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된 한국 현대추상미술 거장 ‘박서보’ [이화순의 오늘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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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된 한국 현대추상미술 거장 ‘박서보’ [이화순의 오늘의 작가]
  • 이화순 칼럼니스트
  • 승인 2024.01.01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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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단색화를 세계적 반열에 올린 대가 
‘묘법’으로 세계적 명성 얻은 미술 수행자 
지난 2월, ‘폐암 3기’ 사실 SNS에 밝혀 
10월 14일, 92세로 타계…국내외 팬 추모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이화순 칼럼니스트]

추상미술 '단색화'의 거장 박서보 화백의 발인식이 열린 지난 10월 17일 고인의 손자 박지환이 영정을 들고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작업실)을 돌아본 후 장지로 향하고 있다. ⓒ 뉴시스
추상미술 '단색화'의 거장 박서보 화백의 발인식이 열린 지난 10월 17일 고인의 손자 박지환이 영정을 들고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작업실)을 돌아본 후 장지로 향하고 있다. ⓒ 뉴시스

한국 미술계는 큰 별을 잃었다. 한국현대미술의 선구자이자 단색화 거장 박서보(본명 박재홍, 1931~2023). 지난 10월 14일 작고한 그를 다시 추모하고자 한다. 

‘박서보’라는 이름은 늘 한국 단색화와 붙어있다. 세계 미술계에 한국 단색화의 예술적 가치를 널리 알렸던 박서보. 그 덕에 단색화는 ‘Dansaekhwa’로 표기되기도 한다. 

그의 발병이 알려진 것은 지난해 2월 박서보의 페이스북을 통해서였다. 폐암 3기 판정을 받았노라 스스로 밝힌 작가는 “캔버스에 한 줄이라도 더 긋고 싶다”며 “연락하지 말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한국 현대미술의 상징’이자 ‘한국 비구상미술의 선구자’로도 불렸던 박서보는 한국의 단색화를 세계적인 반열에 올려놓은 대가였다. 동양의 전통과 서양 미술의 혁신 사이에서 매개 역할을 하는 그의 작품은 국제 무대에서도 호평받고 있다.  

일본 미술평론가 미네무라 도시아키(峯村敏明, 전 다대미대 미술관장)는 “구미 근대회화와는 근본정신부터가 차이 나는 아시아 민족의 추상회화를 박서보가 만들어내고 있다”고 평가한 바 있다.  

한국 추상미술의 시조로 불리는 김환기는 제자 박서보를 “한국 근현대 미술사를 통틀어 가장 크게 기록될 작가”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몇 년 전 한 작품가격 사이트가 발표한 작품가격 지수에 따르면, 지난 15년간 박서보의 작품은 7.12배 올라 가격 상승률 1위를 차지했다. 동일한 재료로 비슷한 주제를 그린 10호 크기 작품을 기준으로 작성한 것으로 김환기, 김창열, 이우환, 박수근이 그 뒤를 이었다. 

박서보는 1931년 경북 예천에서 4남 2녀의 둘째 아들로 출생했다. 예천은 소백산맥 아래 강한 정기를 머금은 천혜의 자연, 꼿꼿한 충효와 선비 사상으로 역사의 굽이굽이 많은 인재를 배출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박서보의 작품 속에 동서양 미감이 밸런스를 잘 맞추는 것은 그의 핏속에 흐르는 정신적 문화적 자산 덕일지도 모르겠다. 

1961년 유네스코 후원 국제조형예술협회 프랑스 위원회가 주최한 '세계 청년화가 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한 박서보가 세계 청년화가 대회 합동전시회에서 자신의 작품 '원죄(Péché originel) 앞에 서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사진제공 = 박서보재단
1961년 유네스코 후원 국제조형예술협회 프랑스 위원회가 주최한 '세계 청년화가 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한 박서보가 세계 청년화가 대회 합동전시회에서 자신의 작품 '원죄(Péché originel) 앞에 서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사진제공 = 박서보재단

박서보는 1950년 홍익대학교 동양화과에 입학했으나 한국전쟁으로 전공 교수 청전 이상범과 고암 이응노가 사라지면서 1952년 서양화과로 이적했다. 스승 김환기와 운명적인 만남을 했던 것이다.  

1962년부터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강사로 시작해 1997년 정년퇴직할 때까지 홍익대 회화과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교수이자 미술행정가로 활동했으며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부회장, 한국미술협회 이사장과 고문을 지냈다. 1994년 서보미술문화재단을 설립해 뜻을 같이하는 작가들과 한국단색화를 발전시키며 한국 현대미술 국제화의 흐름을 주도했다.      

박서보의 화업은 한국현대미술 60년 발전사와 궤적을 같이 했다. 한국 추상미술을 세계미술 무대에 올린 작가 중 한 명이었다. 젊은 시절 박서보는 대한민국전람회(국전)가 이해관계에 따라 수상작이 안배되는 풍토에 반기를 들었던 ‘반국전 선언’에 반기를 들었던 ‘반국전 선언’의 주역이었다. 1956년 국전 참여 대신 독립 전시를 선택했고, 1957년에는 현대 추상회화의 한 경향인 전위적인 ‘앵포르멜’ 운동을 이끌었다.  

1967년 그는 무수히 많은 선을 긋는 ‘묘법(描法, ecrite)’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연필로 캔버스에 선을 끊임없이 긋는 것이었다. 전기 묘법시대(1967~1989)였다. 이후 박서보는 한지를 풀어 물감에 갠 후 화폭에 올린 뒤 도구를 이용해 긋거나 밀어내는 방식으로 작업한 후기 묘법시대, 그리고 2000년대 들어 자연의 색을 작품에 끌어들인 유채색 작업까지 변화를 거듭해 왔다. 

박서보는 ‘묘법’에 대해 “‘도(道) 닦듯이 혹은 수련하듯 끝없이 인내하는 과정을 통해 탄생하는 작업”이라며 “그림이란 작가의 생각을 토해내는 마당이 아니라 나를 비워내는 마당이며 내가 나를 비우기 위해 수없이 수련하는 과정이 바로 묘법”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묘법’ 시리즈를 통해 한국 단색화 고유의 특성과 개성을 국제 미술계에 소개했고,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미국 뉴욕현대미술관과 구겐하임미술관, 파리 퐁피두센터 등 세계적인 미술관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루이비통이 박서보의 작품을 이용한 핸드백을 2021년 발표했는가 하면, 제주도 서귀포시 호근동 JW메리어트 제주 부지에 ‘박서보미술관’이 대지면적 3700평에 730평 건축면적 규모로 지상 1층, 지하 2층으로 내년 여름 개관 예정이다. 설계는 스페인 출신 건축가 페르난도 메니스가 맡았다. 

주태석 홍익대 명예교수. ⓒ 사진제공 = 이화순 칼럼니스트

하이퍼리얼리즘 계열 작가인 주태석 홍익대 명예교수는 “선생님은 제자들에게 ‘변하지 않으면 추락한다. 그러나 변해도 또한 추락한다’”고 제자들의 용기를 북돋워 주셨다면서 “청년 시절 ‘바로 내가 훗날 이 나라의 대가’라고 큰소리쳤던 선생님이 진정한 대가였다”고 추모했다. 다음은 주 교수의 추도사 전문이다.

소천하시는 날까지도 “캔버스에 한 줄이라도 더 긋고 싶다”하셨던 선생님. “자신을 비우는 것이 작업이다”라던 선생님. 그곳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편히 쉬고 계시지요.  

우리의 정신적 지주셨던 박서보 선생님이 우리 곁을 떠나신지 이제 2개월 반. 그런데 이전에는 선생님의 빈자리가 이렇게 클 줄 상상하지 못했다. ‘한국 현대미술의 개척자’이자, ‘지칠줄 모르는 수행자’란 칭호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변하지 않으면 추락한다. 그러나 변해도 또한 추락한다”고 하셨던 선생님. 청년 시절 “바로 내가 훗날 이 나라의 대가입니다”라고 큰소리쳤던 선생님. 그분은 진정한 대가였다. 

홍익대학교 은사셨던 박서보 선생님의 옆에 있었던 것이 그렇게 대단한 일임을 그때는 미처 몰랐다. 오랜 시간 같은 학교에서 교수생활을 할 때에도 선생님의 큰 모습을 잘 몰랐다. 선생님이 떠나가신 후에서야 진정한 스승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1977년 나를 포함한 제자 40명의 4학년 졸업작품 심사 때였다. 선생님은 “여기서 한 명이라도 작가가 나온다면 나는 성공이라 생각한다”라고 하셨다. 지금까지도 그 말씀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속으로 다짐해본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그 한 사람의 작가가 될 수 있도록 더욱 열심히 나 자신을 채찍질하며 작업을 하겠다고. 먼 훗날 선생님 계신 하늘에서 뵙게 되면 “저도 이제 그 한명의 작가입니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씀 올리고 싶다. 

미술평론가 김영순 씨(전 부산시립미술관장)는 “박서보 화백은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져 온 국전에 대해 ‘반국전 선언’을 함으로써 한국 현대미술의 시작을 선언했다”면서 “이후 세계 미술시장과의 다리 역할을 하며 한국 미술이 세계적인 보편성을 확보하는데 기여했다”고 밝혔다. 

정준모 미술평론가. ⓒ 사진제공 = 이화순 칼럼니스트

또 정준모 미술평론가(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는 “예리하지만 다정했고, 뜨거웠지만 이성적이었던 분으로 글로벌 마켓과의 교량 역할도 하며 자신을 비워 세상을 채운 분이다”라며 “일본이 해외진출의 유일한 교두보였던 70년대부터 지금껏 자신을 찾는 해외미술관과 화랑에 동료 후배를 추천하는 일을 자기 일보다 우선했다”고 추모했다. 박서보는 해외 미술 관계자들에게 자신 외의 한국 작가들도 소개하며 한국 현대미술의 우수성을 깊게 각인시키고자 드러나지 않는 노력을 하기도 했다. 

열정을 다해 열심히 살았던 화가 박서보, 치열하고 뜨거운 삶을 살았던 그가 천국으로 갔다. 그렇게 자신을 비우길 원했던 이가 이제 스스로를 비울 일 없는 곳으로 떠났다. 그는 평생 스스로를 ‘자신’과 자신의 ‘것’과 싸웠다. 그는 자신을 위해 ‘비우는 일’을 평생해 왔지만, 그는 자신을 비운 만큼 차곡차곡 세상을 채워갔고, 주위 사람을 채워주었다. 

그는 예리하지만, 다정했으며, 뜨거웠지만, 이성적이었다. 빠르게 움직였지만 느리게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그는 늘 나누었다. 좋은 재료를 보면 남과 나누었고, 기회가 오면 후배 동료들과 늘 함께했다. 80년대 중반 한국현대작가들의 한지 작업도 100% 닥을 사용한 순수한지를 만들던 장인을 만나 주변 작가들과 나누면서 시작된 일이다. 일본이 해외진출의 유일한 교두보였던 70년대부터 지금껏 자신을 찾는 해외미술관과 화랑에 동료 후배를 추천하는 일을 자신의 일보다 우선했다. 예술 행정가로 예술인의료보험, 1%법, 민족기록화 사업 등의 도입도 당시 미술인들을 규합해 얻어낸 그의 성과다.

그는 기다리기보다 먼저 움직였다. 그의 서슴없는 행동주의는 ‘근대’에 머물던 한국미술을 ‘현대’로 끌어냈다. 생전 환호와 질시를 한몸에 받았지만 결국 한국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며 홀연히 자리를 비웠다. 자신을 비워 세상을 채우던 그의 빈자리가 벌써 허전하다. 누가 그의 빈 자리를 채워 줄수 있을까. 

설치미디어 작가 김홍년 씨. ⓒ 사진 제공 = 이화순 칼럼니스트
설치미디어 작가 김홍년 씨. ⓒ 사진 제공 = 이화순 칼럼니스트

‘화접(花蝶)’ 연작 회화와 설치미디어 작가로 활동하는 김홍년은 “석사때(1983년) 스페인 호안 미로 국제드로잉미술대전에 출품한 작품이 우수상을 받았을 때 지도교수님이 축하해주시면서도 ‘너무 기뻐하지 마라. 좋은 작가들이 큰 상(賞)을 받고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좋은 작업을 하려면 상을 마음에서 완전히 떨쳐버려야 한다’는 단호하게 한 말씀은 평생의 조언이 됐다”고 전했다.  

1983년 가을 새 학기가 시작될 때 스페인에 출품한 작품이 2등(우수상)을 했다. 당시 홍익대 대학원 지도교수셨던 박서보 은사님께서 축하해 주셨고 축하는 은사님의 프랑스 작품 활동과 수상(受賞) 경험으로 이어졌다. 섬세하면서 한편으로 매우 단호하게 “너무 기뻐하지 마라. 좋은 작가들이 큰 상(賞)을 받고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며 “상은 작업과정의 가늠자일 뿐, 더 좋은 작업을 하려면 상을 마음에서 완전히 떨쳐버려야 한다”고 하셨다. 1년 후, 미국에 출품한 작품이 우수상(1984)을 받았다. 국내에서도 몇 개의 수상 소식이 더해졌다. 나는 마치 습관처럼 그때마다 새 출발을 했다.

 “작업 태도도 중요하다”며 은사님께서는 충청도 어느 산사(山寺)에 기거하실 때 경험한 ‘무심(無心)’을 이야기하셨다. “빗자루로 마당을 쓸 듯 마음을 비우면 좋은 작품을 할 수 있다”고 하셨다. 저는 주로 큰 작품을 하고 집중력이 요구되는 작품이어서 때로는 분심(分心)이 든다. 그러면 “마음을 제대로 비웠나!”라며 나를 추스른다. 꼭 은사님과 호흡하는 것 같다. ‘무심’이 ‘작품’과 이어지면 “캔버스와 물감이 각각 개체(個體)가 된다”며 “물감도 재료(오브제)이니 상호 인정하는 구조(構造)로 작업을 확장해 보라”고 하셨다. 지난 40여 년 ‘오브제아트’, ‘설치 미디어아트’로 확장한 다양한 나의 작품에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은사님의 자필편지를 잊을 수 없다. 탐이 나도록 격조가 있게 또박또박 정성을 다해 쓴 편지를 보여주셨다. 작품을 하거나 주요한 일에는 “반드시 정성을 담으라”라고 말씀하셨다. 작가에게 필요한 “사회성과 통찰력”도 말씀해 주셨다. 선물이 아닐 수 없다. 부고를 받고 빈소에 마련된 영정 앞에 큰절을 올렸던 순간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울음보다 탄성처럼 “감사합니다”가 무심결에 먼저 터져 나왔다.

황인 평론가. ⓒ 사진제공 = 이화순 칼럼니스트

평론가 황인은 “현대화랑에서 큐레이터로 일하던 1990년대 초반, 동경화랑의 다바타 유키히토대표와 박서보 등 한국단색화 화가와의 만남을 주선했을 때 박서보 선생님의 처신에서 많이 배웠다”면서 “선생님은 강직해 보이시나 ‘일이 막힐 때는 돌파하려고 끙끙대지 말고 돌아서 가라’는 유연한 자세를 취하셔서 많이 배웠다”면서 스승을 추모했다.

내가 현대화랑에 다닐 무렵인 1990년대 초반의 일이다. 오늘날 단색화가로 불리는 작가 한 분이 현대화랑 본관에서 전시를 가졌다. 오프닝 리셉션에는 일본 동경화랑의 새로운 책임자가 된 다바타 유키히토대표가 와서 박서보, 정창섭, 윤명로, 하종현 등 여러 선생님들과 함께 좁은 원탁에 앉아 있었다. 홍익대 후배 교수들은 원탁에서 3미터쯤 떨어져서 서 있었고 젊은 교수들은 아예 전시장 입구에 서 있었다. 철저한 위계의 동심원이었다.

장난끼가 발동한 나는 박서보선생님과 다바타대표 사이의 빈자리에 불쑥 끼어 들어가 앉아버렸다. 그 자리는 새파란 제자 따위가 앉을 자리가 아니었다. 순간 박서보선생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나는 모른 척하고 오른쪽의 다바타대표와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다. 현대화랑과 동경화랑은 협력하는 관계였다. 당연히 나는 다바타대표를 잘 안다. 나보나 몇 년 연상일 뿐이나 그는 이미 한일미술계에 큰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침묵하고 있는 박서보선생님의 반응이 궁금했다. 미세하게 움직임이 일었다. 박서보선생님의 얼굴은 노기에서 천천히 화기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고개를 내 쪽으로 완전히 돌렸을 때는 환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어느새 그의 오른손은 나의 오른쪽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황인은 자신이 가장 아끼는 제자라고 다바타에게 말했다. 불과 몇초만에 사건의 긴장감은 끝났다.

나는 선생님의 대처방식이 두고두고 떠올랐다. 내가 그였다면 분명 참지 못하고 화를 내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서로의 향후는 매우 어색해졌으리라. 그러나 박서보선생님은 화를 참으시고 고개를 돌린 채 잠시 상황을 판단하고 최선의 해결책을 계산하고 계셨다. 그 모습은 나중에 내게 큰 공부가 되었다. 빠른 상황판단과 유연한 대처능력이 그를 거인으로 만들었다. 수업시간에 박서보선생님은 ‘일이 막힐 때는 돌파하려고 끙끙대지만 말고 돌아서 가라’고 하셨다. 젊을 때는 그 말씀이 싫었는데 나이가 들수록 금언으로 다가온다. 힘들 때는 박서보선생님의 유연한 자세를 떠올린다. 강직해 보이시나 어려운 상황에서는 유연하셨던 박서보선생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박서보는 근대기 불운했던 거장들과 달리, 생전에 최고의 명성과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고 그 달콤함을 누리기도 했다. 하지만, 성공의 결과를 누리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전 일은 아니다. 2015년 베니스비엔날레 병행전시로 열린 ‘단색화’전이 세계 화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한국 미술 대표 인기 작가로 부상했다. 

다만 세계 무대에서 얻은 명성에도 불구하고, 1970~80년대 박정희 정권의 국가 기록화 사업 참여와 전두환 군사정권 하에서 관변 예술단체 간부를 한 이력으로 올해 광주비엔날레가 ‘박서보예술상’ 신설 한 달여 만에 상이 폐지되었다. 이로써 ‘정치 상황에 대한 저항 여부로 작가의 예술 세계를 재단하는 것이 바람직한가’라는 논의점은 우리 사회 과제로 남았다.   

기자는 지난해 3월 2022프리즈서울의 뜨거운 열기에 감동한 박서보가 역시 단색조 회화 작가  김태호(1948~2022)에게 “우리가 해냈다”라며 환한 미소로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던 모습이 눈에 생생하다. 

이화순 칼럼니스트는…

에이앤씨미디어 대표이자 아트&미디어연구소 소장, 현대정책연구원 전문위원이다.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객원교수, 평창비엔날레 홍보위원장, 순천만국제자연환경미술제 홍보위원을 역임했다. 

안산문화재단 이사, 서초문화재단 비상임이사, 음성품바축제 연구위원, 서울교통공사 문화예술철도 자문위원을 지냈다. 예술경영 석사, 경영학 박사. 스포츠조선 문화경제팀 팀장, 시사뉴스 문화 경제 국장·칼럼니스트로, 아트플래너, 아트컬럼니스트, 아트컨설턴트로도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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