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신문 보기] YS와 이준석…무력감에 맞선 젊은 야당 대표
[옛날신문 보기] YS와 이준석…무력감에 맞선 젊은 야당 대표
  • 조서영 기자
  • 승인 2021.06.14 15: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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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그날, 인물·신문의 평가는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조서영 기자)

이번 열네 번째 ‘옛날신문 보기’는 1974년 ‘신민당 당권 경쟁’이다.ⓒ시사오늘 김유종
이번 열네 번째 ‘옛날신문 보기’는 1974년 ‘신민당 당권 경쟁’이다.ⓒ시사오늘 김유종

이준석 돌풍의 핵심은 ‘세대교체’다. 젊은 세대의 등장으로 앙시앵 레짐(구체제)을 무너뜨리길 바라는 국민들의 열망이었다. 동시에 기존 정치권의 개혁과, 보수 혁신을 바라는 목소리기도 했다.

바람이 모여 정치권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정의당은 헌법 제67조 제4항에 명시된 40세 대통령 피선거권 연령 제한 삭제를 주장했다. 류호정 의원은 지난달 30일 기자회견을 통해 “만 36세 이준석이 제1야당의 대표가 될 수 있다면, 마흔이 되지 않아도 대통령이 될 수 있어야 한다”며 “젊음의 진출을 가로막는 정치 제도를 바꾸자”고 말했다.

우려와 기대 속 국민의힘은 1985년생 37세 이준석 후보를 신임 당대표로 맞이했다. 이로써 그는 헌정 사상 최초의 30대 야당 대표가 됐다. 이는 1974년 김영삼 전 대통령(YS)의 기록 이후 최초다. 지금으로부터 47년 전, YS는 만 46세로 최연소 야당 당수를 했다. 이후로 거쳐 간 원내 교섭단체 대표들은 모두 40대 이상이었다.

젊은 야당 대표의 등장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세대교체에 대한 열망은 오늘날만의 시대정신일까. 대략 반세기 전 40대 야당 당수의 등장은 당시 정치권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까. 그리고 새로운 세대는 국민들의 열망에 얼마나 부응했을까. YS를 통해 37세 이준석 신임 대표 당선의 의미와 그 이후를 예측해보고자 한다.

<시사오늘>은 과거의 인물, 그리고 과거의 사건에 대한 당대 신문들의 평가를 재조명하며, 보수와 진보 언론 양극단의 평가를 비교해왔다. 여기서 ‘어떤 평가가 옳은가’에 대한 가치 판단은 전면 배제한다. 판단은 ‘사상의 자유’를 만끽하면서도, 동시에 ‘과잉 이념’의 시대에 지쳤을 독자들에게 맡길 예정이다. 이번 열네 번째 ‘옛날신문 보기’는 1974년 ‘신민당 당권 경쟁’이다.

 

강력한 정권과 무력한 야당


좌측부터 김영삼 전 대통령과 박정희 전 대통령ⓒ뉴시스(=대한민국 정부 기록사진집)
좌측부터 김영삼 전 대통령과 박정희 전 대통령ⓒ대한민국 정부 기록사진집

40대 야당 당수의 등장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당시 시대 상황부터 파악해야 한다.

1970년대 초반은 민심의 변화가 감지되던 시기였다.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김대중(DJ)에게 근소한 표차로 당선됐다. 그해 8월에 있었던 제8대 총선에서는 야당인 신민당이 지역구 65석에 전국구 24석, 총 89석을 획득하며 개헌 저지선을 확보했다. 아울러 정치권 바깥에서 각계의 저항이 잇따랐다.

이러한 민심의 변화에 불안을 느낀 박정희는 그 이듬해인 1972년, 유신 헌법을 선포했다. 선포 당시 국무총리를 역임했던 김종필은 증언록을 통해 “유신은 철저하게 박정희 대통령이 구성했고 직접 지휘해 이끌었으며 결국 죽음으로 마지막 책임까지 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박 대통령의 흉중에서 유신의 싹이 튼 건 1971년 4월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에게 95만 표라는 예상외의 적은 표차로 이겨 위기감을 느낀 때(<JP가 말하는 대한민국 현대사>, 403쪽)”라고 덧붙였다.

박정희의 집권 연장을 위해 탄생한 유신은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 국회는 해산됐으며, 정당 활동도 정지됐다. 뿐만 아니라 YS는 귀국 후 가택 연금을 당했으며, 수많은 야당 정치인들이 보안사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유신 선포 1년 뒤엔 DJ 납치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렇듯 박정희의 철권통치는 야당을 옥죄고 있었다.

ⓒ네이버뉴스 라이브러리 갈무리
좌측부터 <경향신문>과 <매일경제> 사설이다.ⓒ네이버뉴스 라이브러리 갈무리

위축된 건 야당뿐만이 아니었다. 언론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어느 언론도 유신 체제에 대해 비판하지 못했다. 그저 무의미한 숫자에 주목하는 사설만이 전부였다. 당시 투표율은 91.9%, 찬성률은 91.5%에 달했다. 이에 <경향신문>은 “유권자들이 10월 유신을 지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매일경제>는 “유신에 대한 범국민적 인식이 그만큼 깊다는 것”이라 분석했다.

[사설]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의 두터운 여망

우리는 유신헌법의 확정을 환영하면서 우리나라 역사의 새 한환점(韓換點)을 이룩한 국민투표의 의의를 높이 평가하고자 한다. 국민투표의 결과는 유권자들이 우리나라의 역사적 정치 변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10월 유신을 지지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번 국민투표를 통해 유신헌법의 혹정을 보게 된 것은 곧 박정희 대통령의 영도력에 대한 국민적 신임을 표명한 것이기도 하다.

- <경향신문>, 1972.11.22. 2면

[사설] 유신헌법의 확정 국민투표 결과와 그 의의

과거의 국민투표 결과와 비교할 때 투표율과 찬성률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우리가 어느만큼 10월 유신을 깊이 인식하고 참여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중략) 국민의 정치의식 수준이 높아진데도 연유하겠으나 특히 10월 유신에 대한 범국민적 인식이 그만큼 깊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 <매일경제>, 1972.11.23. 2면

언론의 분석과는 달리, 선거를 통해 민심의 이반이 포착됐다. 유신 헌법 하 첫 번째로 치러진 1973년 제9대 총선에서 야당인 신민당은 35.6%를, 민주공화당은 50.0%를 차지했다. YS는 이를 “공포 분위기 하에서 치른 부정선거로도 박정희는 의석의 절반밖에 획득하지 못했다”고, DJ는 “야당의 예상 밖 선전”이라 평가했다.

 

무력감에 맞선 젊음…선명 야당 주장


1973년 선거의 예상 밖 선전에도 불구하고, 신민당은 온건 야당 기조를 유지했다. ‘정의와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두려운 것이 없던’ 젊은 YS의 눈에는 무력한 야당이 답답했을 터다. 그는 회고록을 통해 “진산 체제 하의 신민당은 실상 유신 체제에 길들여져 가고 있었다”며 “그 기류를 선회시키고자 무진 애를 썼다(<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39쪽)”고 말했다.

그가 기류를 바꾸기 위해 요구한 것은 헌법 개정이었다. 당시 신민당 당수였던 유진산은 일부 의원들의 신중론에도 불구하고, 개헌 추진을 당론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확정한 날 박정희는 긴급조치를 발동해 유신헌법 개폐 주장을 일체 금지했다. 뿐만 아니라 헌법 관련 언동에 대한 기사 역시 단 한 줄도 쓰지 못하게 보도금지 조항을 뒀다.

설상가상으로 긴급조치가 선포된 지 이틀 후, 유진산은 위경련 증세로 병원에 입원했다. 그러나 암 진단을 받고, 그로부터 3개월간의 투병생활 끝에 운명했다. 이에 신민당은 새로운 지도 체제를 구축에 나섰다. 전당대회는 8월로 예정됐다.

‘선명 투쟁’을 주장해온 YS는 당시만 해도 소수파였다. 후보로는 △김의택 △정해영 △고흥문 △이철승이 나서 5파전이 펼쳐졌다. YS를 제외한 모두가 50대 이상으로, 많게는 18살에서 적게는 5살 차이가 났다. 그러나 1~2차 투표 모두 YS가 1위를 거머쥐었다. 이로써 최연소 야당 당수가 탄생했다.

이러한 결과에 대해 그는 “국민의 뜻에 부응하여 독재정권에 도전하겠다는 정치적 용기와 야당성을 회복하겠다는 캐치프레이즈가 국민 속에 한 걸음 더 가까이 있는 대의원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46~47쪽)”이라 분석했다.

ⓒ네이버뉴스 라이브러리 갈무리
좌측부터 <경향신문>과 <동아일보> 사설이다.ⓒ네이버뉴스 라이브러리 갈무리

언론은 40대 총재가 이끌어낼 야당에 대한 기대를 드러냈다. <경향신문>과 <동아일보>는 공통적으로 YS의 당선이 신민당의 선명성을 되찾는 전환점이 되길 기원했다.

[사설] 김영삼 당수에의 기대

원로정객이나 가부장적 권위가 당을 지배해온 오랜 전통을 깨고 신민당이 한국 보수 야당 사상 처음으로 40대 당수를 맞이한 것은 세대교체의 새 기원을 이룩하는 매우 의미있는 체질 개선이라고 하겠다.

사실 오늘의 야당은 ‘야당부재’라 불릴 만큼 무위와 안일로 국민들의 외면을 받아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야당에 대한 국민들의 무관심은 제1야당인 신민당이 원내 활동에서 모험주의와 극한 투쟁을 못하는데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야당을 불신하는 것은 정책 대안이 없는 무정견, 정치적 신념의 결여, 고질적인 파벌의식, 당내 일부의 도덕적 타락에서 오는 당의 이미지 때문이다.

(중략) 신민당에 있어 40대 당수의 의미는 과거의 보수성과 당의 침체를 벗어날 수 있는 계기이기는 하나, 야당성 회복을 강조하는 새 당수의 젊은 패기가 강경 자세로만 치우친 나머지 저돌 일변도로 나가지 않을까 우려하는 소리도 없지 않다.

허나 김 당수는 젊음의 패기와 투지에 못지않게 침착한 성격과 냉철한 판단력의 소유자로 알려진 만큼 앞으로의 신민당 진로를 현명하게 개척해 나갈 줄 믿는다.

- <경향신문>, 1974.08.23. 2면

[사설] 신민당에 기대한다

내외의 여건을 생각할 때 신민당의 앞길은 험난하다. “영광보다도 고난의 십자가를 메는 자리”라고 한 김 총재의 말에 공감을 느낀다. 신민당이 건전한 야당이 된다는 것은 비단 신민당 자신을 위해서만 아니라 이 나라가 민주국가라는 것을 세계에 과시하는 것이며 여론을 그만큼 국정에 반영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도 국민에게도 바람직스러운 일이다.(중략)

우리는 신민당에 좀 더 주체성 있는 야당 자세를 기대한다. 신민당이 야당으로서 인기가 떨어지고 국민의 관심에서 벗어났던 가장 큰 이유는 주체성이 약했기 때문이다. (중략) 신민당이 진산 체질을 벗어나 새로운 시대적 요청에 자신을 크게 발전시킬 수 있는 계기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선명’이란 자신의 정치적 성격을 뚜렷이 밝히는 데 있다.

- <동아일보>, 1974.08.24. 2면

40대 당수의 당선 이후 신민당은 투쟁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점차 상황도 뒤바뀌었다. 박정희 정권의 압박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비등점이 이르렀고, 그 민심의 결과가 제10대 총선이었다. 선거 결과, 신민당이 32.8%를 얻었다. 이는 민주공화당(31.7%)보다 1.1%포인트 앞서는 결과였다.

YS는 이후로도 신민당을 찾은 여공들을 보호하고(YH 무역사건),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와 제명, 부마항쟁 등. 1979년, 김재규의 총탄에 박정희 정권이 몰락하기 전까지, 일련의 투쟁의 선두에 서있었다. 유신 체제의 무력감에 좌절하지 않았던 그의 젊은 투지가 야당의 선명성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지켜낸 셈이다.

 

“50년대 차에 70년대 엔진”


30대 야당 대표의 등장이 또 한 번의 도약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국회사진기자단

“우리에게는 지금 통치가 있을 뿐 정치가 없습니다. 정치가 없는 곳에 민주주의는 없습니다.”
- 1973.09.24. YS의 본회의 질의 中

“저는 제 손으로 만드는데 일조한 박근혜 대통령이 호가호위하는 사람들을 배척하지 못해 국정농단에 이르는 사태가 발생하게 된 것을 비판하고, 통치불능의 사태에 빠졌기 때문에 정당했다고 생각합니다.”
- 2021.06.03. 이준석의 대구·경북 합동연설회 中

두 발언을 나란히 놓았다. 전자는 유신 체제로 모두가 움츠러든 그때, 국회 본회의장 한 가운데서 “정치가 아닌 통치만이 남았다”고 외친 1973년 김영삼 전 대통령(발언의 일부분은 당시 국회의장이 그와 상의 없이 임의로 삭제해, 속기록에는 말줄임표로 표시돼있다)의 발언 내용이다. 후자는 보수의 심장인 대구·경북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은 정당했다”고 외친 2021년 이준석 신임 대표의 발언 중 일부다.

유유히 관성에 따르는 기성세대가 아니었기에 가능했던 발언들이었다. 유신에 맞서고, 탄핵을 인정하고 넘어서려는 젊음의 무모함 혹은 패기에 국민들은 열광했다. 변화를 바라던 민심이 이들에게 향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런 점에서 세대교체가 시대정신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특정 시기에만 통용되는 주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대교체에 대한 열망은 국가의 매 전환기마다 등장했다. 따라서 개혁을 바라는 민심으로 파악하는 편이 옳다.

고종의 왕정에 반대하고 공화제를 이끌던 청년 이승만에 국민들이 환호했던 것, 그 청년이 시간이 흘러 새로운 사회의 주역들이 이끈 4·19혁명으로 물러난 것, 유신 체제가 40대 기수론을 이끈 YS 그리고 DJ에 의해 점차 무너져 내린 것, 제5공화국이 6월 항쟁을 이끈 586세대에 의해 직선제를 받아들인 것 등. 변화가 필요한 시점에 신세대가 등장했다.

대략 반세기 전 40대 야당 당수의 등장은 정치권의 긴장감을 불러 일으켰다. 선명 야당의 기치 아래 투쟁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헌 투쟁으로의 선회는 쉽지 않았다. 그런 YS에게 “낡아빠진 50년대 차에 70년대의 엔진을 갈아 끼웠다”는 비유를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새 엔진으로나마 숨 가쁘게 투쟁을 이끌었고, 견고한 유신 체제에 균열을 냈다.

30대 이준석 신임 대표 역시 ‘2000년대 차에 2020년대의 엔진을 갈아 끼운’ 것일지도 모른다. 준비되지 않은 정당에 젊은 열정만으로 폭발력을 이끌어내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지금껏 무력감에 사로잡힌 야당을 개혁해, 불만스런 정권의 구체제를 뒤바꾼 것은 세대교체였다. 이번에도 새로운 세대의 등장이 또 한 번의 도약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행복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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