여느 오컬트 무비와는 달리 실체 없는 긴장감이 지배하는 이 영화의 후미진 시골 마을은 불분명하지만 늘 막연하게 존재하는 불안과 공포, 분노 속에 지친 삶을 감내해야 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은유한다. 

그러나 <곡성> 은 연출자와 연기자의 그 눈부신 성과에도 불구하고, 분명 관객들의 극명한 호불호의 경계에 서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영화란 관객, 그 중에서도 평단이나 매니아가 아닌 일반 대중의 매체라는 전제가 붙는다면 더욱 그렇다. 

피해자가 피해를 당해야 하는 이유를 현실적이고 논리적인 인간사의 내부가 아닌, 초현실적인 측면에서 찾으려는 발상은 세파에 찌든 현대인의 병든 마음을 다만 오컬트에 기초하여 표출하려는 감독 개인의 지극히 주관적인 창의에 불과하다. 

철저히 감독의 주관과 창의에서 비롯된, 인간의 선과 악에 대한 또 다른 의심에 얼마나 많은 대중들이 공감할 지는 미지수이다. 이를 받아들이는 관객들도 저마다 주관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극 중에서 켜켜이 쌓여가는 인간의 의심에 비례하여 영화가 던진 화두가 빛을 발하여야 하는 156분의 러닝 타임은 감독의 그 주관적 해석이 설득력 있게 와닿지 않는 일부 대중들에게는 너무 길고 방대하며 허전할 수도 있다.  

퇴마를 한국적으로 변주한 플롯은 분명 흥미로울 수 있으나, 수십 년 전 헐리우드의 <엑소시스트> 가 내던졌던 그 원초적 충격과 센세이션을 능가하기엔 이미 대중의 눈높이는 3차원적 자극에 익숙해져 있는 것도 사실이다. 

더구나 눈에 보이는 것이야말로 믿음이라 생각하는 대중들에게 구구한 해석이 가능한 다소 불편하고 개운치 않은 결말은 영화가 줄곧 역설하는 의혹과 의문에 대한 또 다른 여지를 남길 수도 있다. 

여기에 15세 관람가 등급을 받은 이 영화는 영화적 심미안에 대한 지적 허세를 부려보기 위해서라도 15세 청소년 이상의 이해력을 가진 척 해야 하는 일말의 부담감을 떨쳐 버리기 어렵다. 

상업영화가 지향하는 대중성 및 보편성과 어느 정도 거리가 있다고 느껴질 수도 있는 대목이다. 

하긴 어찌 보면 이 모든 것 또한 영화가 그토록 강조하고 싶어 하는, 인간이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의심과 의혹의 편린일 수도 있겠다. 

“절대 현혹되지 마라.” 

어느 대중들에겐 영화가 내세우는 이 홍보 문구가 애당초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작용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족 : 공간적 배경이 전라남도 곡성인 것은 영화의 내용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굳이 감독의 변을 내세우자면 허허로운 개인적 이유로 택했을 뿐이다. ‘곡하는 소리’ 를 뜻하는 영화의 제목과 일치시키는, 일종의 맥거핀적 장치로 봐도 무방할 듯하다.

★★★☆

·영화 저널리스트
·한양대학교 연구원 및 연구교수 역임
·한양대학교, 서원대학교 등 강사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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