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 컨트리클럽] 3당 합당 시발점 된 그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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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 컨트리클럽] 3당 합당 시발점 된 그 곳
  • 정진호 기자
  • 승인 2020.08.15 07: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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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안양 컨트리클럽서 JP와 회동…3당 합당 포함한 정계 개편 논의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진호 기자]

대한민국 최고의 골프코스 중 하나로 알려진 안양 컨트리클럽. ⓒ시사오늘
대한민국 최고의 골프코스 중 하나로 알려진 안양 컨트리클럽. ⓒ시사오늘

영동고속도로에서 군포IC로 빠져나와 시내를 10여분 달리다 보면, 마치 요새처럼 나무로 둘러싸인 군락지(群落地)를 발견할 수 있다. 겉에서 보기에는 평범한 공원처럼 보이는 이 곳은, 사실 골퍼(Golfer)들 사이에서 ‘꿈의 코스’로 불리는 안양 컨트리클럽이다.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전 세계 어디 내놔도 손색없는 골프장을 만들겠다’며 1968년 세운 이 골프장은 대한민국 ‘명문 골프코스’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회원 또는 회원 동반자가 아니면 라운드를 할 수 없는 폐쇄성, 2019년 ‘아시아 100대 골프코스 심사위원회’가 아시아 2위의 골프코스로 선정할 정도의 조경(造景) 등은 안양 컨트리클럽의 가치를 극대화했다.

그러나 안양 컨트리클럽을 더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이곳에 숨겨진 대한민국 정치사의 흔적이다. 1987년 제13대 대선에서 야권 단일화에 실패하며 군부정권 종식이라는 목표를 이루지 못한 YS(김영삼 전 대통령)는 대선 직후 통일민주당 총재직을 내려놓는 강수를 던졌다. 어떻게든 DJ(김대중 전 대통령)와 힘을 합쳐야 1988년 제13대 총선에서 승리할 수 있고, 군부정권을 끝낼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YS가 총재직에서 물러나자, DJ도 화답했다. YS 사퇴 사흘 뒤,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은 남산 외교구락부에서 야권 통합기구 합동회의를 갖고 총선 전 양당을 통합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소선구제를 둘러싼 이견으로 통합 논의가 무산 직전까지 가기도 했지만, YS가 당내 반발을 무릅쓰면서 소선거구제를 수용하면서 YS와 DJ의 결합은 성사 단계에 이른다.

하지만 협상이 막바지에 이른 상황에서, 예상치 못한 또 하나의 변수가 발생했다. 민주당과 평민당, 한겨레민주당이 통합 직인을 찍기로 한 3월 19일, 회의 장소인 서울시 마포구 서교호텔에 평민당 지지자들이 몰려들어 소란을 피운 것이다. 결론적으로 협상은 결렬됐고, 이날을 끝으로 야권 통합 역시 완전히 무산됐다.

19일 하오 서울 서교동 ㅅ호텔에서 열린 민주·평민·한겨레 3당 통합 회의는 전대협 소속 학생과 평민당 지지자들이 몰려들어 소란을 피우는 바람에 홍은동 ㅅ호텔로 장소를 옮기는 사태까지 빚었으나 결국 민주·평민 양당 간의 감정만을 악화시킨 채 다시 결렬.
이날 민주당의 최형우 전 부총재가 회담장에 도착하자 이미 1시간 전부터 농성을 벌이던 전대협 소속 학생 150여 명과 평민당 지지자 100여 명이 ‘무조건 통합’, ‘독재 타도’, ‘최형우 사쿠라’라는 등의 욕설을 퍼붓고 손찌검까지 하는 바람에 회담장은 아수라장으로 변모. (후략)
1988년 3월 21일 <경향신문> ‘통합협상대표에 손찌검’

김대중 씨의 3·17 평민당 총재직 사퇴 선언으로 재개된 민주·평민·한겨레 민주당의 야권 통합 협상은 다시 좌초되고 말았다.
통합 협상을 결렬로 이끈 직접적 원인은 외형상 19일 하오의 3차 협상 개시에 앞서 있었던 최형우 민주당 대표에 대한 폭력 사태이다.
민주당은 폭력을 휘두른 주체가 평민당원이라고 주장하면서 협상 계속의 조건으로 공식 사과를 요구했으나 평민당은 야권 통합을 바라는 대학생들의 우국충정대열에 잠입한 불순분자의 소행이라며 민주당 측의 협상 테이블 무조건 복귀를 촉구했다. (후략)
1988년 3월 21일자 <경향신문> ‘역시 결렬로 끝난 야권통합’

이처럼 YS가 DJ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상황에서, 1988년 제13대 총선이 치러졌다. 결과는 민주정의당 125석, 평화민주당 70석, 통일민주당 59석, 신민주공화당 35석, 한겨례민주당 1석, 무소속 9석. 민정당은 제1당이 됐지만 과반에 실패했고, 민주당은 평민당에 밀려 제3당으로 내려앉았다.

여기에 DJ가 노태우의 중간평가 유보에 합의하는 일이 벌어진다. 제13대 대선 직전, 노태우는 “1988년 가을 올림픽을 치른 이후 오늘의 약속을 포함해서 6·29 선언과 그간의 모든 선거공약의 이행 여부에 대해 국민 여러분으로부터 중간평가를 받도록 하겠다”며 임기 도중 재신임 투표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DJ는 노태우가 중간평가를 악용하려는 저의가 보인다며 ‘유보’ 입장을 취했고, YS는 이 시기를 놓칠 경우 노태우는 영영 중간평가를 시행하지 않을 것이라며 조속한 실시를 촉구했다. 이러자 YS와 DJ, JP(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3자 회담을 열어 ‘선(先)5공 청산, 후(後) 중간평가’ 실시에 합의했다.

하지만 노태우와 개별 회담을 가진 DJ는 돌연 “중간평가를 신임과 연계하여 국민투표로 실시하는 것은 현행 헌법에 정신에 어긋난다”며 “중간평가를 실시하더라도 헌법에 부합돼야 하고, 정책 평가로 국한돼야 한다”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YS와 합의했던 ‘중간평가 국민투표를 통해 노태우의 재신임을 결정하자’는 입장을 전면 철회한 것이다.

당시 상황에 대해 YS는 자신의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에서 “통일민주당은 21일 마포 가든호텔에서 긴급 의원총회를 소집, 3.20 중간평가 유보담화를 대(對)국민 기만행위라고 규정한 뒤 노태우정권 타도를 선언하고 나섰다. 민정당과 평민당 양당을 불신하게 된 나는 당시의 정국상황을 ‘1노(盧)3김(金)’이 아닌 ‘1김(金)3노(盧)’라고 표현했다”고 썼다.

DJ에 대한 신뢰를 잃은 YS는 JP와의 접촉면을 넓혀나갔다. 사진은 국정감사장에서 담소하고 있는 YS(왼쪽)와 JP(중앙), 박철언(오른쪽)의 모습. ⓒ김영삼 회고록
DJ에 대한 신뢰를 잃은 YS는 JP와의 접촉면을 넓혀나갔다. 사진은 89년 골프회동에 앞서 국정감사장에서 담소하고 있는 YS(왼쪽)와 JP(중앙), 박철언(오른쪽)의 모습. ⓒ김영삼 회고록

이때부터 YS는 야권 통합을 통한 군부종식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차선책을 찾기 시작했다. 차선책이란 물론 정계 개편을 뜻했다. 당시 노태우는 여소야대(與小野大)로 인한 국정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정계 개편을 구상하고 있었다. 노태우의 타깃은 JP였다. ‘강경파’인 YS·DJ를 끌어들이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노태우는 JP가 이끄는 공화당과의 합당을 추진했다.

그러나 1989년 10월 2일, YS와 JP가 안양 컨트리클럽에서 첫 골프회동을 가진 것을 계기로 정치 지형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민주화운동의 기수(旗手)이자 골프 초보자였던 YS, ‘박정희 정권 2인자’이자 골프광이었던 JP는 그 태생부터가 달랐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대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었고, 이날 만남에서 현 상황을 타개할 방안으로 정계 개편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10월 2일 YS와 JP는 안양컨트리클럽에서 첫 골프회동을 가졌다. 이 무렵 둘이서 은밀히 Y음식점에서 저녁식사를 한 사실도 최근에 확인됐다.
첫 골프모임에서 적어도 민주, 공화, 나아가 민정까지를 포함한 정계재편을 시도한다는 언질도 오갔다. (중략)
첫 골프 후 양자 밀월은 두드러졌다. JP는 부산동의대 사태에 대한 국정조사발동에 쾌히 응해주고, 민주당의 5공청산 예산 연계전략을 힘껏 뒷받침했다. YS는 10·26 10주기를 맞아 고 박정희 대통령 묘소에 꽃다발을 바침으로써 유신의 그림자가 따라다니는 JP와 공화당에 대한 공식적인 화해 제스처를 보였다. (후략)
1990년 1월 22일자 <동아일보> ‘JP 색깔론이 재편 신호탄…3합 이루어지기까지’

이 골프회동은 큰 파장을 낳았다. YS와 JP의 결합은 ‘민주 대 반민주’ 구도였던 정치 지형이 ‘이념과 정체성’을 기준으로 재편된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이러자 민정당도 생각을 바꿨다. 두 사람의 골프회동 두 달여 후, 민정당 박준규 대표는 12월 27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제 5공 청산 문제가 일단락되는 등 여건이 조성됐다고 보기 때문에, 여권은 양당 체제를 목표로 정계 재편을 추진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상 ‘3당 합당’을 염두에 둔 발언이었다.

이후 노태우는 1990년 1월 11일부터 13일까지 3일간 DJ, YS, JP와 차례로 영수회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노태우는 세 사람 모두에게 합당 이야기를 꺼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정계 개편은 민정당과 민주당, 공화당이 참여하는 ‘3당 합당’으로 귀결된다. YS와 JP의 ‘안양 컨트리클럽 골프회동’이 대한민국 정치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시발점 역할을 한 셈이다.

담당업무 : 국회 및 국민의힘 출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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