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더살아서 국회의원 되도록 밀어줄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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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더살아서 국회의원 되도록 밀어줄께"
  • 노병구 자유기고가
  • 승인 2009.06.16 12: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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⑪유진산 총재의 서거

500만 원짜리 떡
 
#1. 선거운동 기간 동안 가족과 일가친척 친지들에게 많은 신세를 졌지만, 나는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처음으로 비참한 패배의 쓰라림을 맛보게 되었다. 시작할 때는 제법 호기롭게 출발했지만 패배의 쓰라림은 상상을 초월하는 아픔이었다.

선거결과가 나오던 날, 경옥과 나는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당원들 앞에서는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수고한 동지들을 위로하자고 다짐을 하고 나갔는데, 혹시나 하고 기대했던 당원동지들이 패배의 쓰라림을 못 참고 우리 두 사람을 붙잡고 울음을 터뜨렸다. 간신히 그들을 돌려보내고 집에 돌아와서 우리 둘은 서로를 위로하며 재기를 다짐했다.

서울지역 공천을 달라고 수시로 찾아가 떼를 쓰다시피 해 어렵게 공천을 주었는데, 비록 예견은 했지만 패배를 하고 보니 유진산 총재님을 뵐 면목이 없었다. 총재님이 금산에서 당선되어 지역구 수습을 마치고 상경하는 날을 기다려 나는 총재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다.

총재 댁은 당락 간에 인사를 드리러 온 선배동지들로 붐볐다. 내 차례가 되어 총재께서 쓰시는 방 미닫이를 열고 들어가는 순간, 총재님은 느닷없이 나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지르셨다.

“야, 이놈아! 어깨가 축 처져 가지고 그게 뭐야!”
‘아이쿠, 올 것이 왔구나’ 하고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나를 보고 총재님은 “앉아, 이놈아!” 하고 또 소리를 지르시고는 송구스럽게 앉은 나를 보시며 웃음 띤 온화한 낯으로 말씀하셨다.
“너 기대 이상으로 잘 싸웠어. 네가 이번 선거에 네 돈 한 500만원 썼는지 모르지만 그거 떡 사먹은 셈치는 거야. 그리고 처음부터 어려울 거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냐? 요다음 선거 때는 서울은 반드시 분구가 되게 돼 있어. 너 이번에 미리 기반을 닦으라고 공천을 준 거야. 요다음 선거는 서울도 복수공천이 아니라 단수공천을 하게 돼. 젊은 놈이 선거에 한 번 떨어졌다고 어깨가 축 처져 가지고 기가 빠져서 다니면 되겠냐? 기운을 내라. 너는 요다음에 돼. 그리고 부인한테도 힘내라고 그래.”

나는 총재님의 질책 아닌 질책을 듣고 나오면서 그동안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풀리고 평안한 마음으로 돌아와 있음을 느끼며 사모님 방으로 들어갔다. 사모님이 반갑게 맞으시며 말씀하셨다.

“수고했어요. 잘 싸웠어요. 그리고 총재님께서 개표하던 날 영등포 갑구 개표상황을 보시면서 노병구도 잘 싸운다, 노병구도 잘 싸운다 그러시면서 대단히 기뻐하시고 칭찬했어요.”
“사모님, 지금 제가 총재님한테 된통 야단맞고 나오는 길입니다. 죄송합니다.”
“더 열심히 잘하고 하시는 말씀이지. 노병구 씨에게 많은 기대를 가지고 계신걸.”
나는 총재님 내외의 격려를 듣고 나오면서 경옥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신, 총재님한테 야단맞았어요?”

“아니야. 저 양반이 ‘너 이번 선거에 네 돈 한 500만원 썼는지 모르지만 그거 떡 사먹은 셈치는 거야’ 하시면서 젊은 놈이 선거 한 번 떨어졌다고 어깨가 축 처져 가지고 그게 뭐냐고, 어깨를 펴고 힘을 내라고 말씀하셨어. 그리고 당신한테도 수고했다고 전하라고 하셨어요.”
그러자 경옥도 모처럼 명랑하게 웃었다.
“그 영감님 떡도 큰 것을 사 잡수시네.”
역시 진산 선생은 멋있고 폭넓은 지도자였다. 나는 그런 지도자를 모시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정치적 스승 유진산의 죽음
 
 


 
#2. 1974년 1월 10일, 내게 많은 가르침을 주셨고 어려운 공천까지 주시고 미래에 대한 커다란 희망과 용기를 주셨던 유진산 총재께서 중병으로 입원을 하셨다. 나는 참으로 걱정이 되었다. 경옥과 나는 총재님의 회복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얼마 후 경과가 좋다고 퇴원하셔서 상도동 댁으로 오셨을 때 인사를 드리러 갔다.

“건강이 회복되셔서 참으로 다행입니다. 더욱 건강하셔야 합니다.”
“고맙다. 내가 아직은 끄떡없다. 앞으로 20년은 더 살아서 너 국회의원 되도록 밀어줄 거야. 아무 걱정 말아라.”
하지만 총재님과의 만남은 그것이 끝이었다. 얼마 후 총재님이 갑자기 심한 통증으로 한양대학병원에 입원했다는 뉴스를 시내에 나갔다가 들었는데, 가족을 비롯한 몇 분만 면회가 허용되어 시시가각 보도되는 뉴스로만 건강상태를 알 수 있었다.

1974년 4월 28일, 그토록 회복을 빌었던 총재님은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하고 영원한 길을 떠나셨다. 나와 경옥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마음이 되어 우리가 오늘까지 쌓아온 모든 것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고 한없이 울며 총재님의 명복을 빌었다.

아들처럼 며느리처럼 아껴주시고 사랑해주신 자애로운 아버지 같은 그 이름 유진산 총재님!경옥과 나에게 결코 잊을 수도 지울 수도 없는 스승이요 아버지이신 유진산 총재님!
변명하지 말고, 자랑하지 말고, 불평하지 말라고 가르치시며, 자신의 정치를 오해하고 곡해하고 정치권과 언론계가 무책임하게 쏟아내는 모략선전을 국민이 여과없이 받아들여 ‘낮에는 야당 밤에는 여당’, ‘권모술수의 달인’, ‘돈에 모든 것을 파는 돈 먹는 사쿠라’ 등 별의별 별명을 만들어 퍼뜨려도 빙그레 웃으시며 나라와 국민을 사랑하고 언제나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며 확고한 정치철학을 묵묵히 실천하신 분. 자기 주머니를 털고도 모자라면 자기 집에서 일하는 식솔들의 주머니까지 털어가며 어려운 야당생활을 하시고, 삶에 지치고 어려운 동지들의 아프고 가려운 곳을 만져주시고 긁어주시던 참의리의 사나이 유진산!

유진산 총재는 자신이 후진들에게 가르쳤던 모든 것을 묵묵히 실천했으며, 아무도 원망하지 않고 자기 길을 당당하게 걷다가 생사일체로 현실세계와 일직선으로 연결된 내세로 들어갈 때 한 번 열렸다 닫히면 다시는 열리지 않는 문을 열고 들어가셨다.

별의별 소문을 듣고도 변명 한마디 없이 떠나간 유진산 총재에게는 오직 빚만 3천만 원이 남아 있어서 홀로 남으신 사모님의 생활이 걱정이라는 언론보도를 보게 됐고, 생전에 그를 잘못 본 국민들의 한숨소리를 들으면 정부에서 그 3천만 원을 갚아주었다.

자신의 모든 행위는 먼 훗날 역사가의 평가에 맡기고 자신이 생각하는 나라의 앞날에 대한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실천하다가 떠나간 유진산 총재를 언론이, 정치권이, 국민이 생전에 좀 더 일찍이 알았더라면 우리나라의 역사발전에 크게 기여했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지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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