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와 DJ로 보는 적과의 동침과 정계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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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와 DJ로 보는 적과의 동침과 정계개편
  • 윤진석 기자
  • 승인 2013.11.22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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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가장 큰 정계개편으로 대통령이 된 사례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윤진석 기자)

안철수 신당 창당이 임박한 가운데 내년 지방선거를 기점으로 크든 작든 정계개편이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일반론이다. 민주화 세력의 양대산맥이었던 상도동·동교동계가 주축으로 해서 결성된 국민동행의 행보도 예사롭지 않다.

과거 제3당 출연으로 성공한 경우가 있다면, YS(김영삼)가 이끄는 신민당이 민한당을 누르고 야권을 교체한 경우, DJ(김대중)의 새정치 국민회의가 민주당을 제치고 제1야당이 된 경우, 또 열린우리당이 집권당의 힘을 받고 총선에서 압승을 거뒀던 경우가 있다.

이중 YS와 DJ는 적과의 동침을 전제로 한 정계개편을 통해 대통령이 된 대표적 인물이다. YS는 3당 합당을 통해, DJ는 DJP(김대중+김종필)연대를 통해 각각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를 열 수 있었다. YS와 DJ는 어떤 정계개편 과정을 통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는지 되짚어 본다.

가장 큰 정계개편 3당 합당

1990년 1월 22일 민정당, 민주당, 공화당 등이 모인 3당 합당은 우리나라 정치 역사상 가장 큰 정계개편이다. 12·12를 일으킨 노태우, 5·16 군사정변을 주도한 JP(김종필), 그리고 이들과 평생을 싸워 온 민주세력인 YS가 합당했다는 점에서 이를 야합이라고 비판하는 시선도 적지 않다.

하지만 군사정부의 과도기 체제인 노태우 정권을 지나 문민정부를 출범한 YS가 군정 종식을 완전히 이뤄냈기에 이후의 DJ·노무현 정부도 나올 수 있었다는 지적이다. 이와 관련 <시사오늘>은 YS가 3당 합당을 하기까지의 우역곡절에 대해 기술한 바 있는데, 그 내용을 옮겨보면 아래와 같다.

▲ 김영삼은 3당합당을 통해 자신의 염원이던 군정종식을 이뤄냈다.ⓒ김영삼 자서전

"대통령직선제 아래에서 치러진 1987년 13대 대선의 가장 큰 이슈는 ‘군정종식’이었다. 군출신인 집권여당 민정당 노태우 후보에 맞서 야당이었던 통일민주당에는 김영삼과 김대중이라는 두 대권주자가 있었다. ‘군정종식’을 위해서는 야권단일화가 필수적이었다. 단일화를 위해 경선은 불가피했고, 결국 걸림돌은 ‘미창당 지구당을 어떻게 배분하느냐’였다.

통일민주당은 56곳의 창당 지구당과 36곳의 미창당 지구당으로 나눠져 있었다. 통일민주당이 대선후보 경선을 치르기 위해서는 36곳 미창당 지구당 조직책을 만들어야 한다. 상도동 측 김동영은 50대 50으로 하자며 18곳씩 동교동과 나눠서 임명하자고 했다. 반면 동교동 측 대표였던 이용희는 창당지구당의 지구당위원장 수가 상도동이 많다며 23곳을 달라고 했다.
하지만 10월 22일 후보 경선을 단판짓기 위해 외교구락부에서 DJ와 만난 YS는 동교동 측 안을 수용해 버렸다.

그러나 둘은 끝내 야권단일화를 이뤄내지 못했다. 아예 통일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자체가 없었다. DJ가 ‘4자필승론’을 내세우며 평화민주당을 만들어 딴 살림을 차렸다. 4자필승론은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 대선에 참여하면 김대중이 당선된다는 논리다. 영남에서 노태우와 김영삼이 표를 나눠 갖고, 충청에선 김종필이 표를 독식하면, 호남과 수도권에서 절대적 지지를 얻은 DJ가 당선된다는 논리다.

1987년 13대 대선에서 민주세력 간의 분열로 정권을 잡지 못했다는 국민의 비판에 직면한 김영삼은 총재직을 버렸다. 총재직을 버린 후 김대중이 이끄는 평민당과의 합당을 추진했다. 그리고 민주당과 평민당 간의 야권통합 협상 기구를 발족했다.

평민당은 양당이 합당하기 위한 조건으로 소선거구제를 요구했다. 당시는 한 선거구에서 2명을 뽑는 중선거구제였다. 사실 전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민정당이나 민주당은 중선거구제로 13대 총선을 치를 경우 1당과 2당은 떼놓은 당상이었다.

군정종식을 위해서는 야권통합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김영삼은 평민당의 안을 수용해 버렸다. 하지만 민주당과 평민당의 합당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소선거구제 아래에서 치러진 1988년 4월 총선에서 평민당은 제1야당 자리에 올랐고, 민주당은 제2야당으로 추락했다.

그리고 노태우의 공약이었던 중간평가를 노태우와 제1야당 총재인 김대중 간의 청와대 회동으로 인해 백지화시켜 버리자 김영삼과 김대중 간의 믿음은 사라져가기 시작했다. 김영삼은 ‘호랑이 굴에 들어가 호랑이를 잡겠다’는 말로 민주당 지구당위원장을 설득하며 3당합당을 추진했다.

3당합당을 통해 1992년 김영삼은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김영삼이 그토록 염원하던 군정종식이 3당합당이라는 정계개편을 통해 이뤄진 것이다."(시사오늘 4월 29일자 3당 합당으로 김영삼, 1992년 대통령 올라 中)

YS가 외부 인사 영입으로 정치에 입문했던 황병태 전 의원은 <격동 50년, 이제는 말한다>라는 책에서 YS의 3당 합당 추진 배경에 대해  "YS는 여소야대의 4당 체제 정국에서는 군부가 다시 등장할 수 있다고 보았다. YS는 그것을 가장 겁냈다. '만약 군부가 다시 들어오면 역사는 10년 후퇴하는 거다. 그것을 막아야 한다'는 강한 집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 정국 안정이 필요했다"고 강조한 바 있다.

YS의 최측근인 김덕룡 전 한나라당 원내대표도 같은 책에서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이후에도 YS와 DJ가 손잡을 가능성이 없었다. 그렇게 되면 민주화 세력과 야당 세력의 분열을 틈타서 군정 세력 또는 그 비호를 받는 세력이 집권하는 것은 너무도 뻔한 일이었다"며 "그래서 어떻게하든 민간정부를 탄생시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김 전 원내대표는 이어 "호랑이를 잡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냐, 하고 YS가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 3당통합"이라며 노태우 전 대통령은 대통령에 물러난 뒤의 사후보장을, YS는 군정종식과의 완전한 결별을, JP는 내각제 개헌을 통해 권력을 잡아보려는 생각으로 3당통합을 했고, 그 결과 문민정부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그러면서도 "그 당시 민자당을 만들어 놓고도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며 "끝내 대통령 선거를 치를 때까지도 화학적 결합은 못 했으며 통합의 앙금이라고 할 수 있는 세력간의 갈등이 계속되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갈지언정 군사정권과 타협할 수는 없다고 약속한 YS등 민주세력으로서는 예고된 갈등일 수밖에 없었다는 분석이다.

DJP연대의 효과

1992년 14대 대선에서 YS에 패한 DJ는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잠시 영국으로 외유를 떠나는 등 정치일선에서 물러났지만 1995년 6월 지방선거를 계기로 '지역등권론'을 등에 업고 사실상의 정계복귀를 재개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민주당은 이미 차기 대권후보를 염두에 둔 이기택 당대표와 그를 지지하는 반DJ계가 기득권으로 있을 때였다. 따라서 DJ의 도움을 얻은 민주당이 지방선거에서 큰 승리를 거뒀음에도 정계복귀를 선언한 DJ의 힘은 당내에서 견제받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DJ는 이기택 대표와의 갈등을 극복하지 못한채 민주당을 탈당하고 새로운 정치세력화를 도모하게 된다. 민주당 내 친DJ계 세력과, 은퇴 당시 활동 기반이 됐던 아태재단 인사들, 그리고 구민정당의 한 계파를 형성하다 새한당을 창당했던 이종찬계 인사들과 힘을 모아 1995년 7월 새정치 국민회의를 창당한 것이다.

이후 국민회의는 DJ가 맹주로 있는 호남지역을 기반으로 15대 총선에서 국민의 지지를 받고 민주당을 제친 제1야당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이에 탄력받은 DJ는 1997년 대선에서 김종필 자민련 후보와의 DJP연합을 통해 호남과 충정지역에서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DJP연대의 조짐은 1995년 지방선거때부터 있었으며 그 효과는 서울시장 선거를 통해서도 드러난 바 있다. 서울시장 선거에서 돌풍을 일으켰던 무소속 박찬종 후보가 조순 후보에게 패한 이유가 DJP연대  때문이었던 것이다.

"서울 지방선거에서 박찬종 후보는 선거초반 조순 후보를 월등히 앞서 나갔다. 당선이 곧 눈앞에 다가온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선거중반 김대중(DJ) 아태재단 이사장이 지원유세에 나서면서 판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여기에 선거 막판 JP가 민주당 조순 후보를 지지하면서 전세가 완전히 역전됐다. 박 후보는 당시의 패인을 이렇게 분석했다.

'당시 JP가 민주당 후보 지지선언을 한다고 하더라도 판세에 큰 영향을 못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서울에서 자민련의 영향력과 충청도 연고의 유권자들에 대한 장악력이 대단치 않은 것으로 판단했다.
결과를 놓고 볼 때 그것은 완전한 판단 착오였다.

내표 중 1%가 상대후보에게 가면 결과적으로 2%의 변동이 생긴다. 자민련의 민주당 지지선언은 최소 5~6%의 득표변동을 가져왔다. 특히 지역주의가 심화됐던 당시 선거 때 JP의 지지선언은 나에게 완전 치명상을 안겨줄 수 있는 것이었다.'"(시사오늘 2010년. 5월24일자.리뷰 지방선거 中)

이 시기 JP는 YS와의 갈등으로 민자당을 탈당한 후 지역정당을 기반으로 한 자유민주연합을 창당, '핫바지론'을 내세워 충청권을 석권했다.

이처럼 DJ와 JP는 95년 지선을 계기로 선거 공조에 나섰고 YS가 이끄는 신한국당을 압박했다. 이후 정권창출을 목표로 97년 대선에서 내각제를 고리로 한 DJP연대를 도모했고, 이들 양김은 97년 대선을 앞둔 10월 '99년 말까지 내각제 개헌을 완료한다'는 등의 약속을 통해 DJP연대를 이뤘다.

당시 DJP연대를 만드는데 중심 역할을 했던 동교동계인 한광옥 전 민주당 대표는 예전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10월 중순까지도 자민련과의 줄다리가가 멈추지 않았다"며 "결국 김용환 자민련 부총재에게 우리끼리 합의를 한 후 합의문을 두 사람(DJ·JP))에게 들이 밀자고 했다. 결국 모 호텔에서 김 부총재와 만나 합의문 초안을 만들어 검토한 사후에 두 사람에게 결재를 받았다"고 회고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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