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代散策] 박주선 “DJ-노무현, 두 대통령에 사과 받은 기록도 있지, 허허”
[時代散策] 박주선 “DJ-노무현, 두 대통령에 사과 받은 기록도 있지, 허허”
  • 글 박주선 의원/대담 정세운 기자/정리 윤진석·조서영 기자
  • 승인 2019.04.29 16:3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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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번의 구속·4번의 무죄, 간판 없이도 4선 
기적의 정치인인가, 고난의 정치인인가
박주선의 성공과 눈물, 그리고 수난시대 
DJ정부 靑 인사검증 때 ‘강건하게 대처’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글 박주선 의원/대담 정세운 기자/정리 윤진석·조서영 기자)

바른미래당 박주선 의원은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는 기억을 돌아봤다. 파란만장한 수난과 영광의 성공을 반복했던 그는 부침의 인생에서 단력된 듯 보였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바른미래당 박주선 의원은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는 기억을 돌아봤다. 파란만장한 수난과 영광의 성공을 반복했던 그는 부침의 인생에서 단력된 듯 보였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한편의 대하소설(大河小說)과도 같은 파란만장한 스토리를 어디서부터 들려줘야 하나. 잠시 뜸을 들이던 차였다.
<시사오늘> 기자들은 요즘 정국의 인사(人事) 문제부터 꺼냈다. 국회의원회관에서 만난 그날(4월 15일)은 문재인 정부의 인사에 대한 비판이 쇄도할 때였다.
“김대중(DJ) 정부 때 민정수석과 인사수석을 겸직하셨습니다. 당시 의원님께서는 인사검증을 어떻게 밟으셨습니까.”
대통령 법무비서관 때의 일화를 들려달라는 거였다. 그는 또 연이어 물었다.
“4번의 구속과 4번의 무죄. 간판 없이도 4선까지 했습니다. 국회부의장, 바른미래당 대표도 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쭉 술회를 해줬으면 합니다.”
순간 주마등처럼 모든 기억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차곡차곡 책장을 넘기는 페이지 소리처럼 내 기억력은 조금씩 일깨워져 갔다. 성공과 수난을 번갈아 맞이하면서 역경의 역사를 쓰고 있는, 나의 정치 철학을 구김 없고 순수하게 들려주기로 했다.

박주선 의원은 국민의 정부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신임을 얻고 청와대 법무비서관으로 발탁됐다.ⓒ시사오늘(사진=박주선 의원실)
박주선 의원은 국민의 정부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신임을 얻고 청와대 법무비서관으로 발탁됐다.ⓒ시사오늘(사진=박주선 의원실)

청와대 입성과 DJ 제스처

우선 인사 검증 관련해 내 경험의 끈을 풀기 시작했다.

故김홍일 의원이 나를 만나자며 연락이 왔다. 그는 김대중 대통령의 큰아들이었다. 1998년 2월 청와대 법무비서관으로 막 내정발표가 됐을 때다. 

“우리 아버지는 독특한 제스처가 있습니다.”

김 의원은 내 앞에서 아버지(DJ)의 제스처를 흉내 냈다. 양손바닥을 얼굴에 대고 위아래로 쓰다듬고, 이마를 닦고, 귀를 잡아당긴다는 거다.

“대통령으로부터 이 제스처가 나오면 본인과는 뜻이 다르다는 얘깁니다. 그 즉시 보고서를 재검토해야지, 그대로는 보고 내용을 관철시킬 수 없습니다.”

DJ와 일면식도 없는 내가 발탁된 것이니, 김 의원 나름으로 귀띔해준 거였다. 그 말을 들어서인지, DJ께 보고 때마다 언제 그런 제스처가 나올까 긴장이 됐다. 하지만 대통령은 참으로 훌륭했다. 수없이 많은 보고를 하는 중 견해가 다른 경우도 많았다. 그럼에도 논리적으로 합당하다고 생각하면 본인의 견해를 즉시 고쳤다.

“인사, 재고해주십시오.”

그러다 진짜 제스처를 보게 된 일이 생겼다. 한 국영기업체 사장을 임명할 때였다. 하루는 주무 장관이 허겁지겁 나를 찾아왔다. “어젯밤에 대통령께서 역정을 내시며, 왜 빨리 진행을 안 시키느냐고 질책을 했다”고 일러줬다.

하지만 인사검증자로서 볼 때 여러모로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또한 모든 인사는 내가 인사안을 작성해 보고하면 DJ가 재가를 하던 관행을 깬 것도 의아하다고 생각했다. 알아봤더니 DJ께서 미국 망명생활을 할 때 도움을 많이 줬던 사람이었다. 곧장 대통령께 보고하러 올라갔다. 이러이러한 결점이 있어 임명이 곤란하다고 하니 대통령은 고개를 저었다.

 “시켜요. 시켜. 그 사람 능력 있고, 자질  되고, 외국 생활도 많이 해서 이 기관에 적합해요.”

그래도 나는 물러나지 않았다.

“재고해주십시오. 재고해주셔야 합니다.”

내 말에 대통령께서는 그 제스처를 하시는 거였다.

“시켜요. 시켜.”

하지만 나도 거듭 대통령께 재고를 요청드렸다.

감히 “비서가 국가 원수인 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면서 대통령께서  역정을 내시도록 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만, 비서인 저로서는 대통령을 역사의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기록되도록 하려는 뜻에서 이런 보고를 드립니다. 다시 한 번 고려해주십시오.”

간언했다. 그러나 대통령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시켜요. 시켜. 그 사람 미국에서 글로서리(식료품점)를 해서 성공한 사람이고 경영 능력도 뛰어나요.”

박주선 의원은 민정수석과 인사수석을 합한 법무비서관을 맡아 김대중 대통령을 보좌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박주선 의원은 민정수석과 인사수석을 합한 법무비서관을 맡아 김대중 대통령을 보좌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누 되는 일 안 한다…역시 훌륭한 분’

청남대로 여름 휴가를 떠났던 DJ께서 다음날 오후 비서를 통해 전화를 줬다. ‘5시까지 청남대로 내려와라. 만일 내려올 수 없으면 일반 전화로 연락을 하라’는 하명이었다. 전화를 드렸다. ‘왜 그 사람이 안 되는 건지 다시 한 번 보고하라’고 했다. 이러이러 해서다, 라고 했더니 대통령께서 “왜 이런 문제가 있는데도 장관은 보고를 안 한 거요?”라고 말씀했다.

그래서 내가 “장관은 국가원수인 대통령이 무섭고 두려워서 지시를 거역하는 보고를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비서가 필요한 것 아닙니까”라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DJ는 “미국 망명 생활 당시에 도움을 줬던 분이오. 마음이 안타깝소”라며 침통해 하면서 임명을 하지 말라고 말씀했다.

“사장은 아니고 상임고문으로 추진하겠습니다”라고 보고를 드리자 상임고문 임명 절차를 묻더니 휴가 마치고 다시 얘기하자며 전화를 끊었다.

나는 대통령께 부담을 덜어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수소문해서  그분을 직접 내 사무실에서 만났다. 

“대통령께서 당신을 사장을 시키라고 하는데, 이러이러한 문제로 대통령께 큰 누를 끼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양해해주십시오. 오히려 대통령 마음 편하게 당신이 먼저 그 자리를 가지 않겠다고 말씀드리면 어떻겠습니까.”

솔직히 말했다. 그런데 그 사람도 참으로 훌륭한 분이었다.

“나는 대통령께 누되는 일 안 합니다. 제가 대통령께 사양하겠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분이 대통령께 사양 의사를 전달했던 것 같았다.
휴가를 마치고 온 DJ께 부재중 업무 보고 차 집무실로 갔더니 활짝 웃으면서 “그 사람이 사장 안하겠다고 합니다”라고 말씀했다.

그래서 내가 “참 훌륭한 분 같습니다. 상임고문 임명은 어떻게 할까요?”라고 말했더니 “그 자리도 그만두라”고 지시했다.

결국 그분은 상임고문도 하지 않았다. 대통령의 짐을 덜어준 거였다. 대통령도 더는 거론하지 않았다.

차(茶)를 대접받다

한 두어 달 있다가 대통령이 관저로 나를 불렀다. 보통은 이것 때문이지 않나, 하면 적중했다. 그에 맞게 보고서를 준비하면 됐다. 하지만 그날은 도무지 왜 부른 건지 도대체 몰랐다. 일단 관저에 들어가니 이희호 여사와 함께 나왔다. 직감적으로 드는 생각이 있었다.

‘너 그만 둬라. 데리고 있으니까, 맨날 대통령 발목이나 잡고 너무 피곤해서 안 되겠다’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닐까?

당에서 인사 부탁이 너무 많이 들어왔지만, 아닌 건 아닌 거다. 거절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내가 혹시 부담이 돼서 이제 그만 검찰로 돌려보내려고 하는 게 아닐까…. 그런 기우가 스쳤다.

무슨 말을 할까, 기다리는데 대통령이 차 한 잔주시고 덕담을 했다. 이희호 여사도 ‘차 한 잔 더 하세요’하는 거다. 속으로 ‘두 내외분이 차를 대접하며 이제 나에게 그만두라’고 하나보다 생각하고 차를 마셨다.

박 의원은 청와대 법무부 비서관을 역임하는 동안 엄격한 인사검증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사진은 김대중 국민의 정부에서 청와대 법무비서관로 지낼 당시의 모습이다. ⓒ시사오늘(사진=박주선 의원실)
박 의원은 청와대 법무부 비서관을 역임하는 동안 엄격한 인사검증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사진은 김대중 국민의 정부에서 청와대 법무비서관로 지낼 당시의 모습이다. ⓒ시사오늘(사진=박주선 의원실)

그런데 정반대로 대통령이 말했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해서 여기까지 왔소. 그 중에서도 박주선이처럼 영민한 사람을 내가 본 일이 없소. 또 성실하면서 소신을 갖고 직언을 해주니 너무 고맙소. 꼭 이런 자세로 나를 도와주시오. 내가 그 은혜를 잊지 않겠소.”
뜻밖에도 분에 넘치는 격려를 준 거였다.

“국가 원수를 모시는 비서로서의 소임을 다하고 있는데, 은혜라는 말씀은 과분한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아니오. 나는 말이오. 당신에게 큰 은혜를 입고 있소.”

그 후 공공단체 상임고문이 된 그분은 16대 총선에서 당선된 나를 오찬에 초대했다.

 “축하합니다.”

대통령께서 아들들이 구속 당하는 참담한 상황에서 “박주선만 있었더라도 이런 사태는 예방했을터인데”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박의원님을 존경하게 됐습니다”라고 말했다.

1997, 대선을 앞두고

여권(한나라당)에서 이회창 대통령 후보가 아들 병역 기피 문제로 지지율이 폭락할 무렵이었다. 이때 시도한 것이 경쟁자였던 DJ의 계좌를 터는 일이었다. 은행·증권·보험감독원 등을 동원해 친인척 계좌를 샅샅이 뒤졌다. 들어온 돈을 DJ가 받은 뇌물로 둔갑시켰다. 국정감사에서는 “DJ의 비리”로 폭로했다. 시민단체로 하여금 고발하도록 했다. 여당은 오로지 뇌물죄로 DJ를 검찰의 포토라인에 세우는 것에 혈안이 돼 있었다.

그 시기 나는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수사기획관이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검찰이 권력의 하수인이 돼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김태정 당시 검찰총장께 간곡히 보고서를 써서 건의를 했다.

“검찰총장님, 정치적인 경쟁에 검찰이 뛰어들면 영원히 정치검찰이라는 불명예나 오명을 씻을 길이 없습니다. 그 오명은 검찰총장님이 지게 됩니다. 이 사건은 대통령 선거가 끝나면 철저히 수사하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수사유보를 결정해주십시오.”

하지만 검찰 내부의 80% 이상이 이회창 후보를 지지하던 분위기였다. ‘수사를 해야지, 왜 안 하냐’며 내부 불만이 터져 나왔다.

나는 역대 검찰총장, 법무부 장관을 역임한 선배들을 만나 의견을 들었다.

“수사유보”와 “즉시수사”의 의견이 엇갈렸다.

나는 검찰총장께 대선 이후로 수사를 미룰 수 밖에 없는 이유와 명분을 담은 보고서를 작성했다. 검찰 내 분위기상 총장이 독자적으로 수사유보 결정을 해도 검찰 내부에서 반발하면 큰 문제가 야기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총장께 “김영삼 대통령께 검찰의 의지와 입장을 직접 보고해서 수사유보 동의를 받으십시오”라고 건의했다. 총장은 “만일 YS가 동의를 안 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다. “YS에게는 ‘알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즉시 기자회견을 개최해 YS에게 보고한 사실은 언급하지 말고 검찰총장 직권으로 수사유보를 결정한다고 발표하십시오. YS가 노발대발 할 것입니다. 그때는 YS와 맞서는 검찰총장이 되십시오. 대통령급 검찰총장이 됩니다”라고 총장께 건의했다.  

YS, 흔쾌히 수락

고심 끝에 검찰총장은 청와대로 향했다. 김영삼(YS) 대통령께 면담을 요청했다.
“지금 곧바로 수사를 하게 되면 검찰의 명예가 완전히 매몰되는 상황입니다. 공정한 수사, 엄정한 수사를 하기 위해서는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해야 합니다.”
자초지총을 설명하니

“그렇게 하시오.”

YS 대통령은 흔쾌히 허락했다. 검찰총장은 사실 청와대에 들어갈 때만 해도 얼마나 긴장했는지 모른다. 만일 YS가 동의를 안 하고 수사를 지시했다면 어땠을까. 검찰 내부는 검찰총장이 수사유보를 결정하더라도 항명사태가 일어나고 DJ 후보로서는 대통령 꿈을 포기해야 했을지도 몰랐다.

나는 수사유보 발표문을 직접 작성했다. 검찰총장은 기자회견도 가졌다. ‘정치검찰이 돼서는 안 된다’는 일념 하에 최선을 다했다. 그런 내게 DJ는 깊은 감명을 받은 듯했다.

당선 후 DJ는 곧바로 나를 불렀다.

“호남 출신 검사가 영남 정권 하에서도 보직 관리가 잘되고, 어찌 이런 담대하고 용기 있는 결정을 할 수 있었소.”

말처럼 나는 검사 초임부터 대단히 촉망 받았다. 80년대 서슬 퍼런 군사독재 정부 하에서도 당시 광업진흥공사 사장이던 전두환 대통령 처삼촌의 비호를 받던 동자부 석탄국장이 관여된 저질연탄 사건을 수사해 구속시켰다.

차기 검찰총장 0순위, 법무부장관이라는 말을 들었다. 검사 생활 5분의 4를 서울중앙지검 특수부와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등에서 근무했다. 바르고 곧은 사람, 인정이 많고 의리가 있는 사람으로 평가받았다. 명검사 칭호도 받았다. YS 정부에서는 ‘올해의 공무원 상’을 받기도 했다. 그게 내 자부심이었다. 

DJ 대통령은 이런 나를 신임하고 총애했다.

“당신은 나와 역사를 함께 쓸 사람이오.”

나를 보며 그 말을 하던 눈빛이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과분한 칭송이었지만 더 열심히 소신껏 대통령을 보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故김대중 전 대통령은 국민의 정부 당시 발탁한 박주선 의원에 대햐 "나와 역사를 함께 쓸 사람"이라며 격려한 바 있다. DJ 대통령은 법무비서관인 박 의원을 신임했다고 알려져 있다.ⓒ시사오늘(사진=박주선 의원실)
故김대중 전 대통령은 국민의 정부 당시 발탁한 박주선 의원에 대햐 "나와 역사를 함께 쓸 사람"이라며 격려한 바 있다. DJ 대통령은 법무비서관인 박 의원을 신임했다고 알려져 있다.ⓒ시사오늘(사진=박주선 의원실)

수난시대의 시작

그러나 임인대사 천험근골(任人大事 天驗筋骨)이라고 했던가. 하늘이 큰일을 시키기 위해 살을 도려내고 뼈를 부순다. 즉 단련을 시키려고 시련을 내린 것처럼 영광은 잠시였고, 수난시대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1999년 옷 로비 사건부터 끝이 없는 낭떠러지로 내몰렸다. 무죄를 받았지만 피해는 막대했다. 석방 당시 DJ 대통령은 내게 “검찰을 개혁하지 못한 나의 죄가 너무 크다”며 사과했다.

“청와대를 안 오겠다고 사양하고 거부했던 사람을 억지로 끌고 와, 검찰의 엉터리 수사로 기소를 당하게 했소. 너무 안타깝고 미안하오. 나도 사형선고를 받지 않았다면 대통령이 안 됐을 것이오. 하늘이 박주선이에게 큰일을 시키려고 단련을 시킨 것이오.”

국회 배지를 달다

나는 이후 고뇌 끝에 16대 전남 보성화순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악전고투(惡戰苦鬪)의 상황이었지만, 압도적으로 당선되는 기염을 토했다. 나의 선거운동을 돕기 위해 전국에서 구름처럼 모여든 지인들, 아까운 인재를 그대로 둘 수 없다고 나선 고향분들 등등….
그것이 나의 국회 첫 입성이었다.

정적의 타깃

공교롭게도 나는 DJ 대통령에 이어 노무현 대통령에게마저 사과를 받게 됐다. 자초지종은 이렇다.
2004년 정적의 타깃이 돼 부당한 구속 수사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나라종금 퇴출 저지 로비 사건, 현대건설 후원금이 뇌물로 둔갑된 것에서 누명을 쓰고 억울한 구속을 당해야 했다.
실은 여기에는 막강한 권력의 탄압이 있었다. 참여정부 집권 초 나는 열린우리당 창당에 반대했다. 노무현 대통령을 만들어준 민주당을 버리고 새로운 정당을 창당하는 것은 정치적 도리에도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한민국 정당 정치를 퇴보시키는 일로 절대 동의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그 즉시 검찰은 민주당에 남아있던 사람들을 수사하기 시작했다. 정치적 말살을 하려 했다. 이는 민주당을 고사시키기 위한 철저한 계획이었다. 잔류 의원들을 부정부패 세력으로 낙인을 찍어야 열린우리당이 성공을 하고, 지지를 크게 받을 수 있다는 음모였다. 나를 비롯해 ‘한광옥, 한화갑, 권노갑, 김운용, 이훈평, 이인제’ 등이 싹쓸이 구속됐다. 모두가 민주당 뿌리 뽑기 작전이었다.
당시 안태희 중수부장은 내 담당 변호인에게 “내 뜻이 아니다. 어차피 무죄다. 무죄 받으면 선거에 유리하다”라는 말까지 했었다.
담당 검사는 “어차피 무죄”라고 까지 했고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자 검찰은 항소도 포기해 버렸다.

옥중 출마 감행

나는 이 같은 정치 탄압에 굴할 수가 없었다. 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옥중 출마를 강행했다. 이때도 민주당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지역구인 보성화순으로 나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참여정부는‘박주선 낙선’을 위해 선거구 개편마저 단행했다. 전남에서 세 번째로 가장 큰 선거구를 쪼갠 것이다. 화순군은 나주시로, 보성군은 고흥군으로 붙여버렸다. 어쩔 수 없이 고흥보성으로 출마하게 된 이유였다.
그 시절 옥중 연설은 송요찬 내각 수반의 옥중연설 후 40년만의 일로서 광주MBC에 연설 영상이 보관돼 있다. 이를 시청한 많은 유권자들이 울음바다가 됐다는 말도 들려왔다. 비록 29.7%의 득표율로 낙선됐지만, 끝내 나는 2005년 5월 27일 최종 무죄 확정 판결을 받기에 이르렀다.
경쟁 후보자들은“부정부패의 원흉이 국회의원이 될 수는 없다”며 옥중에 갇힌 나를 원색적으로 비난했고 지역구가 바뀌어 인지도 낮은 나를 위해 가냘픈 여인으로서 내 남편은 억울하다고 하소연 하면서 선거유세도 마다 않았던 아내와 지지자들을 생각하면 한없는 눈물이 나온다.

노무현 대통령의 사과

보란 듯이 재기에도 성공했다. 18대 광주동구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 후보로 나가 88.7%라는 전국 최고 득표율을 기록한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사과를 받은 것은 그가 퇴임한 후다. 2008년 7월 12일 민주당 최고위원으로서 나는 ‘정세균’ 등 당 지도부와 함께 봉하마을로 찾아갔다.
단도직입적으로 나는 노 전 대통령에게 물었다.

“어떻게 현역 국회의원을 무고하게 2번이나 구속시킬 수 있습니까. 진상조사를 해달라고 해도 어떻게 전부 그렇게 묵살시킬 수 있습니까. 노무현 대통령 비서실장을 통해서도 얘기를 했고, 법무부 장관, 검찰총장한테도 다 얘기를 했습니다. 여당(당시 열린우리당)에게도 진상조사를 해달라고 했지만, 다 묵살 당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더 놀라운 것은 나에게 누명을 씌워서 두 번이나 구속을 시켰던 무책임한 주역들을 문책해야 함에도 어떻게 전부 승진시키고, 영전시킬 수 있습니까. 그런 것을 보면서 최후 배후는 노무현 대통령이다, 하는 의심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자리에는 권양숙 여사, 문재인 현 대통령도 함께 있었다.

노 전 대통령은 그러자 1초도 머뭇거리지 않고 말했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민주당과 박주선 의원님과는 분리해서 취급했어야 했는데.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지 않겠습니까. 저희 집에서 소주나 한잔 하면서 회포를 한번 푸시죠.”

그러고서 헤어지면서 노 전 대통령이 내 손을 꼭 잡았다. 거듭 “미안하게 됐습니다”라면서 사과를 반복했다.

4번째 구속과 무죄

하지만 수난은 끝나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 말기인 2012년 7월 네 번째 구속이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이 얘기를 하려면 4·11 국회의원 19대 선거에서 광주 동구에 무소속으로 나가 전국 최저 득표율(31.6%)로 당선한 사연부터 전해야 한다.

그 시기 민주당은 선거법상 허용되기 어려운 모바일 선거인단 경선 제도를 도입했다. 나를 지지하던 구 의원 한분이, 한 전직 동장에게 모바일 선거인단 모집을 부탁한 모양이었다. 나는 지금도 하늘을 두고 맹세하지만 당시로서는 전직 동장의 이름도 성도 모르며 만나본 사실 자체도 없다.

당시만 해도 관련 공직선거법이 개정되지 않아 혼란이 있던 중이었다. 이를 틈타 상대편의 제보로 선관위에서 들이닥치는 일마저 발생했다. 전직 동장이 그 과정에서 도망가다 실족사를 당했고, 이는 뉴스를 통해 전국으로 보도됐다. 나는 그 배후로 지목돼 또 다시 4번째 구속을 당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잘못이 없었던 나는 7개 죄명, 9개 범죄 사실 전체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나는 너무 억울한 구속을 또 당했다.

다시 또 무소속

나는 심리적 부담 때문에 19대 총선에 출마하지 않으려 했다. 이유는 전직 동장 때문이었다. 만난 일도 없고, 죄지은 것도 없지만 고인이 된 상황에 너무도 아프고 마음이 무거웠다.

그런 내가 출마를 다시금 결심하게 된 것은 유족들의 요청에 의해서였다. “제발 당선돼서 전 동장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해 달라. 동장의 명예를 회복시켜 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외면하지 못했다. 또 검찰수사를 받던 관련자들이 “당선이 돼서 우리를 도와줘야지 출마를 안 하면 안 된다”하소연도 외면할 수 없었다.

이에 무소속으로라도 출마해 전국 최저 득표율로나마 당선됐다. 그때가 간판 없이 나간 두 번째 무소속 당선이었고, 도합 삼선이었다. 나중 20대 국민의당(현 바른미래당) 후보로 당선된 것까지 합하면 4선 국회의원이다.

유례없는 기록

돌이키면 내 인생 자체가 기네스북 감이다. 정치인이 4번 구속 되고 4번 무죄를 받은 건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다. KRI(한국기록원)에서 신기록 인증서까지 받았다. 도합 16년 실형이 구형됐고, 감옥에서만 409일 넘는 기간을 보내야 했다. 풍랑과 같은 내 인생을 두고 사람들은 불사조, 오뚝이, 인동초, 풍운아 등 여러 수식어를 달아줬다.

고마운 사람들

박광태 전 광주시장은 내가 4번째 구속에 무죄로 풀려나자 해방 후 독립운동군을 맞듯 감개무량해 할 정도였다.

“박 의원, 너무 감사하오. 너무 고맙소.”

전화로 기뻐하는 박 전 시장을 향해“박 시장님을 대신해서 감옥에 간 것도 아닌데 왜 감사하냐”고 물었다. 일반적인 경우에는 ‘고생했다, 사필귀정으로 무죄가 돼 축하한다’고 해야 하지 않냐는 말뜻이었다.
박 전 시장은 그제야 사정을 전했다.

“이번에도 박주선이 무죄라고 주변 인사들에게 말했더니, 어느 한사람도 믿질 않았소. 3번은 어떻게 살아나왔지만, 4번째는 절대로 무죄를 받거나 살아나오지 못할 거라는 예측뿐이었소. 다들 우리나라 검찰이 바보냐, 박주선 머릿속에 놀아나겠나, 하면서 믿지를 않았소. 그런데 무죄라고 한 내 주장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해줘서 너무너무 고맙소.”

한번은 박근혜 대통령 특검을 맡은 박영수 검사 역시 내게 전화를 해온 일이 있었다. “기록을 보니 도저히 기소할 수 없는 건인데, 기소를 했다”며 해당 검사를 향해 엄청난 비판을 늘어놓을 정도였다. “이런 검사에게는 벌점을 줘야 겠다”는 말로 나와 같은 생각을 피력했다.

박주선 의원(사진 맨 위 오른쪽)은 어린시절 수재로 불렸고 1등을 놓쳐본적이 없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그는 죽을 고비를 4번 넘기는 등 어려운 점도 한두번이 아니었다.ⓒ시사오늘(사진=박주선 의원실)
박주선 의원(사진 맨 위 오른쪽)은 어린시절 수재로 불렸고 1등을 놓쳐본적이 없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그는 죽을 고비를 4번 넘기는 등 어려운 점도 한두번이 아니었다.ⓒ시사오늘(사진=박주선 의원실)

구사일생

거슬러 올라가면 내 인생은 구사일생(九死一生)이며 기적 같은 삶이었다. 여기서는 나의 출생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1949년 전남 보성읍 옥평리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봉하산 기슭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순탄치 못했다. 죽을 고비만 4번을 넘겼다. 첫 번째는 4살 때였다. 할아버지가 나를 업고 냇물을 건너시다, 깊이 2미터가 되는 물속에 그만 빠진 거였다. 하염없이 떠내려가는데 마침 동네 군인이 휴가 나오는 길에 목격하고 나를 건져줬다.

두 번째는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관내지서로 향하는 보성 경찰서장 차에 치인 나는 5일 동안이나 깨어나질 못했다. 이미 관과 수의가 만들어질 정도였다. 그런데 5일째 되는 날 극적으로 깨어나 살았다.

세 번째는 고등학교 때였다. 축농증이 생겼는데 시골이라 이비인후과가 없었다. 전문의가 아닌 의사에게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잘못 돼 엄청난 부작용에 시달렸다. 생사의 기로에서 오래도록 고통 받았다.

네 번째는 구속 후 얻은 화병이 문제였다. 너무도 억울한 나머지 스트레스가 쌓여 심장에 위험이 왔다. 급성관상동맥의 문제로 발작까지 났다. 2시간 내에 수술하지 않으면 촉각을 다툴 위급한 순간이었다. 다행히 보석으로 풀려나 가까스로 수술해 생명을 건졌다. 4번의 구속 4번의 무죄처럼 이 역시 불구덩이에서 네 번 살아나온 거였다.

어머니의 희생이 있었기에 사법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고 성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박 의원의 어머니는 헌혈을 해 아들의 등록금을 마련할 정도로 살신성인의 모습으로 아들의 장래를 도왔다. ⓒ시사오늘(사진=박주선 의원실)
어머니의 희생이 있었기에 사법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고 성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박 의원의 어머니는 헌혈을 해 아들의 등록금을 마련할 정도로 살신성인의 모습으로 아들의 장래를 도왔다. ⓒ시사오늘(사진=박주선 의원실)

살신성인

어찌 보면 내 인생 전부의 버팀목은 어머니의 살신성인, 희생 덕분이었다. 우리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어머니는 안 해본 장사가 없었다. 농산물을 광주로까지 가서 팔아도 보고, 구멍가게도 열어봤다. 심지어 서울까지 가서 남의 집 파출부도 했다.
하지만 갖은 고생에도 어머니는 내 중학교 등록금 1100원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결국 어머니는 자기의 피를 뽑아 팔아서, 등록금을 마련했다.
이 사실을 나는 한참 후에서야 알게 됐다. 1974년 사법시험을 수석 합격했을 때였다. 많은 기자들이 단칸방으로 몰려왔는데, 그때 어머니가 처음으로 당시의 일화를 털어놓은 거다.
주위 사람들도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입을 모았다. ‘박주선이 아무리 호남 100년의 인재라 해도 어머니의 갸륵한 보살핌이 없었다면 하늘도 출세 길을 열어주지 못했을 것’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후회하지 않는다’

그때 순간 상념에 젖어있던 내 귀에 기자의 질문이 꽂혀왔다.

“우여곡절과 파란만장 끝에 정치를 시작해 여기까지 왔습니다. 후회는 없으십니까.”
나는 그 말에 정중하게 대답했다.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나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정치에 입문할 때 국민의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겠다 하는 게 내 슬로건이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오늘을 사는 국민이 내일 더 편하고, 희망이 있고, 꿈을 꾸게 하는 정치를 하고 싶었습니다.
또한 나는 멈출 수가 없습니다. 나같이 억울한 사람이 다시는 이 땅에 있어서는 안 되겠다, ‘신문고 나라’를 만들고 싶기 때문입니다. 억울한 사람은 언제든지 최고 권력 앞에서 진실 규명을 요구할 수 있는 사회. 반드시 공정하고 엄중한 수사를 거쳐 사필귀정의 원한을 해결해주는 정부. 진실로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는 책임 있는 정치에 도를 다할 계획입니다.”

지역구를 위해서도 나는 초심을 잃지 않고 있다.  그동안 음과 양으로 많은 역할을 해왔다. 장학금을 유치해서 보내드리기도 하고, 사회복지시설에 후원금도 전달했다. 자동차도 보내드리고, 노인복지와 관련해서는 여러 후원도 알선하는 등 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어머니, 나의 어머니

끝으로 나는 내 사명을 다짐하며 어머니의 정신을 다시금 떠올렸다. 이 자리를 빌려 나의 어머니께 꼭 들려드리고 싶다.

‘어머니, 나의 어머니, 위대한 당신의 살신성인을 뛰어넘는 희생이 아니었다면 내가 어떻게 살았겠습니까. 어머니. 감사합니다. 어머니, 어머니의 그 높고 깊으신 뜻을 잊지 않겠습니다. 꼭 받들어 제 생명 다하는 순간까지 선량한 이들의 생명을 지키겠습니다. 권익을 보장하며 재산을 보호하는 그 막중한 어머니의 정신을 끝까지 완수하겠습니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꿈은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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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와이 2019-04-30 20:30:39
한 정치인의 삶에 대한 인터뷰 잘 읽었습니다. 기자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