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는 거부권 행사, 대통령만의 잘못인가 [기자수첩]
스크롤 이동 상태바
반복되는 거부권 행사, 대통령만의 잘못인가 [기자수첩]
  • 정진호 기자
  • 승인 2024.02.02 18: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유례 없는 극단적 대결구도와 압도적 야당 의석 수, 거부권 행사 많아질 수밖에…숫자의 이면 들여다봐야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진호 기자]

윤석열 대통령이 이태원 참사 특별법에 대한 재의요구권을 행사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이태원 참사 특별법에 대한 재의요구권을 행사했다. ⓒ연합뉴스

1월 30일. 윤석열 대통령이 ‘이태원 참사 특별법(10·29 이태원 참사 진상 규명과 재발 방지 및 피해자 권리 보장을 위한 특별법)’에 대한 재의요구안을 재가했습니다. 취임한 지 채 2년도 되지 않아 벌써 9번째 거부권을 행사한 건데요. 야권은 기다렸다는 듯 일제히 윤 대통령이 ‘거부권 독재’를 하고 있다며 비판의 포문을 열었습니다.

비단 야권뿐만 아니라 언론에서도 윤 대통령이 1987년 민주화 이후 가장 많은 거부권을 행사한 대통령이라면서 비판에 가세하고 있습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7회, 노무현 전 대통령이 6회, 박근혜 전 대통령이 2회, 이명박 전 대통령이 1회 사용한 것과 비교하며 윤 대통령이 유례없는 ‘불통 정치’를 하고 있다는 거죠.

대통령이 국회를 통과한 법안에 거부권을 쓰는 게 바람직한 일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입법권은 국회의 권한인 만큼, 권력분립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본 질서를 지키기 위해 거부권은 매우 신중히 행사돼야 합니다. 윤 대통령이 취임 1년 8개월 만에 9차례나 거부권을 내민 건 분명 비판 받을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횟수’에 주목하는 행태 역시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현재 우리 정치가 극단적인 진영 논리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건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대화와 타협보다는 무슨 수를 써서든 상대를 굴복시키려 하는 태도가 팽배합니다.

여기에 의석수는 야권이 원하는 모든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을 만큼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과거 대통령들과는 처한 정치 환경이 완전히 다르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내민 9개 법안은 모두 여야 합의 없이 야권이 국회에서 단독으로 처리한 법안이었고, 그 가운데는 여러 부작용 우려로 문재인 정부조차 추진하지 않았던 것들이 포함돼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전후 맥락을 보지 않고 그저 거부권 행사 횟수가 많다는 점만 비판하면서 윤 대통령을 ‘역사상 가장 비민주적 대통령’으로 평가하는 건 합리적인 추론이 아닙니다. 자칫 다수 야당의 법안 단독 처리에 대한 유인을 강화할 소지마저 있습니다. 대통령을 독주 프레임에 가두고 선거에서 유리한 구도를 만들기 위해 정부여당이 결코 수용할 수 없는 법안을 밀어붙이는 유혹에 빠질 공산이 커진다는 거죠.

이런 정치 문화의 형성은 국민에게 악영향을 미칩니다. 국회가 법안을 처리할 때는 숙의(熟議)가 필요합니다. 법은 국민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규범이므로, 장단점이 무엇인지, 부작용은 무엇인지, 누가 어느 정도의 수혜를 입고 누가 어느 정도의 피해를 입는지를 충분히 생각하고 논의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일방의 의사만으로 추진되는 법안은 이런 절차가 제대로 지켜질 리 없습니다. 수혜를 입는 쪽과 피해를 입는 쪽의 갈등만 격화시켜 놓고 정작 법안은 통과되지 않는 악순환의 고리가 형성될 가능성이 높다는 뜻입니다. 이미 야당의 단독 처리와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가 반복되는 과정에서 집단 간 갈등이 위험 수위까지 다다랐던 사례가 있죠.

대통령의 거부권의 행사는 최소화되는 게 좋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거부권 행사 횟수만으로 대통령의 비민주성을 질타하는 건 다수 야당이 국민을 위한 법안이 아닌, 정략적 법안 제정을 밀어붙이게 만들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가 ‘숫자’ 너머의 이면을 촘촘히 들여다볼 때, 정치권도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게 되지 않을까요.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