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가 장악한 동아시아 외환위기 [특별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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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가 장악한 동아시아 외환위기 [특별기고]
  • 조찬옥 (사)민주화추진협의회 사무총장
  • 승인 2023.12.03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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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조찬옥 (사)민주화추진협의회 사무총장]

25년 전 한국이 국가부도 위기로 인해 IMF로부터 구재금융 양해각서를 제결한 1997년 12월 3일 이었다. 국제사회에서 자국의 이익에는 우방도 동맹도 존재치 않고 처절한 정글의 약육강식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아편전쟁 당시 영국 수상이던 파머스턴 경의 유명한 말처럼 미국을 비롯한 패권 국가에게 영원한 친구나 동맹은 없고 오직 영원한 이해관계만이 존재할 뿐이다. 아시아의 금융위기보다 앞서 1994-95년 멕시코에서도 금융위기가 발생하였다.

1994년 8월 멕시코 페소화는 30센트의 가치가 있었으나 1년 후 이는 단지 16센트의 가치밖에 안 되었다.1994년 멕시코는 부상하는 국가로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체결되어 미국 캐나다 멕시코 사이의 장벽이 낮아지고 멕시코 경제의 장래에 자신감이 쌓여가고 있었다.

세계 각국의 투자자들은 멕시코 정부와 기업에 대부를 제공해 주려고 열망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인 사태가 곧 이런 사태를 변화시켰다. 멕시코 치아파스 지역에서 발생한 폭력사태는 멕시코 정치상황이 매우 불완전한 것처럼 보였다. 이때 유력한 대통령 후보자 루이스 도날드 콜로시오가 살해 가 되었다.

정치적 장래는 더욱 불안한 것처럼 보였고 많은 투자자들이 멕시코 국가에 대해 보다 큰 규모의 위험 할증을 부과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위험 할증이 증가해도 페소의 가치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왜냐하면 멕시코는 고정환율제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멕시코의 외환보유고가 너무 적어 고정환율제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투자자들은 멕시코의 정책입안자들을 더욱 불신하게 되었고 앞으로 일어날 멕시코의 화폐 평가절하를 우려하게 되었다. 멕시코는 1994년 말 금융개혁을 통해 자유변동환율제로 전환하면서 모든 외환 거래는 시장에서 거래되는 환율로 거래할 수 있게 되었다. 페소위기가 닥친 상황에서 외환 시동에 대한 규제 필요성이 대두되었으나 위기 이후 페소화가 정상화 되면서 외환규제는 정상화 되었다.

멕시코의 경제가 금융위기로부터 벗어나고 있었던 1997년 말경에 태국 한국 특히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몇몇 아시아의 국가들에서 유사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동아시아는 장기간에 걸친 고도성장을 이루었고 공평한 소득분배를 통해 불균형을 축소하였으나 1997년 동아시아는 외환위기를 맞게 되었다.

1997-98년 일어났던 금융위기는 아시아의 호랑이들의 경제를 불구로 만들기 위한 정치적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주된 타 깃은 미국의 달러 시스템에 위협으로 자리 잡은 한국을 비롯 동아시아 국가였다. 이처럼 미국이 중남미 국가 외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신흥 산업 국가들을 달러체제 안에 묶여 두기 위해 헤지펀드와 국제통화기금(IMF)을 앞세워  외환위기를 일으켰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실제로 이러한 사실은 IMF가 멕시코 외 동아시아 국가 특히 한국사회에 끼친 경제사회적 업적들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1997년 동남아 외환위기는 1980년대 중반 이후 고도성장에 익숙해 있던 동남아에 큰 충격을 주었다.

동남아 외환위기의 원인을 단일한 요인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동남아시아는 경제적으로 개발도상국이 많고 수출 주도형을 기반으로 높은 경제성장율을 보이고 있었다.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태국 등 동남아 선발국들은 투자나 수출의 담당자가 자국기업이라기보다는 다국적기업이었다.

다국적 기업들은 현지의 저렴한 생산 요소를 활용하여 대량생산형 조립 산업에 진출했는데 필요한 부품이나 중간제를 현지에서 조달하기 보다는 모기업 혹은 모국에서 수입하고 생산된 제품은 미국 등 선진국으로 수출하는 방식으로 기업을 운영해 왔다. 이와 같은 다국적기업이 주도하는 동남아시아의 경제발전은 싱가포르나 말레이시아에서1970년대 시작되었으나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에는 동남아 전역에 꽃을 피워 1990년대 초반까지 동남아의 고도성장을 이끌었다.

그러나 다국적 기업이 주도하는 동남아 선발국의 경제발전은 취약점을 갖고 있었고 기술 기반이 강화되지 못하면서 부품산업이 발달하지 못해 최종 제품은 소득탄력성보다는 가격탄력성이 높은 상품이 되었다. 현지기업은 주로 화교기업으로 정부와 밀착하여 내수 일부 분을 독과점화 했고 부동산. 유통. 금융 부분에 집중하면서 수출부분은 다국적 기업에 맡겨 두었다.

그러나 다국적 기업은 현지의 저렴한 인건비를 활용했을 뿐 기술 이전은 하지 않았다. 그 결과 동남아는 중소기업이나 부품산업이 발전하지 못해 고 중간재나 부품을 해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나 수출이 늘어나고 경제가 성장했으나 무역수지 적자만 증가하였다. 또한 환율 변동은 동남아의 중저급 제품 수출 경쟁력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97~98년 일어났던 아시아 금융위기는 아시아 호랑이들의 경제를 불구로 만들어 버리기 위한 정치적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픽사베이
1997~98년 일어났던 아시아 금융위기는 아시아 호랑이들의 경제를 불구로 만들어 버리기 위한 정치적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픽사베이

특히 일본 엔화 환율 변동은 동아시아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면서 철저하게 자국의 이익에 충실한 대외정책을 펴온 미국이 일본과 중국을 비롯한 도전세력들을 어떻게 응징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중동과 아프리카 중국의 내전을 이용해 정치 경제적으로 어떻게 유리하게 판도를 바뀌어 나가는지 였다. 타깃 차이나의 저자인 F. 윌리엄 앵달의 1997~98년 일어났던 아시아 금융위기에 대한 배경을 한국 호랑이 길들이기라고 설명하고 있다.

1997~98년 일어났던 아시아 금융위기는 아시아 호랑이들의 경제를 불구로 만들어 버리기 위한 정치적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우선 1997년 외환위기는 비단 한국에만 일어난 외환위기는 아니었다. 1997년에는 태국. 인도네시아. 한국 등 IMF의 지원을 받은 3국 외에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의 경제성장은 마이너스 성장이었고 비교적 안정적이라는 중국조차 경제성장률이 7%대로 추락하였다. 이러한 외환위기의 원인으로는 먼저 경상수지 적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실물경제 측면에서 찾아보면 무엇보다 막대한 경상수지 적자가 주요인이었다.

아시아의 경상수지 적자는 대부분 무역수지 적자에서 나오고 무역수지 적자는 아시아의 경제구조가 조립가공형의 산업구조를 갖는데서 출발했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무역수지 적자는 경기가 활황을 보일 때 즉 수출이 활기를 가져을 때 오히려 확대되는 면이 있다.  동아시아는 당시 20여 년간 고도성장으로 절대 빈곤 인구가 급속히 감소하여 세계의 다른 지역에 비해 경제개발의 과실이 공평하게 배분되었다.

그러나 아시아의 금융위기는 1997년 중반에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몇 달 동안 태국 바트화의 평가에 대한 우려가 있었고 결국에는 그것이 상당한 자본유출로 이어졌다. 그러나 좀더 일반적으로 동아시아는 10년 이상 엄청나게 높은 경제성장률을 유지했었다. 그와 동시에 인플레이션은 억제되었고 예산 및 통화정책은 책임성 있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이 모든 것은 그해 봄에 세계은행과 IMF의 보고서에서 확인 되었고 그때는 투기적적인 압력들이(IMF의 권장 속에서)바트화의 평가절하를 강요하기 불과 수주일 전이었다. 그로부터 몇 개월 만에 각국 통화의 가치에 대한 의심들이 동아시아의 신흥경제들 전반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말레시아는 대부분의 나라들보다 그 어려움을 잘 견디어 냈는데 그것은 장기적인 성장과 세계 경제의 완전한 참여와는 거리가 먼 아주 포괄적인 외환 통제로 후퇴했기 때문이었다.

1985~1996년 사이에 태국의 경제는 연 평균 9,6%씩 성장하며 세계 어느나라보다 높은 성장율을 보였다. 이에 반해 물가 인상률은 3,4~5,7%의 상대적 낮은 모습을 보여주었고 당시 태국 바트화는 미화 2달러 당 25바트로 고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1997년 5월 태국 바트화는 대규모 투기적 공격에 시달리고 있었다. 태국 총리는 바트화를 평가절하 하지 않을 것이라 밝히자 이

발언이 태국 정부로 하여금 국제투기 세력에 대항해 미국 달러에 대해 고정환율이 적용되던 바트화를 더 이상 방어할 수 없을 정도로 만들었다. 당시 태국의 경상수지 적자는 이기간 평균 국내총생산GDP)대비 6,9%에 이르렀고 말레시아도 5,6% 심지어 무역수지에서는 흑자를 내던 인도네시아조차 경상수지 적자가 GDP의 2.6%로 나타났다. 당연히 이런 모순적인 상황은 서구의 투기자본에게는 기회로 여겨졌고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환율 제도를 그대로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본 것은 당연하였다.

그리고 1995년 방콕 금융센터의 개장으로 대표되는 금융자본 이동의 개방은 이러한 상황에서 투기성 핫머니의 유입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면서 위기의 창이 열리게 되었다. 우연찮게 1997년 당시 부동산 거품이 꺼져가던 태국에서의 자금들이 철수를 하면서 금융시장에 심리적 공포가 만연하게 되자 경제위기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다수의 의견이었다.

그래서 아시아 전체적으로 들이닥친 금융위기는 1997년 여름 태국을 시작으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국가로 번진 외환위기는 같은 해 가을 한국으로 번지게 되었으며 그래서 외국에서는 이 사태를 총체적으로 아시아 금융위기(Asian Financial Crisis)라 칭하고 있다.

먼저 태국의 고정환율제도 포기로 인해 외국자본들의 이익실현이 크게 일어났고 외국자본들이 일시에 국외로 빠져나가게 되자 외환위기가 도래한 것이다. 1997년 태국의 고정환율제 포기로 인한 동남 아시아의 통화 위기가 동북 아시아를 거쳐 세계 경제에 불안을 가져온 일련의 금융위기를 일으킨다. 시작은 1997년 5월 태국이었다. 경제상황 악화. 특히 수출 부진으로 인해 태국 바트화가1996년부터 런던. 뉴욕. 홍콩 등 역외 금융시장에서 공격을 받기 시작하였다.

태국 중앙은행은 바트화 방어를 위해 쏟아 넣는 자금으로 인한 외환보유액 고갈로 태국이 7월2일 바트화의 달러화 페그(Peg System : 고정환율)를 포기하면서 바트화 가치는 하루에 20%나 급락하게 되었다. 결국 태국은 IMF와 1997년 8월14일 170억 달러에 이르는 구제금융 페키지와 함께 경제개혁을 추진키로 합의하면서 진정되는듯 보였지만 전 세계 금융시장에서 동남아 국가의 통화가치는 계속 하락하고 있었다.

1997년 고정환율제를 취하고 있던 태국 등 동남아의 각 국가들의 화폐는 고평가 되어 있었다. 태국의 경우 1996년 경상수지 적자가 GDP 대비 8%에 달하는 153억 달러였을 정도로 심각한 경제상황이었고 강력한 평가절하 압력이 가해지고 있었다. 결국 5월 2일 태국정부는 자국 통화를 20%절하했으며 동월 8월 IMF에 지원을 요청하게 되었다.

그러나 IMF의 지원결정은 쉽게 내려오지 않았고 7월2일 결국 태국정부는 고정환율제를 포기하고 변동환율제를 취해 태국 바트화의 방어를 포기했다. 태국 바트화는 25달러에서 32달러로 급격히 하락했다. 그것이 동아시아 경제위기의 시작이 되었다. 태국에 대한 공격은 1992년 영국 소로스 등의 주도로 발생한 공격과 거의 동일한 성격의 작전세력이었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그렇게 밝아 보였던 신흥세계의 경제적전망은 그로 인해 갑자기 어두워졌다. 적어도 새로운 세기의 처음 1,2년에 대해서는 그렇게 보였다.

1997년 8월 IMF로부터 긴급지원을 받은 태국에 이어 10월경부터 금융위기는 확산되어 당시 동남아의 최대 경제국인 인도네시아로 옮겨가면서 인도네시아 화폐인 루피아 가치가 30% 넘게 떨어지게 되었다.  도네시아는 1986년 루피아의 급격한 평가절하에 따른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경상수지의 상황에 따라 자국화폐를 점진적으로 평가절하하고 관리변동환율제를 채택하여 외환시장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고 통화위기 가능성은 높지 않은 것으로 평가되었으나 루피아의 가치는 1997년 7월에 태국의 바트화 폭락으로 동남아국가 폭락에 대한 불신이 확산되면서 1997년 8월 들어 급격히 하락하였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통화가치 안정을 위해 외환보유고를 활용해 적극 대응하였으나 한계를 인식하여 97년 8월 변동환율제도로 전환 하였다. 그러나 동남아 국가들에 대한 통화위기 의식으로 루피아화 가치는 계속 하락세로 증시가 침체하였고 기업의 달러 표시 부채부담 가중. 정부의 고금리 정책에 따른 기업의 자금조달 비용 상승 등의 많은 문제점들이 노출되면서 국내경제에 대한 극도의 불안감이 팽배해졌으며 주가 지수는 계속 하락하게 되었다.

그래서 태국에 이어 공격대상이 된 곳은 인도네시아였다. IMF와 인도네시아는 10월 31일 400억 달러에 이르는 구제금융 프로그램에 합의를 하게 되었다. 인도네시아는 고정환율제가 아닌 하루의 변동이 가능한 환율폭을 정해놓은 바스켓제를 취하고 있었는데 이미 옆나라태국이 처참하게 당하는 꼴을 바라보며 환율 변동폭을 하루 8%에서 12%로 늘리는 조치를 7월 11일 부터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의 루피아가 폭락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인도네시아는 결국 버틸수가 없었고 10월 8일 IMF 금융지원을 요청하게 되었다. 인도네시아는 부존자원이 부족한 태국과는 달리 자원도 풍부하고 2억 6천에 달하는 인적 자원을 지닌 잠재력이 큰 국가이다. 인도네시아는 1970년대 부터 본격적으로 경제발전에 착수했고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까지 미국. 유럽 등의 국가에서 투자를 받아 의류. 신발 등 경공업 산업을 육성하기 시작하였다.

외부투자를 기반으로 경제성장의 기적을 이루었지만 인도네시아는 금리가 높다는 이유로 헤지펀드 등 투기성 단기자본의 표적국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경제위기가 시작되자 이 당시의 인도네시아 경제는 이웃 말레이시아 태국과는 달리 당시 기준으로는 철저히 붕괴되어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고 경제가 일시적으로 급격히 둔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경제가 망가지면서 30년 권좌의 수하르토 대통령의 통치도 막을 내리게 된다. 태국과 인도네시아에 이어 연달아 승리하게된 투기 자본들은 연이어 홍콩을 공략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홍콩의 외환보유고는 800억 달러로 이들 투기자본의 공격에 충분히 방어가 가능할 정도의 외환보유고를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되고 있었다. 그러나 10월 18일 홍콩의 주가는 14%가 하락하였고 연이어 23일 10.4%가 하락하는 등 위기를 격었지만 홍콩은 막대한 자본의 외환보유고를 바탕으로 투기자본의 방어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아시아에서 건실한 홍콩마저 헤지펀드가 움직이는 것에 따라 흔들리는 것을 바라본 서양의 투기꾼들의 마음도 흔들리고 있었다. 잠시 진정되는 것으로 보이던 아시아 금융시장은 11월 중순 이후에는 이미 위기에 빠진 동남아 국가들과 체구가 다른 한국에 까지 전이 되었다.

그러나1996년 한국은 일본에이어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OECD에 가입하면서 민주화가 정착된 나라로 공인을 받게 되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대부분 OECD 회원국 국가들이 선진국이었으며 민주주의가 정착된 국가들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은 개발도상국가에서 단기간에 선진국으로 진입하게하게 되었다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한국은 국민소득 GNP와 GDP는 달러를 기준으로 당시 1만 달러에 진입하여 정부 당국은 매우 만족스러워 했다. 그렇지만 경제학자들의 관점에서는 당시 원화가치는 1달러에 1천원 정도가 적당했다고 보았다.(즉 원화가치가 20%고평가되어 무역적자가 지속적으로 생기는 구조였다) 지금은 글로벌 국가들이 자국의 통화가치를 낮춰서 수출을 늘리고 무역수지를 흑자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은 왜 원화가치를 고평가 유지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OECD 가입을 정권의 치적으로 여기고 국민소득 1만 달러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1990년대 들어 미국은 금리인상과 이에 따른 달러 동향은원화가치 하락을 예상케 했었는데도 불구하고 원화가치를 방어해야 한다는 논리로 달러를 내다 팔아 외환보유고는 바닥을 보이게 되었다. 진정한 외환보유고는 무역흑자와 외국자본의 투자로 유지된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를 한국정부는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1997년 10월 말 한국의 외환보유고는 305억 달러(10월 말 현재 기준 4100억 댤러)로 알려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한국은 원화고평가를 유지하기 위해 방대한 외환보유고를 단기간에 시중에 풀게 되었다. 당시 한국은 일본이 가장 많이 투자를 하고 있었는데 외환위기 상황의 징조가 보이자 일본은행들은 채권을 회수하여 달러로 바꿔가기 혈안이 되었고 이에 덩달아 다른 나라들도 채권회수에 열을 올리게 되어 그래서 달러부족은 심각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외환보유고가 바닥나게 된 또 다른 이유로는 외환보유고의 비상식적인 운용에 있었다. 각국의 중앙은행은 갑작스런 대외결제 종가에 대비해 즉시 현금화 할 수 있는 자산으로 보유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다. 당시 한국은행은 보유외환을 즉시 현금화 할 수 있는 자산으로 보유하지 않고 시중은행에 예치해 두었고 시중은행 역시 이를 현금화 할 수 있는 자산으로 운용하지 않아서 이를 국제결제에 한국은행이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신용공급이 중단되자 갑작스러운 외환부족에 대처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6개 종금사 체제로 유지되었던 것이 김영삼 정부들어 금융자유화정책에 따라 30여개로 늘어나게 되었다. 종금사들의 난립은 일본등지에서 단기자금으로 끌어들인 자금 즉 앤 캐리 트레이드(일본에서 낮은 금리로 돈을 빌려 해외에서 높은 이자로 투자를 의미함)을 해외에 장기 채권으로 빌려주었던 것이 동남아 국가들의 경제상황이 나빠지게 되자 불량채권이 늘어나게 되었다.

IMF가 터지기 전까지 한국은 금리가 낮은 선진국에서 대출을 받아 금리가 비싼 나라에 돈놀이를 하며 발전해왔었다. 한국이 급격히 성장했었기 때문에 외국에서 돈을 빌리기도 쉬웠고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에 투자를 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동남아의 국가들이 경상수지 적자가 나게되면서 외국인 투자자들이 이탈하게 되었다. 

동남아 외환위기 여파가 한국으로 다가올 때 종금사들의 자금난은 한국경제의 대외신인도를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었고 은행들의 단기차입마저 끊어지게 만드는 도화선이 되었다. 한국은 1996년까지 국내 금융기관들은 선진국 특히 일본의낮은 금리의 단기자금을 과도하게 차입하여 높은 금리의 장기대출을 해주고 있었다.

1996년 단기 금리는 미국 5,58% 일본 0,56% 한국은 12.63%로 금리차이로 앉아서 돈을 버는 시대로 인식하고 있었다. 미국과 일본의 단기자금에 대한 수요는 무한대였고 저금리의 유혹은 만기 불일치의 위험보다 훨씬 컸다. 결국 빚으로 돈놀이를 하다가 달러의 가치가 급등을 하게 되었고 만기도래가 급격히 닥치면서 부도가 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게 되었다.

외화업무에 경험이 전무 했던 종금사들이 외화차입 즉 단기차입 금리가 싸다는 이유만으로 단기 차입금의 리스크를 모르면서 닥치는 대로 차입해서 다시 수익성이 높은 장기대출 사업에 사용했던 것이다. 이는 외화유동성을 기하급수적으로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사실 한국의 금융위기의 원인은 금융부분이 잘못되어서 발생되었고 YS 정부가 OECD에 가입하면서 자본시장 자유화를 서둘렀고 신규은행과 종금사를 무분별하게 인가해주게 된 또다른 요인은 금융기관 경쟁력을 키우겠다면서 모두 해외로 나가게 해주게 되었다. 이때 무려 한국의 금융회사가 홍콩에만 120-130여개나 되었다.
또한 정부의 환율정책상 오류가 위기 촉발의 중요한 원인이 었던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여기에 1995-97년 3년 간 무려 380 억 달러가 넘는 무역적자가 누적되면서 YS 정부는 무리하게 원화강세를 추구했다. 금융국제화를 구실로 금융기관들의 단기외채 차입-중장기 대출형식의 위험하기 짝이 없는 외화 돈놀이를 단속하기는 커녕 오히려 정책적으로 부추키기도 했다. 또한 한국의 금융위기는 개도국들이 공통적으로 격고 있는 단기외채 때문에 일어난 것도 한목하고 있었다.

특히 일본의 은행들이 대형보험사의 도산 등 자국의 금융위기에 당면하여 국제결제은행(BIS)이 정한 자기 자본비율 맞추기 위해 한국에 차용해준 자금을 회수해가면서 많은 외화가 유출되면서 발생하게 된 원인이 컸다. 외환위기 발발 후 한국은 굶주림에 허덕이는 하이에나처럼먹잇감을 찾아 헤매던 투기 자본가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사냥터가 되었다.

그러자 치솟는 이자율을 감당하지 못한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은 연쇄 부도사태가 터지면서 은행들이 가지고 있던 담보채권들이 급격히 부실화 되었고 금융기관들 마저 위기에 처했던 것이다. 여기에 홍콩까지 적자가 나게 되자 다음은 한국일 것이라 예상한 투자자들은 한국에 투자한 주식까지 대거 매각했으며 채권자들도 만기를 연장해주지 않고 빚을 거둬들였다.

그러자 달러환율이 급등을 하자 결국 외환보유고에서 달러를 풀게 되었는데 결국 외환보유고가 바닥이 나자 견디지 못하고 IMF에 구제 금융을 신청하게 되었다. 엎친 데 덮친다고 1997년 10월 22일 기아자동차가 법정관리 신청을 시작으로 많은 기업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하였다.

이미 10월부터 한국시장에서 자금이 이탈하면서 환율이 급등하기 시작했고 한국은 원달러 환율을 무리하게 달러당800원대로 방어하려다 외환보유액을 허비했다. 11월에는 외환보유액이 20억 달러 밖에 남아 있지 않아 급기야 11월 24일 IMF에 구제 금융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고 IMF는 한국을 위해 570억 달러에 이르는 전례없는 당시로써는 최대 규모의 구제 금융에 사인을 하게 되었다.

IMF 패키지는 한국에 돈만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고통까지 안겨 주었다. 외국인이 한국 금융기관을 쉽게 인수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정리해고를 인정하며. 관치금융은 금지시켰다. 정부가 부실 금융기관을 합병 또는 폐쇄하도록 조치하며. 경제 성장률과 긴죽예산이 강요되었고 만일 중도에 약속을 파기해버리면 IMF는 즉각 자금지원을 중단해 버리겠다는 의미였다.

IMF는 구제 금융을 제공하는 대신 자본시장을 전면개방하고 환율 변동폭을 확대하라고 요구를 했다. 또 고금리. 고환율 정책으로 투자자금을 유치하라고 압박을 하여 금리는 연 20%대 이상으로 뛰어올랐고 원. 달러 환율은 1900원대로 상승하게 되었다. 고환율 정책은 수출증대. 투자자금 유치 등을 위해 불가피했으나 고금리 정책은 수많은 기업들을 도산시켜 두고두고 정책 실패였다는 오명을 남겼다.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정부는 금융 기업 공공 노동부분 등에서 4대 구조조정을 추진하게 되었다. 정부는 총 200조원에 달하는 공적자금을 조성해 부실화된 은행에 투입했고 일부 은행과 종합금융사를 퇴출시켰다. 조. 상. 제. 한. 서(조흥. 상업. 제일. 한일. 서울은행)으로 대표되는 5대 시중은행들은 합병이나 해외매각의 길을 열게 되었다.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를 통해 부실채권을 사들이는 한편 국제매각을 통해 외화확보에 나서게 되었다. 당시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차원에서 투기자본까지도 가리지 않았다.

기업들은 부채비율을 낮추고 인원을 해고하는 등 뼈를 깎는 고통분담의 구조조정을 강행하였고 상당수 기업들이 채권은행의 관리 하에서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을 통해 자산 매각 구조조정 등을 추진했다. 4대 그룹 중 하나였던 대우그룹이 해체되고 채권은행들이 관리를 했고 공기업 개혁으로 포스코. 한국전력. 한국통신(KT)등이 민영화 되었고 노동부분에서는 정리해고가 허용되었다.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조찬옥은…

故김대중 전 대통령 사단인 동교동계 소속으로 현재는 사단법인 민주화추진협의회 사무총장을 역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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