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韓 갈등설…현재권력 정면돌파한 YS [김자영의 정치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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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韓 갈등설…현재권력 정면돌파한 YS [김자영의 정치여행]
  • 김자영 기자
  • 승인 2024.01.26 16: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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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국민의힘 대표 사퇴설만 3번째
윤·한갈등에 ‘수직적 당정관계’ ‘대통령 당무개입’ 논란
노태우-김영삼·김영삼-이회창, 일인자·이인자 갈등 연상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김자영 기자]

ⓒ 시사오늘 (그래픽 = 정세연 기자)
지난 주말 한동훈 위원장과 이관섭 대통령실 비서실장 등이 가진 비공개 회동에서 ‘한동훈 위원장 사퇴 요구’가 나왔다는 소식이 언론에 전해지며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 시사오늘 (그래픽 = 정세연 기자)

지난 주말 대통령실과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의 갈등 소식이 전해지며 한바탕 소동이 일었습니다. 

지난 21일 한동훈 위원장과 이관섭 대통령실 비서실장 등이 가진 비공개 회동에서 ‘한동훈 위원장 사퇴 요구’가 나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한 위원장은 이를 부인하지 않고 “국민 보고 나선 길, 할 일 하겠습니다”라는 입장을 기자단에 공지했습니다. 

이어 한 위원장은 지난 22일 국회에서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내가 사퇴 요구를 거절했기 때문에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말하기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한 위원장이 대통령실로부터 사퇴 요구를 받았음을 확인해 주는 꼴이 됐습니다. “내 임기는 총선 이후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안다”며 위원장직 수행 의지도 확실히 했습니다. 총선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만큼 윤 대통령과 한 위원장은 23일 회동을 하고 갈등을 일정 부분 봉합한 모양새를 취했지만, 이 갈등의 씨앗이 어떻게 번질지는 알 수 없습니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국민의힘은 이준석·김기현 지도부를 거치며 ‘수직적 당정 관계’ 문제가 여러 차례 논란이 된 바 있습니다.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국민의힘 패배 이후 김기현 대표 체제로 총선 치를 수 없다는 여권 내 우려가 이어졌습니다. 그 끝에 한동훈 비대위가 시작됐습니다. 

한 위원장은 보수층의 높은 지지를 받는 차기 대권 주자인 만큼 선거 승리를 견인해 줄 적임자로 여겨졌습니다. 이에 더해 한 위원장이 수직적 당정 관계를 깨고 대통령에게 할 말은 할 것이란 기대도 섞였을 겁니다. 그런데 한동훈 비대위가 발족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상황에서 대통령실과 정면충돌하는 상황이 벌어진 겁니다. 

이에 따라 향후 권력 지형에 변화가 생길 것으로 보입니다. 갈등의 원인으로 분석되는 ‘김건희 여사 명품백 수수 의혹’ ‘김경율 비대위원 사천 논란’ 등에 대한 두 사람의 입장차가 좁혀질지가 관건입니다. 

전예현 우석대 대학원 객원교수는 26일 <시사오늘>과 통화에서 “과거 미래-현재 권력 다툼은 단순 계파 문제가 아니라 개헌·세금 등 국정 운영방식에 관한 큰 주제로 대립하고 경쟁하는 것이었는데, 이번 윤-한 갈등은 김건희 여사 특검법·가방 수수 의혹 등이 원인이었다. 과거 충돌 양상과 비교해 봐도 실망스러운 수준”이라며 “양쪽 리더십 한계를 드러낸 계기였다”고 말했습니다. 

이인자는 일인자와 사사건건 부딪치며 권력의 동의 따위 상관없는 양 굴어도 안 되지만, 무조건 복종만 해서도 미래 권력으로 나아가기 어렵습니다. 과거 김영삼(YS)은 노태우 정부와 민자당 내 민정계를 향해 권력 의지를 확실히 하면서도 그 안에서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동분서주했습니다. 신한국당 대선 후보로 꼽힌 이회창은 국민적 지지가 높았음에도 김영삼과의 갈등을 빚고, 경쟁자 이인제의 독자 출마를 막지 못해 패했습니다. 

 

YS, ‘내각제 합의 각서 공개 파동’으로 노태우와 갈등
안기부 ‘김영삼 동향 보고서’도…권력 다툼 끝 대권 쟁취


ⓒ 뉴시스
김영삼 전 대통령은 3당 합당 후 치열한 내부 권력 투쟁 끝에 대권을 거머쥐었다. 그 과정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과 갈등을 빚었다. ⓒ 뉴시스

1990년 1월 22일, 노태우의 민주정의당과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3당 합당을 합니다. 걸어온 길이 다른, 이질적 세력이 뭉친 만큼 내부 계파 간 권력 투쟁이 치열했습니다. 

김영삼은 합당 후 얼마 안 된 시기에 ‘김영삼 최고위원의 최근 특이 동향’이라는 제목의 안기부 비밀문서를 입수했습니다. 그 안에는 ‘김영삼 자금지원 견제 대책’ ‘부산 지역의 반(反)김영삼 여론 조장책’ ‘민정계의 김영삼 접근 여부 감시책’ ‘김영삼 이미지 격하 방법’ 등이 담겨있었습니다. 그를 견제하는 세력이 꾸준히 있었던 겁니다. 노태우 정부 실세 박철언이 YS를 주저앉히기 위해 끊임없이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1990년 10월 내각제 합의각서 유출 사건에서 YS·민주계와 노태우·민정계의 갈등이 폭발합니다. YS는 “문서 공개는 처음부터 나를 궁지에 몰아넣어 고사시키려는 정치공작”이라고 비판하며 당무를 거부하고 마산에 내려가는 선택을 내립니다. 그로서는 분당까지 각오한 ‘최후통첩’이었습니다. YS는 이때 노태우로부터 ‘내각제 포기’를 받아내고 당내 입지를 단단히 굳힙니다. 김윤환 등 민정계 주류의 지지를 받아내고 대선 후보로 선출돼, 대통령 취임까지 이어갑니다. 

그 과정에서 노태우는 김영삼 지지 의사를 확실히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노태우 정부는 군사 쿠데타로 시작한 5공화국의 후예인 점, 정통성 문제 등으로 YS를 필요로 했습니다. 노태우는 임기 말인 1992년 9월 거국적 중립 내각 구성을 약속하며 민자당을 탈당해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키지만, YS 대세론을 꺾지는 못했습니다. 

 

‘대쪽’ 이회창, ‘3김 청산’ 주장하며 YS 치받아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는 이회창 전 국무총리와 김대중 전 대통령, 이인제 전 의원이 맞붙었다.ⓒ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이버선거역사관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는 이회창 전 한나라당 대표와 김대중 전 대통령, 이인제 전 의원이 맞붙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이버선거역사관

김영삼과 이회창 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YS는 성역 없는 감사로 인기를 얻은 이회창을 감사원장에서 국무총리로 전격 발탁합니다. 당시 국무총리는 이름만 있고 실제 영향력은 미미한, 얼굴마담에 가까운 직책이었습니다. 하지만 이회창이 오며 변화가 생깁니다. ‘헌법에 명시된 대로 총리다운 총리가 되겠다’며 대통령을 치받은 겁니다. YS와 갈등을 거듭하던 이회창은 취임 4개월 만에 국무총리를 그만두지만, 이는 그가 금세 대권 주자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됩니다. 

YS는 15대 총선을 앞두고 이회창에게 손을 내밉니다. 과거 갈등을 빚었지만, 선거 승리를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회창은 전국구 1번을 받아 국회에 입성하고 신한국당(한나라당 전신) 대선 후보로 선출됩니다. 그는 15대 대선 국면에서 다시 YS와 충돌합니다. 문민정부 출범 이후 뒤로 물러났던 민정계와 손을 잡고 ‘김영삼 탈당 요구’에 인형 화형식까지 여는 등 과격한 면모를 보였습니다. 

이회창은 당시 YS의 DJ 비자금 수사 중단 지시를 “나에게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가한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는 후에 회고록에 “대통령이 버린 집권당 후보를 국민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내가 만일 김 대통령 처사에 머리를 숙이고 복종한다면 나는 후보 자리를 지키기 위해 굴종하는 비겁자가 될 뿐”이라며 ‘3김 청산’을 더 거세게 주장합니다. 이 와중에 신한국당 대선 경선에서 그에게 패한 이인제가 탈당해 독자 출마를 결정합니다. 그는 이후 한나라당에서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지만, 대권은 쥐지 못했습니다.

여야간 대립이 날로 심화되는 상황입니다. 정치권에서 왜 저런 선택을 했을까 의문이 든 적 한 번쯤 있을겁니다. 이들의 선택은 과거 정치 경험으로부터 얻어진 학습효과 아닐까요. ‘김자영의 정치여행’은 현 정치 상황을 75년간의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를 비춰 해석해 봤습니다. 다음주 금요일에 찾아 뵙겠습니다. <편집자주>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생각대신 행동으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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