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선 3기 지선] 정치권은 왜 지방선거를 주목했을까?
[민선 3기 지선] 정치권은 왜 지방선거를 주목했을까?
  • 조서영 기자
  • 승인 2020.12.29 16: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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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본 정치史>2002년 그날,
김대중 김영삼 노무현 이명박 등이 말하는 진실은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조서영 기자)

보궐선거가 99일 앞으로 다가왔다. 내년 4월 7일, 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비위 의혹과 오거돈 전 부산시장의 성추행 사건으로 선거가 열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10월 당헌 개정을 감행했다. 당 소속 선출직 공직자의 중대한 잘못으로 직위를 상실해도, 전 당원 투표로 후보를 추천하기 위해서다. 이로써 여야를 가리지 않고 출마 선언이 이어졌고, 하마평에 오른 후보만 해도 여럿이다.

지금의 전국동시지방선거는 1995년에 시작됐다.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원을 동시에 직접 선거할 수 있는 길이 이때 열린 것이다. 현재 민선 7기까지 왔으며, 이번 보궐선거로 선출된 단체장의 임기는 2022년 6월까지다. 1995년 제1회 지방선거의 막전막후는 아래 기사에 상세히 서술돼 있다.

(관련기사: http://www.sisa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95316)

그중 3회 지선은 역대 최저 투표율을 기록했다. 국민들의 관심은 월드컵과 16대 대선에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그때 선출한 이들의 행정·복지를 누리고 살고 있으며, 그 해에 태어난 아이들이 얼마 전 수능을 치렀다. <시사오늘>은 매번 역대 대통령들의 입을 빌려 당신에게 일종의 ‘기억재생장치’를 선사해왔다. 이번 서른 번째 ‘대통령 회고사’는 2002년 민선 3기 지방선거다. 그중 역대 대통령들의 일화와 시선에 초점을 맞췄다.

‘대통령 회고사’는 대통령의 입을 빌려 그 사건을 재구성하는 것에 의미가 있지만, 이번 회고사는 이회창 전 국무총리의 회고록도 참고했다.

 

1995년~1998년. 이명박은 왜 서울시장을 꿈꿨을까


이번 서른 번째 ‘대통령 회고사’는 2002년 민선 3기 지방선거다.ⓒ시사오늘 김유종
이번 서른 번째 ‘대통령 회고사’는 2002년 민선 3기 지방선거다.ⓒ시사오늘 김유종

“이 의원은 앞으로 다른 일을 할 기회가 많지 않습니까?”

김영삼의 한 마디는 예언이 됐다. 이명박은 1995년 제1회 지선의 서울시장 후보로 단독 출마했다. 그러나 김영삼이 내세운 민주자유당 후보는 정원식이었다. 선거를 한 달 앞두고, 김영삼과 이명박은 청와대에서 2시간 동안 마주 앉았다. 김영삼은 사퇴 조건으로 다른 자리를 제안했으나, 이명박은 경선을 주장했다.

결국 김영삼은 이명박의 제안을 수용했다. 5월 12일, 올림픽 경기장에서 민자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이 열렸다. 이는 역대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지선 경선이었다. 그러나 대통령과 지구당 위원장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은 후보를 이기기란 쉽지 않았다. 결국 이명박은 정원식과 1817표 차로 패배했다.

경선이 공정하게 치러질 리 없었다. 나는 송파구를 제외한 다른 지역의 대의원들은 만나보지도 못한 채 경선을 치렀다. 내가 연설을 할 때마다 마이크에 문제가 생겼다.

(중략) 내 정치 경력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패배였다. 그러나 나는 그때의 경선에서 결코 패배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민주적 절차와 원칙을 놓고 기성 정치권과 대결을 벌여 승리했다고 생각한다. 당시로선 일개 초선 전국구 의원이 당의 제왕적 총재인 대통령의 뜻에 정면으로 도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이명박 자서전 <대통령의 시간>, 76쪽.

이명박은 이후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 종로에 출마했다. 그는 노무현 후보를 누르고 40.5%로 당선됐다. 그러나 선거법 위반으로 벌금형을 받으며, 스스로 의원직을 사퇴했다.

새로운 길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펼쳐졌다. 그는 1998년 조지워싱턴 대학에 객원 연구원으로 초청을 받아 미국을 향했다. 그곳에서 이명박은 낭만적인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편익과 비용을 계산하던 ‘기업인’이, 사람들의 삶의 질과 환경을 고려하는 ‘정치인’으로 전환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경제발전으로 소득은 높아졌지만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았다. (중략) 그 옛날 우리 강산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이제 우리 도시와 하천도 생명력이 넘치는 친환경 생태공간으로 거듭나야 한다. 기후변화에 대비하고 경제적 역동성을 갖추도록 하려면 국토를 어떻게 탈바꿈시켜야 할까? 이는 미국에 머무는 동안 얻은 가장 귀한 깨달음이었다.

- 이명박 자서전 <대통령의 시간>, 82쪽.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그는 ‘청계천 복원’과 ‘서울 숲 조성’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 시기 보스턴 시는 ‘빅 딕 프로젝트(Big Dig Project)’를 통해 고가 도로를 철거하고 녹지를 건설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또 그는 샌프란시스코 부근의 타호 호수의 맑은 물을 마주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연스레 물질적 풍요를 넘어, 환경과 사람을 위한 행정에 관심을 갖게 됐다.

‘내가 왜 서울시장이 되려 하는가?’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됐다. 이전까지는 서울을 개발해 물질적 풍요를 누리도록 하겠다는 생각이 컸다. 그러나 점차 환경과 사람 중심으로 생각이 변해가면서 나는 문화와 환경 그리고 복지에 대한 비전을 갖게 됐다. 후일 서울시장이 되어 청계천을 복원하고 서울숲을 조성할 때 이때의 경험이 소중한 자산이 됐다.

- 이명박 자서전 <대통령의 시간>, 82쪽.

1년간의 미국 생활 끝에, 그가 택한 길은 서울시장이었다. 당시 신한국당 총재였던 이회창은 또다시 종로 출마를 권했으나, 그는 국회의원을 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2002.4~5月 노무현은 왜 YS를 찾았을까


ⓒ노무현재단_노무현사료관
노무현은 민선 3기 지선을 통해 3당 합당 이전으로 정치 지형을 돌려놓고자 했다.ⓒ노무현 재단 사람사는세상_노무현사료관

4월 노무현은 새천년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당선된 직후, 김영삼을 찾았다. 그는 부산시장 후보 문제를 상의하며, 김영삼에게 공천권을 위임하려 했다. 상도동계의 지방선거 지원을 부탁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이회창은 이를 두고 “노무현 후보는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된 뒤 자신감에 넘친 탓인지 돌출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공당에서 시장후보를 제3자에게 지명해 달라고 위임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중략) 아마도 부산 민주계의 지지를 얻어 득표해 보자는 계산인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에 이 판단은 잘못된 것이었다. 여론도 좋지 않아 지지도 여론조사에서 나와의 격차가 계속 좁혀졌다.

(중략) 그의 이런 구애에도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응하지 않아 그는 결국 한이헌 전 의원을 부산시장 후보로 공천했고 그 후 그는 낙선했다.

- 이회창 회고록 2권, 437쪽(e북 기준)

2006년 노무현은 김대중·김영삼 전직 대통령과 오찬을 가졌다.ⓒ노무현재단_노무현사료관
2006년 노무현은 김대중·김영삼 전직 대통령과 오찬을 가졌다.ⓒ노무현재단 사람사는세상_노무현사료관

그렇다면 노무현은 왜 돌출 행동을 보인 것일까. 일견 무모해 보이는 행동엔 이유가 있었다. 바로 그의 오랜 꿈 때문이었다. 그는 지선을 계기로 3당 합당 이전으로 정치 지형을 돌려놓고자 했다. 그에게 3당 합당은 김영삼과 갈라선 계기이자, 평생을 싸워야 했던 지역 분열의 정치구도가 탄생한 이유였다. 그는 김대중과 김영삼을 4월 이후 차례로 만났다.

일마다 꼬였고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는 내리막이었다. 모든 것이 내 잘못과 부족함 때문이었다. 시작은 상도동 방문이었다. 4월 29일 청와대를 방문해 김대중 대통령에게 인사를 드렸다. (중략) 다음날 김영삼 대통령의 상도동 자택을 방문했다. 나는 민주개혁 세력을 분열시키고 동서분열을 고착시킨 3당합당 이전으로 우리의 정치 지형을 돌려 놓고 싶었다. 김영삼 김대중 두 대통령이 직접 손잡지 않는다 할지라도, 내가 민주개혁 세력 통합의 촉매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것은 내가 오래 꿈꾸어 왔던 일이었다.

6월 지방선거에서 그 단초를 마련하려고 했다. 그래서 김영삼 대통령에게 후배들이 민주개혁 세력 연합을 이룰 수 있도록 국가원로로서 도와 달라는 청을 드리고 부산시장 후보 문제를 상의했다. (중략) 그러나 성과는 전혀 없었고 부작용만 엄청나게 나타났다. 김영삼 대통령은 끝내 협력을 거절했다.

-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 185~186쪽.

노무현의 부푼 꿈과 희망만큼이나 좌절도 컸다. 그는 당시를 회고하며 “지나친 행동”, “의욕이 너무 앞선 나머지 너무나 서투르게 행동한 탓”, “뒤늦게 후회했다”는 등의 표현을 썼다. 결국 지선을 앞두고, 김대중과 김영삼은 하나로 규합되지 못했다. 2002년 16대 대선의 막전막후는 아래 기사에 상세히 서술돼 있다.

(관련기사: http://www.sisa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8710)

 

2002.06.13. 김대중·노무현·이명박·이회창에게 3기 지방선거의 의미


결국 민선 3기 지방선거의 승리는 한나라당의 몫이었다. 광역자치단체장 16곳 중 한나라당이 11곳을 차지했다. 뿐만 아니라 기초자치단체장(140석·60.3%)과 광역자치단체의원(467석·68.5%) 선거에서도 한나라당이 압승했다. 그간 김대중 아들이 청탁 의혹으로 구속되고, 노무현을 향한 열기가 주춤해진 결과였다.

김대중은 자서전에 민주당 참패에 대해 한 단락 가량 짧게 언급했다. 앞서 그는 선거를 한 달 앞둔 5월, 선거 중립을 이유로 탈당한 상태였다. 따라서 민주당의 패배에 대해 책임을 질 필요도, 안타까움을 표할 이유도 사실상 없었다. 그는 제3자의 입장에서 담담히 서술했다.

6월 13일 지방 자치 단체 선거를 치렀다. (중략) 나는 비록 당적이 없었지만 선거 결과가 우려스러웠다. 한나라당은 이회창 대통령 후보 대세론을 내세울 것이고, 민주당은 패배의 책임을 싸고 진통을 겪을 것 같았다.

- 김대중 자서전 2권, 481쪽.

그의 관심은 다른 데 있었다. 그는 아들들의 비리 혐의에 대해 “2002년 봄은 잔인했다”며 “마냥 혼자 있고 싶었다”고 회고했다. 탈당 당시 그는 아들들의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데 대해 거듭 사과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자서전은 월드컵의 전 국민적인 관심과, 선거가 열린 날 여중생 2명이 미군에 의해 목숨을 잃은 효순·미선이 사건에 초점을 맞췄다.

2002년 8월 9일, 대통령 후보의 거취 및 신당논란에 대한 기자회견장에서 참석자들에게 인사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모습이다.ⓒ노무현재단 사람사는세상_노무현사료관
2002년 8월 9일, 대통령 후보의 거취 및 신당논란에 대한 기자회견장에서 참석자들에게 인사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모습이다.ⓒ노무현재단 사람사는세상_노무현사료관

노무현은 지방선거 참패에 대해 특히 쓰라린 아픔을 맛봤다. 6월 지방선거에 이어 이후 8월 재보궐 선거에서도 민주당이 참패했다. 노풍(盧風)은 위태로워졌고, 여론조사에서도 큰 격차로 이회창에게 뒤지기 시작했다.

그는 당시를 “명색만 후보였을 뿐 당내에서 점차 고립돼 갔다”고 회고했다. 민주당 내에서는 ‘제3의 후보 영입론’이 제기되며, 월드컵 조직위원장이었던 정몽준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노무현은 신당 논의뿐만 아니라 재경선 요구도 수용했다.

6·13 지방선거에 전력투구했다. 영남권에서 단체장을 하나라도 당선시키지 못하면 후보 재신임을 받겠다고 말했다. 지지층을 결집시키고 기세를 보여 줄 목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런데 영남은 고사하고 수도권과 충청, 강원 등 호남을 제외한 모든 곳에서 참패했다. 마치 산사태가 난 것 같았다. 아무 대책도 세울 수 없었다.

후보가 재신임을 불사하는 결연한 자세로 지방선거를 지휘한 것으로 이해하고 후보 재신임 문제는 없던 것으로 해 주기를 내심 기대했다. 그런데 거꾸로 지지율 하락을 이유로 후보를 교체하자는 움직임이 당내에서 생겨났다. 재신임 약속을 지키라는 요구도 나왔다. 그럴수록 지지율은 더 내려갔다. (중략) 나는 명색만 후보였을 뿐 당내에서 점차 고립되어 갔다.

-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 191쪽.

이명박은 바라던 대로 서울시장에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해 52.3%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그는 “쉽지 않은 선거였다”며 “월드컵 열기로 인해 공약도 여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쉽지 않은 선거였다. 나와 경쟁했던 후보는 386세대의 젊은 후보였다. 월드컵 열기로 인해 공약도 여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초반의 열세 분위기를 뒤집기란 결코 쉽지 않아 보였다.

나는 청계천 복원 공약을 비롯해 대도시 서울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의지와 추진력을 가진 시장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결국 181만여 표를 얻어 52.3퍼센트의 득표율로 서울특별시장에 당선됐다. 1,000만 시민과 5만 5,000여 명의 직원이 있는 거대 기업 ‘서울특별시의 CEO’가 된 것이다.

- 이명박 자서전 <대통령의 시간>, 83쪽.

이명박은 대중교통체계 개편을 통해 중앙버스전용차로제를 설치했다. 이로써 버스의 운행 속도가 높아졌고, 환승 할인 혜택으로 대중교통 이용률이 높아졌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이명박은 대중교통체계 개편을 통해 중앙버스전용차로제를 설치했다. 이로써 버스의 운행 속도가 높아졌고, 환승 할인 혜택으로 대중교통 이용률이 높아졌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그는 당선 이후 서울을 세계 일류 도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도시로 만들기 위한 비전을 세웠다. 그가 꿈꾼 ‘세계 일류 도시 서울’은 친환경적이면서 사람 중심의 도시였다.

서울을 세계 일류 도시로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시정의 혁신이 필요했다. 나는 서울시 행정에 ‘경영 마인드’를 도입했다. 그때까지 우리 행정은 경제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주어진 예산을 모두 쓰는 것이 공무원들의 일이었다. 행정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공무원들의 생각부터 바꿔놓아야 했다.

- 이명박 자서전 <대통령의 시간>, 88쪽.

그의 ‘경영 마인드’와 ‘고객 제일주의’는 4년간 △서울광장 공사 △청계천 복원 △서울 숲 조성 △시내버스 개혁 등 수많은 정책을 성공시켰다. 지금의 우리는 당시의 행정을 누리며 살고 있다.

이회창은 한나라당 압승을 두고 “한국정치에 지각변동을 가져왔다”고 평가했다.ⓒ뉴시스
이회창은 한나라당 압승을 두고 “한국정치에 지각변동을 가져왔다”고 평가했다.ⓒ뉴시스

이회창에게 지선은 김대중 정권의 비리사건에 대한 심판의 기회이자, 당내 악재를 얼마나 극복했는지 가늠할 기회였다. 그는 한나라당 압승을 두고 “한국정치에 지각변동을 가져왔다”고 평가하며, “정권의 권력형 부패·비리와 오만에 대해 국민이 준엄한 심판을 내린 것에 대한 반사적 이익을 얻은 것”이라 분석했다.

민주당과 한나라당이 각각 당체제 개편을 하고 대선 후보가 정해진 후 치러지는 이번 지방선거는 양당에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특히 한나라당은 김대중 정권의 각종 비리사건과 실정에 대한 심판의 기회이면서 동시에 박근혜 의원 탈당과 가회동 빌라문제, 설훈 의원의 20만 달러 수수 등 허위조작 의혹 등 악재를 어느 정도 극복했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 (중략) 이번 선거가 중요했다. 그래서 3당이 모두 온 힘을 쏟았다.

6월 13일 선거의 결과는 참으로 엄청난 것이었다. (중략) 일부 언론은 한국정치에 지각변동이 일어났다고 표현했다. (중략) 이러한 선거결과는 이 정권의 권력형 부패·비리와 오만에 대해 국민이 준엄한 심판을 내린 것이고 그런 면에서 한나라당은 그 반사적 이익을 얻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이회창 회고록 2권, 437~438쪽.

이렇듯 민선 3기 지선의 승패는 누군가에게는 뼈아픈 아픔을, 다른 누군가에게는 오랜 꿈의 달성을 안겨줬다. 뿐만 아니라 지선은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당 체제 개편 이후의 당내 상황도 바꿨다.

이번 선거에서는 한나라당이 당체제 개편 후 당이 안정되고, 결집된 모양을 갖춰가는 데 반해 민주당은 계파 간 갈등이 격화되고 당과 노무현 후보 간의 조정도 원활하지 못한 데다 노 후보의 자신의 돌출 언동으로 지지율이 하락하는 것으로 보였다.

- 이회창 회고록 2권, 438쪽.

 

정치권은 왜 지방선거를 주목할까


2002년 민선 3기 지방선거는 다양한 이유로 정치권의 주목을 받았다. 선거는 각자의 이해관계와 욕망 혹은 꿈이 얽혀있는 장이었다. 김대중에겐 임기 말 아들이 비리 혐의로 구속되면서, 마지막 심판의 순간이었다. 반면 노무현과 이회창에겐 그 해 12월에 있을 제16대 대선의 바람을 가늠하고, 당을 결집할 수 있는 기회였다. 이명박에겐 7년 전 포기했던 서울시장의 꿈을 이룬 시기였으며, 이를 발판 삼아 차기 대통령에 당선됐다.

2021년에 있을 보궐선거 역시 마찬가지다. 더불어민주당에게 이번 선거는 두 전직 시장의 오명을 씻어낼 기회이자, 2022년 대선에서도 승기를 잡기 위한 발판이 될 선거다. 국민의힘에겐 여당의 오랜 독주에 제동을 걸 수 있는 기회다. 차기 대선을 포기하고 서울시장을 택한 국민의당에게도 이번 선거가 갖는 의미는 남다르며, 차례로 출마를 선언한 후보들 역시 몸값을 올릴 수 있는 계기다.

선거의 결과는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선거의 승패가 누구의 욕망과 꿈을 택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고 선거는 당일 까봐야 알듯, 이번 보궐선거의 결과 역시 마찬가지다. 뿐만 아니라 2002년처럼 지선의 승패와 이후 대선의 승자는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결과를 충분히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정치권의 바람을 만들어내는 것도, 고작 1년간의 임기만으로 도시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도, 모두 우리의 선택에 달렸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행복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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