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신문 보기] 대선 데자뷔 ‘셋’ …“낯설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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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신문 보기] 대선 데자뷔 ‘셋’ …“낯설지 않아”
  • 조서영 기자
  • 승인 2022.02.09 17: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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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1997년 그날, 인물·신문의 평가는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조서영 기자)

이번 스물세 번째 ‘옛날신문 보기’는 ‘역대 대선 데자뷔’다.ⓒ시사오늘 김유종
이번 스물세 번째 ‘옛날신문 보기’는 ‘역대 대선 데자뷔’다.ⓒ시사오늘 김유종

3월 9일 제20대 대통령 선거가 약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대선을 앞두고 ‘이런 대선은 처음’이라는 평이다. 2강 1중 구도에 단일화 여부도, 선거의 승패도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후보자 본인과 배우자 등에 대한 흑색선전에 비호감 대선이라는 비판도 잇따랐다.

그러나 역대 대선과의 공통된 흐름 역시 존재한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측근 그룹 ‘7인회’의 백의종군 선언과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 후보가 제안한 ‘중간평가’는 각각 1997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측근 그룹 7인회와 1987년 노태우 전 대통령의 중간평가와 닮아있다. 또한 5선 정치인인 박찬종 변호사의 윤석열-안철수 후보 단일화 요구는 1987년 김영삼-김대중 후보 단일화 요구와도 비슷하다.

<시사오늘>은 과거의 인물, 그리고 과거의 사건에 대한 당대 신문들의 평가를 재조명하며, 보수와 진보 언론 양극단의 평가를 비교해왔다. 여기서 ‘어떤 평가가 옳은가’에 대한 가치 판단은 전면 배제한다. 판단은 ‘사상의 자유’를 만끽하면서도, 동시에 ‘과잉 이념’의 시대에 지쳤을 독자들에게 맡길 예정이다. 이번 스물세 번째 ‘옛날신문 보기’는 ‘역대 대선 데자뷔’다.

 

측근의 ‘백의종군’


ⓒ연합뉴스
이재명 후보의 측근 그룹인 7인회의 백의종군은 1997년 DJ의 동교동계의 백의종군과 맞닿아 있다.ⓒ연합뉴스

지난달 24일 이재명 후보의 측근 그룹인 7인회가 백의종군을 선언했다. 7인회는 이규민 전 의원을 포함해 정성호·김영진·김병욱·임종성·문진석·김남국 의원이 포함돼있다. 이들은 기자회견을 열어 “이 후보의 최측근으로 분류돼 소위 7인회로 불리는 우리부터 기득권을 내려놓겠다”며 “이재명 정부에서 국민의 선택 없는 임명직은 일절 맡지 않겠다”고 말했다.

7인회의 기자회견 전날 같은 당 김종민 의원이 제기한 ‘586세대 용퇴론’ 역시 맥을 같이 한다. 이외에도 송영길 대표의 차기 총선 불출마 선언 및 국회의원 재보궐선거 무공천 등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인적 쇄신론은 민주당의 위기에 대한 변화 의지를 의미한다.

강훈식 민주당 선대위 전략기획본부장은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586 용퇴론 등의 단어가 우리 당에 나온다는 것은 민주당이 혁신하고 새롭게 바뀌려고 하는 몸부림의 과정”이라 설명했다.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갈무리
1997년 9월 12일 자 <경향신문> 5면에는 동교동계의 백의종군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네이버뉴스 라이브러리 갈무리

시간을 돌려 1997년 15대 대선 때의 일이다. 그해 9월 김대중(DJ) 당시 후보의 측근 그룹이었던 동교동계 비서 출신 7인이 용퇴를 선언했다. 권노갑·한화갑·김옥두·남궁진·최재승·설훈·윤철상 의원 등 7인은 당시 ‘동교동 가신 그룹’으로 불렸다. 이들은 결의문을 통해 “김대중 총재가 집권할 경우 우리들은 청와대와 정부의 정무직을 포함한 어떠한 임명직 자리에도 결코 나서지 않겠다”고 말했다.

대선이 한창이던 때는 김영삼(YS) 당시 대통령의 측근 그룹이던 상도동계가 각종 의혹에 휩싸였을 때였다. 이에 자연스럽게 YS의 라이벌이었던 동교동계에 대한 걱정으로 이어졌고, 이들은 임명직이 아닌 국민의 선택을 받는 선출직만 하겠다고 선을 그었다.

동교동가신들 집단 “백의종군”

이들은 ‘김대중 총재의 비서 출신 국회의원들이 드리는 말씀’이라는 결의문을 통해 철저한 2선 퇴진을 거듭 다짐했다. 이들은 또 “우리들이 결의하지 않더라도 김 총재는 전 정권의 잘못된 폐습을 답습하지 않을 것이나 국민들의 가신 정치에 대한 불안감을 덜어주기 위해 분명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밝혔다.

(중략) 이들의 선언으로 김 총재는 연말 대선을 앞두고 ‘가신정치청산’에 대한 걸림돌을 제거했지만 한보사태 이후 끊임없이 제기돼온 김 총재의 장남 김홍일 의원 처리 문제는 여전히 ‘뜨거운 감자’로 남게 됐다.

- <경향신문>, 1997.09.12. 5면.

이들은 대선 직후인 12월 22일에도 “가신들의 부정부패에 의해 통치력이 무너진 김영삼 정권의 전철을 밟을 수는 없다”며 다시금 다짐했다. DJ 또한 당선 후 “국민의 심판을 받는 선출직 진출은 막지 않겠지만, 임명직에는 측근들을 한 사람도 등용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측근의 백의종군이 DJ의 대선 승리로 직결됐는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이들의 용퇴는 변화와 쇄신에 대한 의지 및 대선 전 인선에 대한 우려를 종식시키는 데에는 유의미한 역할을 했다.

 

후보의 ‘중간평가’ 공약


ⓒ연합뉴스
안철수 후보는 ‘중간평가’ 공약은 1987년 노태우 전 대통령의 중간평가 공약과 맞닿아 있다.ⓒ연합뉴스

지난달 20일 안철수 후보는 ‘중간평가’를 공약했다. 안 후보는 한국행정학회 주최로 열린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 “당선된 후 임기 중반에 여야가 합의하는 조사 방법으로, 국민 신뢰 50% 이상 받지 못하면 깨끗하게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이는 지난해 11월 출마 선언문에서 내걸었던 임기 중반 재평가 고약을 다시금 상기시킨 것이다.

그가 임기 중 재평가 혹은 중간평가를 내건 이유는 초심에 있다. 임기 중반이 지나면 공약과 멀어지거나, 국정 운영에 대한 부정 평가가 올라가는 정치를 막기 위함이기도 하다. 그는 “이렇게 스스로 족쇄를 차고 대통령에 당선되면 국민과의 약속을 지킬 수밖에 없고, 취임사 약속마저 헌신짝처럼 내던져 버리는 정치는 완전히 사라질 수 있을 것”이라 설명했다.

ⓒ네이버뉴스 라이브러리 갈무리
1989년 3월 21일 자 <한겨레> 1면에는 중간평가가 사실상 취소됐다는 기사가 실렸다.ⓒ네이버뉴스 라이브러리 갈무리

시간을 돌려 1987년 13대 대선 때의 일이다. 대선을 4일 앞두고 노태우 당시 후보는 여의도 유세 현장에서 중간평가 공약을 발표했다. 그는 1988년 올림픽 이후 6·29 선언과 그간의 모든 선거 공약의 이행 여부에 대해 중간평가를 받겠다고 말했다.

안 후보의 중간평가 공약이 책임있는 정치에 대한 의지를 보여줬듯, 노태우 후보의 공약 역시 전두환 정권과 마찬가지로 군인 출신인 그를 미심쩍어했던 부동층의 표심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정작 공약은 이뤄지지 않았다. 중간평가는 유보(중평유보)되다 못해 영원히 정치권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이러한 배경에는 양김의 입장차가 있었다. 1989년 중간평가 의제가 떠올랐을 때, YS는 ‘합의 불가, 조속 실행’, DJ는 ‘합의 가능, 일단 유보’ 입장이었다. 1987년 야권 통합 불발에서 시작된 갈등은 2년 후 중간평가 시행 여부로 이어졌다. 결국 3김이 만나 3자회담을 통해 내린 합의는 ‘선(先) 5공 청산, 후(後) 중간평가’였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는 5공 청산을 별개의 문제로 보고 ‘선(先) 중간평가, 후(後) 5공 청산’을 내세웠다. 그러면서 DJ와 JP를 각각 만나 개별 회담을 진행했다. 회담 이후 DJ는 중간평가를 통해 노태우의 재신임을 결정하자는 입장을 전면 철회했다. DJ는 신임과 연계시키지 않는 단순 정책 평가로 실시해야 한다는 데 합의했다. 그러나 YS가 빠진 회담으로, YS는 전국을 순회하며 ‘1김(金) 3노(盧)’라 반박했다. 그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중간평가는 유보돼 노태우 정부 기간 동안 이뤄지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중간평가 사실상 취소

노태우 대통령은 20일 현 시점에서 중간평가를 실시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이날 ‘중간평가와 관련하여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을 통해 “이 시기에 중간평가를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하는 것은 나라와 국민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돼 중간평가는 실시하지 않겠다”면서 “앞으로 중간평가 문제는 그 시기와 방법 등을 신중히 재검토하여 반드시 나라의 장래에 도움이 되는 방향에서 결정할 것”이라 밝혔다.

(중략) 노 대통령은 “국민투표가 공고도 되기 전에 정국은 대결과 격돌로 치닫고 있다”면서 “야당은 지금 이 시기에 중간평가를 실시하는 것을 반대하고 미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어떤 당은 ‘실시하려면 정책 평가로 해야 한다’고 하고 어떤 당은 ‘신임을 건 국민투표라야 한다’고 말하는 등 정국을 안정시키고 민주화를 실천하려는 중간평가 본래의 의미를 무색케 하고 있다”고 말했다.

- <한겨레>, 1989.03.21. 1면.

 

야권 단일화 요구


ⓒ시사오늘
박찬종 변호사의 야권 단일화 요구는 1987년 YS-DJ 단일화 요구와 맞닿아 있다.ⓒ시사오늘

5선의 원로 정치인인 박찬종 변호사는 야당대선후보 단일화추진위원장으로 앞장서고 있다. 그는 지난해 12월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윤석열-안철수 간 야권 단일화를 위해 필요하다면 민심의 방망이라도 들고 쫓아가 담판을 짓게 하겠다”며, 양자 대결을 주장했다.

ⓒ네이버뉴스 라이브러리 갈무리
1987년 11월 6일 자 <경향신문> 2면에는 박찬종 변호사의 단일화 요구에 대해 담았다.ⓒ네이버뉴스 라이브러리 갈무리

그런 그의 단일화 요구는 낯설지 않다. 시간을 돌려 1987년 13대 대선 때의 일이다. 박 변호사는 당시엔 ‘군정종식을 위한 단일화추진회의’ 소속으로 YS와 DJ의 단일화를 위해 연대 투쟁했다. 그는 두 사람의 단일화를 요구하며 삭발단식농성을 하기도 했다.

단일화 촉구 5의원 탈당…1명은 삭발

두 김씨의 단일화를 촉구한 소장서명파 의원 중 그동안 명확한 거취 표명을 유보했던 박찬종·조순형·홍사덕·이철 의원 등 민주당 내 서명파 4의원과 애초부터 서명운동에 가담치 않은채 평민당에 입당했던 허경구 의원 등 5명은 6일 민주당 또는 평민당을 탈당하는 공동성명서를 발표한 뒤 박찬종 의원만이 대표로 삭발.

이들 의원들은 성명에서 “단일화만이 목숨을 바친 젊은이와 감옥을 마다하지 않은 수천수만의 사람들, 그리고 직선제 개헌 투쟁을 지원했던 절대 다수 국민에게 보답하는 길”이라고 주장.

- <경향신문> 1987.11.06. 2면.

그러나 그의 간절했던 촉구에도 불구하고 1987년 YS와 DJ는 단일화에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13대 대선의 승리는 노태우 후보에게 돌아갔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행복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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