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비껴간 대통령들④>정몽준과 ´정주영 학습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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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비껴간 대통령들④>정몽준과 ´정주영 학습효과´
  • 윤진석 기자
  • 승인 2012.09.25 14: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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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진은 있으나 메시지가 부족한 MJ
늘 차기만 내다볼 듯한 모습 탈피해야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진석 기자]

시대를 비껴간 대통령들이 있다. 한 때 유력 대선주자들로 통했지만 대통령 운이 닿지는 못한 이들을 말한다. 독재 정권 아래에서는 신익희, 조병옥, 유진산 등이 대표적으로 꼽힌다. 민주화 된 다음에는 이인제, 박찬종, 이회창, 정몽준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나름의 애석한 이유로 대통령이 되지 못했다. 비껴간 시간의 단면을 돌이켜 봤다. <편집자 주>

최다선 의원 정몽준 새누리당 의원도 한때는 신선한 바람을 일으킨 제3후보였다. 그런 점에서 이번 대선에서는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2002년 대선에 출마했던 정몽준 의원과 비교되기도 한다.

정치권에서는 민주통합당 박선숙 전 의원이 탈당계를 제출하고 안 원장 측으로 옮긴 것과 관련, 과거 DJ(김대중)계의 김민석 의원이 정 의원 측으로 넘어가 후보 단일화 가교에 나선 것과 닮았다며 공통점을 찾기도 한다.

하지만 안 원장과 정 의원은 대선에 임하는 근본 그릇부터가 다르다. 정 의원은 2002년 독자 출마, 2012년 새누리당 대선 경선에 뛰어들며 두 번의 대권 도전에 나섰지만 우리는 그에게서 시대를 담아낼 메시지를 발견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 이번 대선에서 보였던 것은 국정운영 청사진이었다. 적어도 그가 대통령이 된다면 어떤 나라일지는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안보 우선의 뚜렷한 대북관, 한미 동맹 강화, 글로벌 리더십에 기반을 둔 외교력, 일자리 정책과 사다리 개념의 복지 정책에 초점이 맞춰졌을 거라고 본다.

“메시지가 부족한 대권 주자”

ⓒ뉴시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시대를 관통할 메시지를 지니지 못했다는 게 한계로 남는다. 이는 2002년 대선 때 월드컵 바람으로 반짝했던 참신성, 신선함 등과는 다른 문제다. 국민 열망을 반영하는 시대정신 혹은 강렬한 메시지가 대선 주자에게 보여야 하는데 정 의원에게는 그런 점이 보이지 않는다.

혹자는 그가 가진 돈의 절반이라도 사회에 기부한다면 세상이 그를 달리 볼 거라고 말한다. 물론 지난해 8월 현대는 故 정주영 회장의 10주기를 기리는 아산나눔재단을 설립했고, 당시 정 의원은 약 2000억 원 정도의 개인 재산으로 재원을 부담한 바 있다. 하지만 여기서 얘기하는 건 대통령 꿈을 꾼다면 일생일대의 각오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얼마 전 역술가이기도 한 이철용 전 의원은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정 의원이 빈민촌으로 이사해 그들의 삶과 이웃하기만 하더라도 대권을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전했다.

지난 2008년 정 의원은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 버스 요금이 얼마냐는 질문을 받자 70원 정도이지 않느냐고 말해 여론의 뭇매를 맞은 바 있다. 이후 대중교통도 가끔 이용했다는 얘기도 들려오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은 '저이가 과연 서민을 알고 민심을 알까' 하는 의아스러운 눈길을 보낸다.

정 의원은 올인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지금껏 절박한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지금껏 대권에 도전했던 두 번 모두 차기 대권을 염두에 둔 행보로 비쳤을 뿐이다.

이 같은 배경에는 정 의원이 기업과 정치라는 두 개의 떡을 양손에 쥐고 있기 때문이라는 의견이다. 정치가이자 재벌가라는 특수한 상황을 지닌 정 의원은 정치 행보를 하는 데 있어 기업의 운명도 같이 생각할 수밖에 없다.

"아버지가 남겨준 학습효과"

또한 대권에 도전했으나 패배했던 정주영 회장이 남겨준 학습효과가 그의 뇌리 속에 강하게 남아있어 통 큰 배팅을 할 수 없을 거라는 것도 일각의 분석이다.

정치권에 돈 갖다 바치는데 이골이 난 정주영 회장은 1997년 마침내 대권 출마를 선언한다. 당시 상황을 잘 아는 정치권 인사말로는 정 회장이 처음 국민당을 창당할 때는 김영삼(YS)을 지원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만약 YS가 민자당 내 '민정계'에게 '팽' 당할경우, YS를 국민당 대선후보로 만든다는 계획이었다는 것.

하지만 정 회장은 미국 측에서 자신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얘기에 마음을 바꿔 끝까지 완주한다. 그로서는 승부수를 띄운 건데 결과는 낙선이었고 YS 정권의 타깃이 돼 시련을 겪었다는 후문이다.

제3후보로 나선 반짝 스타의 선택

ⓒ뉴시스.
김대중(DJ) 정권이 들어서자 한숨 돌리게 된 정 회장은 아들의 대권 도전에 기대를 건다. 이후 정 회장은 막대한 자금을 들여 DJ 정권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세간에 따르면 정 회장은 DJ에게 정몽준 의원의 대권을 부탁했다. 이를 의식한 DJ는 2002년 대선 당시 한 손엔 노무현 카드를, 다른 한 손엔 정몽준 카드를 쥐고 저울질했다고 전해진다.

월드컵 직후만 해도 정 의원은 삼자대결 구도에서 30%대로 앞서나가며 돌풍을 일으켰다. 하지만 얼마 안 가 거품에 불과하다는 것이 곧 드러난다. 국민통합21이라는 신당 창당을 앞뒀을 때는 20%대로 하락했다고 한다. 혜성처럼 등장한 제3지대 다크호스가 반짝 스타로 전락하는 듯했다.

정 후보의 인기 하락은 국민 눈높이에서 봤을 때 당연한 결과라는 얘기도 있다. 선거 종반부로 치달으면서는 국민의 선택은 신중하고 꼼꼼해진다. 그런 점에서 정 의원은 월드컵 유치 외에는 남다른 비전이 보이지 않았을 거라는 얘기다.

정당정치가 기본인 나라에서 갓 만들어진 정당에 나라의 운명을 걸기도 어려운데다 그렇다고 주변에 유능한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나마 영입된 인사들 성향은 민주당 쪽 인사들, 그게 아니면 월드컵 응원단장으로 활동한 연예인 김흥국 씨 정도이다. 정 의원은 나름의 표 계산법으로 노무현 후보 쪽 표를 잠식할 양으로 민주당 쪽 인사들과 함께 했다고는 하지만, 그 덕에 중도보수 성향의 유권자들은 등을 돌리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의아스러운 건 정 의원이 그 당시 경선 포기를 하고 민주당을 탈당했던 중도개혁성향의 이인제 의원과는 왜 연대하지 않았느냐이다. 이 의원 정도면 힘이 떨어졌다고는 하나 중도보수층 유권자까지 확장시킬 수 있는 저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정 의원이 민주당에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노 후보와 단일화하는 과정에서 DJ가 자신을 밀어줄 거라고 기대한 거라 말한다. 그런 점에서 정 의원과 이인제 의원 모두 정치 9단 DJ 전략에 희생된 측면이 크다는 분석이다.

노무현 지지철회와 얄궂은 운명

ⓒ뉴시스.
대선 후반부로 들어서면서 정 의원은 야권 후보단일화에 나섰고 여론조사에 밀려 노 후보에게 석패한다. 당시 정 의원이 단일화 규칙을 놓고 양보하는 모습을 보이자 대권도전을 포기한건지, 차기 대권을 염두에 둔 게 아닌지 등 말이 많았다. 

반전은 여기부터다. 12월 19일 대선이 있기 하루 전날 정 의원은 돌연 노 후보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만다. 당시 이에 대한 여러 설이 있었지만 정 의원이 설명한 대목을 옮겨본다.

"20여 년 간 정치인생에서 나를 힘들게 한 때는 2002년 대통령 선거 마지막 순간 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던 밤이었다. 단일화는 했지만, ‘반미(反美)면 어떠냐’는 노무현 후보의 인식이 바뀌어야만 (공동유세에) 합류할 수 있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10여 일 간 협상을 벌인 끝에 한미 관계에 있어서만큼은 노 후보 쪽이 우리 입장을 따르기로 했다. <중략> 이후 노 후보 측에서 나를 국정동반자‘라고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선 전날 명동과 종로 유세에서 국정동반자에 대한 신뢰가 깨졌다. 명동 유세에서 노 후보는 ’북한과 미국이 싸우면 우리가 말리겠다'는 말을 하며 우리 쪽과 합의한 기본원칙을 완전히 뒤집었다. <중략> 종로유세에서 노 후보가 정동영 의원을 데리고 (단상에) 올라갔다. 단일화와 공동정부를 나타내는 나와 노 후보의 협력 모습은 사라지고, 노 후보를 양옆의 두 사람이 떠받드는 이상한 모양이 연출됐다.“-위키백과에 나온 정몽준 자서전 중-

정 의원 처지에서 보면 이념 갈등이 생길 것은 불 보듯 뻔할 거라는 우려, 이대로 가다간 차기 대권은 물 건너 갈 수 있다는 위기감, 공동정부 구성은커녕 이용만 당할 수 있겠구나 싶은 배반감이 한순간에 몰아닥쳤을 거다.

하지만, 운명은 얄궂다. 정 의원의 지지철회는 역풍을 몰고 왔고 이를 발판으로 노무현 정권은 탄생한다.

선거 막판까지 노무현+정몽준 지지율보다 이회창 후보가 앞서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정 의원의 지지철회로 노 후보에 대한 동정여론은 급물살을 탔다. 당시 분위기는 선거를 맞아 휴가를 떠나려던 386세대의 발길까지 되돌려놓을 정도였다.  

"결국은 청출어람?"

ⓒ뉴시스.
정 의원은 이후 노무현 정권으로부터 보복정치를 당했다고 자서전을 통해 밝힌다.

"지지 철회 후 나는 다음해 2월 초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으로 검찰 조사를 받았다. 또한 내가 주주로 있는 현대중공업은 노 대통령 재임 중 4개월 이상 세무사찰을 받았다"-위키백과에 나온 정몽준 자서전 중-

이 대목에서 순간 오버랩 되는 인물이 있다. 바로 정주영 회장이다.

YS와의 약속을 어긴 대가로 문민정부 때 푸대접 받았던 정주영 회장. 그리고 노무현 지지철회로 시련을 겪었던 정몽준 의원. 이들 부자는 빗나간 예측으로 인해 답습하지 말아야 할 학습효과를 2대에 걸쳐 겪은 셈이다.

그는 아버지가 남긴 학습효과를 미처 습득하지 못한 걸까. 물론 정 의원으로서는 지지철회까지 한 마당에 노 후보가 설마 당선될 거라고는 감히 상상도 못했을 거다.  

정 의원은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아버지가 걷지 않은 길을 택해 도전한다.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지지를 선언, 기존 당으로 들어간 것.

정주영 회장의 통일국민당, 정몽준 의원의 국민시대21. 제3의 정당 방식으로는 정치생명과 기업 모두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꿈은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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