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과 화합…‘늘 그가 있었다’ [YS서거 8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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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과 화합…‘늘 그가 있었다’ [YS서거 8주기]
  • 김자영 기자
  • 승인 2023.11.15 11: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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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민추협서 DJ 동교동계와 지분 동등히 나눠
신민당, 비민추협계 포함 소수 계파 모두 아울러
‘보수’ 가치 공유한 민정·공화당과 3당합당 결단
문민정부, 5·18 유족 명예 회복…국민통합 힘써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김자영 기자]

ⓒ 시사오늘 (그래픽 = 정세연 기자)
<시사오늘>은 YS 서거 8주기를 맞아 그가 남긴 ‘통합과 화합’의 메시지를 살펴봤다. ⓒ 시사오늘 (그래픽 = 정세연 기자)

대화와 타협의 정치가 복원돼야 한다는 목소리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는 요즘이다. 갈등을 조정해야 할 정치가 오히려 이를 조장하고, 진영 논리에 올라탄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국민들의 정치 불신은 날로 높아지고 있다. 

30년 전, 국민을 바라보며 큰 정치를 했던 인물이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YS)이다. <시사오늘>은 YS 서거 8주기를 맞아 그가 남긴 ‘통합과 화합’의 메시지를 곱씹어 보기로 했다.

김영삼의 정치생애는 크게 세 시기로 나눠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반독재 투쟁기, 다음은 민주화 이후 가치 중심의 3당합당을 통해 대권을 잡기까지의 과정, 마지막은 대통령 취임 이후 개혁을 이룬 시기다. YS는 모두 통합에 방점을 찍었다. 

우선 민주화 투사로서의 YS다. 1954년 26세 젊은 나이에 국회의원이 된 YS는 사사오입 개헌이 이뤄지자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 “3선 개헌은 안 된다”고 직언한 뒤 자유당을 탈당한다. 이후 길고 긴 야당 생활이 이어졌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1972년 유신까지 감행한다. 이때 YS는 반유신 투쟁을 하다 정권의 눈엣가시가 돼 의원직에서 제명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은 국민의 분노를 촉발해 ‘부마항쟁’으로까지 이어졌다. 

10·26 사태로 유신체제는 막을 내렸지만, 전두환은 또 한 번의 쿠데타를 일으켰고, 수많은 야권 인사들의 정치 활동을 금지했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이 YS는 막지 못했다. 23일간 단식이라는 비폭력 투쟁 방식으로 ‘민주주의 실현’이라는 자신의 의지를 드러냈다. 

폭압적 군사정권 아래에서 민주 세력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하지만, YS의 단식 투쟁은 당시 미국에 있던 김대중 전 대통령(DJ)의 지지까지 이끌어내며 소위 ‘상도동계와 동교동계의 결집’을 이뤘고,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창설로 이어졌다. 이후, ‘반독재 투쟁 세력’이 헤쳐 모여 만든 신민당은 12대 총선에서 수도권에서 압승, 관제 야당을 제치고 제1야당으로 올라서며 파란을 일으켰다. 

민추협 창설과 신민당 창당 과정에서 YS의 통합정신은 빛을 발했다. 민주화 세력 규합 계기를 만든 건 자신의 단식 투쟁이었지만, YS는 민추협 권력 지분을 DJ의 동교동계와 절반씩 나눴다. 신민당을 창당할 땐 상도동계, 동교동계 뿐만 아니라 이철승계·신도환계·김재광계, 이민우, 이기택 등 야권 소수 계파와 함께했다. 신민당의 지분 또한 민추협계와 비민추협계가 동등하게 나눴다. 

당시 YS와 함께했던 김덕룡 김영삼민주센터 이사장은 11월 10일 <시사오늘>과 통화에서 “YS는 야권이 단합하고 국민을 통합해야 군부 통치를 단절시킬 수 있다고 봤기 때문에, 상도동계와 동교동계 지분을 50대 50으로 해서 민추협을 만들었다. YS가 정치 규제에 묶여 12대 총선에 나가지 못할 때에도 민주 세력의 선거 승리를 우선으로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선 범야권 통합이 중요하다 보고 과거 사쿠라 세력이라 지탄받은 비민추협 세력과도 동등하게 지분을 나눠 신민당을 창당했다”며 “통합의 정신이 민주 시대를 연 것”이라고 전했다.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지난 10월 4일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신민당을 만들 때 민추협 세력만 있었던 게 아니라 이철승을 비롯한 비민추협 세력도 함께 했다. 그런데 이들은 유신 체제하 신민당 내에서 김영삼과 완전히 등졌던 사람들이다. 그런 이들에게 YS는 함께 하자고 했다. ‘독재에 반대하는 세력은 하나로 집결하자. 같이 가자’라는 이 메시지는 대단한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군정종식’ 위해 DJ와 ‘야권 통합’ 끊임없이 노력


ⓒ 시사오늘 (그래픽 = 이근 기자)
ⓒ 시사오늘 (그래픽 = 이근 기자)

1987년 6·29 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뤄졌다. 하지만 그해 대선에서 양김은 단일화 불발로 각각 독자출마했고 YS는 2위로 패배한다. YS는 대선이 끝난 뒤 곧바로 야권 단일화 작업에 돌입했다. 그 과정에서 YS의 통일민주당과 DJ의 평화민주당은 ‘선거구제’ 문제로 갈등한다. 

YS는 ‘무조건 통합’을 주장한 반면, DJ 측은 ‘소선구제 합의 후 통합’을 요구했다. YS 측근들은 소선거구제로 총선을 치를 경우 원내3당으로 추락할 것이라며 수용을 반대했다. 하지만 YS는 ‘군정 종식을 위해 야권 통합을 해야 한다’며 소선거구제 수용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통합 협상 최종안에 도장을 찍기로 한 날, 회동 장소였던 서울 마포구의 한 호텔에서 느닷없는 소요 사건이 벌어진다. 협상은 중단됐다.  결국 소선거구제만 내주고 통합은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1988년 총선에서 민주당은 원내 3당으로 추락했다. 

1989년, YS와 DJ는 노태우 정부 중간평가 여부를 두고 의견 차이를 보였다. YS가 조속한 중간평가 실시를 주장했던 반면 DJ는 뒤늦게 중간평가 유보를 결정한다. YS는 DJ와의 통합을 끊임없이 갈망했지만, 일련의 사건을 겪은 뒤 더 이상 함께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는 1989년 12월 23일 가진 송년 인터뷰에서 ‘5공 청산이 종결된 이후에도 야3당 공조체제를 유지할 생각이냐’는 취재진 질문에 “청와대 회담 이틀 전 야3당 총재회담에서 합의 본 것도 안 지킨 사람이 있는데 무슨 야3당 공조예요…. 다만 무슨 일이든 국민에게 보탬이 되는 차원에서 판단하겠습니다”라고 답한다. 그리고 얼마안가 정치권을 뒤흔드는 ‘3당합당’ 결정을 발표한다. 

 

YS, 6·29 선언 이후 “민주 대 반민주 사고 벗어나야”
보수성향 민정·민주·평민·공화4당, 이념 차이 없어 통합 가능


1987년 6·29 선언으로, 이전에 작동한 군사독재세력 대 민주화세력 대결 구도는 지역주의 구도로 넘어갔다. 김영삼은 “1990년대에는 새출발을 해야 한다. ‘민주 대 반민주’로만 보는 것은 옳지 않다. 민주화로 가고 있는 만큼 그런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야권 통합 차원을 넘어 보다 폭넓은 통합작업을 추진하는 ‘大정계개편’을 고민했다. 

YS는 1990년 1월 12일 ‘정책연합’을 제의한 노태우에게 ‘신당 합당’을 제안한다. 노태우는 그 제안에 응했다. 여소야대 국회로 국정 운영에 어려움을 겪던 노태우 정부로서도 어떤 식으로든 불리한 정치 상황을 극복해야 했다. 게다가 민정당·민주당·공화당은 이념적으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의 가치를 갖는 성향이었다. 때문에 3당 합당 과정에서 정치이념의 문제는 없었다. 물론, 당시엔 평민당도 보수로 보는 시각이다. 하지만 DJ에게는 4대불가론(영남·기업인·공직자·군인의 반대)이란 정서가 존재했다.

노태우는 회고록에 “정치지도자들의 성향으로 보아 김영삼 총재, 김종필 총재는 보수 성향이라 할 수 있었다. 따라서 민정·민주·공화 3당이 합당하면 가장 이상적”이라고 봤다고 기록했다. 

김덕룡 이사장은 “1980년대 당시 민정·민주·평민·공화 4당은 지금 시각에서 보는 보수냐 진보냐의 이념적 차이가 있는 정당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정당 지도부가 군사 쿠데타 세력이었느냐 민주화 운동 세력이었느냐’ ‘정당이 어느 지역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느냐’의 두 가지 차이가 영향을 끼쳤음을 설명했다. 

1990년 1월 22일 3당 합당 결정을 발표하고 가진 기자들과의 문답에서 YS는 “그간 독재타도를 위해 싸워 왔으나, 80년대를 넘기고 90년대를 맞이하면서 여야를 초월해 혁명적 변화를 기할 수밖에 없게 됐다. 지금부터는 대결의 시대를 청산하고 민주화를 완결하는 시대로 가야 한다. 이제는 여당도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고 말했다. 3당통합 후 첫 국회 연설에선 “정쟁과 대결의 정치를 극복하고 대화의 정치, 동반의 정치를 위한 결단을 내리게 됐다”고 전했다. 독재 대 반독재에서 벗어난 대통합을 실행했다.

“내가 야당 지도자로 남는 것은 현상에 안주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차라리 손쉬운 선택이었다. 그러면 누가 국가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겠는가. 

설령 쿠데타의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1992년 예정대로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다 하더라도, 야당은 또다시 분열될 것이 불 보듯 분명했고, 지역감정은 더욱 악화될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또다시 군부세력이 집권, 군정종식의 시대적 요청은 외면될 것이다. 세계는 냉전시대를 마감하고 있는데, 우리는 냉전시대의 청산은 커녕 30여 년 계속된 군부통치의 망령을 버리지 못한 채, 역사의 후퇴와 지체 속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이다. (중략) 

평생 민주주의를 위해 싸워 온 나는, 쿠데타 정권의 재등장을 막고 이 땅에 영원한 문민정부를 세우기 위해, 제3의 길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3권 239~241쪽. 

YS 차남 김현철 김영삼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은 11월 9일 <시사오늘>과의 통화에서 “3당합당은 민주화 온건파 YS와 군부 온건파 노태우 두 사람의 역사적 대타협이었다”며 “군사 쿠데타와 그에 따른 민주 세력의 저항으로 유혈사태가 많았다. 3당통합은 얼룩진 현대사를 청산하고 무혈혁명을 통해 우리나라 군사 문화를 정리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전했다. 

김 이사장은 또한 “아버님(YS)은 군사독재 정권 시절 투쟁하면서도 타협과 대화의 문을 상시 열어놓고 있었다”고 강조했다. 

김덕룡 이사장은 “YS는 군정 종식이라는 목표 아래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는 생각으로 이를 돌파하려했다. 지역주의로 정당이 분열된 상황에서 민주화 시대를 열기 위해 3당 통합을 이용한 것이 YS의 ‘민주화 전략’이었다”고 말했다.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는 같은 날 통화에서 “정치는 기본적으로 협상과 타협이고, 통합이다. 화해를 통한 통합. 국가의 주인인 국민을 보고 정치해야 한다. 그게 김영삼의 정치이기도 하다”며 “민주화 세력도 과거 권위주의 세력과 손잡았다. 그것도 화해를 통한 통합의 하나”라고 전했다. 

 

YS, 진영 초월 ‘국민’ 바라본 대통령 본보기 돼
“국민 통합 힘써…지지층 결집 몰두 현정치와 달라”


YS는 대통령이 되어서도 ‘국민통합’에 힘을 쏟았다. YS는 집권 후 지지층만을 위한 행보를 걷지 않았다. 

5·18 문제 해결을 위한 거침없는 발걸음이 이를 증명한다. YS는 1993년 5·13 특별담화에서 “1980년 5월 광주의 유혈은 이 나라 민주주의의 밑거름이 되었다”며 “오늘의 정부는 광주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 위에 서 있는 민주정부”라고 선언했다. 5·18 정신을 기려 망월동 묘역 민주 성지화, 기념공원 조성 등을 약속했고, 피해자 명예 회복을 돕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또 YS는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해 ‘역사바로세우기’ 작업을 했다. 전두환과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하며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받을 수 있다’는 선례를 남겼다. 

정세운 시사평론가는 “YS는 3당합당을 통해 지지기반을 TK·충청으로 넓혔다. 5·18 민주화 운동 관련 역사바로세우기, 전·노 구속 등은 지지층의 반발을 일으키는 조치였다. 그런다고 호남으로 지지세를 확장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지만, 단행했다. 현재 지지층 결집에 몰두하는 정치와 다르게 ‘국민 통합’을 추구한 것”이라고 전했다. 

현 정치권에선 표가 되는 곳, 되지 않는 곳에 따라 정치인이 방문하는 장소나 정책에 대한 목소리가 달라지기 십상이다. 이런 행태에 대해 YS계 인사들은 YS정신 복원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김현철 이사장은 “현재 정치가 양극단으로 치닫고 있어 우려스러운 상황이다. 정치 요체는 대화와 타협인데, 그런 정신이 여야를 막론하고 완전히 실종됐다. 아버님이 유언으로 남긴 ‘통합과 화합’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국민이 김영삼이란 지도자에 대해 깊은 신뢰를 가졌기에 군사정권과의 타협에도 불구하고 지지를 보내줬다는 점도 짚었다. 

김무성 전 대표는 “현재 정치권은 상대를 죽일 듯이 바라보는 극한 대립을 이어간다. 좌우 진영대결에 아무것도 이뤄지지 못한다. 국민의 실망감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정치가 국민의 관심에서 멀어져도 정치인들이 진영의 벽을 높이 쌓고 그 안에서 살림한다. 국민에게 물어보면 국회가 만악의 근원이라고도 한다”며 “지금이라도 방향을 바로 잡아야 한다. 김영삼 대통령이 지난날을 돌이켜보며 마지막으로 화해와 통합을 말했다. 그렇게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덕룡 이사장은 “과거 민주 대 반민주 세력이 싸울 때, 민주 세력은 쿠데타 세력과도 만나서 대화했다. 그래선 안된다고 나무라고 질책하면서도 대화의 통로를 열어뒀다. YS가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부정축재와 부패가 폭로된 것을 도저히 보고 있을 수 없어 역사 바로세우기 차원에서 재판에 회부했지만, 임기가 끝나기 전 결자해지 정신으로 사면했다. 이 또한 국민통합을 위한 생각의 일환이었다. 그런데 현재는 대화와 타협을 해야할 정치권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갈등과 극한 대립으로 치닫고, 국민을 통합해야 할 정치가 도리어 국민을 분열시키는 데 앞장서는 듯해 답답하게 생각한다”며 “YS가 임종 전에 말한 것이 ‘통합과 화해’”라고 다시금 부각했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생각대신 행동으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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