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86세대는 ‘공공의 적’이 됐나 [기자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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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86세대는 ‘공공의 적’이 됐나 [기자수첩]
  • 정진호 기자
  • 승인 2023.11.30 17: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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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진호 기자]

송영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송영길의 선전포고’ 출판기념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송영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송영길의 선전포고’ 출판기념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또 찾아왔다. ‘86세대(80년대 학번·60년대생) 용퇴론’ 얘기다. 제20대 총선을 앞둔 2015년 이동학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청년혁신위원이 86그룹 대표주자였던 이인영 의원에게 ‘586 전상서-더 큰 정치인으로 거듭나 달라’는 제목의 편지를 보낸 데서 촉발된 86세대 용퇴론은, 제21대 총선을 거쳐 제22대 총선이 코앞으로 다가온 지금 다시 한 번 불이 붙었다.

불을 지른 건 송영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다. 송 전 대표는 최근 자신의 출판기념회에서 한동훈 법무부장관을 향해 “이런 건방진 놈이 어디 있냐, 이 어린 놈이 국회에 와서 인생 선배, 한참 검찰 선배를 조롱하고 능멸하고 이런 놈을 그대로 놔둬야 되겠느냐”고 말했다. 민주화를 외쳤던 그가 ‘건방진 놈’, ‘어린 놈’, ‘검찰 선배’ 운운했다는 사실은 젊은층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고, 정치권에서는 ‘기득권이 된 86세대의 본모습이 드러난 것’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자연스럽게 86세대 용퇴론도 따라붙었다.

그러나 권력을 잡고 ‘초심(初心)’을 잃은 건 비단 86세대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나 아렌트조차 ‘가장 급진적인 혁명가는 혁명이 끝난 다음 날부터 보수주의자가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단순히 초심을 잃고 기득권이 된 게 ‘퇴출 사유’라면 정치권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아무도 없다. 86세대가 지금처럼 ‘공공의 적’이 된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 바로 ‘민주주의에 걸맞지 않은 정치 스타일’을 가졌다는 점이다.

86세대는 대한민국에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게 하기 위해 노력한 세대다. 실제로 그들이 민주화의 주역이었는지에 대해선 이론(異論)이 있지만, 86세대가 대한민국 민주화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86세대는 민주화가 달성된 그 순간부터 민주주의와 불화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반독재투쟁은 기본적으로 ‘정의 대 부정의’라는 구도에서 출발한다. 정의로운 내가 불의와 싸워 승리를 거머쥐는 것이 민주화운동의 기본적 서사다. 20대 시절, 이 서사 속에서 성취감과 정치적 효능감을 경험한 86세대는 세상을 선악 구도로 바라보는 인식습관과 악에 대한 투쟁을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내면화해왔다.

문제는 반독재투쟁과 민주주의는 작동 구조가 전혀 다르다는 데 있다. 반독재투쟁이 ‘옳고 그름의 충돌’이라면 민주주의는 ‘이익의 충돌’이다. 군사독재정권 시절 정치인과 지식인의 역할이 국민을 ‘분연히 떨쳐 일어서도록’ 하는 계몽(啓蒙)과 선동(煽動)이었다면, 민주주의에서 정치인과 지식인이 해야 할 일은 각자의 이익을 위해 질주하는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정의와의 싸움이 자신들의 존재 이유였던 86세대는 그 서사를 포기하지 못했다. 민주화 이후에도 86세대는 끊임없이 ‘부정의한 적’을 찾아 나섰고, 특정 이념·계층·직업·성별·세대 등을 적으로 상정하고 교화에 나섰다. ‘기성세대가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돌 들고 화염병을 던지라(유시민 전 노무현재단 이사장)’거나 생각이 다른 상대를 향해 내뱉는 각종 ‘막말’은 그 연장선상이다.

물론 모든 86세대가 운동권식 사고방식에 젖어 있는 건 아니다. 정치의 본질은 ‘싸움’이 아닌 ‘조정’에 있다는 걸 이해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너무 많은 86세대가 ‘나만이 옳고 나만이 정의’라는 아집으로 대화와 타협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사실이다.

상대를 대화 상대가 아닌 굴복시켜야 할 악으로 규정하는 86세대의 태도는 날이 갈수록 거세지는 ‘정치 무용론’, ‘정치 무능론’과 맞닿아 있다. 선거 때마다 ‘단골’처럼 찾아오는 86용퇴론. 이제는 86세대도 왜 자신들이 ‘퇴출 대상’이 됐는지를 한 번 곱씹어봐야 할 때가 아닐까.

담당업무 : 국회 및 국민의힘 출입합니다.
좌우명 : 인생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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