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신문 보기] ‘야당의 용광로’ 신민당…국민의힘-국민의당, 합당할까?
[옛날신문 보기] ‘야당의 용광로’ 신민당…국민의힘-국민의당, 합당할까?
  • 조서영 기자
  • 승인 2021.06.30 17: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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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그날, 인물·신문의 평가는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조서영 기자)

ⓒ시사오늘 김유종
이번 열다섯 번째 ‘옛날신문 보기’는 1985년 ‘신민당-민한당 합당’이다.ⓒ시사오늘 김유종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마지막 과제만을 앞두고 있다. 이 대표에게 주어진 과제는 크게 세 가지, 복당·입당·합당이었다. 첫째, ‘무소속 홍준표 의원의 복당’은 24일 최고위원회의 만장일치로 의결됐다. 둘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입당’은 29일 출마 선언과 함께 “국민의힘과 정치 철학 같다”는 답변으로 가시화됐다. 셋째, ‘국민의당과의 합당’은 지난 22일 첫 실무협상단 회의를 시작으로 아직 진행형이다.

마지막 과제인 국민의힘-국민의당 합당을 끝으로, 야권은 대통합할 수 있을까. 이 대표 역시 취임 후 첫 의원총회에서 “우리 당 밖에 있는 훌륭한 주자들, 당 안에 있는 아직 결심 못한 대선 주자들 등 풍성한 대선 주자 군과 문재인 정부에 맞설 빅 텐트를 치는 데 제 소명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빅 텐트를 통해 야권 대통합을 꾀하는 이 대표에게, 신한민주당(이하 신민당)은 모델로 삼아야 할 성공 사례다. 그가 태어나던 1985년, 신민당은 창당한 지 불과 25일 만에 총선 돌풍을 일으키고, 관제 야당인 민주한국당(이하 민한당)과의 합당을 이뤄냈다. 신민당의 이러한 성공은 ‘야당의 용광로’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시사오늘>은 과거의 인물, 그리고 과거의 사건에 대한 당대 신문들의 평가를 재조명하며, 보수와 진보 언론 양극단의 평가를 비교해왔다. 여기서 ‘어떤 평가가 옳은가’에 대한 가치 판단은 전면 배제한다. 판단은 ‘사상의 자유’를 만끽하면서도, 동시에 ‘과잉 이념’의 시대에 지쳤을 독자들에게 맡길 예정이다. 이번 열다섯 번째 ‘옛날신문 보기’는 1985년 ‘신민당-민한당 합당’이다.

 

신민당 돌풍 요인…야권 대연합


역사를 바꾼 1985년 2월 12일. 투표함이 열리자 민주정의당(이하 민정당)은 경악했고, 관제 야당이던 민한당은 망연자실했다. 서울 등 대도시에서 창당 25일밖에 안 된 신민당이 예상을 뒤엎고 1위 당선자를 다수 내는 기염을 토했기 때문이다. 당시는 한 지역구에서 두 명의 당선자를 내는 중선거구제였다.

12대 총선 결과, △민정당: 87석(전국구 포함 148석) △신민당: 50석(67석) △민한당: 26석(35석) △국민당: 15석(20석)을 얻었다. 이 가운데 민한당은 부총재였던 신상우와 선거대책본부장이었던 조윤형 등 지도부가 원내 진입에 실패해 초상집 분위기였다. 아울러 현역 의원 44명도 낙선했다.

신민당은 불과 25일 만에 어떻게 돌풍을 일으킬 수 있었을까. 복잡한 갈래와 계보 관계로 얽힌 야권을 하나의 용광로에서 아울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은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출신 상도동계와 동교동계를 주축으로, 이철승·신도환·김재광계 등 비(非)민추협 소수 계파까지 포용했다. 뿐만 아니라 이민우를 종로·중구에 내세우고 정책 지구로 선택한 것은 선거 열기를 한층 높였다.

김영삼(YS)은 이를 ‘선거혁명’이라 칭하며, 단식 투쟁을 비롯한 민주산악회와 민추협 조직, 이민우의 종로 출마 구상 등을 승리 요인으로 들었다. 그는 회고록을 통해 “야권이 정치적 동면에서 깨어난 것은 나의 단식이 주요한 계기가 됐다”며 “또 내가 심혈을 기울인 민주산악회와 민추협은 신민당의 산파 노릇을 했다(<민주화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305쪽)”고 설명했다.

김대중(DJ)은 본인의 선거 직전 귀국을 승리의 요인으로 봤다. 그는 자서전을 통해 “결국 목숨을 건 나의 귀국은 국민들의 민주 의식과 민주 세력의 야성을 일깨웠다”며 “누구는 ‘총선 전 귀국은 야구로 치면 승부를 뒤집는 9회 말 역전 만루 홈런이었다’고 말했다(자서전 1권, 493쪽)”고 회고했다.

ⓒ네이버뉴스 라이브러리 갈무리
좌측부터 차례로 <동아일보>와 <경향신문>의 1985년 2월 13일 3면이다.ⓒ네이버뉴스 라이브러리 갈무리

언론은 국민들의 선택을 어떻게 분석했을까. <동아일보>와 <경향신문>은 이 같은 결과를 민한당의 야당성에 대한 심판인 동시에 여당인 민정당에 대한 불만이라 풀이했다.

[기획] 12대 정국의 풍향① 신민 회오리의 새 판도

12대 총선을 통한 신민당의 돌풍적 강세는 상대적으로 집권 민정당의 대도시에서의 부진과 지금까지 제1야당이었던 민한당의 참담한 퇴조를 불러일으켰다. (중략) 민한당의 참패가 정치적 무력과 무능에 대한 질책이었다면 민정당도 원인(遠因)의 책임을 면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결국 창당과정에서부터 피동성 잡음을 뿌려왔던 민한당에 대한 불신의 심판이 한꺼번에 내려진 셈이다. 국민은 자생의 야당을 선택한 것으로 풀이된다.

민한당에 대한 일격은 결과적으로 민정당 주도의 정당 질서에 대한 일격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난 4년간 정당의 뿌리가 아직 착근되지 못했음도 아울러 드러낸 셈이다.

- <동아일보>, 1985.02.13. 3면

정계재편 불가피

당초의 예상을 뛰어넘어 신민당이 이처럼 압승을 거둔 것은 유세장에서 불러일으킨 ‘신당바람’과 열기를 득표로 연결시킨 전략이 주효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뿐만 아니라 정치의 활성화와 야당다운 야당으로 원내에서 강력한 경제 세력을 기대하는 유권자 성향이 투표로 나타난 결과로 여겨진다.

민한당은 참패의 원인을 총선이 3차 해금 시기와 엇물려 실시돼 해금자에 대한 동정표가 몰린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근본적인 원인은 11대 국회에서 야당다운 야당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데 대한 국민의 실망이 투표에 반영된데다 총선 직전에 소속 의원들의 집단 탈당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득표 활동에 제약을 받았기 때문인 것으로 파악된다.

게다가 재야인사의 입김으로 신민당과의 정통성 및 선명성 경쟁에서 뒤진 것이 결정적인 타격을 입은 것으로 풀이된다.

- <경향신문>, 1985.02.13. 3면

이렇듯 23일간의 YS 단식 투쟁을 시작으로 깨어난 야권은, 민주산악회와 민추협을 통해 세력을 확장했다. 그 결과가 12대 총선이었다. 신민당은 그간 민심을 대변하지 못했던 제1야당의 자리를 차지하며, 정국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선거後, 신민당-민한당 합당


제1야당으로서 수명을 다한 민한당과 새로운 제1야당인 신민당 간 합당은 필연이었다. 뿐만 아니라 상도동계가 주축이 된 신민당과, 동교동계와 구(舊)유진산계가 당 지도부였던 민한당은 한 뿌리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에 두 당은 선거 직후부터 야권 통합 논의가 불붙기 시작했다.

민한당 총재였던 유치송은 “통합 야당 및 야당 단일화 노력에 최선을 다하겠다”며 총선 후 이틀 만에 야권 재편을 시사했다. 이에 신민당 총재였던 이민우 역시 “야권 통합은 민주 회복의 차원에서 조속히 이뤄져야 한다”고 화답했다.

그러나 야권 통합에 대한 인식을 공유함에도 불구하고, 합당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합당 방법과 형태를 둘러싸고 수많은 이해 관계자들이 얽혀있었다. 두 정당의 신경전은 ‘시기’에서 비롯됐다. ‘무조건 통합’을 부르짖는 신민당과 ‘체제 정비 후 통합’을 외치는 민한당 사이에 입장 차가 있었다.

이 같은 신경전은 2개월 간 계속됐다. 총선 참패의 책임을 지고 진산계의 유치송이 사퇴하자, 그해 3월 29일 동교동계의 맏형 격인 조윤형을 선출해 체제 정비에 나섰다. 이에 YS는 “새 지도부를 선출하지 말고 수권통합위원회만 구성하라”고 요구하며 ‘조기 흡수통합’을 강조했다. 그러나 전당대회를 통해 새롭게 총재를 맡은 조윤형은 ‘당 대 당 통합’을 내세웠다.

이미 민한당 내부에는 자책의 목소리가 높아져있었다. 4월 3일 12대 총선 민한당 소속 당선자 29명이 집단 탈당 후 신민당에 합류했다. 조윤형 체제가 출범한지 5일 만에 당이 와해되며, 흡수 통합 형식의 합당이 이뤄진 셈이다. 결국 조윤형도 신민당과의 무조건 합당을 선언하며 두 정당 간의 통합이 이뤄졌다. 이에 민정당 대 신민당의 양당구조로 정계가 개편됐다.

ⓒ네이버뉴스 라이브러리 갈무리
좌측부터 차례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1985년 4월 3~4일 3면이다.ⓒ네이버뉴스 라이브러리 갈무리

언론은 정국의 변화를 어떻게 봤을까. <동아일보>는 ‘예견된 통합’이라면서도, 두 정당이 과거 신민당과 같은 뿌리였다는 점이 통합을 앞당겼다고 분석했다. <조선일보>는 확대된 야권의 100석 내외의 의석이 정국의 변수였던 ‘개헌’을 초래할 수 있다고 풀이했다. 뿐만 아니라 여야가 장외에서 제도권 장내로 집결됐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봤다.

민한 와해로 사실상 양당체제 통합야권과 정국의 앞날

신민 민한의 통합은 12대 총선에서 민한당이 참패, 35석의 제3당으로 영락한데다 양 김씨가 신민당 중심의 야권통합을 강력히 주장, 통합 시기만 미정인 상태여서 충분히 예견되어 왔던 것이다.

(중략) 조 총재가 원외 당수로 선출되는데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던 낙선자들만 중시, 국회의원 당선자들과의 대화를 소홀히 한 점도 당선자들의 이탈을 촉진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당선자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이와 함께 지난 4년간 민한당에 몸 담아온 인사 중 전국구를 포함, 14명만이 12대 총선에서 당선됐고 나머지 당선자 21명은 구 신민당 출신 인사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민한당에 대한 애착심이나 동질감 형성이 이뤄지지 않은 것도 조 총재 체제의 단명을 부채질한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특히 이들은 민한당을 하루라도 먼저 이탈, 신민당과 민한당이 통합하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공적을 남겨 새로 몸담을 신민당으로부터 논공행상을 받겠다는 경쟁심리가 작용, 이탈 움직임이 가속화된 측면도 없지 않다.

- <동아일보>, 1985.04.03. 3면

신민만 1/3 넘는 양당국회

신민당이 통합과 흡수 과정을 통해 확보하리라고 예상되는 1백석 내외의 의석은 국회소집요구 정족수와 해임안 발의정족수를 넘는 것이고 개헌저지선을 충족시키는 것이다. 말하자면 (중략) 다가오는 정국의 잠복 변수일 수도 있는 개헌에 대한 최소한의 발언권을 갖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중략) 실세화된 여야 관계가 위험스런 함정과 위기만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느 때보다 장외 정치의 요인을 줄이고, 그만큼 장내 정치의 영역과 비중을 높여준 것도 사실이다. 통합된 야당은 지난 선거에서 제도권과 비제도권이 내건 목소리를 함께 대변하게 되고, 강경과 온건을 융통성있게 접목할 수 있는 소지를 갖춘 셈이기도 하다.

따라서 여야의 정치력이 장내에 집결됨으로써 그만큼 여야가 지혜로운 운영의 묘를 통해 11대 국회가 갖지 못한 정치 발전의 계기를 제공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안고 있는 것이다.

- <조선일보>, 1985.04.04. 3면

12대 총선 1주년인 1986년 2월, 신민당은 ‘1천만 개헌서명운동’을 전개하며 본격적으로 개헌 투쟁에 나섰다. 그 이듬해인 1987년, ‘선 민주화 7개항 후 내각제협상 용의’의 이민우 구상 파문으로 신민당은 내분에 휩쓸렸다. 결국 신민당 소속 의원 90명 중 상도동계 40명, 동교동계 34명 등 총 74명이 탈당해 통일민주당을 창당했다. 이후 신민당에서 통일민주당으로 이어간 선명 야당의 기치는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뤄냈다.

ⓒ뉴시스(공동취재사진)
야권 대통합의 마지막 과제인 합당을 앞둔 두 정당을 향한 신민당의 교훈은 ‘타이밍’이다. ⓒ뉴시스(공동취재사진)

물론 1985년과 2021년의 야권 통합에는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빅 텐트를 통해 차기 대선의 정권 교체를 목적으로 한다는 점과, 합당에는 여전히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혀있다는 사실만은 달라지지 않았다. 국민의힘과 국민의당 역시 통합의 필요성에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당명 변경 △정강정책 수정 △당협위원장, 사무처 당직자 등에 대한 논란이 발목을 잡고 있다.

야권 대통합의 마지막 과제인 합당을 앞둔 두 정당을 향한 신민당의 교훈은 ‘타이밍’이다. 12대 총선에서 드러난 민심의 분위기를 끌고 간 신민당은 직선제 개헌 및 군정 종식을 이뤄냈다. 국민의힘과 국민의당도 국민들의 야권 통합 열망이 식기 전에 합당을 이뤄낼 수 있을까.

“신민당을 통해 지금의 정치판을 깨야 된다는 생각을 했고, 그대로 적중했다. 야권통합 논의가 이뤄지고 있었는데, 지지부진하면 지금 이 분위기(군정종식을 향한 국민의 염원)가 깨진다고 생각해 조건 없는 양당 간의 무조건 합당을 요구했다. 시간을 끌 문제가 아니었다. 결국 순식간에 합당이 됨에 따라 천만인 직선제 개헌 서명운동에 돌입하며 87년 체제를 만들 수 있었다.” - 2009년 YS의 <시사오늘>과의 인터뷰 中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행복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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